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모멸(侮蔑)을 넘어서
①
어김없이 밤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오늘밤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사사도의 관리들과 수인들은 횃불을 든 채 분주히 해안가를 수색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조탁은 더욱 길길이 날뛰었고, 수인들과 관리들은 지칠 대로 지쳐만 갔다. 그러나 조탁의 흉폭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삼삼오오 패를 지어 먼 해안까지 샅샅이 뒤졌다.
백육호와 백사호, 육노인은 기암괴석이 난립해 있는 해안을 뒤지고 있었다.
백사호가 약간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그녀의 옷자락 하나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탈출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육노인은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갈대배를 생각해 내다니... 놀라운 소녀야. 지혜와 용기를 한 몸에 지니고 있어. 아마 그런 소녀는 이 하늘 아래 다시는 없을 거야."
육노인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괴소를 흘렸다.
"클클! 사사영이 이곳에 나타날 때부터 네놈은 그 아이에게 빠져 있었지. 하기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겠지. 네놈이 용골이라면 그 계집아이는 봉황이니 그보다 어울리는 사이가 또 있겠느냐?"
"......."
백육호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너무 낙담 마라. 네놈도 머지않아 광명천지로 나가게 될테니 인연이 닿는다면 그 아이와 필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육노인은 위로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백육호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더욱 더 뼈저린 외로움을 씹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뒤쪽으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사사영을 찾았다아......!"
'오오, 맙소사!'
백육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백사호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했다.
"쯧쯧! 하늘의 시샘이로다! 아깝구나, 아까워......."
육노인도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무거운 탄식을 토해내며 육노인은 소리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얗게 얼굴이 탈색되어버린 백사호가 백육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빛과 후끈한 불꽃의 열기.......
사사영은 치를 떨었다. 그녀는 생을 포기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와류에 몸을 맡겨 버렸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녀를 둘러싸고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과 횃불이 일렁이는 듯한 빛과 열기는......?
그녀는 살아난 것이다. 아니, 지옥과도 같은 사사도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달아나고자 몸부림쳤던 곳으로 되돌아오다니!
"비켜라, 비켜!"
귀에 익은 거친 음성이 들렸다.
조탁이 횃불을 들고 수인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사영을 퉁방울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
그는 잡아먹을 듯이 사사영을 내려보다가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면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었으나 막상 사사영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야릇해지고 말았다.
사사영은 죽지 않았다. 가냘픈 어깨가 숨을 쉼에 따라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수인복은 갈갈이 찢겨져 눈부신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온몸에 찰싹 들러붙은 천이 그녀의 섬세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이 계집은 어떻게 봐도 날 울렁거리게 한단 말야!'
그는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이 계집을 내 처소로 옮겨라!"
조탁의 몸은 사라졌다. 그러자 수인들을 헤치며 헌칠한 인영이 다가섰다.
백육호였다. 그는 사사영을 안아들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때, 우연의 일치였는지 죽은 듯 미동도 않던 사사영이 반짝 눈을 떴다.
'......!'
두 남녀의 눈길이 마주쳤다. 영혼의 울림이었을까? 두 사람의 눈동자에 똑같이 파랑이 일어났다.
백육호는 사사영을 등에 업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사영의 몸이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넘치는 지혜와 결연한 의지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역시 가냘픈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시무시한 와류에 시달린 나머지 체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업고 걸어갔다.
한편, 사사영은 의식이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온 것을 알았으나 어이없게도 포근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 사람의 등은 참으로 푸근하구나. 넓고 따스해. 마치 어릴 적에 아버님의 등에 업힌 것처럼.......'
사사영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백육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사나이의 굵은 목을 안은 순간 가슴이 뻐근하도록 안정감을 느꼈다.
백육호는 더욱 더 가슴이 뭉클해졌다. 목줄기에 그녀가 흘린 뜨거운 눈물방울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고 싶었다.
'신이여! 방법이 없단 말이오? 있다면 가르쳐 주시오! 어떻게 하면 이 소녀를 구할 수 있는지를 말이오!'
그는 너무도 무기력한 자신을 증오하고 싶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더욱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번번이 당신에게는 폐만 끼치는군요."
갑자기 놀랍도록 차분한 사사영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백육호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걸음을 최대한으로 늦춤으로써 그녀가 맞이해야 할 고통을 미루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사영.... 아직은... 포기하지 마시오."
사사영의 몸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얼마 후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전 너무 지쳤어요. 아무런 미련도 없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좋군요. 당신에게 업혀있는 것이......."
사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백육호의 넓은 등에 뺨을 갖다 붙였다. 뒤이어 수줍은 소녀의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의 등은... 참 좋아요......."
그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반면 백육호의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있었던 것이다.
②
"사사영은 본좌가 직접 취조하여 내일 아침 결과를 공표하겠다!"
조탁의 말이었다.
관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수군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망한 표정들이었다.
"젠장, 언제부터 직접 죄인을 취조하셨나?"
관사에서 멀어져가며 이렇게 투덜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쳇! 어쨌든 부럽다, 부러워."
사사도에서의 근무 만료를 불과 이 개월 앞둔 요즈음의 관리들의 기강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해이해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새벽부터 굶어가며 사사영을 수색했던 그들은 그 보상으로 가학적인 쾌감을 기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공개 심문이나 처형을 통하여 여흥을 맛보려니 했던 기대가 무너져 크게 실망한 것이었다.
"젠장, 마지막까지 혼자서만 단물을 드시겠다 이거 아닌가?"
"쯧쯧! 오늘로써 그 도도하던 사사영도 끝장이구먼."
"휴유!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아까운 소녀야."
"어쩌겠나? 명백히 국법을 어겼으니."
관리들의 수군거림은 조탁의 귓전에도 들렸다. 그의 안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록 대놓고 떠들어대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절대권위가 점차 무너지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퉁방울 같은 눈으로 관리들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몇 놈을 요절내버리고 싶었다.
