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나비 >
지는 꽃
바라보는 하얀 나비
지는 꽃
바라보는 면앙정(俛仰亭)
꽃이 지는 것
슬퍼하지 말라는데
꽃을 꺾은 송강(宋江)
상사병(相思病)
앓고 있네
님을 찾는
하얀 나비
흔연히 꽃을 떠나는데
님을 찾는
호랑나비
꽃가지에 앉아
오지 않는 님
기다리고 있네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금성면(金城面) 대관리에서 박장원(朴壯元)과 배금순 사이에서 태어난 박동실(朴東實, 1897년-1969년)은 아홉 살부터 아버지 박장원과 외조부 배희근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열두 살 나던 해 서편제의 명창 이날치의 제자 김채만(金采萬: 1865∼1911)의 문하에 들어갔다. 1909년 박동실(朴東實, 13세)은 광주 양명사(楊明社: 창극단체)와 서울 원각사(圓覺社)에서 각각 상연한 창극 「춘향전」에 춘향 역으로 출연하여 애기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박장원(朴壯元)은 송우룡에게 동편제를 사사받은 명창이다. 국창(國唱) 김채만은 고종 앞에서 창을 하여 통정대부를 제수 받은 인물이다. 판소리 서편제는 이날치 -> 김채만 -> 박동실로 전승되었다. 전라남도 담양 태생인 이날치는 대원군 때 어전에서 창을 하여 무과 선달의 벼슬을 받은 인물이다.
외조부 배희근은 전라남도 영광 출신이며 조선창극사에 <심청가>로 유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명창이다. 조선 창극사에는 다음과 같은 배희근의 기록이 있다. “배희근은 호기가 있고 성음이 거대한데 겸하여 비위가 늠름하여 자기보다 상수인 선배나 동배라도 능가할 기상으로 불굴하고 병견능창(並肩能唱)하는 것이 타인의 불급처요 청중을 능히 웃기는 것이 역시 장처였다 한다.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아지 못하고 제작범절이 다소 허루한 데가 있으되 그 당당한 풍채와 거대한 성량은 도처 환영을 받았다 한다. 창의 명창이라기보다 광대 중 일종 괴걸(魁傑)이라고 볼 수 있다.”(이동백 추억담에 의함)
1921년에 광주 협률사에 참여하였고 협률사가 해산된 이후 박동실(朴東實)은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오가전집(五歌全集 =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 수궁가)으로 명창의 반열에 올라섰다. 박동실은 후진 양성과 판소리 창작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판소리는 '방안 소리'와 '무대 소리'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박동실은 '무대 소리'에 능했다. 그만큼 성량이 풍부하고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1934년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 정착했다. 이 마을에는 박석기(朴錫驥·1900~1953)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박석기의 부친은 아전 집안 출신으로 부를 축적해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박석기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화려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하에서 출세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박석기는 민족의식에서 국악 쪽에 열정을 보였다. 명창 김소희가 그의 부인이다.
지실 초당에서 박동실은 판소리를 가르치고 거문고는 거문고 산조(散調)의 대가인 박석기가 직접 맡았다. 1935년부터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박동실은 박석기와 함께 화랑창극단을 결성해 공연을 했다. 무형문화재 김소희(金素熙), 한승호(韓承鎬), 무형문화재 보유자 한애순(韓愛順) 등이 그의 지도를 받은 명창들이다. 박동실은 작곡 능력도 뛰어나 ‘열사가’ ‘김유신 보국가’ ‘해방가’ 같은 작품을 만들어 곡을 붙였다. 작곡은 고스란히 박동실이 했지만 작사는 창극 작가들이 도움을 주었다.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으로 이어지는 열사가는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공연 목록에 올랐다. 단가 ‘사철가’의 작사 작곡도 박동실의 작품이다. '해방가'의 작사가는 광주의 박만순이었다.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으로 이어지는 열사가는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공연 목록에 올랐다.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이런 민족의식과 소리광대로서 신분차별에 대한 반감이 사회주의 의식 형성의 계기가 된 것 같다. 미군정하에서 체포령이 떨어지자 숨어 지내다 1950년 6월 28일 그가 지도한 임소향‧공기남‧조상선‧조해숙 등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고전음악연구소에서 활동하였다. 1961년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월북 이후 판소리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제자들조차 한동안 스승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그는 북한에서 독신으로 살며 수양딸 박영선(본명 오영선·평양음악무용대학 교원), 사위 김철현(4.25 예술영화촬영소 공훈배우)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그는 서편제 소리의 고향 담양 땅을 밟지 못하고 1968년 12월 4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동실은 김소희와 일가인 김이채와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두 자녀 모두 소리공부를 했다. 둘째 달 박숙자는 영화 서편제의 실제 모델이다. 박숙자의 아들 김정호는 ‘하얀나비’, ‘이름 모를 소녀’, ‘저 별고 달을’ 등을 불러 천재가수라 불리었던 음유시인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985년에 요절해 많은 음악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팬들은 “김정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졌다.”며 애석해 했던 가수였다. 현재 김정호 노래비가 담양에 세워져 있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간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나비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 김정호 작사 작곡 < 하얀 나비 >
450여 년 전 담양 출신의 면앙정 송순은 상춘가(傷春歌)라는 시조를 읊었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김정호는 꽃을 님으로 생각했고, 면앙정 송순은 꽃을 사림(士林)으로 생각했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고 노래하고 했다. 그러나 송순의 제자 담양 출신의 송강 정철은 “사미인곡”에서 매화를 꺾어서 임에게 보내고 싶다고 노래했다. 임을 향한 짝사랑이 도진 송강은 스스로 호랑나비가 되어 꽃의 향기를 임의 옷에 옮기겠다고 노래했다.
“황혼의 달이 좇아와 배갯머리에 비치니
흐느끼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저 매화 꺾어 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 싶구나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까
꽃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깔렸는데
비단 장장이 적막하고 수놓은 장막이 비어 있다” - < 정철의 사미인곡> 중에서
“명의가 열 명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은 모두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 < 정철의 사미인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