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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권 위기와 극복
책머리에
이 책에서 다루게 될 시대는 네로 황제가 죽은 뒤부터 트라야누스가 등장할 때까지 3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기 68년 여름부터 서기 97년 가을까지 29년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제위에 오른 사람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등 무려 일곱 명에 이른다.
제정 로마 시대의 최고 역사가라고 일컬어지는 타키투스의 저술 가운데 바로 이 시대를 다룬, 역사(history)가 있다. 영어의 ‘history'에도 과거를 기록한 역사'라는 의미 외에 ‘기록할 만한 사건'이라는 뜻도 있듯이. 13세기부터 40대 초반까지 한창 시절을 이 시대에 보냈을 것으로 여겨지는 타키투스는 ‘역사'를 쓰면서 ‘동시대인의 증언'을 기록하는 심정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타키투스의 또 다른 대표작 ‘연대기(Annales)'는 후세의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에 가깝다. 티베리우스의 즉위부터 네로의 사망까지를 다룬 저술은 타키트스가 태어나기 40년 전부터 10대 전반까지의 시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에게는 한마디로 말해서 ‘가까운 과거'에 해당한다.
타키투스로서는 ‘동시대'를 다룬 ‘역사' 첫머리에서 저자는 그 30년이 어떤 시대였는지를 개괄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대를 그 자신은 어떻게 보았는가를 정리해준 셈이다. 그 대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제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 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도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넷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을 말한다),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했다, 제국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유대 전쟁)은 로마에 바람직한 결과로 끝낼 수 있었지만, 제국 서방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사르마타이족과 수에비족은 로마군단에 손해를 끼치고, 다키아족은 로마에 패했을 때도 기세를 올리고,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황제를 자칭하는 가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본국 이탈리아도 잇따라 일어나는 재해에 시달렸다. 캄파냐 지방의 풍요로운 도시들은 매몰되고(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이 매몰된 것을 가리킨다),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고, 유서 깊은 신전들은 파괴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있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들은 파괴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서있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까지도 같은 로마인의 손으로 불타버렸다.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는 소홀히 하고, 거리낌 없이 간통을 저지르고,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 나르는 배가 넘쳐흐르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신분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 되었다.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만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 당했다.
그렇긴 하지만, 악덕이 횡행한 이 시대에도 고결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방된 아들을 따라간 어머니, 추방된 남편을 버리지 않고 본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린 아내, 용기를 보여준 친척, 장인이 실각했는데도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남편,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인에 대한 충절을 지킨 노예도 있었다. 자살 명령을 받은 이들도 옛 사람들 못지않은 호탕함을 보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하늘과 땅이 보여준 조짐이나 경고는 수없이 많았다. 신들의 뜻이 로마인의 안전보다 로마인에 대한 징벌에 있다는 사실이 조짐을 통해 그렇게 명확히 드러난 시대도 없었다.”
이것만 읽으면 누구나 서기 1세기 말의 30년 동안은 로마 제국이 정말로 엉망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타키투스는 ‘가까운 과거'를 기록한 ‘연대기'에서도 티베리우스부터 네로에 이르기까지의 로마 제정을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의 비난이 옳다면 로마 제국은 무려 82년 동안이나 악덕과 패륜이 횡행한 나라라는 예기가 된다. 그리고 저술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의 생각을 더듬어 가면,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서 로마 제국을 구해낸 것은 네르바와 그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타키투스의 이런 역사관이 로마 제국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결정지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세가 ‘오현제'라고 부르게 된 것도 타키투스의 역사관이 후세에 미친 뿌리 깊은 영향을 보여준다.
