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도 올려 될지 모르겠네. 몇년 제가 전 모 잡지에 기고한 글인데 년초 세시 풍속과도 좀 어울릴것 같아 남겨보니 흘려보세요.
민족(民族)의 세시풍속(歲時風俗)
-풍물 한가락(금호동 무쇠막)
“덩~덩~ 덩~따 궁~따”“더궁~덩~ 덩따 궁따”
삼채를 치다 가게 앞에서 상쇠가 냅다 소리를 내지른다.
“ ~ 문 여소. 문 여소. 주인장 문여소~. . ~만 인간 들어갈제 ~만 복이 들어갑니다.~”
북을 잡은 필자도 이때 상쇠의 선창에 화답하며 북채로 휘모리를 북이
찢어져라 조져된다.
정월 대보름날
‘무쇠막’이라는 풍물패 깃발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는 농기(農旗)를 앞세운 풍물패는 시내골목을 요리조리 용트림을 하며
잘도 돌아다닌다. 상쇄인 ‘최사부’가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선창을 하니
일제히 화답을 하는데 그 우렁찬 소리는 온 마을을 휘감고 다시 돌아
와 우리의 귀청을 후려친다.
“주인, 주인 문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
“거---뉘시오.”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이 강산 저 강산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
며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술 잘 먹는 무쇠막 풍물패들인데 이곳 금호
동 최부자님이 우릴 부르시니 그냥 갈 수가 없구료. 주인어른 온갖 만
복을 불러들이는 흥겨운 판을 벌이기 위해 여기에서 굿을 칠까요? 말
까요?”
“굿을 치긴 치되 허술게 치지 말고 우리 집에 낀 온갖 잡 부정들이 싸
그리 달아나도록 걸판진 굿판을 한판 벌려 주도록 하시오.”
대문을 열고 나온 집주인이 흰 봉투에 돈을 넣어주며 안으로 들어와
한판 놀아달란다.
앞에선 상쇠가 문을 밀고 집안에 들어서며 요란한 풍물소리를 반주로
무병장수, 소원성취, 사업 발전을 기원한다.
“자 여러분 그럼 굿판을 벌려보는데, 드리세 드리세 만복을 쳐 드리
세”
“덩~ 덩~ 궁딱궁~ 궁따궁따 궁따궁”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이리로
“궁딱궁~ 궁딱궁~ 궁따궁따 궁딱궁”
별달거리 두 장단이 힘 있게 두드려 지다 다시 삼채로 가락이 변한다.
“자, 이렇게 이곳 최부자집에서 올 한해 찾아들은 왠갖 잡 부정은 싸
그리 몰아내고 운수대통하게 오방지신과 사해용왕님께 만복과 건강도
함께 빌어주는 것이 어떠냐?”
‘최사부’가 선창을 떠니 난장패들이 모두 난리다.
“거 좋지 흰 봉투에 돈 많이 넣는 것 봤어.”
“어혀라 지신아~ 용왕지신 울려보자”
덩~ 덩~ 덩~ 덩~...
다시 다음 집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이 뭔 날인고 하니 풍물패 중에서도 우리나라최고의 풍물패인
‘무쇠막’ 풍물패가 이곳 금호동에서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깃발도 세
우고 나발도 불며 한 판 걸쭉하게 굿판을 펼치는 날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네 삶을 힘들게 만들고 어렵게 만드는 왠갖 잡 부정을 막아내기
위해 금줄도 치고 지신도 밟아봅세...”
상쇠의 선창에 필자를 포함한 패거리들이 둘러서서 굿거리, 삼채, 휘
몰이로 크게 한판 몰아친다.
몇 년 전 필자는 서울시 중구에 있는 ‘무쇠막’ 이라는 한 풍물패를 알
게 되었다. 조금은 엉뚱하였지만, 어느 해 가을 덕수궁 옆에 있는 정동
극장에서 미친 듯이 두들겨 대든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을 본 것
이 그 계기가 되었다. 유독 그 날의 사물 가락은 필자의 가슴을 칼로
저며 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임선생’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단다. 하면서 언젠 간 꼭 ‘사물놀이’를 배워보겠단다. ‘그
래? 널 털털하게만 보였는데 님이 그런 감성도 가지고 있었나?’ 약간
은 의아심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형, 오늘 좋은 대 같이 갑시다.” 어느 날 직장이 파할 무렵 ‘임선
생’이 넌지시 폼을 잡는다. 술을 무척 좋아하시는 님이라 혹 좋은 술집
이라도 잡아두었는가 했는데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간 곳은... 금
호동에 있는 풍물놀이 마당 ‘무쇠막’이란 곳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무쇠막’이란 철을 녹여 그릇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곳으로 이곳 금호
동의 옛 속명이기도 했다는데 풍물마당에서 그 유례를 빌어 이름으로
쓰고 있단다.
