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사도 바울의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13-38
오늘 낭독한 본문 가운데 13-16절은 4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 짧은 구절의 정서(情緖)는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이르는 사도 바울의 항해에 있어서 다소 숨 가쁜 기사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려는 이유
지금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처럼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식으로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방인 교회들이 거둔 헌금을 이방인 교회들의 대표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감으로써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열혈당과 같은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변질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종말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방 세계로 넘쳐서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순례한다는 구약 예언서의 말씀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교회에게 이방인들의 교회도 예루살렘교회처럼 하나님의 교회이며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시위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일종의 시위(示威)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헌금을 거두는 일에 힘썼던 것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종말(終末)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질 때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예물을 가지고 시온을 순례한다는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아울러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각지에서 모여들 것인데,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종말에 참 하나님을 발견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예물을 가지고 시온을 순례한다는 그 선지자들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하여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서둘러서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애찬을 겸한 성찬식을 베풀고 설교를 한 이후에 이어서 드로아의 성도들과 함께 날이 새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자신을 제외한 일행을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으로 행선 하는 배를 타고 앗소 항으로 가게 하고 자신은 걸어서 앗소 항까지 갔습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가면 더 빨리 가는 길을 놔두고 왜 혼자 이 길을 걸어갔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한 이유
사도 바울은 앗소 항에서 드로아 항에서 배를 타고 먼저 떠난 일행들을 만나 그들이 탄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해서 에베소로부터 약 48km 정도 떨어진 에베소 밑에 있는 밀레도에까지 갔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밀레도에서 며칠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탄 배는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밀레도에서 적재한 화물 일부를 내리고 다른 화물을 싣기 위하여 며칠 동안 머물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출항하여 앗소에서 약 70km 떨어진 레스보스섬의 수도인 미둘레네에 갔고,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또 그 이튿날 에베소 서쪽에 있는 섬인 사모에 들리고, 그다음 날에는 밀레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을 태운 배가 화물을 내리고 싣기 위하여 밀레도에서 며칠 동안 머무는 동안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도록 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갈을 받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사도 바울을 보고 싶은 간절한 일념으로 단숨에 밀레도로 달려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권고하였습니다. 그 권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8-27절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28-35절에서는 그 결론으로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첫 번째 부분부터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의 끝인 26-2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에 대한 결론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들과 교훈을 회상(回想)하면서 에스겔서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겔 33장 참조). ‘그러니 여러분들이 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겠지만,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의 책임입니다. 나는 나의 책임을 다했습니다’라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얼마나 온 힘을 다해 사역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무르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전하고 가르친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 성도들의 초청을 받아서 그들의 집에서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책임은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전파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절하거나 지나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환난과 겸손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서 오는 시험을 참는 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8-2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사도 바울은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거리낌이 없이 모두 다 가르치고 회개와 믿음에 대해 증거 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라든지 헬라인 이방인이 되었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인 22-24절을 보시면, 이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지만, 오직 성령님께서 어느 성에서든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가르쳐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고 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5절에서는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방금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을 죽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은 앞으로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중심으로 동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로마의 서쪽으로 가서 서유럽에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롬 15:23-29 참조) 다시 소아시아의 교회들의 성도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한 일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8절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하여 항상 조심하고, 성령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워서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다스리고 보살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해서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은 만일 장로들이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세우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심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거룩하신 희생을 대가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매우 고귀한 사회입니다. 교회는 매우 거룩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보살 피실 때 감독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양 떼”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양 떼를 큰 목자가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서 양 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감독자(bishop)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다스리고 보살피기 위하여 목자같이 일할 감독자를 세우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교회의 장로들에게 “나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하면서 베드로전서 5:2-4에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당신을 대신하여 교회를 감독할 감독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5에서 주님을 가리켜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감독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감독자들을 세우셔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감독하는 일을 당신을 대신하여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감독과 지도의 제도를 부인함으로써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사람을 세우셔서 당신의 교회를 가르치시고 감독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에서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기 위하여 교회에게 은사를 주시되 여러 직분자들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감독자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보내어준 귀한 선물로 알고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5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가르친 대로 그 다스림을 잘 받아야 합니다.
