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걸린 달
김 과장이 홍천교육청으로 출근을 할 때에는 매일 7시 반쯤이면 집을 나섰는데 도로에 나서기에 앞서 집 근처에서부터 차가 막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전문직 생활을 마감하고 전직하여 춘천시 호반초등학교 교장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 좀 느긋하게 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몇 년 동안 드린 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치지를 못하고 7시가 되기 전에 벌써 밥을 차리라는 독촉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침에 먼저보다 1시간은 늦게 출근을 해도 된다고 하더니 먼저나 마찬가지로 밥을 차리라니 어떻게 된 거에요.”
아내가 한마디 하는 바람에 김 교장은 할 말이 없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글쎄 말이요. 처음에는 그런 마음을 가졌는데 몇 년간을 그렇게 하다 보니 잘못하면 게을러질 것 같으니 당분간은 종전처럼 해주면 좋겠네요.”
“ 맙소사. 집 가까이 와서 좋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그렇지 그 버릇이 어딜 가겠어요.”
젊어서는 남편이 객지로 돌아다니느라 항상 어린 학생을 등교시키듯이 새벽밥을 해 먹여 보냈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이니 앞집의 할머니 말씀 마따나 여편네는 사내를 잘 만나야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가 춘천시내로 발령을 받은 것은 9월 1일 자였다.
전문직에서 13년을 근무하다 보니 외도를 너무 한 것 같아서 일선학교로 복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해서 오래간만에 일선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부임을 하게 되었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가 하면 여자 아이들은 한쪽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철봉 틀 모래사장에서는 1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등교하는 어린이들이 낯이 선 그를 보고는 인사를 한다.
“ 안녕. 가방이 무겁지 않니.”
“ 아니요 가벼워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 음. 내가 바로 이 학교로 새로 오는 교장선생님이란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아이는 금방 앞으로 내달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교장선생님이 다아.”
그 소리에 앞서가던 아이들 몇 명이 돌아서더니 인사를 하였다.
삽시간에 그 소식이 전해졌는지 아이들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는데 반가움이 배어 있다.
“ 너희들은 몇 학년인데 그리도 예쁘게 생겼냐.”
“ 저희들이요. 5학 년이지요. 교장선생님 멋이 있으세요.”
" 내가 어디가 멋이 있어 보이니. “
“ 다 요.”
그러는 사이에 현관에서 어떤 선생님이 바삐 나오더니 어서 오시라면서 인사를 한다.
“ 교장선생님. 이 학교로 부임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등우 교무주임입니다.”
잠시 후 직원들이 모두 교장실로 들어오자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선생님들과 인사교환을 한 후에 바로 아침조회를 운동장에서 한다고 하여 김 교장이 현관을 나서자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손뼉을 치는데 학교가 들썩하는 것 같았다.
이에 김 교장은 오른 손을 번쩍 들어서 흔들자 어린이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었다.
교감선생님의 소개를 받고 교단에 올라선 김 교장은 조용한 어조로 인사말을 하였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 어린이와 함께 이 아름다운 학교의 운동장과 교실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모두 모두 양손을 잡고 씩씩하게 자라서 이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
조회가 끝나자 어린이들은 발걸음도 가볍게 밴드부의 리듬에 맞춰서 교실로 들어가면서도 어린이들의 눈은 교장선생님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운동장에는 웬 승용차 두 대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서더니 양복을 입으신 신사 네 분이 바로 교장실로 향한다.
“ 교장선생님 처음 뵙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형으로 새로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시기에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 왔습니다. 부임을 축하드립니다.”
“ 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런데 바로 뒤에 교장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은 한복을 곱게 입으신 어머니들로 무려 여덟 분이나 되었다.
어머니회 박 명분 회장님은 바로 교장선생님께 한 아름이나 됨직한 꽃다발을 드리면서 축하를 드린다고 하자 모두가 박수를 울렸다.
“ 감사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존함은 많이 들었습니다. 홍천군 학무과장님으로 계시다가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학교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학부모들이 모두가 좋은 학교를 만들어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도 많이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리게 되면 부임도 못하고 쫓겨 가야 되겠지요.”
“ 하하하하. 교장선생님 농담도 잘 하시네요. 어머니회에서는 그런 분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오고가는 동안에 집배원이 축전카드를 한 묶음이나 교장실에 놓고 갔다.
“ 웬 축전이 그렇게도 많이 왔대요. 교장선생님 잘 받들어 모셔야겠습니다.”
서무계에서 차를 내오고 한참동안 환담을 나누다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자 어머니 회장님이 저녁에는 환영식을 할 계획으로 있으니 다른데 약속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학부형들이 나가신 후에 교감선생님을 비롯하여 각급 주임교사들이 별도로 맡은 업무에 대해서 보고를 하겠다고 하여서 간단하게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현황을 설명이 끝난 뒤에 교감선생님은 급하게 드릴말씀이 있다면서 하는 말이 가을 운동회 날짜를 9월 10일로 정하였는데 총연습을 5일쯤으로 예정한다고 하였다.
“ 9월 5일이면 나흘 뒤의 일이네요.”
김 교장은 그 말을 한 뒤에 교감선생님을 따로 불러서 의견을 듣기 보다는 학교장의 의견을 말하였으니 그것은 총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은 총연습을 하지 않고 어떻게 운동회를 하느냐면서 의아해 하였다.
김 교장은 그 소리를 듣고 난 후에 바로 교감 교무 체육주임을 다시 불러 총연습 없이 운동회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교장이 선생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운동회야말로 학부형과 어린이가 혼연일체가 되어 하루를 즐기는 것인데 구태여 육군사관생도 모양으로 질서 있게 행진하는 것이 보기가 좋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종목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하고 다음 종목에 대한 상상을 하게 함으로서 운동회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총연습을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김 교장의 의견이라고 하였다.
어찌 보면 학교의 직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것이 될지 모르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 의견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다음날 직원조회에서 학교장의 방침에 따라서 이번 운동회의 총연습은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리고 학부모에게 그 사항을 자세히 전달토록 하였다.
이날 김 교장은 학교 외부까지 한 바퀴를 돈 다음에 자리로 돌아왔는데 부임하고 나서의 하루는 얼마나 빨리 가는지 교감선생님이 환영식에 간다면서 앞장을 섰다.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니 홀에는 어머니 회원과 직원들이 박수로 환영을 해주었다,
이날 회식이 끝이 난 것은 9시가 지나서였는데 몇몇 주임들은 2차를 모신다고 하자 어머니 회원들이 노래방으로 가자고 하여 오래간만에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 아침 어젯밤 까지도 좋던 날씨가 밤사이에 구름이 많이 끼더니 조반을 먹고 출근을 서두르자 이미 비는 촉촉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8시에 집을 출발하여 20분 만에 학교에 도착을 하니 부지런한 어린이들은 벌써 우산을 받쳐 들고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 학교의 건물은 남쪽과 북쪽 현관을 통해서 교실로 입실을 하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은 바로 남쪽 현관으로 가서 어린이들이 현관으로 질서 있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비에 젖은 우산들을 받아서 접어주기 시작을 하였다.
조그만 어린이들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왔다가 우산을 접자니 어린이들이 밀려들어오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 차례차례 들어와요. 우산이 잘 접히지 않는 어린이는 교장선생님이 접어줄게요.”
그러자 너도나도 교장선생님께로 줄을 섰다.
모든 어린이가 명찰을 달았지만 이름을 부를 사이도 없이 우산을 받다보니 어린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일천 이백여 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거의 한꺼번에 등교를 하게 되니 현관은 혼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만 30여분을 지나고 나자 어린이들의 등교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체구가 작은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층계를 오르는 것을 목격하게 되어 교장은
그 어머니를 따라서 가다보니 3층에 있는 4학년 1반 교실에 서 내려놓았다.
“ 안녕하세요. 새로 부임한 교장입니다. 아이가 어디 아파서 업고 오시는가요.”
그 소리에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등교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교장실로 와서 아이의 상태를 알아보니 하반신 무력증으로 인해 걸음을 걷지 못해서 날마다 업어서 등교를 시킨다고 하였다.
순간 엄마와 어린이가 함께 고생을 하는데도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였다.
어머니가 가신 뒤에 3일 내로 1층에 있는 과학실을 2층으로 옮기고 과학실 자리에다가 4학년 1반 교실을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교실을 옮기고 나자 김 찬희 어머니는 교장실로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지만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면서 위로를 들였는데 엄마는 보험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근육무력증이라는 병에 걸린 것은1학년 때까지만 해도 마음대로 뛰어 다니었는데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원엘 가니 하반신 무력증의 시초로 더 심해져서 가슴까지 올라오게 되면 사망을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교실을 옮긴 후에 전교생이 김 찬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반의 어린이들은 부랴부랴 당번을 정해서 남여 공히 화장실을 갈 때에는 휠체어를 밀어주고 체육시간이 되면 함께 달리지는 못하지만 운동장까지 데리고 나가서 눈과 마음으로 참여토록 하였다.
