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서울로 올라가는 여정
다른 사람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여행 거리를 반으로 줄여 줄 것 같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조선 땅에서 하루 밤만 지내면, 동료는 아니더라도 수행원의 경우사람에 따라, 당신은 조선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이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전통적인 이동수단으로 하루가 걸린다.
해안을 떠나 서울로 올라갈 때, 출발하는 시간이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해가 지면 도시의 성문이 닫히고, 너무 늦게 도착하는 사람은 성문 밖에서 지내야하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후 도착하는 것은 어디서나 있을 수 있어서 동의하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예방책이 어떤 경우에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그리고 낮이 가장 짧은 12월에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면, 일찍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날 저녁 모든 준비가 끝났고, 우리가 아침 적절한 시간에 출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났고, 아침에 기억을 더듬으니 말다툼을 했던 기억이 났다. 이것이 나를 일어나게 했다.
하지만 내 조선인 친구들은 연루되지 않았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함께 있지 않았다. 일본영사는 친절하게도 나를 그의 손님으로 대접했다.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를 초대하는 데 있어서 그의 생활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는 거류지에서 유일한 유럽식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이었다. 그의 큰 친절과 환대에는 외교적인 기민함과 사교적 수완이 매력적으로 결합되었다.
수도까지 동행할 조선인은 고향 마을에 숙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육군 대령과 귀환한 난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후자는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추방 자가 아닌, 나중에 그가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관리는 왕에게 임무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전날 서울로 올라갔었다. 그의 임무는 우리를 위해 가마를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물포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들은 무사히 도착했지만, 조선인들은 여전히 지체했다. 그들이 나타나지 않자, 재촉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에 대한 답변은 글자로나 정신적으로 곧 바다로 나가려는 선박의 "즉시 출발”이라는 광고 문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답변으로 판단하건대, 우리는 이미 자리를 떴어야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우리는 출발하지 않았다. 말만 들으면 기분 좋은 상황이라는 망상에 쉽게 빠진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흘렀는데, 조선인들에게 일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자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침내 지연의 원인이 밝혀졌다. 경호원들이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조선인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 이런 인생관은 여행을 떠나려 할 때만큼 고통스러울 때가 없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길에 나섰을지라도, 조선 사람들은 앉아서 간식을 먹는다. 여행의 불확실성은,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일반적으로 예방적인 조치에 추가적인 유인을 더해준다. 한 끼의 맛있는 음식을 확보한다는 생각과, 언제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본래 자극이 필요 없는 식욕을 더 돋운다. 그렇게 특별한 이유로 인해, 다른 행동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먹는 것을 필요악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의 사물에 대한 개념과는 다르다. 그들이 무엇을 먹을 때, 다른 행위는 대개 불필요하고, 항상 선한 것으로 여긴다. 대부분의 조선인에게는 항상 식사시간이다.
한낮이 되자 드디어 그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지나치게 서둘러서 식사한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계단 위에 모여 있는 친절한 영사관 직원들의 작별인사 속에 출발했다. 언젠가는 거리가 되겠지만, 지금은 산 옆구리에 붙어 있는 판잣집 사이의 위험한 틈새에 불과한 구덩이와 푹 꺼진 웅덩이 함정을 기쁜 마음으로 지나, 우리 행렬은 좁은 길로 들어섰다. 행렬은 인력과 장비에 있어서 잡동사니였다. 일행은 중국인 한 명, 일본인 한 명, 조선인 몇 명, 그리고 나였다. 운반 수단은 그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우리는 말 한 마리와 예의상 의자라고 부르는 가마 몇 개와 인력거 두 대를 가지고 있었다. 인력거는 사람이 끄는 대형 유모차 종류로서 수입품이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막 들여온 것이었다. 그것들은 국내에 최초로 들어온 것이었으며, 일본에서 그것들을 좋아하게 된 조선인들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반도의 모든 도로는 아무리 최고로 좋은 도로라 해도 바퀴가 굴러가기에는 너무 울퉁불퉁하고, 조선인 막일꾼들은 인력거 다루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우리가 1마일도 가지 않았는데 두 대 중 한 대가 부서졌고, 끊임없이 덜컥거리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 대령은 굴러 떨어졌다. 불행한 인력거는 그 자리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서 버려 졌다. 말은 가장 소심한 사람에게 겁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마보다 훨씬 더 빨리 달려가더니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가마들 - 좀 더 묘사적인 단어로는 상자 - 중 하나는 내 몫인데, 얼어붙는 추운 날씨와 비좁은 공간을 참을 수 없어서 걸었다. 내 가마꾼들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방종해져서, 내가 다시 가마를 타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그들은 한참 뒤쳐져 심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칭찬할만한 것이 하나 있었다. 예상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군대식 보급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맥주를 많이 가져왔는데, 석유와 성냥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산물로서 처음부터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물포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가마마다 맥주 두세 병씩 쑤셔 넣는 조치를 취했다. 이 행렬을 면밀히 살피면, 잘 통제되어, 거의 군대 같은 모습이었고, 이 일행의 지도자는 육군 대령이었다. 이 존경할 만한 보급은 안타깝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마를 잃어 버렸을 때, 그 내용물을 잃어버렸고, 이탈의 외로움에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해졌다.