그는 꾹 참고 관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군들의 노고가 극심했음을 잘 알고 있다. 해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곧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모두들 허기진 배를 마음껏 채우고 마시도록 하거라. 한 방울의 술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치워도 좋다."
실로 예상치 못했던 조탁의 말이었다.
"와아!"
관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개중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만세를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와르르 떼를 지어 창고를 향해 몰려갔다.
수인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새벽잠을 빼앗겼으므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다행일 뿐이었다.
관사 앞에는 봉두수와 육노인, 백사호, 아직도 사사영을 업고있는 백육호 등이 있었다.
조탁은 음침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봉두수! 넌 저 계집을 내 방으로 옮긴 후 열쇠를 가져가 창고문을 열어주도록 해라."
그는 몸을 홱 돌려 관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봉두수는 백육호에게 다가갔다.
"이리 내려놔라."
그러자 사사영이 발딱 고개를 들더니 차갑게 말했다.
"내 발로 걸어갈테니 비켜요."
그녀는 백육호의 등에서 내려왔다. 내리기 전 그녀는 섬섬옥수로 은밀히 백육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므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백육호만이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이었다.
탕!
사사영이 관사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백육호의 가슴 속에서 울렸다. 그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만 가자."
육노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이대로 갈 순 없소."
백육호는 육노인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육노인의 안면이 찌푸러졌다. 그는 백사호에게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끌고 가자. 이러다 일 나겠다."
백사호는 마지못한 듯 백육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백육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나무기둥처럼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부릅뜬 눈은 관사를 노려보고 있었고, 눈동자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거 안되겠군!"
탁!
육노인이 그의 목덜미를 주먹으로 쳤다.
"우― 욱!"
백육호가 선혈을 한 덩이나 토해내며 쓰러졌다.
"이러다 심마(心魔)에 빠지겠다. 백사, 어서 이놈을 옥사로 옮겨라."
육노인의 다급한 음성에 백사호는 황급히 백육호를 둘러멨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육노인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녀석,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 지경이 되다니. 겉으로는 낙천적인 것 같더니 속마음은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놈이란 말이야. 그래봐야 너만 손해일 텐데.'
옥사 앞에는 두 명의 옥졸이 막 달려오는 백사호를 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뭐하느라고 늦었느냐?"
백사호는 대답없이 백육호를 업고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백육호 저놈은 또 왜 그 모양이냐? 동포두에게 혼줄이라도 났나?"
옥졸은 워낙 자주 봤던 모습인지라 가볍게 한마디 던지고는 뒤따라오는 육노인을 발견하고 물었다.
"육백오십구호, 오늘도 저 탕약을 밤새 달일 참인가?"
옥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후미진 곳에는 장작불 위에서 약탕기 십여 개가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이오. 곽대인의 엄명이라 하루도 쉴 수가 없소이다. 이곳은 늙은이에게 맡기고 가서 술이나 드시오."
"그래 볼까?"
옥졸이 동료를 돌아보며 운을 띄우자,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만 빠질 수는 없지 않는가? 어서 가세!"
두 옥졸은 부리나케 창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실 감시라는 건 사사도에서 별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자 육노인은 옥사 안으로 들어섰다. 백육호는 자리에 누운 채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백사호, 침상 아래 약재통을 뒤져보면 연뿌리와 질경이뿌리가 있을 거야. 즙을 내서 이놈에게 먹여라. 노부는 약탕기를 살펴보고 오마."
육노인은 그렇게 지시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등뒤로 들리는 백육호의 괴로운 신음소리는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있었다.
③
"긴 말은 않겠다. 너도 국법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단, 이곳은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다. 특히 탈출을 시도하는 수인들에게는 특별한 조치를 내릴 수가 있게 되어있지."
조탁은 사사영의 젖은 몸을 핥듯이 훑어보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낮처럼 밝혀놓은 유등의 불빛은 흠뻑 젖은 수인복을 입은 사사영의 몸매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매우 관능적으로 보였다.
지금까지는 고귀한 분위기로 인해 육감적인 면모가 많이 가려져 있었으나 바닷물에 젖은 데다 옷까지 여기저기 찢겨져 있어 색다른 육감을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꿀꺽!
조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사영의 모습은 통째로 삼켜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사사도의 율법을 어긴 몸이라 이제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상태가 아닌가?
그는 비대한 몸집을 의자에 걸치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자살을 하려 했건 탈출하려 했건 네 목숨은 이곳의 도주인 본 어르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율법을 어긴 이상 네 신상은 내게 맡겨졌다. 동창의 무사 아니라 누구라도 내가 시행할 적법한 집행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느냐?"
조탁은 두터운 이중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집행방법도 본 어르신에게 일임되어 있지. 참수형에서부터 화형(火刑), 태형(笞刑)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의 처형 방식이 있느니라. 물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방법도 있지."
"......."
사사영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조탁은 조금 불쾌해졌다.
그녀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애원하기를 원했던 것이나 예상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그는 탁자 위의 술병을 들어 거칠게 들이킨 후 물었다.
"살고 싶지 않단 말이냐?"
"......."
사사영은 여전히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듯 무표정이다.
"오냐! 네년의 태도를 보아하니 죽어도 좋단 뜻이렷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조탁은 버럭 외쳤다. 바야흐로 그의 흉성이 발작할 모양이었다.
"좀 쉬시오, 육노야."
백사호였다. 그는 옥사 밖에서 약탕기를 달이고 있는 육노인을 향해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육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네놈에게 맡기고 들어가마. 너도 잠시 후 들어와 눈 좀 붙이도록 해라."
육노인은 노구를 일으켜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상에서 두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고 있는 백육호를 보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의 고독한 모습에서 지난 십 년간의 참혹했던 세월의 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육노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백육, 앞으로 열흘이다. 십 년을 기다려온 우리의 한을 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일을 벌이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육노인의 음성은 간절했다.
"너무 걱정마라. 사사영은 결코 죽지 않는다."
백육호는 힐끗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사자(死者)의 눈을 보는 듯했다.