학교현황을 거의 다 파악한 김 교장은 편부편모의 어린이를 조사하고 그들과 선생님 간에 양부모 맺기를 통하여 아이들의 외로움을 덜어주도록 하였다.
앞서 9월 5일로 날짜를 잡은 총연습에 들어갈 예산 일 백만 원을 절약할 수가 있었으며 특히 어머니회에서는 총연습 때 어머니들을 동원하기로 했는데 총연습을 중단한다고 하자 모두가 환영을 하였다.
운동회 날이 임박하자 체육주임을 중심으로 종목별로 단체별로 세분해서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담당부서에서 시계를 내놓고 가상연습을 하였다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회 당일은 날씨가 화창하였고 고학년 어린이를 동원해서 교실의 의자를 청 백군 좌석에 배치하여 전교생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종목별로 출전토록 하였다.
전임 남산학교운동회 때부터 어린이 좌석에 의자를 배치하여 앉게 하였는데 그전까지는 어린이들이 맨 바닥에 앉아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했다.
이 날 식전에 선생님들은 일찍 출근을 하여 만국기를 달고 운동장 라인에 회를 뿌리는 동안 부지런한 학부형들은 운동장 주변 나무 그늘아래 자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마침내 김 교장이 부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는 운동회는 9시30분 리듬밴드에 맞추어 어린이들이 운동장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입장하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개회선언과 더불어 학교장 인사와 내빈소개 이어 준비체조 후에 바로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퇴장을 하면서 한쪽에서는 1학년 어린이들의 100m 달리기를 시작으로 운동회막이 올랐다.
총 연습 없이 프로그램 진행이 되다 보니 모두가 다음 종목에 대한 관심이 많고 방송을 통해서 학년종목이 임박하면 서로서로가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질서정연하게 인솔 선생님의 구령을 잘 따르는 것이니 혼잡을 예상했던 일부 교사들은 오히려 질서 있게 진행이 되자 신기하게 느꼈을 것이다.
달리기가 끝난 후에는 지금까지는 등수를 가려서 팔뚝에다가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하지만 김 교장은 시상을 즉시 하여 어린이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상품을 결승선에다 비치를 하고 경기가 끝난 즉시 주도록 하였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우리의 전통을 빛내는 한복을 입은 5.6학년 여자 어린이들의 강강술래였는데 이들이 운동장 가운데로 모여들어 훨훨 나비같이 율동을 하자 장내에는 환호성과 더불어 박수가 끊이지를 않았는데 강강술래가 끝나자 바로 마지막 종목인 학년별 청백계주로 경기가 이어졌다.
이 경기가 청백군의 총점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청 백군들은 이때가 되면 승리를 다지고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운동장이 떠나가라 응원을 하였다.
마침내 1학년이 달리다가 청군이 뒤로 쳐지자 운동장에서는 양쪽 진영에서 북을 울리면서 함성이 터졌는데 한번 등위가 뒤바뀌면 만회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데 3학년에 올라오자 웬걸 또 다시 백군이 앞으로 나서자 운동장의 환호성은 절정을 이뤘고 이것이 백군이 우승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경기가 끝나자 청 백군들은 각기 운동장으로 집합을 하였는데 총점 발표가 있자 다시 한 번 운동장은 함성으로 뒤덮였으니 이것이 어린이들의 추억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운동회가 끝나고 나자 다시 학교는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학교장이 부임하고 다음날 느낀 것 중에 한 가지는 저학년 어린이들이 오전 4시간 후에 급식을 하고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학교급식이란 사립학교에서나 실행한 사례로 공립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이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 후 학교 급식이 시작이 된 것이니 누구보다도 좋아한 것은 어머니들이었다.
자녀 하나를 둔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는 것이 수월하지만 중고등학교 자녀를 셋이나 넷을 둔 어머니들의 도시락 싸는 고역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토록 집집마다의 가사의 일을 줄여준 도시락인데 이 귀한 점심을 먹은 후에 바로 맨송맨송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 시간을 활용해서 학교에서 독서를 하고 간다면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다음날 직원회의에서 전달이 되었다.
학교장이 이 안을 낸 것은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방과 후 1시간 정도만 할애하면 충분히 1년 목표 량 10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장이 새로 부임하고 모처럼 어린이들이 독서력향상을 위해 시간을 조정하자는데 이를 반대하는 교사는 없었다.
반대자가 없기보다는 어쩌면 학교장이 부임하면서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정한 문제를 교사들이 왈가왈부한다면 학교장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 반대를 보류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독서시간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점심 후 1시간은 의무적으로 하도록 권장이 되니 처음부터 교실마다 독서시간 때문에 혼잡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런대로 제대로 유지가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학년별 독서시간을 설정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학부형들이 아이 공부 때문에 학교로 전화를 해온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교장실로 전화를 한 어머니가 계셨으니 왜 학교에서 독서시간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학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 분은 학교에서 12시 20분에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학원엘 보내는데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놓아 주지 않으니까 학원엘 보내지를 못하니 독서시간을 없애고 원래대로 환원해 달라고 하였다.
학부형이 그런 반응을 보이자 일부 교사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서시간의 조정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김 교장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다음날 독서시간 설정에 대한 취지의 공문을 학부형에게 보냈다.
이후 학부형의 그 이상의 잡음은 나지 않았으며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독서시간 설정 이후에 어린이들의 독서하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는 말이 들렸다.
독서자율시간을 결정하고 어린이들의 독서 목표량을 연간 100권으로 정하자 처음에 어린이들은 그 목표량이 과하다는 소리가 들렸으나 1년 열두 달 중에 방학을 빼고 한 달에 10권씩을 읽는다면 이 목표는 쉽게 달성된다는 취지를 알려주자 어린이들 자신도 이를 수용하였으니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여실히 읽을 수가 있었다.
독서시간을 설정한 이후에 그 실태를 알아보던 중에 김 교장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거의 매일같이 담임선생님들 중에 한 두 사람은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결근을 하게 되어 빈 반의 수업을 당해 학년에서 대교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담임선생님이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반의 어린이들은 옆 반 선생님이 대교 수업을 하지만 거의 자습을 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심을 하였다.
김 교장은 그러지 않아도 부임하던 날 부터 어린이들의 인적사항을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던 차에 이 기회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음 날 직원조회 시간을 이용하여 앞으로 담임이 반을 비우게 되면 교장이 직접 대교수업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그런 후 선생님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살필 수는 없었으나 별반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장이 새로 오더니 학급담임까지 하러 든다는 말이 돌 것 같았다. 더구나 학부형들은 색안경을 쓰고 볼 것이니 다소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긴장 속에 맨 처음에 들어가게 된 교실은 3학년 2반 교실로 창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란하던 교실이 금방 조용해지고 모두가 긴장상태로 자리에 앉았다.
“ 여러분 안녕. 혹시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대답 좀 해볼까.”
그러자 모두가 큰 소리로 “교장선생님이요.” 하였는데 몇 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교장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많은 선생님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사정에 의해서 출근을 하시지 못해서 오늘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여러 분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자 모두가 긴장을 하였다.
“ 자 그러면 수업 시작을 하기 전에 이름을 불러 볼게요. 자기 이름은 다 알고 있나요.”
하자 세상에 자기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킬킬거렸다.
" 여러분 웃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네. 그럼 일어서도 좋으니 마음껏 웃어보아요.”
이번에는 피아노 소리이상으로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창문 틈을 비집고 새나가고 있었다.
“ 앞으로 이름을 부를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답을 하기로 해요. 그리고 바로 노래를 부르면서 오늘 배울 책을 펴서 놓는 거예요. 끝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르면서 책을 가방에 넣어요. 그럼 연습을 한번 해 볼까요.”
이후 하루 종일 그들의 이름 부르고 노래 부르며 일기 검사를 할 때에는 일일이 개별지도를 하다 보니 어린이들의 얼굴을 익히고 그들의 가정환경이며 성격까지도 파악이 되었다.
어린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이에 교장과 아이들 간에 거리가 훨씬 가까워지고 어린이들의 애로사항도 알게 되어 부모에게 조언을 하게도 되니 일거양득의 효과였다.
