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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자
마야는 아주 철저한 기록 중심 사회로
한 해의 조세 기록과 호구 조사 등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이지만
표의문자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한글 혹은 가나로 표기하면서 한자를 섞어쓰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에서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의 조합으로 대체로
하나의 단어 전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한글에서보다 조합이 더 복잡하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마야 문자는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도 여러개이며,
여러 개의 기호가 조합될 때 몇몇 기호는
기호 전체를 표기하지 않고
일부분만을 앞의 기호 뒤에 붙여서 표기하는 등 표기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마야문명의 또다른 특징은 0의 사용이다.
10, 100, 1000 등을 나타내는 별개의 기호가 있었던
중국이나 로마 등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 숫자에서처럼
0과 자릿수를 이용했던 것이다.
유라시아의 대부분의 문명과는 달리
마야문명에서는 20진법을 사용했다는 차이는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숫자체계는 마야문명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라
보다 이전의 문명인 올멕 문명에서 이미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야문명의 달력은
1하압(Haab)이 365일로 이루어지고
1년 = 1508/1507 하압 = 365.242203일 이라는 복잡한 것이었지만,
이는 실제 1태양년과 불과 1.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단히 정확한 것이기도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경우 약 27초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달력 및 기수법과는 대조적으로
마야문명을 포함한 아메리카의 문명에서는
청동기나 철기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바퀴 또한 발명되지 않았다.
말이나 소 같은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쇠퇴와 멸망2번째 쇠퇴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선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
화전을 해버린 것이 치명타였다.
한편 유카탄 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질 못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막무가내식 개발이 어떤 꼴을 불러오는지
아주 적절히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스터 섬과 유사하나
이스터 섬은 상황이 더욱 막장이었던 데에 비해서
이쪽은 어디든지 이동하기 쉬운 대륙이어서 조금 낫지만...
다만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의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에서는
화전이 아닌 세밀하게 짜여진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화전 방식에 비해서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되는 또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들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입혔다.
정글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차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다만 말 그대로 궤멸당한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마야 지역의 원주민들은 그나마 혈통을 많이 계승한 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제국을 이루고 있던
아즈텍인들이나 잉카인들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다.
마야의 인신공양은 어디까지나 제의의 일부로,
아즈텍만큼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피를 보는 것은 대부분 사람이 죽지 않았고
지배층이 우선이었다.
왕은 자기 피를 뽑아
종이에 적셔 태우며 연기를 맡았고,
여왕은 가시가 있는 줄을 혀에 꿰었다.
그 외에 귀 등의 신체부위를 찔러서 피를 바치거나 했는데,
우리네가 돼지머리 바치는 것과 비슷한 행위일까?
물론 생명을 희생시키는 의례도 있었지만
주로 물에 던져넣는 방식이었고
연례행사 수준으로 '드문' 일이었다.
마야의 공놀이
피찰이라고 부른다.
마야제국 때 행해지던 스포츠로,
중요한 종교의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도 전용 경기장 유적이 남아있는데,
양키 스타디움과 비슷한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장식은 고무공을 이용한 경기로,
손과 발을 둘 다 쓰면 안되는 규칙이 있다.
예전에는 경기 후 이긴 팀은 희생을 통해 제물로 바쳐졌지만,
당연히 현대에는 그냥 경기 후 하이파이브만 하고 끝낸다고 한다.
경기횟수도 예전만큼 못하고,
대중들에게 보여주가 위해 간간히
소칼로광장 등지에서 경기가 열릴 정도라고...
심지어 공놀이 의식을 위한 체육관까지 갖추어져있으며,
경기에 사용되는 공도 예전에 비해 엄청 가벼워졌다.
경기에 이길 경우 제물로 바쳐진다고 했는데,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도 신과 가까워진다는 이유로
영광스러운 죽음이라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 유적지에선
도시가 쇠락한 시대로 추정되는 시대의,
가족단위의 살해된 성인과 아이들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치아에 보석장식을 하고 있는 등 지배계층으로 추정되었다.
추측하자면 기근이 닥치고 분노한 농민들이
제사장과 그 일가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이상 지배계급의 신성한 능력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성공한 반란은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이어지지 도시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러번의 대기근에서 살아남은 마야 북부의 인구는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로 추정된다.