“덩~따따 궁~따따~ 궁따다~ 궁딱~”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엔 경쾌한 장구소리가 방음 문을 뚫고 우리 귀
를 현혹한다. 방음이 된 두꺼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실내엔 20여
명정도 되는 회원들이 온몸으로 땀을 틀어대며 장구, 북, 꽹과리, 징을
때리는데 그 사물에서 터지는 비명소리가 가히 천지간에 있는 모든 소
리가 합성되어진 것처럼 들린다. ...그날이후 ‘임선생’과 필자는 풍물
놀이마당 ‘무쇠막’에 입문하게 된다.
“풍물의 유례를 근간 사당패에서 그 뿌리를 찾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
사성으로 볼 때는 반만년전인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30대 중반이 되었다는데도 처녀라서 인지 20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예쁜 ‘최사부’님은 그 특유의 앙칼진 음색을 뱉어내며 풍물에 담
긴 역사성을 얘기한다. 예로부터 우리민중들에게는 자연의 소리를 4
개의 악기로 표현했는데 꽹과리는 뇌공(雷公), 징은 풍백(風伯), 장구
는 우사(雨師), 북은 운사(雲師)를 상징한단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환웅이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베
풀었는데 이때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을 주관하고 360여 가지의 인간사를 다스리며 교화시켰다는 기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물의 역사성을 반만년이전인 고조선시대로 봄
이 정당하단다. 또 최 근세 전문 풍물꾼은 사당패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민간에도 최근까지 북, 장고, 북, 꽹과리와 상여만은 시골 어
느 마을에도 없는 곳이 없어 풍물은 근자 민간놀이의 전통으로도 이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유명
해진 사물놀이에 대하여도 이야기한다.
“원래 풍물에서 ‘사물놀이’라고 별도로 불려진 것은 없었습니다.” 그
러던 것이 1978년 사당패의 후손인 ‘장구 신동 김덕수’에 의하여 장
구, 북, 꽹과리, 징으로 이루어진 풍물이 ‘공간사랑’이란 곳에서 ‘사물
놀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에 탄생되었단다.
‘김덕수’ 그는 언젠가 모 기자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이
렇게 털어놓았다. “추석 다음날이었죠. 아버지가 절 때때옷을 갈아 입
히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나셨지요.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1957년으로 제가 다섯 살 때였죠. 그 길로 엄마 곁을 떠났던 겁니다.”
그것이 그가 기나긴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된 시작이었단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1978년 2월28일 ‘김수근’ 선생이 지은 계동 공간건물에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이 개장되며 “전통예술의 밤”이라는 새로운
무대가 마련된다. 그 첫날밤을 ‘민속악회 시나위’의 정기연주로 때웠
는데 그 한 프로그램으로 ‘웃다리 풍물’이라는 사물이 들어가게 되었
다. 그때 ‘김소희’ 선생이 삼배위에 ‘사물놀이’라 써주게 되었는데, 이
것이 우리나라에서 ‘4물놀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하게 된 시초가 된
것이다.
‘사물놀이’란 농악, 무속, 탈춤, 성주굿, 대동제, 소리, 민요 등에 녹아
있는 우리의 음악이요 철학이며 정신인 신 바람나는 민족가락을 한곳
에 모아 집대성한 것이다. 일부학자들이 ‘사물놀이’를 일부 농악 리듬
을 정리한 것으로 취급하는데 전혀 아니란다. ‘김덕수’는 우리나라의
예술은 모두 무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무속의
무가에 청배(請拜)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 연원(淵源)을 두고
‘남도무속’은 후에 ‘판소리’가 되었고 ‘경기무속’은 ‘경기민요’, ‘황해
도, 평안도무속’은 ‘서도민요’가 되었다. 흔히 우리는 판소리하면 그것
이 마치 영.정조 때부터 성행하고 있었던 예술이 구한말에 가서 퇴색
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19세기말에 이르러 완성된 것
이다. 이렇게 보면 ‘송만갑’은 판소리의 집대성자이며 완성자고 이 판
소리의 리듬구조를 기악화한 산조는 전남영암의 ‘김창조’가 시조이다.
