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652호)
[폴란드] 헨릭 세미라드즈키(Henryk Siemiradzki), ‘네로의 횃불’(The Torches of Nero), 1882년 작, 개인 소장.
초기 기독교(Early Christianity)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아왔다.
그 이유는 3가지다.
첫 번째 이유 - 고대 사회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었다. 민족별로 각각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던 고대사회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공동체는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온전한 인간이 아님으로 전쟁과 노예가 정당화된 사회였다. 당시 로마는 귀족, 평민, 노예의 계급 사회였다. 당시 노예는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당시 여성은 남성의 통제를 받던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사회였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다. 또한 신분 차별에 반대했다. 교회 내에서 모두 동등한 신분으로 형제 또는 자매로 불렀다. 기독교는 남녀차별 없는 평등을 가르쳤다. 로마 제국의 계급 사회가 기독교 때문에 크게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 - 기독교에 대한 나쁜 소문과 편견이었다(성찬식과 유일신, 징집 거부). 로마 제국에서는 기독교의 성찬식을 오해한 거짓 소문이 퍼졌다. 예수는 빵을 주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했다. 이를 기독교인들은 식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락한 종교라는 인식이 로마제국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다신론을 믿었으며, 심지어 황제를 신으로 여길 때였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유일한' 주'가 된다고 고백하니 로마 황제에게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적과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교리에 따라 살인을 금하므로 전쟁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고, 지키려는 로마 황제들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복종이 되었기에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세 번째 이유 - 도덕성을 중요시한 기독교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흥청망청 즐겼던 것은 술이었다. 성생활도 문란하게 즐겼다.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스와핑이 만연했고, 지중해에 널리 퍼져 있던 이방 제사에서 공창제도를 통해 성행위가 만연해 있었다. 또한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창가가 왕성하게 번창했다. 당시에 노예들은 로마인들에게는 '성 착취물' 정도로 여겨졌다. 특히 이방 사제들의 영향을 받아 동성 간의 성교(동성애)가 만연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강조했으며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고 경고했다. 따라서 금욕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로마인들에게는 아주 가시처럼 보였다.
이런 3가지 이유로 로마제국에서는 기독교인을 제 3의 종족이라고 비난했고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네로 황제로부터 64년 시작한 핍박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 황제들과 순교자들 -
콘스탄티누스가 반포했다고 전해지는 '밀라노 칙령
-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 네로(54-68)
서기 64년 7월 18일부터 19일에 걸친 밤, 로마 시내에 큰 불이 일어났다. 대경기장 관중석 밑에 있는 가게에서 조그맣게 일어난 불은 남서풍을 타고 서민층 주거지역을 지나, 온 로마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맹렬한 불길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별하지 않았다.
엿새째 저녁에야 겨우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뿐, 이번에는 동쪽에서 불어온 강풍에 불씨가 되살아났다. 결국 '세계의 수도' 로마는 아흐레 동안 불길에 휩싸인 것이었다. 불이 났을 당시, 황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 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불타는 로마 시내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에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 즉 황금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방화범의 주범이 네로 황제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유재산을 철저히 보호하는 로마에서는 아무리 황제라 해도 땅이 필요하면 소유자한테 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땅을 사려면 소유자들과 일일이 교섭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하지만 불타버리면 주인도 체념하니까 사들이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네로가 방화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소문이 불행을 탄식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일파만파로 퍼진 것이다. 27세의 네로는 방화의 주범에서 벗어나려면, 시민이 공감하는 방화범을 잡아야 했다. 결국 네로는 방화범의 주범으로 기독교도를 지목하였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고발한 이유에는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체포는 일망타진이 아니라, 고구마 덩굴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밝힌 자들을 잡아서 고문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고발하게 하고, 자백을 끌어낸 뒤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경우, 판결은 재판을 하기 전부터 뻔했다. 물론 사형이었다. 체포한 뒤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장으로 보내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로마의 사법기관은 고발을 받아야만 비로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자백이나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들의 처형은 기독교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네로는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아 여론을 환기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이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 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기둥들이 관중석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312-337)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고 신앙 자유의 원칙에 의하여 기독교를 공인했다. 당시에 로마의 10%가 기독교인이였다.
* 밀란노 칙령이란 무슨 종교든지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다. 이 칙령으로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보호받게 되었으며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고대 지중해 세계는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적 전통이 강하였는데, 1세기 중엽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가 전파되어 다신교와 갈등을 빚었다. 수도를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천도하고 개혁을 실시했던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박해 중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고 연금을 주어 성직자를 우대했다. (참고: 막센티우스 통치 5년째(312)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Milvius)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막센티우스와 대치할 때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표식인 χ와 ρ를 새겨 넣고 전쟁에 나가라는 계시를 받고 그의 군대로 하여금 그 표식을 새겨 무장한 채 막센티우스와 싸워 승리하였다. 이것은 후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는데 그 개인적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를 소집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는 동일한 본질인가'를 두고 '둘은 유사할 뿐 같은 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지정하고 교회에서 추방한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신조로 삼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379-395)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에서 80% 이상이 기독교를 믿게 되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 11월 8일 이교 신들의 숭배 의식을 전면 금지했다. 다른 종교를 금지하고 기독교를 사실상 국교로 확정하였다. 이후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회, 동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신앙을 주도해 나갔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각각 서유럽의 게르만족과 동유럽, 러시아 슬라브족에게 전파되어 유럽 문화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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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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