그런데 그것이 장점만 있기보다는 교사들이 불만의 소지로도 작용이 된다는 것이었으니 교장이 수업을 하는 것이 교사와 비교가 되어 어린이들이 자칫 갈등을 느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교장의 방침으로 실행하는 수업이 어린이들에게는 새로운 호기심과 수업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다는 면에서 교장의 수업방침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교육이란 교육자가 의도하는 역할이 제대로 할 때에 나타나는 성과라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교장이 수업을 하기 때문에 대교수업이 없다보니 혹여 교실을 비우는 선생님도 마음 놓고 자기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장이 수업을 대교하는 날은 예상외로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더구나 그때마다 교장이 나서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대교 수업을 빼 먹는 경우도 간 혹 생겨 부득이 방과 후 시간에 보충을 해주자 다른 반 아이들도 들어와서 청강생 역할을 하였다.
그해 연말을 기해 교장은 부임한 이후에 스스로 1년간의 교육평가를 해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보람이 있었던 것은 본인이 추구하던 부드럽고 활기찬 인간으로의 기본 예절교육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을 하고 싶었다.
어린이들의 인성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어린이에게 직접 다가선 교육의 성과는 예상외로 어린이들의 개개인에 대한 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어느 학년 어느 반의 어린이로서 특기는 무엇이고 그의 재능은 어떤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반에 들어가서 직접 수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터득할 수가 있었다.
김 교장이 부임한지 어느 듯 두어 달이 되는 아침 교실과 화장실을 순회하다가 발견된 사실은 여자들의 화장실문짝이 자주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여자 어린이들이 남자 어린이들보다 얌전하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화장실문이 자주 떨어지는 것을 보면 여자 어린이들이 오히려 과격한 면이 더 있다는 말인가. 교장이 또 한 가지 화장실에서 발견한 것은 변기의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역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퇴근을 하기에 앞서 변기 안을 솔로 닦기로 하였으니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였지만 그 다음 부터는 역한 냄새가 가시는 것이었다.
이 학교는 도시의 변두리 학교지만 4.5층의 아파트가 학교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가 하면 학교 뒤에는 야산이 자리를 하고 있어 4계절 아름다운 야생화와 풀이며 나무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학교이긴 하지만 학교 건물과 아파트간의 허공을 메우기 위해서 잎이 커다란 푸라타나스 나무를 운동장가에다 심어 봄에서 가을까지는 아파트에서 학교 건물을 바로 볼 수가 없게 환경 조성을 하였다.
김 교장이 학교에 부임한 이후에 어린이들이 활기차게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가사를 작사하여 부르게 하였다.
하늘을 보자 ( 작사 김 두 수. 작곡 신 현 택 )
1. 두 손을 마주 잡고 하늘을 보자.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다
씩씩하게 걸으며 하늘을 보자. 꿈과 희망의 나래가 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보자. 무한한 우주가 우릴 부른다.
2. 손뼉을 마주 치며 하늘을 보자. 별들이 깜박깜박 눈짓을 한다.
두발을 척척 맞춰 하늘을 보자. 꿈과 희망의 미래가 있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늘을 보자. 무한한 우주가 우릴 부른다.
이 가사가 어린이들에게 보급이 되자 급식을 하러 오는 어머니들도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배워서 노래시간이 되면 함께 합창을 하였다.
앞서 학교 뒤에는 야산이 있다고 하였는데 학교에서는 산주의 허락을 얻어서 야외 학습장을 만들어서 활용을 하였다. 꽃이 피는 4월부터 늦가을 아름다운 단풍이 온 산에 물이들을 때까지 학급별로 자연시간에는 의례히 산을 이용하여 야외학습을 하였는데 실외로 나갈 때에는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숲속의 새들도 함께 지저귀도록 노래를 불렀다.
다른 학교 어린이들이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자라다 보니 어린이들이 활기차고 관찰학습을 통한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민감해지었다.
여기에서 다시 " 자랑스런 호반어린이“ 란 노랫말을 만들어 보급을 하였다.
자랑스런 호반어린이 ( 김두수 작사. 김혜숙 작곡 )
1. 진달래가 활짝 피는 우리 학교 뒷동산엔
철새들이 사시사철 지저귀며 모여들고
아침저녁 맑은 공기 밝은 노래 샘이 솟는
후렴 ( 우리들은 자랑스런 춘천 호반 어린이 )
2. 사철 푸른 소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뒷동산의 오솔길을 손을 잡고 올라가면
향기로운 솔향기에 콧노래가 절로 나요
후렴 “
3. 어린이의 눈망울은 슬기 가득 빛이 날고
교실마다 꿈의 낙원 웃음꽃이 함빡 펴요
친절하고 예의 발라 해외까지 이름 떨친
후렴 “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듯 어린이들은 교장선생님이 작사를 한 노랫말을 금방 익혀서 불렀다.
독서시간을 설정한 이후에 어린이들의 독서력이 급격히 향상되고 발표력도 신장되었으며 대외행사에 출전하는 백일장 대회에 나가서는 입상실적도 증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독서시간을 설정한 후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행사계획을 수립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연말에 학년 학급 개인별로 문집을 만들어 전시를 한다는 계획이다.
이것은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시도하는 계획이니만치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성사가 되겠기에 직원들과 수차에 걸쳐서 협의를 통하여 이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모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로 주임회의를 수차 하였으며 여기에 따라서 학급별로 시작을 하게 되니 어린이들 간에 호기심이 매우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전교생이 문집을 만든다는 소문이 학부형에게 전해지자 다음 날 부터 전화가 빗발치듯 왔으니 학교에서는 그 취지를 문서로 학부모에게 전달을 하고 학부모 총회에서도 전달하였다.
젊은 엄마들은 자신도 이런 경험을 갖지 못하였는데 자식 대에 와서 일을 벌리는 김 교장으로 인해 별일을 다 겪어 본다는 취지의 말들이 들리긴 하였으나 선의로 받아들였다.
사실 어릴 때에 학교생활에서 가장 잊을 수없는 일들을 매일같이 접하지만 어린이들은 그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새로운 학습에 관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모두가 사소한 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이 되어 일기쓰기를 생활화하고 우수작은 선발해 시상하였다.
김 교장이 부임하던 날 처음으로 지난 앨범을 통해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가지 떠올랐으니 그것은 매년 2월에 졸업식을 얼음이 꽁꽁 언 운동장에서 한 장면이다.
참석자들이 덜덜 떨면서 졸업식에 참석한 사진을 보고는 강당이 있다면 졸업식이나 학예회며 전시회와 같은 행사를 계속할 수가 있고 학급별 특활반의 연습도 충분히 할 수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바로 교육청을 방문하여 교실 3 칸을 확장하기로 승인을 받았으며 일주일 후 공사가 시작이 되고 보름 만에 공사가 마무리된 뒤에는 어머니회의 도움을 받아서 무대를 만들고 무대 막을 준비하였으며 앰프시설을 하니 다음날부터 아이들의 활용하였다.
이 학교의 설립은 불과 7년밖에 되지를 않아서 학교의 교력이나 시설관리에 대한 실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관계로 비치할 장부도 많았다. 학교 설립이래. 학예발표회를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학예회 이야기가 나오자 교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대었다.
학예회를 겨울방학 이전에 하기 위하여 학년 학급별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연습을 하도록 하니 방과 후에 교실에서는 연극이며 합창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각 학급에서 강당을 사용은 시간 배당을 하여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학예회 준비를 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어린이 출연에 대한 원칙을 세웠으니 전교생 1200명의 어린이가 고루 무대에 두 번 이상을 출연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원칙을 세운 것은 과거에 겪어온 것을 생각하면 특정한 어린이 몇 명만 무대에 출연을 시키는 바람에 참여를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실망과 좌절의 쓴 경험을 어릴 때부터 당했던 것이니 이야말로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같은 반 어린이 인데 누구는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을 하는가 하면 어떤 어린이는 모래밭에서 흙장난이나 하거나 무대 밑에서 구경만 해야 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도록 하였다면 전적으로 그것은 담임교사의 큰 잘못이었다.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무대에 다 세우느냐에 대한 문의가 나중에 화제걸이였는데 학예회는 학년별로 6일간을 계속토록 하고 무대에 세우는 겻은 합창과 제창을 위시해서 연극 낭송 무용 등을 하게 되면 다수의 인원을 무대에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습을 하는 동안에 무대에 모두 올라간다고 하자 어린이들은 모두가 집에 가서 학예회에 출연한다고 자랑을 하여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의 무대 복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부형은 시장에서 사서 입히기도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중순부터 학년별 학예회를 1주일에 걸쳐서 실시한다고 공문이 나가자 학부형과 어린이들은 모두가 환희의 찬 얼굴로 그날을 기다렸다.