물론 이 다섯 사람은 현제라고 불릴 만한 기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섯 사람만 현제이고, 그 전후의 황제들은 모두폭군이나 우매한 황제였을까? 그렇다면 왜 로마 제국은 더 일찍 무너지지 않았을까? 오현제의 치세 기간은 83년이지만, 로마가 제정이 된 뒤 붕괴할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에 이른다. 80년의 선정으로 그 전후의 420년을 버틸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정복은 단념했어도 브리타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이루어졌는데도 방치했다"는 타키투스의 기술은 사실에 어긋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타키투스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어두운 면에만 조명을 비추는 것은 타키투스 개인의 성격이다. 타키투스와 동년배로서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소 플리니우스는 타키투스처럼 현실에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다만 소 플리니우스는 서간집만 남겼을 뿐 역사는 쓰지 않았다.
또한 위기는 언제나 부정적인 현상일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인간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위기를 다른 어느 시대의 위기보다 가혹하게 느끼는 성향이 있다. 게다가 로마는, 만사가 좋은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융성하고, 그 후에는 만사가 나쁜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쇠퇴한 것은 아니다.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나라를 세운 뒤 수없이 닥쳐온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융성을 이룩한 민족이다.
기원전 390년에 일시적이나마 수도를 켈트족에게 점거당했을 당시는 위기가 아니었을까.
그 전후에 로마인을 괴롭힌 귀족과 평민의 투쟁은? 40년에 걸친 삼니움족과의 전쟁은?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에피로스왕 피로스에게 고전했을 때는?(제1권 참조)강대국 카르타고와 100년 동안 사투를 벌였을 때, 특히 명장 한니발과 맞선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16년 동안 고생했을 때는 위기가 아니었을까?(제2권 참조).
숙적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차지한 뒤에도 로마는 위기에서 영원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사회의 불공정함을 세상에 드러낸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이 일치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기원전 90년 당시의 ‘동맹시 전쟁'. 그리고 마리우스와 술라가 서로 상대편의 유력자 수천 명을 숙청한 10년 동안의 내전. 이 모두가 로마 국가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는 위기였다.(제3권 참조).
게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국가 형태 자체를 둘러싸고 벌인 투쟁(제4권과 제5권 참조). 그 투쟁이 카이사르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뿐. 카이사르 암살로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불이 붙은 14년 동안의 권력투쟁(제5권 후반 참조).
이런 사건들은 그 하나하나가 당대의 로마인이 그대로 짓눌려 쇠퇴의 길을 걷느냐, 아니면 이겨내고 재기의 길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을 로마인에게 강요한 ‘위기'였다. 그리고 이 '위기'와 ‘극복'의 되풀이는 오현제 시대가 끝날 무렵부터 쇠퇴기에 접어든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로마인의 역사는 곧 ‘위기와 극복의 역사'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융성기의 위기와 극복은 번영으로 이어지지만. 쇠퇴기에 들어서면 위기는 극복할 수 있어도 그것이 더 이상 번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했는데 왜 그것이 번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로마 제국이 멸망한 요인에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나는 지금부터 서기 1세기 후반의 30년을 서술할 작정인데, 그 기간 동안에 위기를 겪은 로마인이 그 직후에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다는 점에는 타키투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첫해인 서기 69년에만 국한시켜 말하면, 타키투스가 "하마터면 로마 제국의 마지막 1년이 될 뻔했다"면서 분노와 절망감을 표명한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질 만큼 로마 제국의 혼미는 극심했다.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1년 동안 세 번이나 정부가 쓰러지면, 타키투스처럼 만사를 어두운 쪽으로만 해석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독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한탄하지 않을까.
제1부 갈바 황제(재위: 서기 68년 6월 18일~69년 1월 15일)
네로의 죽음이 로마인에게 제기한 문제
서기 68년 6월 9일. 네로 황제가 죽었다. 에스파냐 주둔군이 황제로 옹립한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올 거라는 소문에 원로원은 재빨리 갈바를 ‘제일인자'로 인정했고, 로마 시민들도 나 몰라라 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네로를 버렸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네로는 결국 3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의 2대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 양쪽에서 불신임을 받은 것이다. 군단병이나 근위병의 첫 번째 자격 조건이‘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이상, 이들도 어엿한 ‘유권자'였다.
