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페 '고흥도화중학교 29회 동창회'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부끄^^
1998년에 썼던가??(가물가물..) 노자샘의 명령?에 이거라도 한 편..
풋내나는 내 첫사랑의 아이들
강정희
1984년! 죠지 오웰은 소설 <동물농장>에서 시간의 배경을 ‘멀지 않은 미래’의 의미로 1984년을 잡았다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해 3월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발령장을 들고 고흥반도의 한 작은 면소재지로 갔다.
도화면 도화 중학교. 광주에서 2시간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내려 멀미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도 한참을 기다려 녹색 줄무늬의 낡은 완행버스를 탔다.
도화! 어쩌면 분홍빛 복숭아꽃이 앞산 뒷산에 만발해 있을 무릉도원을 머리 속에 그리며.......
버스는 비포장도로에서 계속 덜컹거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밀려 열린 유리창문 틈새로 흙먼지가 날려 들어왔다.
부옇게 묵은 먼지가 낀 유리창 밖으로는 거센 바닷바람 때문에 제대로 키가 자라지 못한 소나무 몇 그루씩이 있는 메마른 산이 굽이굽이 보일 뿐이었다.
혼자 가겠다는 나를 한사코 따라 나선 엄마(아직도 나는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못한다)는 이제 시골 학교 여선생이 될 딸의 얼굴이 햇볕에 검어질까봐 신문을 접어 유리창을 가리고 있었다. 벌써 학교를 지나친 게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될 즈음, 친절한 버스 기사는 우리를 불러내려 주었다.
1년에 8만원짜리 자취집에서 세든 5명의 신참선생들
크고 작은 네 개의 가방을 들고 들어선 학교. 파랑색 슬레이트 지붕의 하얗고 길 다란 2층 건물. 삐거덕거리는 나무 복도를 걸어가는데 유리창을 깰 듯한 바람이 달려들었다. 교무실 문을 밀어 여는 순간,
“어, 너는?”
“너도?”
같은 과 친구가 둘, 다른 과도 둘. 그러니까 같은 학교, 같은 학번 다섯 명이 같은 학교로 온 것이다.
청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사범대 앞에서 가볍게 마주치던 얼굴들. 이제 바람에 불려온 낙엽들처럼 이 남도 땅 끝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우리는 작은 방 하나에 연탄 부엌 하나씩이 달린 똑같은 자취집을 1년에 8만원씩 주기로 하고 나란히 정했다. 작고 네모난 방에 가져온 짐을 풀었다. 높지 않은 천장에는 쥐 오줌 자국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네 동생들과 한방을 썼었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방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 내가 떠나 조금은 넓어 졌을 그 방에 남은 동생들이 그리웠다. 아버지도 보고 싶었다.
30년 가까이를 국민 학교에 근무하시던 아버지. 내가 서울 교육대학에 가겠다고 하자 ‘좋아하는 한 과목만 가르쳐라’ 하시며 사범대를 권하셨던 아버지가 마련해준 대추나무 도장과 자명종 시계를 꺼내 놓았다.
땅은 아직 땡땡 얼어붙어 있었다. 돌멩이가 박힌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엄마와 나는 농협 연쇄점과 그릇 파는 가게로 간단한 살림을 사러 갔다. 전기 주전자, 물 컵, 과일칼, 쟁반, 거울, 세숫대야, 비누 곽.......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였다.
내일 학교에 가, 교무실에서 또 학생들 앞에서 할 인사말을 생각하면서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바람이 온 세상을 쓸어버릴 듯 밤새 불었다.
다음날, 개학식과 입학식을 했다.
바람에 누런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는 얇디얇은 홑 잠바를 입은 아이들이 검게 탄 얼굴에 새로운 선생님들에 대한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웅성거리고 서 있었다. 엄마가 정해준 대로 입은 붉은 투피스도, 굽 높은 구두도 어색하고 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거의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 못 이겨 얼굴을 감싸고 뒤돌아섰는데 바람은 뒤통수 머리칼을 가르며 머리통 속까지 불어왔다.
우리는 이를 두들기며 떨었다.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할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이런 바람 가운데 서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만나서 기쁘다는 등의 평범한 말을 간단히 했던 것 같다.