육노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노부의 말을 믿어라. 조탁은 결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시련은 있을지언정 목숨의 위협은 없을 것이다. 제발 믿어라. 그녀의 관상을 볼 때 단명(短命)할 상은 아니다. 더구나 그처럼 굳은 의지와 지혜를 겸비한 아이는 하늘이 보살펴 준다. 그러니 너는......."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잘 들어라. 세월은 많다. 너희 둘은 천하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쌍이 될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그 아이를 마음에 둔다면 오늘의 이 일을 뇌리에 박아 두어야 한다. 진정으로 네놈이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열흘을 굳은 각오로 버티어 내는 것이다. 그런 연후 이곳을 평정하고 그 아이를 구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며 그동안 희생된 일천 원혼을 위로하는 일이다. 알겠느냐?"
육노인은 백육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 후 일어섰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당부했다.
"약발이 잘 받을려면 충분히 자 두어야 한다. 내 말 명심해라."
그가 사라진 후, 백육호는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소리 죽여 부르짖고 있었다.
"사사영 소저... 날 용서해 주시오."
같은 시각.
연거푸 마신 술기운에 욕정마저 오른 조탁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크흐흐! 널 처형하기 전에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라. 백삼호! 이리 들어오너라!"
조탁은 느닷없이 고함을 쳤다.
잠시 후 한 미부가 주춤거리며 들어섰다. 그녀는 백삼호였다. 방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녀는 안색이 변했다.
찢어진 수인복을 걸친 채 바닥에 앉아 있는 사사영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깨달은 듯 불안과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조탁은 그녀를 노려보며 호통을 질렀다.
"네년은 사사영이 야반도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어르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저 계집의 탈출을 묵인한 것이다!"
백삼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탈주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것은 죽음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다. 설마 네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
백삼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주님, 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도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어젯밤 도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닥쳐라, 이년! 어디서 변명을 하는 거냐?"
사사영은 입술을 악물었다. 조탁은 억지를 쓰고 있었다. 그녀도 어젯밤 백삼호가 조탁의 침실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억지로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이었다.
"도주님, 제발...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백삼호는 오열을 터뜨렸다.
"못난 것, 죽음이 그토록 두렵다면 애초에 죄를 범하지 말았어야지."
조탁은 눈을 내리깔며 온통 경멸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삼호가 본래는 고귀한 신분이며 현숙한 부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성의 노리개가 된 것은 죽음 따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아들인 백사호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탁은 늘 그녀를 멸시하고 천대해 왔다. 아니, 도리어 그 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백삼호는 무릎 걸음으로 조탁을 향해 기어가 매달렸다.
"도주님, 그간의 정리를 봐서라도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어떤 명이라도 즐거이 받겠나이다."
사사영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는 백삼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그것은 조탁의 변태적인 취향을 얼마든지 맞춰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삼호는 조탁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도주님, 제발... 저에게 아무 명이나 내리세요. 제발......."
백삼호는 방안에 사사영이 있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조탁은 술잔을 기울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의 알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제발 그만 두세요, 부인!"
사사영은 마침내 더 두고볼 수가 없어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며 고개를 홱 돌려 조탁을 노려보았다.
"조도주,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뭔가요?"
"뭐라고? 조도주? 쿠하하하......!"
조탁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오냐, 마음껏 지껄여라. 네 오만함이 얼마나 오래갈지 두고 보겠다."
사사영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을 돌려 보내세요. 당신이 원하는게 내 몸이라면 기꺼이 던져 주겠어요."
조탁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이제야 대화가 좀 되는구나. 백삼호, 넌 가도 좋다."
"잠깐, 부인 앞에서 약조 하세요. 다시는 이번 일로 문책하지 않겠다고요."
사사영의 말은 또렷하기만 했다. 조탁은 느물거리며 말했다.
"좋아, 약조하지. 하지만 본 어르신도 너에게 받아야 할 약조가 있다."
"......."
"본 어르신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훗날 오늘 일로 동창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다. 물론 엄정한 법의 집행으로 너와 백삼호 계집을 처형해 버리면 동창도 시시비비를 따지고 들지는 못할 테지만 말야."
조탁은 슬며시 사사영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사사영은 만면에 경멸의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비열한 인간! 좋아요, 약속하지요. 오늘밤의 일은 동창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부인과의 약조를 지키지 않을 땐 그 약조는 지켜지지 않을 거예요."
"크하하하! 걱정 마라. 내가 왜 약조를 깨겠느냐?"
조탁은 광소를 터뜨린 후 백삼호를 향해 말했다.
"넌 마음 놓고 돌아가라. 내 보장하건데 앞으로 이번 일을 놓고 따질 일은 없을 것이다. 뭣 하느냐? 썩 꺼지지 않고!"
"......."
백삼호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다 말고 사사영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사영... 미안해요."
조탁은 밖으로 나가는 백삼호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흐흐, 하긴 죽이긴 아까운 계집이지. 근자 들어 허리에 군살이 붙긴 했지만 아직은 쓸만하거든. 사실 천지를 뒤져도 저런 절색은 흔치 않지."
멋대로 지저분한 소리를 지껄이는 조탁이었다. 사사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런 사사영의 모습을 바라보는 조탁의 눈에는 욕화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사영, 이제 네년이 약조를 지키는 일만 남았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후회도 없을 것이다. 자, 서둘러라 곧 날이 밝을 테니."
④
사사영의 질끈 감은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비록 조탁의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각오하면서 체념했지만 치욕의 순간이 도래하자 자신도 모르게 심금이 떨린 것이다.
"벗어라! 네 손으로."
조탁의 음탕한 음성이 떨어졌다.
사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 주는 거야.... 더러운 개에게... 적선이나 하는 셈치고.......'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옷고름을 끄르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녀의 작고 예쁜 발 옆으로 찢어진 윗옷이 떨어져 내렸다. 드러난 그녀의 동그란 어깨와 속살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청결함이 지나쳐 은은한 푸른빛마저 감도는 그녀의 피부에 조탁은 벌써부터 하복부가 불끈 치솟고 있었다.