그러나 네로를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원로원도 시민도 사태를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한 것 같다. 네로 대신 갈바가 제위에 앉기만 하면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롭게 이어지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인류는 온갖 형태의 정치세계- 왕정, 귀족정, 민주정, 나아가서는 공산체제까지-를 생각해내고 실행했지만, 통치하는 자와 통치 받는 자로 양분되는 체제를 해소하는 데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을 꿈꾼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 현실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체제가 어떻든 간에,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양분되는 체제는 존속한다는 예기가 된다. 그런 체제가 존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이상,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와 역량이 그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로마 제정에서 ‘정당성'은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고, ‘권위'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역량'은 로마 황제의 두 가지 책무인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을 비롯하여 제국을 운영하는 데 적합한 능력을 의미했다. ‘권위'는 지니고 있었지만 ‘역량'이 모자란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것이 네로의 운명을 결정했다.
네로 이후의 황제들도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것을 요구받았다는 점에서는 네로 이전의 황제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정당성과 능력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권위까지 창출해야 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우선 황제를 자칭한 갈바 자신이 누구보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군단이 그를 황제로 옹립한 것은 서기 68년 초여름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네로가 자살한 것을 알았다. 갈바는 당장 로마로 갔어야 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 들어가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혀놓아야 했다. 원로원이 그를 승인하고 로마시민인 근위병들도 갈바의 즉위를 환영하고 있었으니까 ‘정당성'은 얻은 셈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으니까 그런 종류의 ‘권위'는 없었지만, ‘역량'은 갈바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되도록 빨리 로마에 들어가 황제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가 그의 임지였지만, 총독주재지인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에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까지는 순풍을 타고 직항로를 따라가면 닷새 밖에 안 걸린다. 불안한 해로를 피해 육로를 택한다 해도, 남프랑스를 돌아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로마에 도착하는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지역-의 가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되지 않았던 100년 전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마르세유까지 가는 데 12일 밖에 걸리지 않았고, 마르세유에서 에스파냐 북부산지에 있는 레리다까지는 17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는 로마의 도로망이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을 테니까.
갈바가 서두를 마음만 먹었다면 타라고나에서 로마까지 간선도로를 따라 편하게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바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가을로 접어든 뒤였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갈바는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이상을 허비해 버린 모양이다. 로마 도착이 늦어진 것도 단지 느긋하게 여행했기 때문이고,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시간을 활용하여 필요한 조치를 내리는 배려조차도 하지 않았다.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붕괴라는 중대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막중한 시기에 석 달 동안이나 권력을 공백 상태로 방치해둔 셈이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는 원로원이 일찌감치 인정해준 ‘정당성'을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다. 원로원이 승인해준 것만으로도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졌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또한 로마의 귀족으로 태어나 자란 갈바는, 네로를 대신할 황제를 뽑는다면 자기야말로 가장 적임자라고 과신한 게 아닐까. 게다가 72세라는 고령 때문에, 이런 경우에 가장 필요한 과단성을 잃고 있었던 게 아닐까.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수도 로마 출신의 귀족이라는 신분은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피통치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어난 곳이 칼리굴라나 네로처럼 로마근처의 소도시 안치오라 해도, 또는 클라우디우스처럼 갈리아 속주의 주요 도시 리옹이라 해도 상관없다. 요컨대 ‘본적지'가 수도 로마라는 게 중요하다. 제정을 맨 먼저 착상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뿐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본적지를 로마로 옮긴 것도 아우구스투스의 본적지가 지방인 벨리트라이(오늘날의 벨레트리)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집안은 오래 전부터 수도 로마에 뿌리를 내린 명문 귀족이었다.