해서 사물놀이란 새롭게 개창된 국악예술로 보아 바로 ‘김덕수’를 사
물놀이의 시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덕수’는 사당패의 후예인데 1964년 그가 12살 때 쯤 부산 초량에서 포장 굿을 친 것이 남사당의 종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사당패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곡예와 연예를 연회 하던 무
리로 처음에는 천민들 중 여자들만이 모갑 또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하여 떼 지어 다니면서 술자리에서 가무를 하고 한편으로는 매음을 부
업으로 삼았다. 그 후 조선 말기에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사당패가 출
현하였는데 이를 남사당패라고 한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절을 집결장
소로 삼고는 절에서 내준 부적을 팔아 수입으로 생활을 하고 그 일부
를 절에 바치기도 하였다.
풍물은 이런 사당패들의 전유물로 내림 되어오다 근세에 들어 민간 농
악으로 발전되었다. 그 경위를 역사학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왕조가 무
너지고 신분의 차이가 없어지자 토지는 귀족계급에서 일반농민에게
넘어가고 천민들의 전유물이던 풍물도 농악으로 변해 자리 매김 되어
진다. 해서 삼십 여년전 까지만 해도 농가에선 쉽게 이 4물을 접할 수
가 있었다. 허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시대 자립경제와 위대한 민족중
흥을 일으키신 ‘박정희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은 초가집과 함께 전국의
풍물도 사라져 버리게 하였고 이제 사물은 국정을 반대하는 데모대의
구호반주물로 전락이 되어 버렸단다.
먼저 ‘인사 굿’을 배운다. 덩~덩~ 덩~덩~ 덩~그러러 딱! 열채로 장
구의 채편을 한차례 ‘딱’ 때리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법부터
배운다.
계속해서 ‘이채’며 ‘삼채’를 배우고 앉은 반(앉아서 사물을 치는 법)이
며 선반(서서 사물을 치는 법)을 배운다. 조금 장구채가 손에 익숙해질
무렵 기교가 한 것 들어간 설장구를 배운다. 당시 우리기수는 14명으
로 무쇠막에선 26기로 통하였다. 일주일에 두번 하루 2시간씩 해서 3
개월 정도를 하여 풍물일반과정을 수료했다. 처음 시작 할 땐 20명이
넘었는데 끝날 때쯤엔 7~8명이 탈락했다. 불행히 필자를 이곳에 끌어
다준 ‘임선생’도 그 7~8명중에 한 명이 되고 말았으니...
“이형, 해보니 나는 마음만 앞섰다는 생각이 드데요. 꼭 할 수 있으리
라 했는데...”
필자가 중도 하차한 ‘임선생’에게 몇 번이나 같이 가자며 권한 뒤에 들
은 답변이다.
풍물 배우는데도 요령이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엔 달리 별다른 요
령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상한건 주변 지인들에게 수도 없이 권하
여 풍물패주변까진 제법 많이 데리고 갔는데도 대개가 한두 번 참석하
고는 갖은 변명을 다하며 물러앉는다. 입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해
서 나름대로 한번 분석을 해보았는데 40대의 굳어진 팔로 장구의 ‘궁
채’ ‘편채’를 마음대로 주무르기란 결코 만만치가 않음을 느낀다. 정교
하면서도 날렵한 속도감을 싣고는 좌우로 넘나들어야 하는 왼팔의 경
우는 더욱더... 필자의 경우도 처음은 다소 생경(生硬) 서러웠지만 점
차 적응이 되었는데 아마 늘 가까이 해온 음악이 한몫 한 것이리라. 또
젊은 시절 청년문화를 한답시고 통기타를 매고 다니며 팝송이나 포크
송을 흥얼거린 득도 있었으리라. 아무튼 각고의 노력 끝에 사물 기본
과정을 수료한 필자는 ‘무쇠막’의 정회원이 되어 풍물패가 되는데 성
공했다. 정회원이 되니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정회원만의 행사인 경기도 가평 대성리에서 열린 ‘머꼬지’행사에 도
참석하게 되었다. ‘머꼬지’? ‘먹고지’? 생소한 말에 선배회원은 풍물패
들이 야외에서 선반놀이를 하면서 현지에서 음식도 해 먹고 즐기는 요
사이말로 봄철 화전(야유회)행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훗날 ‘머꼬
지’에 대하여 국어사전을 들먹여 가면서까지 어원을 찾았지만 문헌 어
디에도 그러한 단어는 보이질 않아 지금까지도 그냥 당시 그 선배회원
의 말만으로 짐작해 볼뿐이다.