사사영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은 가슴에 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소담스런 가슴을 가리고 있던 젖가리개가 떨어져 내리고 소녀의 수줍은 가슴이 드러났다.
"......!"
조탁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인간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가? 정녕 사사영의 육신은 뼈와 살로 이루진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입가에 흐르는 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사사영의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소담한 봉우리의 위에 앵도같이 작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사영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그녀는 조탁의 탐욕스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무심히 손을 늘어뜨렸다.
조금도 이지러짐 없이 팽팽한 육봉은 소녀다운 청순함과 이제 막 성숙한 여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난숙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조탁은 멍하니 젖가슴을 바라보다 사사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열일곱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귀하고 기품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이 소녀를 희롱하고 능욕해도 괜찮은 것인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게 웬 개 같은 경우지? 내가 주눅이 들다니.......'
조탁은 고개를 강하게 흔든 후 사사영의 젖가슴을 노려보았다. 탐스런 가슴의 기복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아무리 냉담초연한 사사영이라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탁의 갈등은 끝났다.
'흐흐! 그래, 네년이라고 별 수 있느냐?'
그는 조탁은 결심했다. 설사 단 하룻밤만이라도 이 십전십미(十全十美)의 소녀와 뼈가 녹는 듯한 유희를 즐길 수만 있다면 장차 어떤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벗어라! 나머지도."
조탁은 음침하게 외치며 사사영에게 다가갔다.
사사영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하의를 끌어내렸다. 생각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소녀의 하체가 손바닥만한 고의만을 남기고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물주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빚어 놓은 듯한 가지런이 뻗은 두 옥주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사사영은 더 이상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조탁의 털투성이 손이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쓰다듬었다.
"......!"
순간 뇌전을 맞은 듯 그녀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모질게 유지해 왔던 평정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황급히 가슴을 가렸다. 청순무구한 소녀의 몸으로,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을 버텨보리라던 결심은 더러운 손길이 닿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순진한 소녀의 각오였었다.
만일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면 사사영은 차라리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요하게 희롱해 올 능구렁이를 초연하게 견뎌내기에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여린 것이었다.
반면 조탁은 승전한 장수의 기분이 되어 한껏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는 느긋하게 사사영의 눈가에 번져나온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냐, 실컷 울어라. 그것이 네게 어울린다. 이제부터는 본 어르신이 잘 돌봐줄 테니 모든 걸 잊고 복종하도록 해라. 이 어르신은 그만큼 널 극진히 대해주마."
"흑흑......."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사사영이었다. 한 번 울음이 터져 나오자 걷잡을 수 없는 오열로 이어졌다.
조탁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마음이 되어 사사영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슬금슬금 손길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마지막 남은 고의끝을 잡았다. 그가 막 힘주어 그것을 풀려는 순간,
"이... 개만도 못한 놈!"
갑자기 방안이 쩌르릉 울렸다.
언제 나타났는가?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분광을 뿜으며 장발의 청년이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낡아빠진 수인복을 걸친 장발청년, 그는 바로 백육호였다.
조탁는 눈을 꿈벅거렸다. 그는 잠시 혼란해졌다.
'이거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이렇게 아름다운 계집이 발가벗고 있고 또 저놈이 내 방에 뛰어들다니......?'
그는 눈을 부릅떴다.
백육호가 사사영의 몸에 옷을 걸쳐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사영은 얼굴을 온통 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공자님,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수줍음에 찬 사사영의 음성이 들렸다.
"용서해 주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백육호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사사영은 암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어리석은 일이에요. 제가 무엇이길래 공자님께서 이런 모험을......."
이때였다. 갑자기 짐승의 발작과도 같은 포효가 울렸다.
"으으... 악! 이 가랑이를 찢어 죽일 놈!"
조탁이었다. 그는 눈썹을 거꾸로 세우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내 오늘 네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조탁이 아니라 견탁이다!"
비로소 상황판단을 끝낸 조탁이 우장(右掌)으로 번개같이 백육호의 등뒤 지당혈(志堂穴)을 후려쳤다.
펑!
폭음과 함께 백육호는 붕 떠서 날아가더니 조탁의 견고한 침상 위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침상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백육호, 내 네놈이 언제고 사고칠 줄은 알았다! 흐흐! 그런데 감히 본좌의 침실까지 뛰어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다! 오늘로 질긴 네놈의 목숨을 끊어주마!"
조탁의 비대한 몸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며 두 발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퍼― 억! 펑!
백육호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선혈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조탁이 구사하고 있는 무공은 소림사에서 유래한 연환십팔퇴(連環十八腿)란 각법이었다.
본래 조탁은 청년시절 잠시 소림사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림은 파천황교의 횡행으로 기강이 무너진 상태였으므로 그 같은 불한당이 쉽게 속가제자가 될 수 있었다.
심성이 흉폭한 조탁은 과거 소림사에서 배운 무공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다. 그의 악행이 극에 달하자 소림사에서는 집법승(執法僧)을 내보내 조탁을 추적했다.
이렇게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탁은 마침 공공연히 사병(私兵)을 모집하던 건친왕부에 소림파의 무공을 밑천으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일단 왕부의 무사로 발탁되자 소림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의 단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탁의 발길질은 일류고수라해도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연속된 그의 공격에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터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장마저 뒤틀려 의식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탁의 흉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백육호의 몸에 쉴새없이 발길질을 퍼부었다.
퍼― 엉! 퍽!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가슴을 감싼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사사영은 울부짖으며 달려와 조탁의 다리를 부여안았다.
"비켜라!"
조탁의 가벼운 발길질에 사사영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네놈을 찢어죽여 가루를 내버릴 테다!"
시체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백육호의 전신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다시 떨어졌다.
퍽! 퍼억!
"제발... 그만 하세요! 도주님. 소녀의 간청이옵니다."
일순 조탁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알몸을 앙증맞은 고의 한 장으로 가린 채 눈물로 호소하는 사사영을 음침한 눈으로 훑어 보았다.