10월초 월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매 학년 당 1일을 선정해서 학예회의 막이 오른다고 하자 학부형은 물론 어린이 모두가 들썩할 정도로 들 뜬 가운데 등하교를 하면서의 화제걸이는 무대에 올라가서 자기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하느냐에 대한 대담이었다.
마침내 맨 처음으로 1학년이 차례가 되고 10시부터 시작의 종이 울려 학예회의 막이 올라 리듬밴드에 맞춰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사회를 맡은 1학년 남여 어린이가 무대에 오르자 만장에는 박수 소리가 요란하였다.
이날 시간이 시작이 되기 전부터 학부형과 내빈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메웠으며 무대에 오르는 어린이들이 노래와 무용 낭송 동극 등 여러 가지를 깜찍하게 발표를 하자 시작부터 끝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2시간동안의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마감이 되었다.
화요일에도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진행이 되다 보니 학년이 오를수록 무대는 더욱 화려하게 꾸며지는가 하면 무대에 필요한 소품 등은 대여하는 곳을 통해 준비를 하여 학년이 오를수록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다.
맨 마지막 날에는 6학년의 발표 날로 이들은 연극 극본까지 자신들이 써서 연습을 하였기에 이들이 발표를 본 학부형들은 진작 이런 발표회를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학예발표를 김 교장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강원도 장학사에서 전직되면서 초임교장으로 부임한 남산초등학교를 발판으로 본격적으로 지도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김 교장이 홍천군 학무과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초 중등학교가 고루 1년 1회씩 학예발표를 하도록 하자 그것이 연중행사로 정착이 되어 가을이면 운동회와 학예회는 학교의 축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 축제는 나중에는 분교까지도 동참을 하게 되었는데 동면의 속초초등학교 신봉 분교에서는 학부형들의 농사철을 감안하여 밤에 학부형과 어린이들이 함께 학예발표를 하였으니 일생에 한번 이런 추억을 만들어 준 선생님들과 학부형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고 하였다.
학교마다 학예발표회를 매년 하다 보니 종목별 작품성이 우수하여 1회 발표로 끝내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소리가 들려 그 다음 해에는 군내 학교별발표대회를 하기로 하고 11월초에 각 학교별 우수작을 선정해서 홍천초등학교 강당에서 발표를 하였으니 이 대회는 육상기록대회. 과학경진대회 과목별 시범 연구 대회 등에 포함되어 매년 정기적으로 발표가 되었으나 사람이 바뀌고 난 후에는 그것이 유야무야되었다는 말을 후에 들었다.
사실 학교에서 창의력 교육에 대한 강조를 하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시대를 뛰어 넘는 학습지도가 아닌 한 기존의 사례를 계승해 나가는 것도 혼동을 주지 않을 것이다.
김 교장은 신동초등학교 출신으로 그가 4학년과 6학년 때에 심청전과 안중근 의사 연극에 출현했던 경험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경험이야말로 일생일대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면들이다.
더구나 그가 1950년대 말 인제군 원통초등학교 교사 때에 6학년을 담임하고 학예회를 하게 되었을 때 연극의 제목은 “거지왕자”로 주연으로 출연한 장 성선 학생이 후일 한국의 유명한 배우인 김 희갑 선생과 함께 연극무대 활동을 하였다는 말을 50년이 지난 후에 듣고 어렸을 때의 소질을 계발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 교장이 부임하던 해 10월 11일 학교에는 귀한 손님들이 방문을 하였으니 일본 돗토리 현 PTA 협의회( 日本 鳥取縣 PTA 協議會)의 仲田司朗 회장을 비롯한 회원 5명이었다.
한국의 초등학교의 교육시찰을 겸해서 온 이분들은 학교를 순회하고 나서 일본과 한국의 교육실태가 비슷하다면서 새로운 한국의 면모를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는 평을 하였다.
이날 김 교장은 기왕에 한국의 학교를 보셨으니 귀국하여 일본 어린이들의 작품을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참으로 좋은 착상이라며 전하겠다고 하였다.
김 교장이 이 학교에 부임한 후에 가장 어린이들의 변화를 촉구한 것 중에 한 가지는 질서교육을 통해서 올바른 행동의 습관화였다.
모든 행동의 규범으로 순서대로 줄을 제대로 서고 보행을 할 때에는 절도가 있고 인사를 할 때에는 70도 각도로 정확하게 하는 습관을 드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행동의 변화는 꾸준한 지도가 병행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어서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를 통해서 질서교육에 대한 평가를 하여 우수한 학급은 시상하였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6학년 학부형( 현재 홍천군에서 법무사로 일하는 송 태우 씨)께서 모처럼 가을 운동회에 참석을 하였다가 어린이들의 씩씩한 걸음걸이며 질서 있는 행동과 특히 공손하게 인사하는 태도를 보시고 나서 크게 감동을 받으셨다는 평을 해주셨다.
사실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의 생활화를 갖도록 세심한 지도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자각하고 터득하며 한 개체의 행동이 다른 어떤 개체와 융합이 될 때에 어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판단토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이 학교는 매일 급식을 하는 관계로 학급 당 학부모 급식당번을 정해서 점심 배식을 하였는데 50여명의 학부모가 학교에 출근하다시피 하니 어린이들의 행동도 부모들을 의식해서 그런지 나날이 변하고 있었다.
학예회 준비도 그렇지만 독서시간을 설정하고 나서 어린이들에게 과제를 준 것이 있으니 연말에 각자가 문집을 만들어서 전시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각급 담임도 이에 호응을 하여 방과 후에는 개별지도를 통하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문집 전시는 개교기념일 계기로 전시를 하기로 하였는데 10월 쯤 중간 평가 결과는 좋은 성적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때라 학급에 한 두 명이 문집의 표지를 강원대학교 근처 인쇄소에서 한 장에 5 천원을 주고 해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고학년은 거의가 컴퓨터로 표지를 뽑아서 문집을 만든다고 하였다.
특히 문집의 제목을 알아보니 학급별 어린이별로 같은 제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창의성이란 어린이 스스로가 일구어 나간다는 면에서 어린이들이 지어온 문집의 제목들은 살펴본 결과 거의가 시의 제목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11월이 되면서 날씨가 차츰 추워지기 시작을 하자 학교에서는 일찌감치 난로 설치를 하였으니 난로 설치를 너무 늦게 하여 손을 불어가며 난로를 놓느라 애를 먹기 때문이다.
곧 눈이라도 내리게 되면 어린이들이 움츠려들 것을 감안하여 그들이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추위를 이기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작사 보급하였다.
눈썰매 ( 작사 김 두 수. 작곡 신 현 택 )
1. 아침 일찍 장갑 끼고 눈썰매를 타러 가자. 눈바람이 불어와도 썰매타면 춥지 않다.
눈 내리는 한낮에 눈썰매를 타러 가가. 손 시리고 발 시려도 썰매 타면 춥지 않다.
2. 노을 지는 해질 녘에 눈썰매를 타러가자. 바람 안고 씽씽 밀면 눈썰매가 잘 나간다.
달이 뜨는 어둔 밤에 눈썰매를 타러 가자. 팔을 뻗쳐 줄당기면 눈썰매가 잘 나간다.
문집이 완성된 것은 그해 11월말이었으며 개교기념일을 기해서 강당에 학급별로 전시를 하고 학부형과 지역사회인사들을 초청하였다.
문집이 전시된 후에 각급 방송사와 각 신문사들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전시되는 전교생의 문집전시회를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주는 바람에 호반초등학교의 명예가 전국적으로 홍보가 되었다.( 1997년11월 13일 세 번째 글모음 전시회에 대해서 어린이 강원에 실린 신문기사 내용)
‣ 호반 초등 “ 전교생 1,212명이 개인문집”
… 세 번째 글모음 전시회 올 한 해 동안 익힌 글 솜씨 자랑…
초등학교에서 글 잔치가 열렸다. ‘하늘을 나는 기차’ ‘ 날고 싶은 자작나무’ ‘ 작지만 큰 세상’ ‘일곱 색깔 무지개’ 등 전교생이 올 한 해 동안 정성스럽게 만든 개인문집 1천 2백 12권이 늦가을학교 교정을 풍성하게 하였다. 아늑한 전원학교인 호반초등학교( 교장 김두수)는 지난 6일부터 12일까지 1층 강당에서 세 번째 글 모음 전시회를 열어 화제. 어린이들의 독서 발표력 표현력 글짓기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전시회는 막내 1학년부터 맏이 6학년까지 전교 어린이 1천2백여 명이 모두 참여해 더욱 뜻이 깊었다.
