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ㆍ침례교 목사. 경기도 안성 출생. '후라이 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1950~70년대 국내 코미디계를 이끌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공군 연예대에서 활동하던 시절인 1951년 서울 명동의 은성 뮤직 살롱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1956년 일반 극장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성대모사와 원맨쇼의 개척자로 꼽혔으며 '막둥이' 구봉서와 콤비를 이루어 1970년대 텔레비전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57년 <후라이 보이 아워> <다이얼 Y를 돌려라> <군 위문 열차>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영화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에 출연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춘 방송 사회자로 더 유명했다. 1964년부터 동양방송(TBC)의 <쇼쇼쇼>를 11년 간 진행한 것을 비롯해 <KBS배 전국노래자랑>, 문화방송(MBC)의 <청춘 만세> <토요일 밤에> 등 많은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명성을 떨쳤다.
1970년대초 직접 설립한 광고회사가 부도나면서 어려움에 처하자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연예인들과 서울에 연예인 교회를 세웠다. 1982년 한국방송공사(KBS)의 <백분 쇼> 진행을 끝으로 국내 연예 활동을 접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한 뒤 198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뉴욕 한마음 침례교회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했고, 1989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곽규석 목사 초청 연합전도대성회' 참석차 내한하는 등 국내 선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1992년에는 한마음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가, 미국 뉴욕 한국 기독교 방송국 국장이 되었다. 1999년에는 지병인 췌장암으로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코미디언·사회자. 예명은 후라이 보이.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서울음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 후 공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복무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 1970년대 후반까지 코미디 연기와 무대·방송·TV 등의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특히, 1960·70년대 쇼의 대명사가 된 TBC(동양텔레비전)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는 그의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진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58년 국내 최초로 공중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한 그의 특기는 목소리를 이용한 기관총 발사, 비행기의 폭격 등 흉내내기의 원맨쇼. 1950년대 말 〈박단마(朴丹馬) 그랜드 쇼〉이후 선보인 이 재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의 출연도 적지 않았는데 그의 스크린 데뷔작은 1959년 정창화 감독의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이라는 넌센스 코미디이다. 로켓설계자로 유명한 허박사가 실종되면서 현상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짜 소동 이야기로 1인 2역을 맡았다. ‘후라이 보이’란 원래 플라이 즉 나른다는 뜻의 일본식 발음으로 구전되어 엉터리와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었다. 무한한 창공을 날아 보겠다는 소년의 꿈이 공군복무라는 형식으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잇달아 <청춘일기> <복도 많지 뭐유> <고바우>(1959) <후라이 보이 논산훈련소에 가다>(1960) <서울의 지붕밑> <바단이 장사 왕서방> <이별의 부산정>(1961)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1962) <남편은 바람둥이>(1963) <청춘사업>(1965) 등에 출연하였다.
그의 연기는 정통적인 악극·신파 계열의 배우들과는 달리 서구적인 풍자가 특징으로, 1960년대 초 KBS라디오 고정프로 <막박사, 후박사>의 공동진행을 맡으면서 컴비가 된 막둥이 구봉서와 경쟁 관계였다. 그 대표적인 영화로 바람기 많은 식품회사 사장의 탈선을 저지하려는 비서의 행각기 <남편은 바람둥이>(박성호 감독)와 두 명의 실업자가 각기 사랑에 빠지면서 여자의 도움을 받는 <청춘사업>(심우섭 감독)등이 꼽힌다. 그는 1970년대 말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 신앙생활에 전념, 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