"도주님, 이미 저분은 숨이 끊어진 듯하니 바다에 던져 버리면 되잖아요? 어서 소녀를 취하세요. 소녀 비록 남녀지간의 일은 잘 모르오나 성심껏 도주님을 모시겠어요."
사사영의 그 말에 조탁은 한순간에 울화가 말끔히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에 음소가 피어 올랐다.
"흐흐흐.... 그래, 두고 보자. 네가 이 어르신을 만족시켜 준다면 이놈은 날이 밝는 대로 바닷물에 수장시키도록 하지.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사사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심정에서였다. 더 이상 맞다가는 백육호가 완전히 죽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기적에 마음을 건 것이었다.
"흐흐, 왜? 마음이 바뀌었느냐? 그렇다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마. 그동안 나는 이 송장이나 좀더 타작해야겠다."
조탁의 묵중한 발이 다시 백육호를 짓밟았다.
"아악! 하겠어요, 뭐든지."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조탁은 사악한 눈빛을 빛내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성을 다해 수청을 든다 했으면 뭘 망설이는 거냐? 마저 다 벗어야 할 게 아니냐?"
사사영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핥듯이 바라보며 그는 명을 내렸다. 사사영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흐흐! 난 참을성이 없다. 어서 벗어라."
조탁의 음성에 짜증이 배어나오자 사사영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천조각을 몸에서 떼어내고 말았다.
마침내 유등 아래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수줍게 그 모습을 드러낸 초지(草地). 그녀 스스로도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처녀지림이 마침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록한 허리를 받치고 있는 풍요로운 둔부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흠......!"
조탁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오늘밤이 있게 해 준 자신의 부모와 형제, 건친왕, 그리고 신에게 감사했다. 그는 마치 난생 처음으로 방사를 치루는 새신랑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갔다. 아마도 태어난 이후 가장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사사영의 육체는 신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조탁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탁은 눈요기를 끝낸 듯 손을 내밀어 사사영의 뽀얀 젖가슴을 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매끄럽게 느껴지는 소녀의 피부와 팽팽한 탄력에 그는 전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문득 사사영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한쪽을 바라보았다.
핏덩어리!
그것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바닥을 느릿느릿하게 기어오고 있는 그것은 핏덩어리였다.
조탁의 발길질에 뭉개질대로 뭉개진 핏덩어리가 그녀와 조탁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 공자님!'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때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발했다. 조탁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이어 그의 손은 바쁘게 그녀의 온몸을 주물럭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치를 떨었다. 탐욕이 가득한 얼굴을 들이댄 채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는 조탁을 외면하면서 그녀는 하늘을 저주하고 신을 저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사영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핏덩이는 조금씩 그녀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전신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조탁의 손이 멈췄다.
"이런 빌어먹을. 이렇게 목석 같아서야 어디 흥이 나느냐?"
조탁의 욕설에 사사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편히... 누우세요. 소녀가 도주님의 의복을 벗겨 드리겠어요."
"옳지. 이제야 네년이 도도한 기를 꺾었구나. 오냐, 눕지. 눕고 말고."
조탁은 만족하여 의자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침상은 백육호가 떨어지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났으므로 의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영은 이를 악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조탁의 옷을 벗겨 나갔다. 조탁은 누워있는 중에도 사사영의 여린 육봉을 사정없이 움켜쥐고 마구 주물럭거렸다.
핏덩어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조탁이 의자에 길게 눕자 사사영은 더욱 그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백육호였다. 그는 도무지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피투성이가 된 채로 꾸준히 기어오고 있었다. 사사영은 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시퍼런 불꽃을. 그 불꽃은 태산이라도 녹일 듯했다.
사사영은 피를 토하듯 외치고 싶었다.
'제발... 포기하세요! 이까짓 소녀의 정절 때문에 마지막 가는 길을 고통스럽게 하지 마세요. 이제 그만 쉬세요. 편히... 눈을 감으세요.......'
하지만 사사영은 말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말하는 순간 저 사내는 비참한 심정으로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녀는 백육호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조탁의 하의를 벗겨 내렸다. 큼직한 속옷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속옷을 끌어 내렸다. 순간 시커먼 육괴(肉塊)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크크.... 놀라기는, 귀여운 것. 이리 올라오너라."
조탁은 손을 내밀어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린 사사영을 자신의 배 위에 끌어 올렸다. 이어 털투성이의 손으로 그녀의 알몸을 더듬어 나갔다.
사사영은 거침없이 파고드는 조탁의 거친 손길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조탁의 손은 이제 그녀의 하복부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제발 포기하세요. 공자님의 생명을 앗아간 하잘 것 없는 소녀의 순결도 이제 깨져버릴테니......'
문득 그녀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백육호의 눈이 무엇인가 애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 소저, 포기하지 마시오. 날 믿고 조금만 더 버텨 주시오!
바로 그런 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울리는 듯했다.
그것은 생명의 마지막 끈을 움켜쥐고 다가오는 백육호와 능멸의 순간을 참고 있는 사사영 사이에 오고가는 영혼의 대화였다.
사사영은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눈빛만으로도 백육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육호의 눈빛을 읽은 사사영은 간곡한 만류를 자신의 눈빛에 담아 보냈다. 그러나 백육호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사영은 백육호가 대단히 고집이 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 저 이를 위해서... 불가능한 일인 줄은 알지만 편히 가실 수만 있다면.......'
이때 조탁이 짜증을 왈칵 냈다.
"안되겠다. 이 어르신이 할테니 내려오너라."
사사영은 급히 자신의 몸으로 조탁을 누르며 구슬 같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도주님,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소녀는 처음 겪는 일이라 서툴러서 그러니 이해하세요. 편히 눈을 감고 계세요. 소녀가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평소의 사사영이라면 목에 칼이 박혀도 할 수 없는 교태로운 언행이었다. 조탁은 그만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술로 조탁의 털투성이 가슴을 찍으며 섬섬옥수로 그의 비대한 살결을 어루만져 주었다.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짓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서툴기는 했지만 조탁에게는 닳고 닳은 창기보다도 그녀의 행위가 더욱 자극적이었다.