이번 문집축제는 지난해 보다 참여 어린이가 더욱 늘었고 평소에 글짓기를 열심히 해온 덕에 작품 수준도 작년보다 뛰어났다는 평. 도 지정 인성교육 시범학교인 본교는 도 농간 현장 체험학습을 꾸준히 확대하였다. 그래서 이번 어린이 문집에 우정의 편지. 기행문. 훈훈한 가족이야기, 등 현장체험의 글이 많은 것이 특징, ‘가빈이의 일곱 색깔 무지개’ 4학년 5반 이 가빈 어린이의 문집 이름이다. 예쁜 책 제목처럼 책장마다 맑고 아름다운 글들이 보석같이 박혀 있다. 첫 장을 펼치면 부모님 사진이 함께 실린 우리 가족 소개가 읽는 이를 반갑게 맞는다. 다가올 겨울을 넉넉히 이길만큼 따뜻한 이야기가 피어있다. 책장을 계속 열면 우리 학교자랑, 우리 선생님, 부모님께 드리는 글, 엄마가 사랑하는 딸에게 등 맑고 밝은 글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가빈이의 글모음에는 글 종류도 정원의 꽃처럼 다양하다. 동시 산문 독후감 신문으로 배우기 골고루 28편이 실려 저마다 맵시를 자랑하고 있다. 가빈이는 “내 손으로 문집을 만들어 너무 기쁘다며 그 동안 문집을 준비하면서 글 솜씨가 많이 늘었고 그만큼 보람도 컸다”고 말한다. 컴퓨터 솜씨가 뛰어난 가빈이는 문집을 워드 프로세서로 직접 편집해 책 디자인이 누구보다도 멋지다. 책장마다 관련 사진과 그림 삽화를 실어 구성이 아기자기하면서 입체적이다. 학교에서는 전시된 작품가운데 학년별로 최우수 우수 장려상을 뽑아 시상할 계획이다. 한해가 깊어가는 11월 문집을 펼쳐보며 향긋한 글 향기를 맡아 보면 어떨지….
신문 기사의 내용대로 전교생은 이번 전시회에 대해서 만족하기 보다는 내년에 더 좋은 문집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였으며 누구보다도 학부형들이 더 좋아 하였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특히 고학년 어린이들은 명년에는 도서매점에 내놓아도 될 만한 책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이후 문집 전시는 매년 11월 중에 하였는데 해마다 그 질이 높아지고 실제 어떤 책은 서점에 내놓아도 될 만큼 감쪽같이 한 작가의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어떤 작품의 편집후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었다.
“ 이 문집은 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다. 어느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초등학교 어린이가 쓴 자랑스러운 문집으로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서전을 만들거나 작가가 되어 책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개는 그것에 대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다 보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김 교장은 자신이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을 어렸을 때에 경험을 갖게 하기 위해서 시도를 하였다.
운동회가 끝나고 나서 학교에서는 도 육상 기록대회에 출전할 선수들의 연습에 주력하는 한편 본교 육성종목이 된 양궁지도에도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육상대회 출전을 하기 위한 비용마련도 그렇지만 양궁에 출전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드는 비용이 만만치를 않았으니 이 비용조달을 맡은 부서가 학부형을 중심으로 조성된 학교 체육진흥회였다.
학교체육진흥회는 양궁과 육상선수들이 출전할 때에 진흥회비에서 지출을 하도록 하였는데회원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수차에 걸쳐서 도 주체 양궁대회에서 우승을 할 수가 있었다.
학교체육진흥회에서는 그 밖에도 매년 춘 추 2회에 걸쳐서 학년별로 소풍 행사와 5.6학년 1박 2일 코스의 수학여행 등의 차 교섭과 행선지를 선정하는 것도 학교와 긴밀하게 협의하여 결정을 하였다.
수학여행지는 해마다 경주의 불국사를 선정하였고 학년별 소풍은 주로 대전이나 서울의 고궁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시야를 넓히도록 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김 양수 선생님을 중심으로 매월 학교신문 엄지호반을 발행하고 특히 어린이들의 발표력 향상을 위하여 매주 목요일 학급당 10분간의 녹화 장면을 아침조회 시간에 TV를 통하여 발표하였다.
‣ 일본 돗도리현 사이하쿠군 청소년 축구교류( 日本鳥取縣西伯郡靑少年蹴球交流)
그날도 5학년 1반의 첫 수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교실 문을 열자 지금까지 떠들썩하던 어린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 오늘 교장선생님이 이 교실에 몇 번 째 들어오나요.“
그러자 모두가 “세 번째입니다.” 큰 소리로 대답을 한다.
“그럼 우리 학교의 자랑스러운 5학년 1반 어린이들의 이름을 부르겠어요.”
그런데 이름을 부르고 나자 한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어서 해 봐요,”
“ 교장선생님.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그러자 한쪽에서 어린이들이 킥킥 대면서 웃는다.
그런 질문을 벌써 몇 번째 받는지 모를 정도라 가만히 생각을 하니 그것은 필연코 학부형 중에서 그것이 알고 싶어서 아이들을 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하였으니 대답을 해주어야 하겠지.“
“ 네에.”
어쩌면 이렇게 대답을 시원하게 하지. 다른 반에 가보니까 조반을 먹지 않은 사람모양 대답이 시원치 않던데.“
“ 교장선생님께서 앞서 교실에 들어오셔서 대답은 교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해야 한다고 하셔서 우리 반 어린들은 대답하는 연습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러고 생각을 하니 그때 내가 숙제 한 가지를 낸 것 같은데.”
“ 예. 고조할아버지 할머니 존함을 열 번씩 써오라고 하셨습니다.”
“ 그랬구나. 다 써왔겠지.”
그 시간 서무직원이 와서 일본에서 손님이 오셨으니 어서 내려오시라고 하였다.
그날은 김 교장이 학교로 부임한지 불과 한 달이 지난 10월 11일로 방문자는 일본 돗토리 현 PTA 협의회( 日本 鳥取縣 PTA 協議會)의 仲田 司朗 회장과 회원 5명이었다.
한국의 초등학교의 교육시찰을 겸해서 온 이분들은 학교를 순회하고 나서 일본과 한국의 교육실태가 비슷한 면이 많다고 피력하면서 모처럼 학교방문 기회를 통하여 새로운 한국의 면모를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는 평을 하였다.
이날 이분들에게 부탁을 한 것은 귀국한 후에 양국 어린이들의 작품을 교환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자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일본에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그는 한주여행사( 韓州旅行社)의 동경사무소장(東京事務 所長) 김 승진( 金承辰)으로 일본의 돗도리현 PTA 협의회 회장 (鳥取縣 PTA 協議會 會長) 의 이야기를 잘 들었으며 이쪽 일본에서는 학생들의 작품 교환도 좋지만 청소년축구교류를 희망하니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주시기 바란다는 요지였다.
김 교장은 전화를 받은 후에 일본과 청소년 축구교류를 하자면 직원들의 의견도 들어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양궁부를 소년체전에 춘천대표로 출전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육성종목 한 가지를 훈련시키려면 선수 선발에서부터 훈련담당교사가 있어야 하고 체전에 출전을 하려면 합숙훈련과 몇 번에 걸쳐서 타교 선수와의 교환경기를 할 때에는 경비를 체육진흥위원회에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어쨌거나 축구부를 조직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쪽에서 제의를 한 상태에서 저쪽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일단은 국제 대회를 유치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후 교직원과 체육진흥회 연석회의를 개최한 결과 체육진흥회가 주축이 되어 선수 선발부터 교류대회 참가경비까지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축구부조직은 5.6학년을 대상으로 희망자가 12 개 반에서 60여명이지만 22명을 정후보군으로 선발하여 일본에 통보하니 김 승진 소장은 명년 3월경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다음해 3월 24일 일본에서 추진단이 세종호텔에 도착하였고 그들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상견례를 하고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이날 도착한 세분은 일본 사이하쿠군(西伯郡)의 군의회 의원이며 현 사이하쿠군 축구부를 대표하는 야마지유( 山路有 ) 단장과 요나고시(米子市) 여행사대표 노구지 다가시( 野口降資) 씨 그리고 한주여행사 동경지사 김 승진소장이었다.
다음 날 일본 측 세분과 교감. 체육주임. 체육진흥회회 간부가 참석한가운데 양국 간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다음과 같이 합의를 보았다.
1. 교류일정… 한국에서는 여름방학기간인 8월 24일부터 27일( 3박4일)간에 걸쳐 일본선수와 보호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선수와 보호자들은 동년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일본을 방문한다.
2. 축구교류가 끝난 후에는 지역사회 관광 및 문화재 탐구를 한다.
3. 선수들은 학생들의 가정에서 민박을 하며 학부형과 인솔자는 별도로 호텔에 유한다.