엄마도 보였다. 1학년 신입생 학부모들 사이에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쩌면 당신의 옛날 교사 생활을 추억하고 있었을까?
한겨울 새벽 네 시, 바다에 나가 김발을 건지던 아이들
그렇게 시작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었다.
이중창도, 난방시설도 없는 교실에 그들은 지난 가을부터 줄곧 입었을 때 묻은 홑옷을 입고 있었다. 손등에고 목 에고 때가 끼어 있었으며 지각을 하거나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 준비해 오라는 사전을 안 가져오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새벽 네 시, 해뜨기 전에 배를 타고 나가 김을 건진다고 했다.
큰 가마솥에 가득 짚을 썰어 넣고 불을 때 쇠죽을 쑤어놓고 온다고 했다. 등하교 시간에 버스시간이 안 맞아 한 시간씩 산길 들길을 걸어서 온다고 했다.
집에 농협 빚이 얼마인데, 언제면 다 갚을 수 있는지를 안다고도 했다.
그렇게 나는 차츰차츰 아이들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미 어른 몫의 일을 하면서 장래 희망을 ‘일꾼’이라 연필에 침을 묻혀 적어 내던 아이. 찢어진 책가방을 옷핀 다섯 개로 여며가지고 아침에 오면 한참을 엎드려 그것을 풀어 열던 아이. 술 취한 아빠에게 매 맞고 집 나간 엄마를 찾으러 읍내에 간다고 조퇴를 시켜달라던 아이. 가수가 되고 싶다며 연습장에 노래 가사를 옮겨 적던 아이. 김치도 없이 날마다 네모로 자르고 남은 김 부스러기 무침만으로 도시락을 싸오던 아이가 스승의 날 내밀던 김 한 묶음
사랑은 결코 감정이 아니라고 늘 되뇌이는데, 이 아이들의 얼굴이 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게 삶과 사랑을 가르쳐 준 그 아이들. 나는 정말 무엇을 주었는가, 무엇을 가르쳤는가 부끄러울 뿐이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가정방문 가서 아이들 부모님 앞에서는 일을 모르는 내 하얀 손이 부끄러웠고 아이들이 예쁘다고 환호성 지르는, 맘 먹고 산 출근복도 부끄러웠다.
첫 월급날도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이십 몇 만원인가의 돈을 받기가 쑥스러워 맨 마지막까지 일을 하는 듯이 있다가 세어 보지도 않고 봉투째 가방에 넣었었다.
지금은 김준태 시인의 시 ‘감꽃’에서처럼 꽤나 많아진 월급을 엄지와 검지로 몇 번씩이나 확인하는 나.
서로를 선생이라 부르기도 어색했던 우리들
서로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여 김선수, 박선수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불렀다.
무얼 잘하는 선수 였던가? 바람 부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잘 살아가게 만드는데 선수? 신 금치(김치)와 계란 한 알고 전기 쿠커에 기름 두르고 김치전을 잘 부치는 선수? 도시에 다녀오는 일요일 저녁, 꺼진 연탄불을 눈물 흘리지 않고 번개탄으로 잘 살려 내는 선수?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매사에 서툴고 고민 많은 선수들이었다.
긴장 속에서의 꽉 짜인 생활이 힘들어, 퇴근하자마자 옷 입은 채로 쓰러져 잠들고 한밤 중에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세수하고, 서로 비슷한 운동복 차림으로 밥통과 국냄비와 플라스틱 반찬통을 들고 한 방에 모여 때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대학에서 배운 교육학과, 대학의 부속 중,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하던 때와는 또다른 현실을 얘기하며 우리가 받아온 교육과 나 자신의 존재 의미까지 고민을 하며.
군사 우편으로 오는 편지를 받을 날, 문을 잠그고 그 큰 눈으로 분며 울고 있었을 조선수. 마음이 여려 교감 선생님에게서 들은 한마디 말도 상처가 되어 문을 잠근 채 최백호, 이필원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빨래를 하던 최선수. 단단한 신앙으로 흔들림 없이 항상 굳건하게 서있던 정선수,
그는 결국 목사님 사모님이 되어 더 큰일을 위해 교직을 떠났다.