특히 그녀가 촉촉한 입술과 보드라운 손으로 가슴과 복부를 훑으며 내려가자 그는 눈을 감은 채 쾌락에 젖은 신음을 흘렸다.
"크음, 그래... 좀더 아래로."
조탁은 욕망의 뿌리를 향해 사사영의 따스한 숨결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불끈 일어서는 남성의 뿌리가 힘차게 위용을 과시했다.
"허음! 어억."
그는 입을 벌리며 신음을 발했다. 사사영은 더욱 빨리 입술과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가 쾌감을 느끼는 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움직였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백육호가 기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만일 조탁이 그를 발견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조탁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조탁은 불현듯 온몸을 찌르는 듯한 살기(殺氣)를 느꼈다. 그 살기는 자신을 향해 가공할 파괴력을 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육감이었다.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나긋나긋한 소녀의 몸이 그를 누르고 있었다.
"잠깐... 읍."
막 일어서려던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사사영이 대담하게도 천산의 만년설(萬年雪)보다 더 순결한 젖가슴을 스스로 조탁의 입에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조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육감은 사사영을 뿌리쳐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욕망은 그를 유혹했다. 앵두처럼 빨간 꽃망울을 달고 있는 소녀의 젖가슴이 그의 입술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천도(天桃)인들 이다지도 달콤할손가! 그는 넣기만 해도 사르르 녹을 듯한 사사영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조탁은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시뻘건 핏덩어리가 유등을 가리며 떨어지는 것을!
그 핏덩어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짓밟아 뭉개버린 백육호의 몸뚱아리였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 잠시란 시간은 찰라이기도 했다.
허공에서 백육호의 손바닥이 창처럼 빳빳하게 뻗쳤다. 그리고 그 손칼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조탁은 멍청하게 눈을 떴다.
'어째서.......'
그는 뭐가 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찮은 수인놈이라고 생각했던 백육호가 어떻게 허공에 떠서 공격을 하고, 그의 수도가 절정무공으로 그의 목을 꿰뚫었는지... 그의 아둔한 머리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풀어질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조탁은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의 눈앞에 자신이 막 입안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탐스런 천도 복숭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천도 복숭아였는데.......
죽음의 땅 동사군도를 지난 십 년간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으로 군림했던 제왕 조탁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⑤
사사영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마저 다했으리라 여겼던 사내가 자신이 보아왔던 황궁의 어떤 고수보다도 더욱 빠른 몸짓으로 허공을 날아와 가볍게 휘저은 손짓 한 번으로 악마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더운 피를 뿜어내고 있는 조탁의 구멍 뚫린 목줄기와 그 옆에 혼절한 채 쓰러져 있는 백육호의 피투성이의 몸이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급히 백육호에게 다가가 호흡을 확인했다.
'아! 이 사람은 사력을 다해 내 몸을 지켜주고도 아직 한 가닥 숨이 붙어 있구나.'
감동의 눈물이 그녀의 두 볼을 적셨다.
'이젠 내가 뭔가를 해야 될 때야.'
사사영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명석한 지혜와 냉철한 판단력을 되찾은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안의 가구를 뒤져 금창약을 찾아내 백육호의 상처부위를 처치해 나갔다.
피에 절어있는 수인복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니 차마 인간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그녀는 눈물방울을 떨구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응급처치를 마친 그녀는 조탁의 의복 한 벌을 골라와 백육호의 몸에 입혔다.
경황중에도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혼절해 있다지만 사내의 알몸을 다뤄야 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도 아직 알몸인 것을 깨달고 역시 조탁의 커다란 의복을 몸 위에 둘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그녀는 자신보다 두 배가 넘는 백육호를 등에 업은 채 밖으로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해안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안타까울 정도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올 뿐, 관사 주변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포구에는 나룻배가 묶여 있었다.
사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신이여! 무모한 일인 줄은 잘 아옵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답니다. 부디 저희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사사영은 나룻배를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동사군도에는 두 사람 다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조탁의 죽음이 알려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차피 죽게 될 바에야 그녀는 가랑잎 같은 나룻배에 백육호와 함께 운명을 맡기고 섬을 떠날 작정이었다.
물론 섬을 탈출한 확률은 희박했다. 아니, 불가능했다. 섬 주변을 감싸고 도는 무시무시한 와류를 경험한 바 있는 그녀이기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외에 선택할 길이 없는 것이다.
"아아!"
사사영은 답답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그녀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수십 개의 횃불이 포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침내 조탁의 죽음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백육호를 안고 나룻배로 올랐다. 이어 나룻배에서 포구와 연결된 밧줄을 끄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려 오너라!"
문득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사영은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을 느끼며 백육호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 안았다.
'아아, 공자님. 우리의 인연은 내세에서나 맺어질 모양입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분위기를 깨서 안됐다만 시간이 없으니 어서 내려와라."
육노인이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인영은 백사호였다. 두 사람을 확인한 순간 사사영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백육호를 안고 나룻배에서 뛰어 내렸다.
"백사호, 배를 밀어 내거라!"
백사호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는 서슴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나룻배를 멀리 밀쳐냈다.
마침 해류가 빠져나가는 시각이라 나룻배는 금세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얘야, 노부를 따라오너라."
육노인의 손에는 약탕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사사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앞장 서 청도의 우측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리 주시오. 낭자."
백사호는 백육호를 받아 들쳐 업었다.
얼마나 갔을까?
일행은 청도의 가파른 암석군 사이를 지나 까마득한 벼랑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암벽이 병풍처럼 깎아질러 있는 곳으로 아래쪽으로는 단애요, 위쪽은 더 오르기 힘든 암산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육노인은 약탕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말했다.
"모두 앉아 있거라. 노부가 이 못난 놈을 좀 살펴 보겠다."
그는 백육호의 눈을 까 뒤집어보기도 하고, 맥도 짚어보며 전신을 세심하게 살펴본 후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죽기는 싫어서 맞을 때 요령을 부렸구먼. 추나심법을 제대로 써 먹었어. 클클클......."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키들거리는 육노인을 사사영과 백사호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사사영은 만면에 근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걱정마라. 곧 깨어날테니. 크크! 그러고보니 너의 응급처치도 나무랄 데가 없군. 앞으로 그럴 듯한 의원부부가 탄생하겠는걸?"