4. 일본선수단이 도착하는 날과 다음날은 학교 급식소에서 재학생들과 함께 급식을 하고 3일째 되는 날은 시내 유명 음식점에서 한국의 불고기로 점심을 먹는다.
5. 기타 자세한 교류에 필요한 사항은 그때 가서 정한다.
이상의 결정을 본 후 일본 측 대표단은 바로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전교의 어린이들이 그 다음날부터 축구 붐이 일어나고 해지도록 운동장은 축구시합으로 날이 저물었다.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자 축구선수들은 본격적으로 방과 후에 축구경기를 하였다.
5월 초에 일본 선수 22명과 학부모 20명 그리고 단장을 합해 45명의 명단이 입수되었다.
이를 토대로 민박 신청자를 받아 명단을 작성하고 일본선수의 인적사항을 알려 주었다.
일본의 학부모의 명단도 학년별로 4. 5명씩 알려주고 이분들을 환영하는 포스터를 그려서 시합 전까지 복도 벽에 게시토록 하였다.
8월 24일 아침 일찍 출근을 하여 당일의 준비상황을 점검하느라 우선 4층까지의 복도를 돌아보았는데 교류대회에 참석하는 학부형과 선수들의 명단에 따라 그린 포스터를 4학년 이상의 어린이들이 거의 다 참여하였다. 포스터의 규격은 4절 또는 2절지에 맞추었는데 복도에 붙여진 포스터를 살피다가 어린이들의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참석하는 학부형과 선수들의 이름을 큼직하게 쓰고 얼굴도 제각각 도화지에 가득하도록 그린 크레파스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히 포복절도(抱腹絶倒)는 물론 이 포스터를 관람하는 눈동자가 화경처럼 크게 떠질 것 같이 느껴졌다. 인물화를 보면 포스터마다 제각각 다른 색깔 다른 규격으로 그렸는가 하면 특징을 말한다면 눈을 크게 입은 함박만큼 그리기도 하고 코는 서양인의 코만큼 그린 것도 있어 누구나 그것을 보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선수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유니폼을 입은 그림이고 개중에는 한국의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트랙을 도는 그림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나라를 36년간이나 지배를 하였으니 지배를 받은 우리민족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압제에 의해서 외국으로 망명을 하였으며 더구나 젊은 청년들은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수많은 어린소녀들은 군인들의 노리개로 지옥같은 삶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거나 그들의 만행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으니 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이란 말인가.
이 모두가 국력이 쇠약하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기에 후세들은 이를 교훈으로 삼아 결코 이러한 치욕의 국치(國恥)를 다시는 당하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일본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렇게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일본의 극우정치인들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사죄를 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인 중에는 과거의 침략에 대해서 사죄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더구나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는 지한파도 많이 있지만 일본의 극우세력은 결코 그네들과는 반대로 나가기 때문에 한일양국간의 선린관계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는 민간들 끼리 만이라도 선린관계를 넓혀 나가야 하고 그러한 뜻의 일환으로 청소년 축구교류를 시작하는 뜻도 매우 의의가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일연의 일들이 확대가 되면 신진 세대들은 보다 가까워질 것이며 국제교류는 더욱 활성화되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나가게 될 것이다.
이번에 학교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은 자기 생전에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의 춘천 호반초등학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를 얼굴과 함께 포스터로 그려서 복도 아래위층에 가득 붙여 놓았으니 이렇게 환대를 해주리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시간은 어느 새 일본 선수들이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급하게 밖으로 나가니 우리어린이들은 벌써 교문입구 양쪽으로 갈라서서 일본 선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육진흥 회원을 비롯한 어머니회회원들도 여러분이 분주하게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9시에 일본선수를 태운 버스 한 대가 교문 안으로 들어서자 어린이들이 환영의 박수를 치는 사이 버스가 서고 선수와 학부형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야마지유(山路有) 단장이 내리고 이어서 안내자인 한주여행사 도꾜 김승진(金承辰 )소장 .요나고( 米子市)시 여행사대표 노구찌다까시( 野口降資)씨의 뒤를 이어 축구선수와 학부형들이 차례차례 내렸다.
이때 호반의 축구 선수들은 일본선수들의 손을 잡고 운동장 환영식장으로 향하였고 교류협회단장과 학부형들은 교무실로 안내되어 교사 및 어머니회원 체육진흥회원 간에 상호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신 후에 모두는 운동장 앞 사열대에 마련한 좌석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 시간 후에 바로 본교가 개교 이래 처음으로 호반초등학교 축구 선수와 일본 돗도리현 사 이하쿠군(西伯郡) 대표 선수 간에 제1회 한일 친선 청소년축구교류대회를 개최하는 역사적인 의미의 날이다.
그동안 본교에서는 본 대회의 준비를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였으며 특히 운동장에 모인 재학생들은 일본과의 축구경기에 대한 기대를 엄청나게 하고 있었으니 일본학생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한껏 가졌기 때문이다.
저학년 학생들은 벌써부터 축구를 열심히 하여 선수가 된 후에는 장차 일본으로 원정갈 꿈에 부풀어 있는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하였다.
마침내 본교 남녀 학생들의 리듬밴드부가 한일친선 축구 경기 개막을 알리는 아리랑을 연주하였고 본교 교무부장인 서 명복 선생님의 개회선언과 함께 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기를 향하여 부동자세를 취한 다음에 양국국가가 차례로 울려 퍼지기 시작을 하였다
환영식은 개식선언. 국민의례. 인사소개. 선수소개. 환영사. 답사. 기념품 증정. 폐회선언으로 끝이 나고. 다음 식전행사로는 민속체조. 리듬밴드 시범. 테권도 시범. 일본측 무용 합창
민요 무용등을 발표하였다.
‣ 친선축구 경기(親善蹴球 競技)
전반 10:40 … 11:05 ( 25분)
후반 11;15 … 11:40 (25분)
4. 12 : 30 … 중 식
13 : 30 소양호 (댐)및 수력발전소 견학
14 : 30 청평사 관람
16 : 00 학교 집합 선수민박 이동
국민의례가 있은 후에 학교장의 환영사에 이어 일본의 야마지유( 山路有) 단장의 인사 말씀이 있었다. 이날의 통역은 한주여행사에서 모셔온 김혜영 통역관이 하였는데 이를 듣는 어린이들은 그 장면을 처음 대해서 그런지 모두가 긴장 속에 경청을 하였다.
환영식이 끝난 후에는 일단 교무실로 입실을 해서 30 분가량 학교의 현황을 보고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참석한 분들의 소개를 하였다.
학교 어머니회에서는 식혜를 준비해서 대접을 하니 일본의 손님들은 그 제조과정을 소개해 달라고까지 하여 서로간의 우의를 돈독히 다지기도 하였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식전행사 관람을 위해서 사열대로 자리를 옮겼다.
맨 먼저 본교 4 .5 학년의 민속체조. 리듬밴드연주. 태권도시범. 사물놀이가 있었고 이어서 일본 선수들의 무용과 합창이 울려 퍼지자 모두는 박수로 격려를 해주었다.
식전행사가 끝나자 바로 축구시합이 시작되었다.
전반전의 휘슬이 울리자 양 팀은 경기를 시작하였는데 전반전에 밀리던 호반 축구부는 전반전을 1대 0으로 승리를 하였다.
일본 선수들은 공을 잘 다루고 달리기를 잘 하여 공을 제대로 몰고 갔으나 슈팅력이 부족하여 전반전을 지고 말았다.
후반전이 시작이 되자 두 팀은 다시 격돌을 하였는데 선생님들은 멀리서 온 손님을 대접하는 의미에서 한국 선수들이 경기에서 양보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경기에는 양보가 없는지 결국 호반선수들이 일본팀을 3대 0으로 격파하였다.
그 순간 일본 학부형들이 얼굴 표정을 보니 역시나 그분들도 경기에서만은 승리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으나 패하자 박수로 선수들을 격려하였다.
땀에 흠뻑 젖은 선수들은 우선 세면장에서 몸을 씻게 하고는 각 학년별로 나뉘어서 어린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도록 하였다.
6학년에 3.4.명씩 배정을 하여 급식을 하게 하자 아이들은 저마다 일본 선수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자 서로가 경쟁을 하였다.
어린이들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금방 친해져 밥을 먹은 다음에는 선물을 교환하였다.
호반의 저학년 어린이들은 일본 선수들이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그들을 환대하려 하였으니 마음 같아서는 일 개월 정도의 기간을 합숙을 시킨다면 일본 어린이들이 우리말을 떠듬거리면서라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점심 후에는 포스터 전시가 되어 있는 1층부터 4층까지의 복도에 붙여진 작품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어린이들은 일본의 선수들이 우리 학교에서 축구 경기를 한다고 하자 각 가정에서는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한 역사교육을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민박지정을 받은 가정에서는 오는 선수들의 인적사항을 파악을 하고 어떤 집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음식을 장만하고 한과며 약과 등 한국의 명절 때 많이 먹는 전통음식 준비를 한다고 하였다.