어느날 서울의 인구 90%가 죽으면 서울은 제대로 돌아갈까?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거나 나가는 것을 배제한다면,
남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훨씬 작은 무리로 살아가겠지만
행정력도 사라지고 기반산업도 무너져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스페인의 식민 이후의 중미에서도 여러번 심한 기근의 기록이 발견된다.
또한 현대까지도 원주민들 사이에선 기우제 의식이 남아있다.
마야인들의 실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했던 많은 문명들은 많은 실책과 문제점 투성이었지만
주도권을 잡고 번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의 장점과 세련된 문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기후의 변화,
화산활동 등의 자연재해로 멸망하거나 쇠락하기도 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참고로 스페인 정복자들은 제도화 되고 정비가 된
아즈텍의 수도를 점령하고 주변지역을 차지해나가는 것보다
작은 집단으로 산개된 마야지역을 점령하는데
시간이 더 들었다고한다.
마야의 역법은 서기 2012년에 끝난다는 설로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진실은 그냥 한바퀴 다 돈 것뿐이다.
십간십이지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갑자가 오는 것과 같은 것.
마야에서의 십간십이지에 해당하는 년도는 144,000일, 394.3년이다.
그리고 마야의 역법에 따르면 이 단위조차
한바퀴 순환하려면 서력 477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20진수인 마야력에서 2012년은 고작 13에 해당하는 절기일 뿐.
참고로 1에 해당하는 절기는 BC 3114년이었다.
마야인들이 가장 큰 단위인 B'ak'tun 이
끝나는 시기마다 큰 행사를 치른 건 사실이지만
지구 멸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기 2012년 12월 21일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야 문명은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서기 900년, 마야문명과 태평성대를 이루던 당나라는 함께 쇠락했다.
당나라는 말기에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졌고,
그 후 송나라가 이를 이어 받아 찬란한 화하(华夏)문명을 꽃피웠다.
이와 동시에 마야 문명도 신비롭게 사라졌는데,
이는 마치 인류가 증발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야문명은 서기전 2500년에 출현되었고
주로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지역에 분포했다.
서원 250년~800년 전은 이 문화의 전성기였다.
마야인들은 수 많은 불후의 건축을 남겼다.
그들은 800개의 상형문자로 된 마야어를 발명했으며,
몇천 년 전에 이미 자신들의 마야역법을 갖고 있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중세기 문명이 도입되기 전이었다.
이들은 또한 중국의 가장 전성기였던
중국 수당(隋唐)시대 때 태양, 금성, 달 등
천체 행성이 서로 돌고 있다는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지구상의 외계인이었다.
또한 몇 천 년 전에 이미 자신들의 마야역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미스터리하게 여기는 것은 이것이다.
마야인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어
수 백 개의 도시로 발전시켰는데,
그 도시 안에는 무려 10~2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이 많은 인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야문명이 신비롭게 사라진 이유를 탐색해보자.
이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 가장 뜨거웠던 화제였다.
그에 대해 가장 많이 떠돌았던 추측은
마야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여 외계 문명과 접촉했고,
우주로 떠났다는 설이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마야문명이 사라진 미스터리에 대해
각종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마야인이 도시를 버리고 사라진 시점은 서기 900년이며,
그 이유는 가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세기를 달궜던 가뭄은 몇 천년 역사를 가진 고도의 문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이와 같은 역사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가뭄과 연관 있다고 설명하였다
서기 1300년 전후의 옛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 또한 홍수와 가뭄으로 멸망했다.
또 서로마 제국과 아카드 제국, 미케네, 하라파 등 고대 문명국들의 멸망 원인도
기후의 악영향과 관련이 높다.
영국 사우스햄튼대학 Eelco Rohling 교수는
호수 밑 침전물과 종유석 동위원소의 비율을 이용해
강수량의 변화를 계산했다.
그는 “마야가 가뭄을 겪을 당시 연강수량은 40%까지 내려가
지하수의 높이가 많이 낮아졌을 것이며,
이로 인해 물을 퍼 올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이 없으면 가뭄에 내성이 강한 옥수수도 재배하기 어렵다.
마야는 인구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식량을 쟁탈하고 물이 흐르는 곳을 점령하기 위해 잔혹한 전쟁을 했을 것이다.
한 세기의 가뭄에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마야인들이 굶주림에 죽어 갔을 것이다.
그들은 가뭄이 한 세기 동안 계속될 것임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고,
찬란한 마야 문명은 이렇게 가뭄으로 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