건국한 지 800여 년이 지나자, 자연의 흐름에 따른 소모와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은 소모 때문에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갈바 가문은 그 얼마 안 되는 명문 귀족 가운데 하나였다. 제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명문 귀족이라는 신분만으로는 자신의 통치권을 피통치자에게는 납득시킬 수 없었다. 명문 출신이라는 것 외에 국가 요직을 경험한 경력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는 갈바는 자격이 충분했다. 인재 등용의 흐름 속에서 속주 총독이나 사령관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 출신이나 속주 출신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제정 시대. 수도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으로 속주 총독을 지낸 갈바는,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네로 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갈리아 총독 빈덱스도 네로를 대신할 황제로 갈바를 천거했다. 빈덱스는 속주 총독이라는 요직을 맡고는 있었지만 갈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네로에게 반기를 들어도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라인강 방위를 맡고 있는 로마군 사령관 루푸스는, 당신에게 황제가 될 용기가 있다면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는 부하 장병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루후스는 로마군에서도 최강으로 알려진 라인 강 방위군 사령관을 맡을 만큼 유능한 장수였지만, 출신지가 북이탈리아의 코뭄(오늘날의 코모)인데다 신분도 로마 사회에서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이었다.
네로는 이들과는 달리 어머니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피를 이어받았고, 친가인 아혜노바르부스 집안도 공화정 시대부터 줄곧 수도 로마출신의 명문귀족이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지만,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갖고있는 가치관까지 바꾸기는 쉽지 않다. 네로가 죽은 뒤. 로마인들이 수도 출신 귀족으로 요직 경험자라는 조건을 갖춘 갈바의 즉위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과거와 급격히 단절되지 않는 무난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은 갈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서기(68년 여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해도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출신지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도시인 리에티였고, 아버지는 원로원에 의석을 갖기는커녕 군단에서 퇴역한 뒤 스위스로 가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형은 수도 로마에서 행정관-요즘으로 말하면 공무원-으로 출세를 꿈꾸었고, 동생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에서 출세하는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의 집안은 지방의 전형적인 중류층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갈바는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지만, 기원전 3년께로 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되찾은 로마에서 인격 형성기를 보낸 셈이다.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에는 역시 티베리우스 황제 밑에서 집정관을 지냈다.
서기 39년에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라인 강 방위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4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갈바는 브리타니아 제패를 마무리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따라 브리타니아에 가게 되었다. 실제로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일은 플라우티우스나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직업군인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명문 귀족인 갈바는 황제 수행단의 일원이 되는 게 어울렸을 것이다. 갈바가 47세 때의 일이다.
그 후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선임되어 카르타고로 가서, 1개 군단을 지휘하며 1년의 임기를 마쳤다. 아프리카 속주는 원로원 속주로 분류되어 있어서, 공화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임기가 1년이었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원로원 의원 생활을 계속한 모양이다. 그런데 서기 60년에 네로 황제는 환갑이 지난 갈바를 황제 속주인 에스파냐 북동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갈바의 에스파냐 생활은 이때부터 네로가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총독은 속주 통치의 최고 책임자다. 갈바는 아프리카에서 1년, 에스파냐에서 8년 동안 총독을 맡았다. 그동안 한 번도 속주민에게 고발당하지 않았다. 로마는 총독의 통치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속주민에게 총독을 고발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주민에게 한 번도 고발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갈바의 통치는 속주민들도 만족할 만큼 선정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갈바는 황제를 자칭한 뒤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편성했는데, 그 작업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갈바의 요청에 따라 군단병을 지원한 에스파냐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북아프리카나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방위전략상으로 볼 때 ‘최전방'이 아니었다.
갈바가 맡고 있던 타라코넨시스 속주에는 3개 군단이 배치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중에서 2개 군단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뒤로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1개 군단밖에 주둔하지 않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갈바는 문제가 별로 없는 속주를 통치해본 경험 밖에 없었다. 최전방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갈바의 즉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바는 한시라도 빨리 황제의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행렬을 거느리고 느긋하게 로마로 들어간 갈바는, 이런 경우에 꼭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반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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