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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리 효자각(김두남) 바로 가기
남파공(광부)后 괴정공파 삼락당 김응일(18세)과 덕탄공 김두남(19세)
★18世 김응일(金應一) (1549- ?)
대호군 윤우(允祐)의 아들 응일(應一)은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자순(子純)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44세의 나이로 스스로 삼가(三嘉)지역에서 구산(龜山) 윤탁(尹鐸),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生員) 권양(權養), 권제(權濟)등이 이끄는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에 지원하여 용감한 의병활동(義兵活動) 중, 삼가의병대(三嘉義兵隊)가 곽재우(郭再祐) 군사와 합류하여 왜적이 서부 경남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宜寧)지방으로 침입하려고 벌인 정암진나루 전투, 진주성 전투등에 참전한 이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화왕산성(火旺山城)전투에 참전하여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 삼락당공(三樂堂公) 응일(應一)은 17世 대호군(大護軍) 윤우(允祐)의 第四子이다
① 第一子 관일(寬一) : 무후(無后)
② 第二子 덕일(德一)부사직공(副司直公) 충북 괴산군 침곡리(바느실), 외사리(배원)
★ 子 기남(起南)
③ 第三子 수일(守一)첨추공(僉樞公) 경남 합천군 고품, 노파리
★ 第一子 두남(斗南) 덕탄공(德灘公)
★ 第二子 도남(道南)
④ 第四子 응일(應一) 삼락당공(三樂堂公) 경남 합천군 , 고품, 노파리
★ 子 수남(秀南)
★18世 김두남(김斗南) 1567-1615)
윤우(允祐)의 손자(孫子) 두남(斗南)도 합천군 용주면 고품마을 출신으로, 자는 여앙(汝仰)이며, 호는 덕탄(㯖灘)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나이 6세에 부친에게 글을 배워 15-16세때는 이미 문장에 통달하여 그 뛰어난 재주와 이름이 이웃 고을까지 떨쳤다. 26세되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경상도 일대의 남명 조식(曺植)선생 문인들은 삼가(三嘉)에서, 그리고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생들은 합천 가야면 숭산동(崇山洞) 일대에서 궐기하여 대대적으로 왜적토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삼가(三嘉)에서 입재(立齋) 노흠(盧欽), (龜山) 윤탁(尹鐸), 화음 (花陰) 권양(權養)등이 이끄는 삼가(三嘉) 향병으로 지원하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진영으로 편성되어 의령(宜寧)의 정암진나루 전투등에 참전하였다.
특히 합천(陜川)을 중심으로 한 초계, 성주, 고령 일대에서는 3000여명의 대병력으로 낙동강(洛東江) 연안을 제압하여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호남(湖南)침공을 방어 하고 왜적의 거점인 성주성(星州城)을 수복 하는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전란이 끝난 후 임천(林泉)에 다시 돌아와서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 하였으며, 과업에는 뜻을 두지않고 부모봉양에 극진하였다. 또한 친족간의 정을 두텁고 화목하게 지내는데 노력하면서, 산속 냇가를 벗삼아 묻혀 지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으로 다시 출전하여,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殉職) 하였다.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당동 고호 세덕사(世德祠)에서 배향하고 있다. 사후에 효행으로 1634년(인조12) 증 선무랑(宣務郎)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추서되고 1650년(효종2년) 사정려(賜旌閭)되었다. 저서로는 19cmX25.4cm 크기의 “덕탄집(㯖灘集)”이있다.
※ 덕탄공(德灘公) 두남(斗南)은 17世 대호군(大護軍) 윤우(允祐)의 손자(孫子)이다
① 第一子 관일(寬一) : 무후(無后)
② 第二子 덕일(德一) 부사직공(副司直公) 충북 괴산군 침곡리(바느실), 외사리(배원)
★ 子 기남(起南)
③ 第三子 수일(守一) 첨추공(僉樞公) 경남 합천군 용주면 고품, 노파리
★ 第一子 두남(斗南) 덕탄공(㯖灘公)
★ 第二子 도남(道南)
④ 第四子 응일(應一) 삼락당공(三樂堂公) 경남 합천군 용주면 고품, 노파리
★ 子 수남(秀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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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과 화왕산성 전투≫
선조 29년(1596) 9월 화의의 교섭이 깨어지자 이듬해 정월에 다시 재침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왜군은 화의 기간 동안 경상도 남쪽으로 철수하여 울산 서생포로부터 동래 웅천 거제에 이르기까지 의산임해하여 장기주둔하고 있었다. 29년 6월에는 가등, 소서 등 제장도 철병하고 부산의 사둔만을 남겼다.