육노인의 짓궂은 익살에 사사영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백사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노야, 지금 우스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소."
"노부도 알고 있다, 이놈아. 하지만 작별의 시간은 충분하다. 놈들은 우리가 나룻배를 타고 도주했을 것으로 추측할 테니 말이다. 저 아래를 봐라."
육노야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백여 개가 넘는 횃불들이 포구 근처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백사호, 날 따라오너라."
육노인은 한 암석 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다란 술통을 굴리며 돌아왔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높이가 장정의 가슴만 했으며 표면에는 무쇠조각들이 빽빽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한 눈으로 술통을 살펴보던 사사영이 탄성을 발했다.
"아! 이건 사사도의 암초와 와류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군요?"
육노인은 히죽 웃었다.
"역시 총명한 아가씨는 다르군. 한눈에 알아보니 말야. 저 멍청한 팽삼산 같은 놈은 약초를 발효하기 위해 술통이 하나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무 생각없이 내주던데 말야."
사사영은 신기한 듯 술통의 표면에 촘촘히 둘러쳐져 있는 금속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 강판들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그야 일도 아니지. 노역 중에 틈틈이 연장들을 빼돌렸지. 물론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모으느라 몇 달이 걸렸지. 그렇게 모은 연장들을 얇게 두드려 강판으로 만들어 붙이느라 이 늙은이의 힘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사사영은 한숨을 쉬었다.
"소녀가 만든 갈대배에 비할 바가 아니군요."
육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노부야말로 이곳에서 십 년을 보내면서도 초도에 널려 있는 갈대들로 배를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이 술통은 갈대배에 비해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뭔가요?"
사사영은 어느새 천진난만한 표정이 되어 육노인을 바라보았다.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고자 하는 곳과는 상관없이 그저 조류가 흐르는 대로 떠다니기만 하니 이걸 어찌 배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건 그렇겠군요."
육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얘야, 네가 만든 갈대배로는 도저히 안되겠더냐?"
사사영은 당시의 공포가 새삼 떠올랐는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와류를 뚫기에는 소녀의 준비가 턱없이 모자랐어요. 특히 와류 속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길 줄은 예상 못하고 매듭을 잡고버티려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마 갈대배의 외형을 조금만 더 크게 만들어 그 안에 몸을 넣을 수 있는 공간만 만든다면 성공 가능성은 조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가능성도 희박하지만요."
"허허! 그거 안타깝구나. 좋은 방법을 찾아냈으면서도 시간이 없으니.... 이것도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던 육노인은 힐끗 아래쪽을 내려본 후 약탕기를 내밀었다.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될 귀한 약이니 네 입으로 흘려넣어 주도록 해라."
"무슨... 약인가요?"
"나중에 얘기해줄 테니 일단 먹이도록 해라."
사사영의 옥용에 홍조가 어렸다.
"하필이면 왜 소녀가......."
"허허, 이런 딱한 일이 있나? 그럼 노부가 냄새나는 입을 놈과 비벼대야 한단 말이냐? 백사호 저놈도 마찬가지다. 겉 모습은 희멀건 해도 십 년 동안 입 한 번 물에 개우는 걸 본 적이 없는 지저분한 놈이란 말이다. 또한 짐승도 암수는 구별하거늘 네가 이 자리에 없다면 모를까, 향기 나는 예쁜 입을 놔두고 수컷들이 주책없이 주둥아리를 들이댔다가 만에 하나 저놈이 구역질이라도 일으켜 귀한 약을 토해내면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이냐? 잔말 말고 빨리 먹이기나 해라."
사사영은 덥석 약탕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두려웠던 것이다.
탕약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녀의 뺨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백육호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손으로 그의 턱을 살짝 당겼다.
귓볼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녀는 백육호의 벌어진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노인은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한편 이미 돌아앉아 있던 백사호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가닥 허탈한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본래는 사사영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언감생심 사사영에게 연모를 품을 수가 없게 된 입장이었다.
"끝났어요......."
사사영의 음성이 들렸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사사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순결한 소녀가 입술을 수십 차례에 걸쳐 사내의 입술에 맞대었으니 부끄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고했다. 이제 노부가 약에 대해서 설명해 주마."
"예."
이윽고 육노인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사영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럼 방금 먹인 탕약은 무용지물이 된단 말인가요?"
육노인은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그건 노부도 알 수가 없다. 그 약을 달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애초에 기대했던 효능이 반감됐다는 것과 천도구엽석화의 절독성분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사영은 급히 물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왜 먹이신 거죠?"
"어차피 독은 필요한 것이었다. 다만 용도에 맞게 변화시키려 했지. 게다가 저놈의 신체는 남다른 데가 있어 웬만한 독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노부는 모험을 걸어 보았다. 어차피 막판에 몰리지 않았느냐? 이제 곧 놈들이 이곳으로도 몰려올 것이다."
사사영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육노야, 그러시다면 저분은 대사를 불과 열흘 앞두고 소녀 때문에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군요?"
"허허, 그건 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다."
"어찌 제 탓이 아닌가요? 여러분들의 십년대계가 소녀로 인해 엉망이 됐거늘......."
"노부는 저놈이 조탁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사사영은 흠칫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을 잡지 않으셨나요?"
"노부가 잡는다고 고집을 꺾을 놈이 아니다. 또한 이 늙은이도 잡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에게는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다. 놈이 뛰어든 것도 다 운명이다. 아마 녀석의 성격으로 보아 오늘밤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았을 게다."
사사영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사실 노부는 창문을 통해 모든 걸 지켜 보았다. 조탁이 죽은 후 네가 저놈을 업고 나오는 걸 확인한 후 즉시 옥사로 가 백사호와 함께 약탕기를 들고 쫓아왔지."
사사영은 그만 땅으로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육노인이 모두 지켜보았다니!
