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교정 13. 학교
마룻바닥
원동국민학교 복도 바닥과 교실 바닥은 나무판으로 되어 있어 빨리 걷거나 뛰어가면 쿵쿵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때문에 선생님들은 발 뒤꿈치를 들고 걷도록 생활지도를 하셨다.
마룻바닥은 사내 아이나 계집 아이나 모두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공깃돌 놀이를 할 때도 아주 탄력 있고 냉기 없는 바닥에 엉덩이가 닿는 느낌이 편하고 좋았다.
장학사 선생님이나 특별한 손님이 방문하시는 경우는 배려 깊은 청소를 하는데 아이들은 초를 가져와 마루 바닥에 칠을 하고 마른걸레로 문질러 번쩍번쩍 광을 내었다. 어찌 된 건지, 콩기름을 가져와 마루 바닥에 부어 문지르는 아이도 있었다.
" 마루바닥이 너무 미끄러우면 친구들이 넘어져, 양초보다 콩기름을 가져가." 라고 집에서 그랬을까.
마루 바닥의 나무판 사이가 넓은 곳에는 연필도 또르르 구르다 빠지고 동전도 떼굴떼굴 굴러 가 빠졌다. 크레옹도 빠지고 20cm 짧은 잣대도 아차 하면 빠지고 여러 가지가 그 틈으로 빠져서 그 피해를 입어 아쉬워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끝내는 아프게 했다.
어떤 재주 좋은 아이는 뒤편의 환기구(換氣口)로 기어들어가 찾아오는 별난 아니, 용한 재주를 갖은 아이도 있었다. 왜냐면 그 마룻바닥의 환기구는 통풍망이 설치되어 있어 쉽게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혹시 들어갈 때 통풍망을 떼어내고 나올 때 다시 제 자리 끼워둔 건 아닐까. 1906년 설립 때부터 1980년 폐교 때까지 74년간 마룻바닥 틈으로 굴러 들어간 연필, 크레옹, 자, 동전은 대체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도 그렇지 온갖 먼지와 지면에 습기가 차 있었을 텐데 그 어두운 곳엘 어떻게 기어들어 갔을까. 내가 수사반장처럼 잘 밝혀낼 순 없지만 그 아이의 말을 듣고 교실 뒤편으로 돌아가 봐도 그 망으로 간단히 들어갈 수 없었다.
뻥일 거야. 그 아이가 일부러 우리들 부러워하라고 뻥친 걸 거야. 아, 그런데 이제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그 턱이 낮은 좁은 공간에 기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 나와서 온갖 먼지를 턴 적이 있었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연필도 주워 나온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인 듯도 싶다.
이 학교 마루판의 진위에 관한 의혹은 그 실체가 철거되어 진상을 규명할 수 없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여섯 번째 수수께기였다.
지금의 건축공법으로는 상상도 안 되지만 소사 아저씨가 마루판의 결이 깨져나가 구멍이 생기고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며 불쾌한 소리를 내던 그 오래된 마루판들을 뜯어내고 새 마루판을 대고 못질을 하던 그 엉성했던 옛날에는 그게 거짓말처럼 가능성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어떤 마룻바닥 나무판에는 잔가시가 솟아 일어나서 아이들 손에 찔리고 박히게 하여 불편하고 고통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소사 아저씨는 흔들흔들 삐걱거리는 책상과 걸상도 수리하셨다.
우리들은 유리창도 닦았다. 마주 보고 손가락으로 서로 오점 자국의 위치를 가리키고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즐겁게 교실미화 일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우리 반이 사용하는 전통 푸세식 변소 청소는 바닥에 먼저 물을 끼얹고 막대 자루솔로 문지르고 다시 물을 뿌리고 환경정리를 마무리했다.
반드시 선생님께 보고를 하고 실제로 검사를 받거나 이만 집에 가도 좋다는 검사 면제를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교문을 빠져나왔다. 가끔은 이를 무시하고 땡땡이를 치고 도망가는 뱃장 좋은 아이들도 있었다.