그들은 지금 나를 어떻게 추억할까? 바지런하고 청빈하여 마치 수녀와도 같았던, 그러나 가끔은 야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김선수. 나중엔 한솥밥을 먹으면서 미운 정이 든 김선생.
그리고 집에 가지 않은 주말, 동네 저수지 둑 위에서 미풍에 밀려오는 잔물결과 청둥오리 떼를 한없이 말도 없이 바라보다 달이 떠서야 엉덩이에 마른 풀 털며 내려오던 어느 토요일의 그대와 나.
여름방학 교외 생활지도라고 내발 해수욕장 모래밭의 아이들, 선생님들 모여서 ‘바위섬’과 ‘이 몸이 새라면’을 부르며 바다에 앛임이 오는 걸 지켜보던 일. 밤벌레 소리를 들으며 가정방문을 다녀오던 어느 가을밤, 그리고 두 번째 겨울 12월초 어느 날 새벽, 토플을 들고 푸른 안개속으로 성당 공소 앞다리를 넘어 대학원 시험을 보러 가던 그대.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아 대학 서클에서 80년도에 목이 아프도록 부르던 노래를 조용히 불렀지.
나도 아이들의 가슴에 살고 싶다
그러나 도화, 그곳에서의 3년. ‘도’는 복숭아가 아닌 지리 ‘도’, 길 ‘도’였다.
나는 도를 닦은게 아닐까? 여러 겹의 껍질을 깨고 혹은 새로운 껍질을 입고 어른이 되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 일기와 우편물을 빈 겨울논에서 태우고 단촌한 짐을 쌌다. 나 뿐 아니라 다들 그랬다.
3년 혹은 4년간 순결한 첫사랑의 열정들을 불사르고 떠났었다. 잊지 으마고 카메라를 않고 조그만 방 창문으로 내다본 들판 풍경, 등하교길, 눈에 익은 모습들을 다 찍었지만 아직은 내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서툴면서도 뜨거웠던 그 사랑. 교직에 대한 풋내나는 첫사랑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얼마만큼 무르익었는지는.
퇴근 시간 이후에는 집안일과 내 아이들 일에 묻혀 학교 일을 거의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학부모가 된 마음으로 학생들을 본다는 능청스런 위안도 하는 나. 그건 그랬다. 숙제할 때 얼굴을 공책에 붙이고 애를 태우며 꼼꼼하게 하고 있는 여학생들에게서 딸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구멍 난 양말도 아무렇지 않게 신고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흔들고, 틈만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는 남학생들에게서 내 아들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 항상 어떻게 할까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 앞에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선생님처럼 나도 그렇게 아이들의 가슴에 살고 싶다.
나보다 젊은 교사가 보기에 나태하지 않고 나이 드신 선배 교사가 보기에 서툴지 않은 교사.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나중에도 있어서 내 제자 중 누군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흥도화중학교에서의 첫교사시절을 그리며
[출처]풋내나는 내 첫사랑의 아이들 (강정희 선생님)|작성자선주파파
첫댓글 1984년, 도화중의 강선수는 얼마나 싱싱했을까?
네, 이제는 선수도 아니고요..ㅎㅎ
고흥에서 '도화'를 가려면 '죽시'를 거쳐 '풍남'을 돌아 '가화'를 지났을 텐디... 제가 바로 그 '풍남국민학교' 27회 졸업생입니다. 흙먼지 뒤집어 쓰며 초승달빛 아래 공차기하던 그 학교가 곧 문을 닫을 거라는 소식.... 꼭 수몰민이 된 기분입디다.
도화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는데,
풍남 길은 조금 더 커브와 경사가 심해서,
김치통을 갖고 뒷좌석에 타면,
내릴 때는 기사님 옆에서 찾아야 했음..
읽고 나니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져요. 누구나에게 '그 때'라고 하는 시간들이 있어서 참 좋아요. 벌써 8년차가 되어 버린 나. 정희샘의 시간이 되면 저도 그 날을 기억하며 이야기해볼까요. 옛날(?) 이야기들이 점점 오늘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어요. 저에게요... ^^
정은샘의 오늘도 궁금해요..
자꾸자꾸 눈물이 났어요. 전 딱 일년 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