계곡은 시간이 지날수록 온통 하얀 눈 속으로 묻혀져간다. ‘머꼬지 행
사’는 필자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사람들은 그냥 현장
으로 갈 수가 있었지만 장고와 북 같은 풍물장비가 문제였다. 대형 트
럭이 필요할 정도다. 50여명이 참석한 행사에 사용할 장비는 장고를
비롯하여 징이며 꽹가리, 북, 소고, 상모, 깃발, 등등... 사무실에 비치
되어 있을 때엔 별로 느끼지 못한 부분인데 그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
컸다. 당일 필자는 회원 한 명과 승용차로 먼저 현지에 도착했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 저녁 무렵까지만 해도 이곳에 눈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행사는 저녁을 해먹는 것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이곳 대성리
구운천 계곡은 원래 여름철 행락객을 위하여 만들어진 계곡 산장이다.
건물은 모두 가건물로 ‘샌드위치판넬’로 지어져있다. 방 규모는 적개
는 2~3평에서 50평이나 되는 큰 것도 있었다. 일행은 50평 짜리 방 한
개를 빌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한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풍물패
특성상 여성회원들이 많아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회원들은 제법
멀찌감치 주방과 떨어져도 되었다. 수년간의 전통이어서 인지 분야별
임무가 확연히 구분되어 보였고 잠시 후 특화된 주안상까지 차려지자
일부 원로 회원님들은 반주(飯酒)를 겸하고는 굿거리장단에 맞춰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춰댄다.
“눈이 온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 모 회원님이 마치 반가운 친구가 오
기라도 하듯이 방문을 열고는 인사를 해댄다. 정말 열린 문 밖으론 흰
눈이 흩날리고 마당엔 이제 막 눈이 쌓여지고 있었다. 이제부턴 남자
회원들의 나설 차례란다. 마당에 불을 지펴는 것은 남자회원들의 몫이
란다. 장작이며 각목들을 제재소에서 화목(火木)용으로 한 트럭이나
준비를 했단다. 올해는 이곳에서 구할 수가 없어 서울에서 운반을 해
왔다니...
벌써 주변은 하얀 눈뿐이다. 겨울밤은 칠흑 같이 어두운데 화톳불에
희끗희끗 ‘눈 벌레’가 날아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전 회원은 장
구며 소고며 징과 북을 둘러메고 불 앞으로 모여든다. “갱~ 갱~ 갠지
~ 개갱~” 꽹과리를 든 ‘최사부’가 삼채가락으로 내리 치며 힘껏 소리
친다. “무쇠막, 풍물패 님들~ 이곳 대성리 ‘머꼬지’행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상만사를 던져버리고 신명나게 한판 벌
려봅시다. 얼슈~”
“갠지~ 갠지~ 갠지~ 개갱”
“둥~ 둥~ 둥~ 둥~”
“덩~ 덩~ 덩따 궁딱”
“징~징~징~징~”
사물이 계곡의 고요를 걷어내자 ‘최사부’를 선두로 50여명의 풍물패들
은 눈발사이로 ‘태극진’을 만들며 화톳불주위를 빙빙 돌아들 간다.
그날 밤 눈 속에서 시작된 ‘무쇠막’의 겨울 ‘머꼬지’행사는 다음날 새
벽 무렵에야 끝이 났다. 그 다음해 봄엔 용인에 있는 모 회원님의 별장
에서 행사를 하였고... 그렇게 몇 년을 풍물패에 묻혀 지낸 필자는 어
느 날 뭔가가 몸 밖으로 뚝 튀어 나오는게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밝혀보지 않았지만 말이
다...(사실 밝히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우리나라의 세시(歲時) 풍속 중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보름까지 행
하는 민속놀이인 ‘지신밟기’라는 것이 있다. 지신(地神)을 진압하고 벽
사(辟邪)하여 마을과 가정에 안강과 다복이 깃들기를 비는 마을행사이
다. 지방마다 ‘마당밟기’‘매귀(埋鬼)놀이’라고도 부르며 그 절차와 등
장인물, 복색 등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꽹과리․징․북․장
구․쇠납 등의 기본풍물을 선두로 소고패․양반․하동(河童)․포수․
머슴과 탈을 쓴 각시 등이 등장하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그 놀이 형식
을 보면 당산 굿을 시작으로 하여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
신을 밟고 지신풀이가사를 창하며 춤과 익살과 재주를 연희(演戱)하는
데 늘 선두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기를 앞
세우고 그 뒤를 풍물패(농악대)와 가장행렬패들이 따른다. 그러나 요
즈음은 전통예식을 정확하게 따르는 풍물놀이는 점점 찾아보기 힘드
는데 그나마 이곳 ‘무쇠막’ 풍물패는 좀 나은 편에 속한단다. 대개가
주변 정황과 적당히 얼버무려 진행하다보니 이제는 변형된 풍물놀이
가 더 쉽게 우리 곁에 와 닿고 있는 실정이다. 그 날의 지신밟기행사는
하루 종일 걸렸다. 주민들이 많은 호응을 해주었고 가는 곳마다 집안
으로 불려들어 돈 봉투며 음식을 내와 극진하게 대접을 잘해주었다.