그러나 재침의 명을 받자 또다시 침입했는데 이 때 왜군은 모리수원을 대장으로 한 일대로 가등청정이 선봉으로 하여 흑전장정 천야행행장 등 5만여 병이었다. 초계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했던 바 본군은 또 한 번 크게 유린당했다. 때는 정유년 7월과 9월까지였고 유명한 화왕산성의 방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지휘하에 경남 지방의 모든 백성은 고지에 위치한 산성에 집결하여 웅거하면서 결사항전하는 전법을 쓰게 되니 각 산성에는 식량과 군기물이 이동외어 전투태세를 완료하였다. 이때 이곳 창녕에서도 평지에 있는 주민과 물자를 거두어 화왕산성에 들어가게 했으니, 그때 경상우도 조방장이었던 곽재우는 현풍에서 석문산정을 새로 쌓다가 완성이 되기 전에 왜적이 침입하므로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7월 21일에 화왕산성으로 이동하였다.
그때 사방에 장수와 선비, 백성들이 곽재우 장군을 믿고 모여 들어 죽음을 각오한 각처의 군사들만의 성명을 기록한 책이 곧 '화왕산성 동고록'이니 여기에 참가한 수는 990명에 달하며 성을 지키는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방어사 곽재우, 종사관 성안의, 조방장 이영(밀양부사), 조전장 장응기(창녕현감), 전재(영산현감), 이숙 성정국 신초(현풍현감) 신방로 김충민,장서기 배대유 성안인 노극홍 이응원 안담 000 000, 장무관 박효선 문홍도. 이들은 성 중에 불 때는 나무를 큰 무더기로 쌓아두고, "만일 이 산성을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여기에 불을 질러 우리는 다 타 죽고 말 것을 각오하라."하고 성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하고 자기도 스스로 마음에 맹세하였다.
왜장 가등이 성 밖에 이르렀다. 왜의 대군의 칼날이 빛을 가리우고 깃발은 들을 덮어 성중의 장병들은 떨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태연히 웃으며, "왜장도 군사 쓰는 법을 알면 감히 우리에게 덤비지 못하리라" 하였다. 과연 가등은 일주야 동안 성안의 동정을 살피다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렸다. 즉 가등청정은 산성의 형세가 매우 험준한 데다가 성안이 고요한지라 복병이 있을까 겁을 먹고 공격을 단념하고 초계와 합천을 지나 안음으로 진출하였다.
적이 등을 돌리자 군사를 성 밖에 내보내어 추격토록 했다. 또 영천 의병장 권응주는 밖에서 응원하려고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북편에서 기세를 올리며 도전하였더니 왜적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물러갔다 한다. 왜군은 그길로 안음 황석산성으로 가서 함락시켰으니 그곳 성을 지키던 안음 현감 곽준 조종도 등이 전사하였다.
임란창의사
임진왜란 때의 합천지역 의병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병을 모아 일본군을 격퇴했던 의병장 정인홍을 비롯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 창의사를 세웠다. 창의사는 합천호 옆의 산비탈을 4단의 층으로 정지하여 터를 마련했다.
임란창의기념관은 사당 창의사, 유물관, 강당(경의당), 기념탑, 외삼문, 내삼문, 사주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사당까지 둘러보려면 모두 4단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만 계단 왼쪽으로 작은 길을 만들어 놓아 계단 이용이 불편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임란창의기념탑
첫 번째 계단을 오르면 전면에 ‘합천 임란창의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기념탑 하단 세 모서리에는 죽창 · 괭이 · 삽 · 쇠스랑 등을 든 농민의병 조각상이 있다. 탑의 높이는 17m, 폭은 19.6m이며, 1999년 12월에 준공되었다.
기념탑 뒤에 있는 두 번째 계단을 따라 ‘숭인문(崇仁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외삼문을 통과하면 왼편으로 사적비 1기와 사주문(천례문), 오른편으로 연못과 또 하나의 사주문(양지문)이 있다.
세 번째 계단을 오르면 유물관과 교육공간으로 쓰이는 강당 건물인 경의당이 나온다. 유물관에는 왜란 당시의 의병투쟁사와 합천 지역 의병사에 관련된 해설판이 설치되어 있고, 유물 30여 점도 전시되어 있다.
창의사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충의문(忠義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내삼문을 통과하면 의병장 정인홍, 윤탁과 의병 112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의사(彰義祠)가 있다.
창의사 봉안 위패(초계 · 합천 지역 의병, 가나다순)
강수, 강익문, 곽율, 권개, 권양, 김두남, 김란손, 김준, 김준민, 김질, 노세기, 노흠, 류영, 마가련, 무명 의병(無名義兵), 문경호, 문덕수, 문려, 문사영, 문익순, 문익신, 문혁, 문홍원, 박개, 박건갑, 박곤갑, 박덕순, 박사겸, 박사돈, 박사재, 박서구, 박천우, 배형원, 변옥희, 손승의, 손인갑, 송희달, 송희순, 송희철, 안각, 안극기, 안기, 안철, 유세온, 윤언례, 윤탁, 이대약, 이대윤, 이동빈, 이영, 이영숙, 이운, 이윤서, 이임, 이정, 이춘형, 이태기, 이해룡, 이현좌, 전문, 전우, 전제, 전치원, 정걸, 정방준, 정석조, 정석희, 정언충, 정연, 정유일, 정인영, 정인함, 정질, 정창서, 조계명, 조의민, 하혼, 허자대, 허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