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출애굽기 14장
출14:2 돌쳐서…장막을 치게 하라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동 방향으로 행진해 왔었다. 같은 방향으로 하루만 더 진행하면 그들은 애굽의 동쪽 국경을 넘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향을 바꾸라고 명령하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방향을 남서쪽으로 향해야 했는데, 거기에는 그들과 목적지 사이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다. 진을 칠 곳의 지리적인 위치가 이곳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지명 가운데 확인된 곳은 하나도 없다. 비하히롯이란 지명은 애굽 명칭이 분명하나 그 의미와 위치는 불분명하다.
출14;3 바로가…말하기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끄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인간적인 판단으로 볼 때 이 경로는 갈 수 있는 길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길로 보인다. 가나안은 애굽의 북동쪽에 있으나, 구름기둥은 그들이 애굽의 동쪽 국경에 다다랐을 때 남서쪽으로 인도하였다. 바로가 이스라엘이 택한 이상한 경로를 보고 그들이 애굽 동쪽의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려 혼란 중에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도망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애굽과 주변 국가들이 그분의 이름을 경외하도록 이러한 상황을 만드신 것이었다(참조 4절).
출14:8 담대히
즉 애굽의 추격에 맞서 의기양양하게 나아갔다는 의미이다. 「개정표준역」에서는 이것을 “대담하게”로 번역했다. 민 33:3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을 「개정표준역」은 “의기양양하게”로 번역한다.
출14:10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의 곤경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동쪽으로는 바다가 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험한 산이 놓여있으며 서쪽으로는 울퉁불퉁한 사막이고 북쪽에는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오고 있어서, 그들은 아마도 도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무장도 하지 않았으며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신뢰하기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출14:13 두려워 말고
히브리인들의 공포는 이해할만하지만 모세의 고상한 용기와 확신은 놀랍다. 하나님 앞에서 수줍게 항변하던 때에 비하여(4:1, 10, 13; 5:22, 23) 실로 놀랄 만한 변화가 그에게 일어났다. 비록 하나님이 “그 바로와 그의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을 것임을(4절) 희미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조용한 확신은, 여호와가 구원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고 백성들에게 훈계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그의 뜻을 성취시킬지는 몰랐지만, 애굽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한 체험을 통해 지금 모세는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모세는 그의 백성이 너무나 적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84).
출14:16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동안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앞으로 전진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함을 목격해야 했다. 지팡이를 든 것을 조력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모세의 도움 없이도 홍해를 가를 수 있었다. 하나님은 또다시 모세를 통해 일하기로 선택함으로써 백성들이 임명된 지도자를 온전히 신뢰하도록 하였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그분의 일을 성취할 때,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헌신한 인간 대리자들을 사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한다.
출14:19 하나님의 사자
24절과 13:21에서는 구름기둥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여호와”로 불렀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자”(참조 부조와 선지자, 366)로 부른다. 이와 비슷하게,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던 이도 “하나님”과 “여호와의 사자” 두 가지로 언급되고 있다(3:2~6).
출14:24 여호와께서…보시고
시 77:17~19에는 이때 일어난 일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갑작스런 폭우가 내렸다. 홍해 바닥을 걸어 나아가며, 쌓아 올려진 물이 양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ⅱ. 16. 3).
출 14:25 여호와가…싸워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라놓았던 기적적인 어두움(20절), 홍해 길의 신비한 열림, 억수 같은 폭풍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든 진행, 이것들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돕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진을 효과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해 보았자 실패할 것이 뻔함을 알고 그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출14:31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닷길을 통해 인도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을 자리잡도록 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은 그의 대표자인 모세에 대한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고, 그 이유로 기적은 모세를 통하여 행사되었다. 믿음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적과 하나님의 현현이 요구되었다. 믿음은 본 다음에 생겼고 보는 것 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요 20:29)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계속 의존하는 믿음은 결코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사실이었다. 만약 우리가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때 이후로 그들은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결코 불신을 나타내지 않고 전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쁘게 여행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불신하고 그들에 대해 불평하며 그들의 권고를 멸시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보며 놀라지만, 성급하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정죄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분의 뜻과 길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신뢰하는 믿음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보다 결코 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홍해 도하 사건은 1) 가나안인에게는 두려움으 되었고 2) 이스라엘에게는 찬미와 승리가 되었다. 그리고 3) 모세의 신적 권위를 확실히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4)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만방에 드러나게 되었다. 5) 이경험은 세례의 모형이 되었다. 애급인들이 홍해 안에서 멸망 당한것은 회개치 아니하는 죄인들의 최후 멸망을 뜻한다.
믿음은 본 다음에 생겼고 보는 것 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요 20:29)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계속 의존하는 믿음은 결코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첫댓글 우리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요 20:29)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계속 의존하는 믿음은 결코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아멘 우리에게 영안이 열리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