점심을 중국집에서 먹었는데 가게주인이 아예 다른 손님은 받지를 않
고 풍물패를 위하여 각종 요리를 만들어 내놓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교회에도 갔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아주 좋았다. ‘최사부’는 교회신자
들의 성화에 못 이겨 교단 위에 올라 설교대신 노래가락을 수차례나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 학교건축을 하고 있는 공사장에서
는 현장인부들이 막걸리를 들고 나와 잔을 돌리며 한패거리가 되기도
했다. 필자도 한잔 받아 마셨더니 아예 북을 한번 빌려달란다. 왕년엔
자기도 풍물깨나 때렸다며... 채잡는 솜씨가 보통은 넘어 보인다.
“매년 이렇게 행사를 하여 무쇠막 운영자금을 만든답니다.” 하루 종일
상쇠노릇을 해 온몸이 파김치가 된 ‘최사부’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
었더니 회원의 회비로는 회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행이
이곳 지역 분들이 풍물패를 아끼는 마음에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
을 주고 있어 그나마도 이런 행사를 매년 치를 수가 있다며 호응해주
는 지역주민들이 무척 고맙단다. 그렇게도 느껴진다. 아직은 덜 개발
된 이곳의 지역여건도 한몫 했지만 개발이란 미명아래 많은 아파트가
점령군으로 들어오면, 이곳도... 원주민이 떠나고... 인심도 떠나고...
‘무쇠막’도 떠나지...?
“웃~ 갱~ 갠지 갱~ 웃~ 갱~ 갠지 갱~”
“딱궁~ 궁 딱궁~ 딱궁~ 궁 딱궁”
“둥~두 둥~두 둥~두 둥~두”
“징~ 징~ 징~ 징~”
오래도록 필자의 머릿속엔 얼려지지 않은 ‘휘모리’의 미음(微音)이 끝
나지 않고 내리 깔린다.
첫댓글 좋은 취미를 가지고 계시네 올려라 올리지 말어라 감이 누가~~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잘 읽어습니다...
잘읽었다니 다행이네. 혹 싫어하는 분도 계실까 해서... 내가 여행 수필가로 활동하면서 한 3년간 글을 쓰 잡지에 올리것이 있다네 짬짬 우리 주변과 관련있는 것은 올려보도록하겠네. 좋은하루...
사물놀이 역사성과 지신밝기의 '취모리'미음이 지금도 들려 옵니다.천등과바람,비와 눈은 자연의 소리이고 우리는 그 소리와 더불어 이 시대을 살아가고 있네요. 둥 - 둥 - 둥둥-
계속해서 재미있는글 올려주시게 언젠가 내가 님의 글로 책 한편 쓰고 싶구만. 벅구야!.하는말, 소고를 치며 풍물에서 쓰는 말인데 서울에선 아니 쓰두만. 내 기억도 어릴때 그러한 소릴 들었는데 말이다. 좋은하루...
지신 밟기의 멋은 소고들의 벅구놀이가 재미 있는데 이제 할줄 아는 사람들은 한두 사람들이지. . .어릴때 봤는데 그리고 할배.아버지.엄마 모두가 상쇠 였는데 나는 무자요 !!! 우리 모친은 지금도 가끔 마을 행사시 여자들 대표을 하여. . .
당시 책에 올린 사진도 하나....
소림사 정통 고수님을 만나지 못해 내공(사진)은 전수 받을 기회가 없. . .
이제 자세히 사진을 보니 알아 볼수 있구나 좀더 드둘겨 닥아오는 세상을 밝혀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