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torio Di Nardo
이탈리아 제노바 항에서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왔으나,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일본형제들이 마중나와 그들과 함께
도쿄로 간 다음 다시 한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결국,
예수회 신부들의 도움으로 며칠을
예수회 수도원에서 머물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배편으로
곧바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64년 1월 10일.
그렇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는 건축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
오자마자, 부산 대연동 성당, 대구 범어동,
그리고 한참 뒤에 서울 한남동 수도원까지
지었다.
건축 현장에서 말을 배운 탓으로
가끔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욕인지 몰라서
"이 새끼야, 이리 오세요" 이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하셨었다고...
주로 교회건축일을 담당하셨다.
서울 성모, 의정부 성모병원,
수녀원 건축에 자문 내지는
감리를 하셨다.
언젠가 한 번 CMC(카톨릭중앙의료원)
원장이셨던 고 최영식 신부에게 물었다.
"아니 자격증도 없는데,
우리 신부님을 병원에서
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대답하시길
"당시에는 자재를 규격대로 쓰지 않거나
빼먹돌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부님한테 걸리면 하이바(안전모)로
그대로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쳐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을
찾아내십니다 "
영화에도 출연하셨다.
당시에는 외국인 많지 않고,
게다가 한국말을 하는 서양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섭외가 들어왔고,
워낙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신부님은
고교얄개, 정과 정사이.. .등등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셨다.
그렇게 화려하던(?) 시간이 60년.
그 감사미사를 드렸다.
방에서는 주례도 하고, 강론도 하시겠다 했지만,
막상 성당까지 걸어오시니 기운이 빠지셨는지 못하시겠다고.
그 긴 60년동안 선교사로서의 삶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
에너지가 없어 걷기도 힘드시다.
한 해 한해가 다르다 하더니
작년과 올해 부쩍 수척해지셨다.
fra. Vittorio Di Nardo
나승덕 빅토리오, 수사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대가 있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한국에 튼튼한 기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Vittorio Di Nardo
글,사진 최영선알렉산델 수사
나승덕 빅토리오 신부님
한국선교 60주년의 노고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더없이 큰 하느님 안에서의 인연.
한국에 오셔서 프란치스코형제회에
더욱 큰 빛이 되어주셔서.
형제적사랑을 몸소 베푸신 신앙을
본받아 열심 기도하며 함께
걷겠습니다..
쭈욱 건강하시길 두손모아
빕니다..양평콜베 형제회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