“감독”(bishop)과 “장로”(presbyter)는 같은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거기에 감독 곧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계시하여 주신 사실로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를 다스리고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회자들은 “장로들”(17절)이라든지 “감독자들”(28절)이라든지 “양무리를 치는 자” 또는 “목사”, “교사” 등으로 불리면서 교회를 위하여 말씀으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21:15-17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Bovske)”고 하시고, 그다음에는 “내 양을 치라(Poivmaine)”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첫 번째처럼 “네 양을 먹이라(Bovske)”고 반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함께 장로 된 목회자들에게 “양 무리를 치라”(벧전 5:1-2)고 하였습니다. 여기 “친다”라는 말은 ‘먹인다’라는 의미와 ‘돌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친다는 말은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행동을 말합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일은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양을 치는 일을 교회의 장로들에게 위임하여 맡기셨습니다. 사실 성경은 주님은 양의 “큰 목자”(히 13:20)라고 말씀하고 있고, 목자들의 “장”(벧전 5:4)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목자장”이시고 목회자들은 “목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양 떼 가운데서 목자로 삼는 일은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28절에서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성령님께서 감독자로 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교회를 돌보고 가르치고 감독하기 위하여 목자로 삼고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목자와 양의 관계로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먹이시고 치실 때 양 무리를 사육하고 관리하는 작은 목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목자로서의 일을 위임하셔서 목자들로 양 무리를 사육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목자들은 양의 주변에는 갑자기 습격하여 오는 이리가 항상 도사리고 있어서 양의 우리에까지 들어와 노략질하고 물어가는 일이 많이 있음을 알고 항상 경계하고 주의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흉악한 이리라고 비유된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목자인체하고 잘못된 진리를 가르쳐서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감독자들은 항상 경계하고 주의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이나 머물면서 주야로 가르치고 때로는 어려운 훈계까지 하면서 에베소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를 통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당시 떠돌이 거짓 교사의 가르침으로 따라가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에베소교회 감독자들, 즉 장로들을 초청하여 그들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항상 조심하여야 할 것을 주의하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9절에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7:15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보시면 “양의 옷”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양의 옷”은 ‘외형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와 전혀 거리가 먼 것을 내놓고 가르치면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거짓을 혼합시키기도 하고 위장하기도 하여서 끌고 가는 거짓된 가르침을 말합니다.
또 오늘 우리 설교 본문 30절에 보면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해서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정직한 말을 하지 않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는데, 그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기의 영광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종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자기의 영광을 위한다면 그것은 벌써 교회의 성격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따라서 감독자들은 특히 조심하여서 거짓 교사들의 풍조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먼저 각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 하나는 교회의 감독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는 수단이고 영의 양식이므로 장로들은 항상 말씀을 든든히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흉악한 이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있어야 합니다.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힘이 있던 교회들도 한순간에 진리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 가르쳐져서 쇠약하여지고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왜 배교(背敎)하느냐면 정신을 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탄과 거짓 진리에 사이비 진리에 끌려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쯤이면 든든하다 할지 모르나 언제나 유혹은 나의 수준에 맞게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유혹이 고도한 어떤 사실로 온다면 수준이 낮은 사람은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다’하고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반대로 유혹이 그 사람의 수준보다 너무 낮은 것으로 오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 확연한 일이므로 시험 거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이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탄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항상 우리의 수준에 맞게 우리를 유혹해 우리가 넘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든든히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저 바쁘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만들어서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또 말씀을 대강(大綱)으로 생각하거나 큰 것만을 취하는 습관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리고 마치 여분으로 말씀을 취하려고 하는 소극적이고 안일한 태도는 자기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바쁘다 보면 말씀을 대강으로 넘기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능력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힘이 약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힘의 원천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고 깊이 생각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파악할 때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교회 전체 역사를 볼 때 사도 바울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떠났을 때 말씀에 대한 태도가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가 들어와서 거짓된 진리를 가르쳤을 때 교회는 큰 해를 입게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하게 파악되고 가르쳐지면, 교회는 밝아지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하고 든든히 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각 부분도 그 비취임을 받아서 밝아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신실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와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과 사회 구조가 그러니까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교사(敎師)가 있고, 그 양 떼들이 정신을 차리고 진리를 받아서 그때그때 든든히 붙들고 나가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교회는 그만큼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밝히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자기 시대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쁜 현실 때문에 이런 일을 늦추고 소홀히 하고 게을리한다면, 그리고 형편에 따라 하는 정도가 된다면, 교회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말씀의 귀중함을 알아야 내 자녀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의 귀함을 절실하게 느껴야 아이들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앞서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앞서 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그러한 본을 보여야 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어떠한 사람을 보내고 싶어도 교회를 먼저 이룬 사람이 잘 서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건강한 교회에서 자라게 하셔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시는데, 우리가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새로 온 사람도 역시 함께 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믿고 먼저 교회를 이룬 성도들의 정신과 삶이 교회의 부흥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백날 노력해도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주님을 의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결과는 주님께서 내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고, 우리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보내 주셔서 그가 잘 자라서 교회를 잘 이루어 살아갈 때 먼저 교회를 이룬 사람들이 교회를 잘 이루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누구도 보내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교회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은 잠시 살다가 세상을 떠나지만,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 교회를 맡기지 않고, 교회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교회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상에서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인도와 도움을 주실 주님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있다는 것보다 더 든든한 사실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고 나가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주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든든히 세워지는 신자들에게는 오늘 우리 설교 본문 32절의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가시는 일을 보면, 첫째는 교회의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는 말씀으로 하시고, 둘째는 그 말씀들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게 하셔서 당신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가십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들을 때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내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면 진리의 면에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가는 일의 세 번째는 성경 자체가 교회에 풍성히 있어서 언제나 접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께는 당신의 말씀에 늘 접촉하게 하여서 당신의 교회를 든든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3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의 교회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탐욕 없는 삶에 대해 말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충성되고 사욕 없는 사역(事役)을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훈을 남긴 후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습니다. 아멘.
(2014. 10. 22 수요예배)
(2024. 6. 23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