단장 일행과 선수들의 학부모들이 복도에 전시된 포스터를 보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자기의 이름이 새겨진 포스터 앞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체면 불구하고 일본인 특유의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탄성을 지른 이유는 포스터가 한 장이 아니고 한사람에 대한 장면이 수십 장에 이르는가 하면 포스터마다 특징을 살려 그렸는데 같은 것은 한 장도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단장과 여행사 대표도 놀라움을 표시하였지만 어머니들은 자기의 포스터작품 앞에 서서 서로 웃고 포스터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대화를 끝없이 나누더니 학교장을 향해서는 감사하다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이런 장면을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지 모두는 장면마다 사진을 찍고 좋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직원들이 오늘의 행사에 앞서 복도에 포스터 전시를 한다고 하였을 때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막상 작품을 전시하고 난 뒤에 의견은 모두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였다.
사실 이번에 방문하는 분들 대부분이 한국을 처음 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한국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고 난 뒤에는 이러한 교류가 미래의 세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교류활동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포스터전시장을 돌고 난 후에 일행들의 얼굴에는 환희의 찬 만족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고 난 후에 일정에 따라서 본교 선수와 일본선수들을 버스 2대에 나누어 태우고 맨 먼저 소양 댐으로 향하였다.
춘천시 신북읍과 동면의 소양강에 위치한 소양강댐은 북한강 유역에 위치한 유일한 다목적댐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67년 4월 15일 착공되어 1973년10월 15일 완공 되었다. 이 댐의 특징은 흙과 돌로 만들어진 사력댐으로 댐의 길이는 530m이고 높이는 123m로 저수량은 29억 톤이라고 한다.
일본 선수들은 모두가 댐의 웅장함에 감탄을 하면서 유람선을 타 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러지 않아도 청평사를 가려면 유람선을 타야 한다고 하자 모두가 와하며 탄성을 질렀다.
유람선을 타기 전에 우선 댐 아래층에 위치한 터빈이 돌아가는 곳까지 가서 구경을 한 후에유람선을 타고 청평사로 향하였다. 소양강댐에서 청평사까지는 10여분이 소요되는데 맑은 호수 위를 떠서가는 유람선을 탄 선수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는 듯하였다.
청평사까지 가는 데는 댐의 물이 장마가 지게 되면 만수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물이 줄기 때문에 선착장까지를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내려야 한다.
배를 내려 30여분을 걸어서 청평사에 도착한 선수들은 대웅전이 .6. 25 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서 모두 불에 타서 지금 복원중이라고 하자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였다.
청평사를 보고 나서 바로 배를 타고 다시 소양 댐에서 버스에 옮겨 탔을 때에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을 하여 민박을 시킬 학부모들을 만나서 선수들은 그 집으로 보내고 나서 일본의 단장과 학부모들은 저녁 대접을 하기 위하여 바로 삼천리에 있는 조선 갈비집에서 불고기를 대접하였다.
만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일본 손님들은 “울며 헤어진 부산항. 천안삼거리”를 잘 불렀다.
저녁 후에 손님들은 숙소인 세종호텔로 향하고 교직원들은 민박 댁을 찾았는데 아이들 끼리 놀이를 하거나 어떤 댁에서는 영화를 보러갔다고 하였다.
다음 날의 일정은 삼악산의 등선폭포를 관람하기로 하고 10시에 학교를 출발하였다.
등선폭포는 춘천시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삼악산( 654m) 남쪽에 있으며 폭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관광객을 맞는 상점들이 즐비해 다소 복잡한 협곡이다.
입구에서 100여m를 올라가게 되면 바로 웅장한 폭포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폭포는 계곡 입구 협곡인 금강굴을 시작으로 신선이 노닌다는 등선 제1폭포와 제2폭포. 학을 타고 나는 듯한 승학폭포. 흰 비단 천을 펼친 것 같은 백련폭포. 선녀가 목욕을 하던 연못의 옥녀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선녀탕. 용소로 불리는 비룡폭포. 옥구슬 은반 같은 주렴 폭포. 등으로 구분되었다.
한 여름에도 폭포가 쏟아지는 밑엘 가게 되면 추울 정도라고 하였는데 선수들 역시 폭포 물이 쏟아지는 근처로 가더니 모두가 춥다면서 덜 덜 떨었다.
일본의 학부모들은 독특한 폭포의 생김새와 자연이 빚은 신비의 협곡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감추지 않았으며 사진기를 계속해서 눌러댔다.
그다음 등선폭포에서 20분이면 닿는 흥국사까지 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바로 학교로 향하였는데 점심으로는 영계백숙과 오색 떡을 해서 나누어 주자 모두가 좋아하였다.
이제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면 선수와 학부모들은 서울에서 1박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민박을 한 어린이들은 서로가 선물교환을 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한다.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선수와 학부모들이 버스에 오르자 일본의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환대에 감사하다면서 수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었다.
야마지 유( 山路有 )단장은 이번의 대회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축구교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행사가 유지되기를 희망한다고 하면서 11월에 일본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마침내 11월 8일 아침 일찍 호반의 선수와 학부형 및 임원 45명이 일본으로 가기 위하여 인천공항에 도착을 하니 출국장은 혼잡스러웠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오사카(大板)공항까지 가는 비행기로 요나고( 米子) 공항은 그때까지 정기노선은 개항하지 않고 있었다.
선수와 학부모의 수속을 모두 끝내고 나서 비행기에 오르자 그제야 국제교류의 근간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가 마침내 오사카 하늘에 근접했다는 기내 방송을 하자 일부 승객 들은 재빨리 일어서서 짐을 챙기려 하자 승무원이 제지를 하였다.
오사카 비행장에 내린 시간은 2시가 좀 지나서였는데 우리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을 나서자 야마지유(山路有) 단장을 비롯한 여러분이 나와서 “歡迎” 春川 湖畔初等學校 蹴球選手團“ 이라는 긴 장대에 현수막을 크게 펼쳐들고 우리 일행을 마중하기 위하여 그 먼 길을 와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단장은 점심이 늦었다면서 우선 오사카 식당으로 안내를 하여 백반이 도시락으로 나왔는데 아이들이 생각을 해도 반찬이 너무 적게 나온다 싶을 정도로 그 양이 성에 차지를 않았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우리나라도 음식의 세계화. 가지 수의 소형화를 추구하는 한식의 개량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중식을 한 후에 단장님은 기왕에 오사카를 경유하니 해양박물관을 관람하자고 하였다.
박물관의 규모는 굉장히 넓고 수족관에는 엄청나게 큰 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는데 머리맡에서 집채만 한 상어가 갑자기 나타나자 모두는 입을 벌리며 놀랐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서 고속도로를 통해 요나고시(米子市)로 향하였으며 도착한 곳은 규모도 엄청난 로이얄 (Royal )국제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는 앞서 한국을 방문했던 어머니들을 위시해서 많은 부인들이 환영을 주었으며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니 객석 중앙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을 수가 있었다.
전면 무대의 막은 일본의 유명한 후지 산(富士山)의 위용을 오색찬란한 색깔로 장식을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려한 무대임을 알 수 있었다.
환영식이 시작되면서 무대에는 식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본 남녀 학생들이 도열해 있다가 “하루노 오가와”라는 일본의 동요를 부른 다음에 우리나라의 민요 아리랑을 합창하는데 그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아리랑이 연주된 다음에는 북을 울리는 시범을 보였는데 일본의 또 다른 전통의 예술로 북을 치는 연주자들의 복장도 특이하지만 북을 치는 방법 중에 하늘로 팔을 쭉 뻗었다가 내리치는 힘에 의한 북소리는 더욱 웅장하게 들렸다.
일본의 서막이 끝난 뒤에는 우리 선수들도 한국의 동요 뜸북새와 일본의 동요 “ 유야께고야께”를 부르자 장내가 모두 함께 따라서 불렀다.
다음에는 우리의 어머니로 구성된 열다섯 명의 무용단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자 장내의 모든 관중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보아도 한복과 부채춤은 세계인들이 다 좋아하고 열광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식전행사가 막을 내리자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국민의례의 순서로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다음에 일본의 국가가 연주되었다.
그 다음에 야마지유 단장의 인사말이 있고 다음에는 요나고 시장. 돗도리현 의회 의장과 교육장 순의 환영사가 있은 다음에 한국의 김 두수 교류협회장의 답사가 있었다.