"허허! 부끄러워 할 것 없다. 너의 행동은 너무도 훌륭했다. 노부가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면 믿겠느냐?"
사사영은 오열을 터뜨렸다.
"소녀의 무모한 행동이 많은 분들에게 난국을 만들어드렸군요. 흑흑......."
"울지 마라, 아이야. 모든 것은 뒤집어진 세상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희생자들일 뿐이다. 모쪼록 너희들에게 하늘의 가호가 따르길 빌어주마. 그리하여 대명천지에 사사도의 참상이 낱낱이 알려져 일천원혼들의 한이 다소나마 풀어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사영은 흠칫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육노인은 술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술통에 백육호와 너 두 사람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사영은 눈을 크게 떴다.
"썰물이 끝나기 전에 떠나야 한다. 어서 서둘러라."
사사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왜 제가 가야 하나요? 마땅히 두 분께서 가셔야 합니다."
내내 침묵하고 있던 백사호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난 갈 수 없소. 이곳엔 어머니가 있소."
"클클클, 노부 역시 남을 것이다. 내 나이 이미 육십을 넘긴 지 오래다. 이젠 미련없이 눈감을 수 있다. 젊은 너희들이 떠나야 한다."
사사영은 입술을 악문 채 고개를 저었다.
"뭐라 하셔도 못 갑니다. 두 분이 남으신다면 이분 공자님만 보내세요. 소녀는 남겠어요."
육노인은 눈알을 부라렸다.
"제기랄! 누가 천생연분이 아니랄까봐 고집까지 닮았느냐? 이봐 아가씨, 그럼 이 늙은이가 저 좁아타진 술통 속에 쪼그려 앉은 채 와류에 휩싸여 대가리가 터지게 곡예를 부려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또, 설사 마의 해역을 벗어났다 해도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끝없이 흘러가다 굶어 죽으란 말이냐?"
실로 괴변이었다. 그러나 사사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싫습니다. 소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이때 백사호가 침울하게 말했다.
"육노야, 놈들이 오고 있소."
육노인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횃불 행렬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코를 휑 풀었다.
"곽가놈이 머리 굴리는 잔재주는 있지. 게다가 의심 또한 많으니 이쪽으로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사영에게 말했다.
"얘야, 시간이 없다. 이건 널 위한 게 아니다. 노부는 몸이 약해 술통 속에서 견딜 수가 없고 백사호는 모친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니 너밖에 더 있겠느냐?"
"흑흑......."
사사영은 오열을 터뜨렸다.
육노인은 백사호에게 눈짓을 한 후 술통의 뚜껑을 열었다. 백사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백육호를 안아다 술통 속에 집어 넣었다.
"어서! 늦기 전에 들어가라."
육노인의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소녀는......."
사사영의 더욱 섧게 흐느꼈다. 백사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백육... 아니 형님을 부탁합니다. 저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백사호는 사사영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제발......."
사사영은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백사호는 그녀를 술통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자 육노인이 재빨리 덮개를 씌워버린 후 그 위에 걸터 앉으며 껄껄 웃었다.
"아가씨! 장차 낭군이 될 사내와 신방(新房)을 꾸민 기분이 어떤가? 하하하! 비록 좁기는 해도 황홀할 거야, 안 그런가?"
이때 가까운 곳으로부터 날카로운 고함이 울려왔다.
"저쪽에 있다! 어서 잡아라!"
횃불빛이 다가오며 우르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아가씨! 내세에서 만나자꾸자. 잘 가거라."
육노인은 술통의 뚜껑을 단단히 잠근 후 술통을 아래쪽으로 굴렸다. 백사호는 처연한 눈으로 굴러가는 술통을 바라보며 외쳤다.
"형님! 내 진작부터 당신을 형님이라 부르고 싶었소! 잘 가시오! 그리고... 형수님도 부디 무사하시오!"
휙!
언덕 위로 동포락이 뛰어 올라왔다. 그는 절벽 아래로 술통이 굴러가는 것을 발견하고 버럭 외쳤다.
"막아라! 술통 속에 사람이 들어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달려왔다. 백사호는 발로 술통을 걷어차며 동포락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이놈."
쐐액!
동포락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악!"
백사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오른 팔이 어깨죽지부터 잘라져 허공에 떠올랐다. 분수 같은 핏줄기가 허공에 확 뿜어지면서 그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넘어지면서도 그는 한사코 하나밖에 없는 팔로 동포락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바람에 동포락은 술통을 놓치고 말았다.
"이이... 지독한 놈!"
동포락의 검이 허공에서 몇 차례 호선을 그렸다. 그때마다 피보라가 뿜어졌다. 백사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그의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고정되고 말았다. 초점없는 눈동자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애로운 모친의 영상인지도 몰랐다.
동포락은 절벽으로 달려갔다. 그의 앞에는 육노인이 뒷짐을 진 채 태연히 서 있었다.
"비켜라! 늙은이!"
육노인은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사를 달관한 웃음이었다.
"늦었네, 이미 떠났어."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
동포락은 욕설을 내뱉으며 육노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 줄기 선혈이 뿌려졌다. 육노인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동포락은 황급히 깎아지른 절벽의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시커먼 어둠 저 아래 검은 바다가 아스라히 보일 뿐이었다. 어디에도 방금 떨어진 술통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때 그의 등뒤에서 육노인의 빈정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동가야. 억울하면 뛰어내려 쫓아가 보지 그러느냐? 허허, 하긴 네놈이 그럴 용기가 있을 리가 없지만."
"으드... 득!"
동포락은 이를 갈며 빙글 돌아섰다. 바닥에 누운 채 야유하고 있는 육노인을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검이 아래쪽으로 쑤셔 박혔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육노인의 여윈 가슴에 검이 깊숙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꺼져라! 개 같은 늙은이!"
동포락은 발로 육노인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육노인의 몸은 붕 뜨더니 시커먼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분기탱천한 동포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절벽 아래 밤바다를 노려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크흐흐... 하하하핫......!"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