집에 와서 미닫이문에 칠판처럼 달력 한 장 붙이고 빵 학년 동생을 그 앞에 앉힌 다음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를 옮겨 적어놓고 따라 읽게 하였다.
학교 선생님처럼 회초리 지휘봉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가리키며 큰 목소리로 따라 읽게 하였다. 한참 학교 놀이에 빠져 있는데 문이 스르르 열렸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가시는 길에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 떠드는 내 목소리를 듣고 들려보신 거였다. 아버지가 마침 들어오셔서 선생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셨다.
아버지는 거창농고, 진주사범, 공주사범, 대전사범을 거쳐 청주사범교장으로 퇴직하시고 남산화학 대전 공장을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진주 남강 촉석루에서 열린 교직원 한시 백일장에서 ㅡ
다한남강유혼돈(多恨南江流混沌),
무언촉석입분명(無言矗石立分明),
한 많은 남강은 흐르기를 혼돈이 하였고
말 없는 촉석루는 때를 분명히 하였다는
시를 써서 배일사상을 나타냈다는 이유로 논란 끝에 타학교 전근으로 마무리하셨다. 이 시를 잠시 들여다보면 그 대비대구(對比對句)가 재미있는 구조다.
多 / 無, 恨 / 言, 남강 / 촉석, 流 / 立, 혼돈/ 분명
따라서 이 시는 참 정교하다.
참고로 역사는 요임금의 불초(不肖)한 일가를 혼돈(混沌)이라 불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시고 돌아오신 작은 아버지께서는 서울에 남산화학이라는 비누공장을 세우셨다. 세수 비누와 빨래 비누를 생산해서 수도권 일대에 공급량을 맞추기도 너무 바빴다. 6.25 동란 피난 이후에는 대전에 공장을 세우시고 운영하시다 아버지에게 맡기고 서울로 가셨다.
당시 집권 여당 자유당은 이렇게 바쁜 작은 아버지에게 공천을 줄 터이니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라고도 제의하였으나 아버지께서 정치입문을 반대하셔서 고사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맡은 대전공장은 물건을 생산하여 시장으로 나가지만 돈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찾아온 어려운 제자들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대주고 생활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다수의 제자들은 물건 값을 입금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여유로우셨다. 힘내라며 물건을 다시 발송하셨다.
아버지는 반갑다고 찾아오는 동창들을 만나 막걸리를 대접하시고 껄껄 웃으시며 술을 권하셨다.
고대중국의 요순우(堯舜禹) 오제시대(五帝時代)의 상고사부터 이야기 화두가 되어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어떻게 임금자리에 올랐는지 아버지는 재미나게 말씀하셨다.
요즘처럼 서로 하겠다고 나서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이가 있으면 서로 하시라고 서로 추천하여 지도자를 임금자리에 추대하여 올렸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요임금은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경영해달라 했다. 그러나 허유는 부끄러운 말을 들었다며 기산으로 옮겨가 개울가 영수에서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巢夫)가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다가 유난히 귀를 열심히 씻는 허유의 말을 듣고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갔다. 이리해서 귀를 씻는 세이(洗耳) 전설이 중국인의 정신사(精神史)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허유가 거절하자 효도의 왕, 전설의 순에게 천하경영이 맡겨졌다. 순은 계모가 우물을 파라고 하고 생매장을 시키는 데에도 옆을 파고 나와서 살아 나왔다. 심지어 지붕 위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라고 하고 아래에서 불을 붙여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계모와 동생에게 가족으로서 효와 사랑을 나타냈다.
" 왜 죽이려 했던 계모와 나쁜 동생을 쫓아내지 않느냐?"
하자
"장님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시다."
고 말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장님 아버지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순은 아버지를 업고 바닷가 끝까지 가서 세상이 이 사건을 잊을 때를 기다렸다. 아버지 사랑, 지극한 효였다.
우임금은 그 다음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해 황하의 범람을 막았다. 이에 우임금에게로 천하가 맡겨졌다는 서경에 나오는 역사 이야길 흥미롭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