답사가 있은 후에 돗도리현 미술가협회회원이며 요나고시 미술가협회 회원인 中野勝喜 씨가 자신이 그린 화화 한 점을 액자에 넣은 채 선물로 전달하였고 한국에서는 신영복의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를 선물하였다.
의식이 끝나자 만찬이 시작되는 시간에 단장은 그날 입장하신 참석자들을 일일이 다 소개를 하였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소개하였다.
명함을 교환하다 보니 이날 행사장에는 시장과 돗도리현 의회 의원 관내 학교 교장과 PTA 관계자. 일간신문기자에다가 학생도 백 명 이상이 참석을 한 것 같았다.
이날 누구보다도 반가운 분들은 사이하쿠 군에 근무하며 이번에 연합팀에 선수를 참가케 한 관내 학교장들이었다.
만찬시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좋은 음식을 구경만 했을 뿐이지만 그날의 분위기에 한껏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저녁 늦게 만찬이 끝난 후에는 선수들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민박집으로 갔으며 어머니 회원과 임원들은 각기 호텔로 이동을 하였다.
다음날은 모두가 일찍 일어나서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니 야마지유( 山路有)단장과 임원들이 벌써 뷔페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아침에 먹을 메뉴를 살펴보니 양식의 여러 가지 중에서 특단의 메뉴는 한국의 청국장과 마찬가지인 낫도가 인기가 있었다.
조반을 먹은 다음에 우리는 10시부터 시작이 되는 축구경기장인 요도에(錠江)소학교 교정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선명하게 하늘에서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가슴이 뭉클하였다. 감히 일본 하늘에 태극기라니 이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말이지만 일본으로 인해 태극기가 받은 서러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일본과 한국은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얼마든지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과거에 너무 연연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래를 열어 가는데 있어서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침내 의식이 시작이 되면서 먼저 애국가와 일본의 국가가 차례로 연주된 후에 야마지유( 山路有) 단장의 환영사와 한국의 김 단장의 인사말씀을 끝으로 중학교 부라스 밴드의 연주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우리가 알던 이상으로 연주를 하는데 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연주가 끝난 뒤에 일정은 맨 처음에 축구경기를 한 후에 선수들의 리레 경주를 하고 난 후에 중식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학교관람을 마치고 대산(大山)을 관람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기로 하였다.
경기를 하기에 앞서 경기장의 동편은 일본선수를 그리고 서편은 한국 팀을 응원하기로 한다고 하자 양쪽 팀의 응원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울렸다.
드디어 경기 시작을 알리자 선수들이 양 갈래로 서서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에는 가위 바위 보로 선점을 하기로 하였는데 먼저 한국 팀이 공을 갖게 되었다.
앞서 한국에서 경기를 할 때에는 한국이 3대0으로 일본을 앞섰는데 이번 경기는 일본 선수들이 홈경기라는 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전반전에 일본이 한국을 1 대 0으로 승리를 거두자 응원석에서는 운동모자를 하늘로 던지면서 좋아하자 서편의 한국 팀의 응원석은 역시 잠잠한 채 실망을 하는 것 같았다.
다시 후반전이 시작이 되자마자 어찐 된 일인지 한국 팀이 먼저 한 개를 상대 골에 넣자 금방 골인이 되었고 이번에는 서편의 응원단이 소리를 지르면서 코리아 파이팅을 하자 동편의 응원단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1 대 1 동점이 된 상태의 경기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을 정도로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후반종료 3분을 남겨놓고 동편이 골 한 개를 한국 골에 넣자 동편의 응원단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면서까지 만세를 불러 코치들의 주의를 받기도 하였다.
한국 팀이 반전의 기회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끝내는 골을 넣지 못하고 경기는 2대1로 일본팀이 승리를 하였다.
앞서 한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하고 이번에는 일본팀이 이겼으니 그 해의 전적은 동점으로 무승부가 된 셈이다.
축구 경기가 끝난 뒤에는 두 나라 선수들의 리레 경기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일본선수들이 단연 우승을 하였다.
그런데 이를 본 한국의 어머니들이 일본어머니들과 한판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를 하자 일본 측에서도 좋다고 하여 15명이 경기에 참여하였는데 한국의 어머니들이 패하고 말았으니 일본어머니들을 만만히 본 한국 측이 무색하게 되었다.
오전경기가 모두 끝이 나자 양쪽 팀들은 점심으로 준비한 도시락을 교실에서 나누어 먹었다
이번에 한국 측에서는 관내 학교에 전달할 미술작품을 한 학급에서 10점씩 360점을 가지고 왔는데 우선 이 학교를 대표학교로 정하고 미술품을 후꾸하라노리와끼( 福原側昭) 교장선생님께 전달하였다.
이 학교에는 벌써 한국의 “한국 호반초등학교 학생 작품란”이라는 판을 2층 두 곳에다가 설치하여서 저 중 고 작품 각 10점씩을 계시를 하였다.
(한국에도 일본학생작품 게시판을 만들어 놓고 작품을 게시하였다).
교실을 돌아보고 나서의 소감은 한국의 학교 현황과 크게 다른 것은 없고 아직도 복도는 나무로 만들어 쓰고 있으며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지난해에 장애아가 한명 입학을 하였는데 그를 위한 특별 예산이 책정이 되어서 2층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학교 관람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후지산과 비슷한 다이산( 大山) 밑으로 가서 내렸는데 그 주위에는 코스모스를 눈이 모자라게 심어서 장관이었다. 이 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 지방 사람들은 지금도 이 산을 “고려산”이라고 부르는데 옛날에 고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기에, 그렇다고 하였다.
시간관계로 그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서 우리는 다시 오던 길로 돌아서 호텔에 도착을 하니 거기에는 민박을 시킬 선수와 어머니들이 모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들을 보내고 나자 야마지유단장은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집으로 모신다면서 한국에 가서 너무도 맛있는 불고기로 저녁을 먹은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도 그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성의껏 대접을 하겠다고 하였다.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기 전에 일본고유의 악기 연주를 들려드리겠다고 하였다.
이날 요도에 모리모도나구후(森本和夫 錠江 町長)씨는 이곳을 방문한 김 단장에게 지방고유의 선물을 주셨으며 한국에서도 도자기 한 점을 선물로 드렸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한적한 일본특유의 미닫이가 많은 다다미방으로 거기에는 일본의 고유복장을 한 부인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다미방 전면에는 “祝”‘ 第1回日韓少年蹴球國際交流大會歡迎會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바로 그 여자들은 북을 치면서 일본의 창을 무용을 곁들여서 하는데 흥은 나지 않았지만 일본사람들의 정서가 함축된 창이었다.
한 30여분의 연주를 끝으로 이분들은 박수를 받으면서 퇴장을 하였고 그 다음에 한국의 불고기 판이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이 댁의 주인은 재일교포라고 하였다.
이날 우리는 늦도록 담소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중에 주인이 들어와서 인사를 하는데 우리말을 떠듬거리며 하여서 김 단장은 재일 교포면 우리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자 자기도 그런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고 하여 몇 번이나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들 삼형제를 잘 키우라고 하자 명심하겠다고 하였다.
그 식당에서 늦도록 있다가 호텔로 돌아가려하자 야마지유 단장은 내일이면 작별인데 내년에 다시 일정을 정해서 교류를 하자면서 손을 꼭 잡았다.
다음 날 조반을 먹고 난 다음에 우리는 10시경 다시 요도에( 錠江小學校)로 가니 거기에는 이미 민박을 마친 우리 선수들과 일본의 ,선수 학부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불어 이번에 수고를 해주신 축구부 임원과 지역사회 유지 그리고 신문사 여러분들이 우리를 끝까지 환송을 하기 위해서 나와 있었다.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르니 일본의 학부모 어머니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날 야마지 유 단장을 비롯한 임원 몇 분은 오사카공항까지 우리를 안내하고는 작별을 하였으니 제 1회 한일 청소년축구교류대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으며 이후 제 3회까지 같은 형태로 대회를 교환방문하며 마치고 김 교장은 퇴임을 하였다.
김 교장이 퇴임 후에 매년 대회가 지속이 될 줄 알았지만 대회는 5회를 끝으로 교류대회는 중단이 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영원히 축구교류대회를 뛰어넘어 문화교류까지 존속하자고 하였으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하여 모든 교류는 중단이 되고 말았으니 신의를 저버린 이쪽의 처사에 대하여 일본 측에게 한없이 미안할 따름이다.
당초의 계획은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로의 꿈을 키워주고 특히 일본의 굴절된 역사를 바로 알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한때의 열화와 같은 저력은 5년을 끝으로물 거품이 되어 흘러가는 강물처럼 멀리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끝
金 斗 洙 21.4.7.( 19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