김병휘의「여름나기」는 한 가족사이며 근세 민중사로서 동학혁명이 일어난 곳인 한 많은 전라도 고부 땅의 이야기이다.
고부 땅, 특히 <백산>은 동학의 조직인 포(包)가 집결하여 동학 인이 운집한 곳으로, 김병휘의 외조부이며 동학인인 김종민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1878년 12월 27일 전라북도 고부군 백산면 산내리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무렵 동학지도자 학산 정갑수 문하에 입도하여 오문술 등과 함께 활발히 활동한다.
이로 인하여 김병휘는 대를 잇는 동학 인이 되는데 부모 역시 동학을 하게 되며 6.25 사변을 겪게 되고 갖은 수모를 당하며 한을 안고 살게 된다.
□ 백산은 좌절의 고부 땅
<백산>에서 동학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패전 후에 신분이 노출되어 붙잡히게 되었는데, 시궁창에 쳐 박아 죽이기도 하고 돌로 때려죽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처참한 죽음뿐이었다. 그 가정은 패가망신이었으며 살아남은 가족은 숨어사는 죄인 가족으로 농민 이하의 신분인 천민이 되었다. 그들을 가까이 하면 일경과 관에 의해 오해받을까 해서 두려운 나머지 백안시하게 되었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선대에 동학을 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 때문에 전혀 자료조사가 불가하다. 당시 어쩔 수 없이 신분이 노출된 채로 구차하게 살아간 상당수의 사람들은 마을을 뜨거나, 외딴집 등에 살면서 상여꾼이나 무당과 어울리고 마을의 궂은일이나 해주며 연명해갔다,
한편 산 속으로 피해 숨어든 동학군(장정들)들이 척왜의 기치를 들고 계속 운거하고 있었는데 김종민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13세시 어느 날 야간에 학당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데 창 밖에서 돌연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주인집 아들 "석두"가 나가 보았더니 어두운 밤 앞마당에 군인(장정)이 줄줄이 서 있었고 큰 사랑채에서 담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문전에 가보니, 주인 장갑두와 그의 모친을 앞에 앉히고 “우리는 국적 왜놈들을 축출하고자 각 고을에서 궐기한 의병인데 그 군자금을 징수하는 바요, 주민은 가세대로 헌납할 의무를 가져야 하오” 라는 말로 설득하고 있었다.
―백암록에서
이렇듯 이곳에는 낮에는 일본 순사가 나타나고 밤에는 장정들이 마을에 내려와 음식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후의 이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 김종민의 입도와 3.1운동
김병휘의 외조부인 김종민은 3.1운동 무렵에 동학에 입도하게 되는데 그 동기가 이러했다.
<하청리>에서 총소리가 콩 튀기듯 났다. 내가 집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보니, 뭇사람이 백산 앞 평야로 도망가는데 일본 기병이 총을 쏘며 쫓았다. 그런데 왜놈 총에 뭇사람이 턱턱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심장이 찢어지듯 하였고 정신이 아득하여졌다.
― 백암록에서
23세 때, 포덕 60년(단기 4242, 서기 1919, 기미년) 3월 초 어느 날 일이 있어 <화호(禾湖)>시장에 나갔더니 이름 있는 송윤초(宋尹初)씨가 선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부름에 따라서 각리에서 모인 민중이며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모두 만세를 함께 외침에 나도 흥분이 되어서 머리에 쓴 백립(白笠)이 찢어지는 것도 불구하고 뛰며 만세를 불렀다.
― 백암록에서
김종민은 이렇게 동학인으로서 삶이 시작된다. 그리고 겪게 되는 왜병의 핍박과 6.25 사변으로 인한 수난과 한이 점철되는데, 끝내는 외롭게 떠돌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 시련의 어린 빨치산
김병휘의 부친은 김종민의 영향으로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이 지역도 해방 후 혼란스러운 이념대립은 좌와 우로 갈라지고, 6.25사변이 나고, 천도교 청우당을 앞세운 인민군이 진주하자 일부 좌경의 동학 인들이 합세하게 된다.
특히 <백산> 인근의 <원천리>에는 당시 일본 유학생으로 명망이 높았던 독립운동가 김철수가 있었다. 그를 추앙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의 가족 일부가 좌경화되었고, 6.25 후에 월북하여 상당한 지위에 있게 된다. 그러니 6.25 후에 이 지역 사람들은 많이 용공으로 몰리고 감시가 심했다.
물론 백산 인근의 태인, 고창, 부안 등의 동학(천도교)인들이 많은 수난을 겪게 되는데, 상당수의 동학 인이 부역(附逆)으로 인한 사상적, 정치적으로 수난에 휘말리면서, 자유당 초기에 ‘용공(容共)’으로 몰리며 역시 ‘소외’와 ‘좌절’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동학은 겨우 명맥이나 유지하는 쇠락(衰落)의 한(恨)을 갖게 된다. 수난의 역사가 골 깊게 한(恨)을 남기며 수레바퀴 돌듯이 반복된 곳이다.
김병휘의 「여름나기」에서 “아버지는 어린 빨치산이었다” 라는 동학 후예의 절규가 가슴에 와 닿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농민으로 이념에 물들지 않고 순수했다. 그래서 빨치산일 수 없다. 그런데 동학한다 해서, 빨치산처럼 핍박받는 그 가족의 한이 얼마였을까,
“내 작은 방안은 겨울보다 추웠다 // 밀폐된 곳에 냉기는 가을보다 서럽고, // 뜨겁던 눈물 다 쏟아 버리고 //~ 하늘은 청명이 비워 두었다”라고 청명이 하늘(=我)의 슬픔을 승화시키고 노래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 "노령산맥은 또 한 번의 청포 옷을 입는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가는데 아직도 대를 잇는 동학인의 한은 ‘여름인데도 발이 시리다.’라고 한다
첫댓글 김병휘 선생님은 신인간지에 경전말씀을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이고 시인입니다 또한 최동환동덕님과 사촌간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동학가문에서 태어난 분이지요 -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분이라서인지 형상화를 시키는 솜씨가 아주 독특하며 시편들이 아름답습니다
좋습니다...그리고...백암 김종민 선생님은 최동환 선생님의 외조부님으로 알고 있습니다...김종휘 선생님은 최동환 선생의 외사촌이 되는군요.... 자랑스런 동학의 후예들이군요...
김병휘 동생의 글을 읽어보니 눈물이 납니다. 백암 외할아버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성령으로 출세하여 한울님과 우리와 더불어 살아 계시리라 믿습니다,
해원장....다음 주에 나는 해원장의 고향인 부안땅에서 좀 살려합니다... 가급적이면...격포항에서 배를 타고 외도에 가서...며칠을 지낼려고 합니다...ㅣ
물론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매창(계량)의 흔적도 볼 것입니다...아아... 매창... 계랑.... 부안의 영원한 사랑...이런 풍토에서 해원장이 나셨군요....
옥계산인님 내몫까지 즐겁게 놀아 주세요. 외도에는 나도 가 보질 못했습니다.잘 다녀 오세요
그래서 선사님께서 백산이였습니까....백산... 시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