독자가 앞선 설명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길 주변 풍경은 좀 단조로웠다. 따라서 큰 길을 따라 가는 행인들에게 더욱 관심이 쏠렸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보지 못할 수 없다. 멀리 있는 흰 점들로부터,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욕의(浴衣)를 연상시키는 청백색의 헐렁한 옷을 입고, 검은 후광의 모자를 쓰고, 그리고 커다란 안경을 쓴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들은 많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걸었고, 가끔 소수의 사람들만이 말을 타거나 우리처럼 가마를 탔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가장 높은 계층부터 가장 낮은 계층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대표했다. 그들의 길게 흘러내린 예복은 그들의 자연스럽고 품위 있는 느린 행동과 잘 어울렸다. 옷을 만든 것이 조용한 기질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옷인지는 알과 암탉 사이의 태생적 우선순위를 닮은 문제다. 어쨌든, 그 둘은 현재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옷 모양새로나 사람들의 기질로나 볼 때, 조선인들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비록 극동 사람들은 행동이 느리지만, 활기차고 강한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이 유럽의 중산층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중국, 조선 또는 일본에서 여행은 예전의 유럽을 능가한다. 여행의 자세를 당연히 고려해야 되지만, 이동거리가 아니라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여행 시설, 고속 교통, 그리고 잘 꾸며진 숙박시설이 갖추어진 오늘날에는 극동에서도 여행은 상당히 인기가 많다.
이러한 개미와 같은 활동을 하는 원인을 특히 조선에서 쉽게 알아낼 수 없다. 일본에서 참배객들이 여행객의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지만, 참배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핑계에 가깝다. 그 여행은 종교적인 헌신만큼이나 즐거운 여행이다. 참배가 목적인 경우,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즐거워도 용납할 수 없는 시간낭비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상황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 중산층이다. 사실, 참배객들의 대부분은 너무 가난한 계층에 속해 있어서 여행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매년 성금을 내서 협회의 회원으로 등록하고, 이러한 회원들은 매년 일정 수의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 여름에 다른 무리가보내지고, 그래서 결국 각 회원들이 순번대로 모두 참배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행자의 구성이 다르다. 당신이 만나는 것은 신념의 힘이 행동의 에너지로 그림처럼 변하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길 수 없다. 반대로, 당신은 여기서 순전히 세속적인 원인의 결과와, 아무리 희미해도 영원토록 이익을 얻을 행위에 대한 반영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흰옷을 입은 방랑자들이 있기는 있겠지만, 주로 행상인이 아니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돈을 버는 떠돌이 장사꾼들 외에도, 조선에는 여흥을 이유로 혹은 노점 상행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여행을 하는 많은 계층이 있다. 만약 우리가 뛰어난 여행자를 그의 물건이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여행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그 이름에 걸맞다. 애초에 조선인들은 정열적으로 경치를 좋아한다.
이러한 점에서 각 지방의 명소는 철저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목록에 올린다. 이곳에서는 나무 숲, 그곳의 산의 벼랑, 물 위에 비치는 달빛 등을 즐긴다. 그런 곳들은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 구경하러 온다. 매년 조상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이 예절이며,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한다. 매년 수도에서 과거를 치르려고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든다. 수백 마일을, 많게는 수천 마일을 여행한 수백 명중 대부분 낙방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관리 계급 중에는 자리를 얻거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돈을 내지 않으면 명예를 훼손해 쫓아내겠다고 협박함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다니는 문란한 여행이 많다.
그 여행은 우리의 여행과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거의 모두 자국의 한계 안에 있다. 일본, 조선, 중국 세 나라는 각기 애국심이 강하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경멸한다. 그 결과, 옛날에는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나가라고 독려하는 욕구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원칙적으로 너무 가난해서 외국으로 갈 수 없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서양 국가들이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서양 방식의 약간의 사치를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더 배우고 싶은 욕구를 심어주기 전까지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국제적인 여행은 이루어졌으며, 우리가 말하는 중국의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알타이 고원 국가들로부터 중국 여행자들에 의해 수입되었다는 것은 거의 증명되었다. 사실,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우리가 과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우리는 국제 교류가 그것에 수반되었던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구시대 국가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여행은 결국 산발적 이었으며, 해당 국가의 일반적인 제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러한 여행 자세의 결과로서 활기찬 모습은 길로 대변된다. 종종 멀리서도 길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면, 그 곳에 큰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이정표보다 효과적 이다.
풍습은 또한 외국인에게 관상학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든 얼굴이 비슷해 보이는 단계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이웃으로 착각하지 않을 정도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놀랍다.
여행하는 무리의 속도는, 불행하게도, 사슬의 세기와 같이, 가장 약한 구성원에 달려있다. 가마꾼들이 멈추어서, 우리의 속도는 상황에 따라서 평균적으로 거의 고통스러운 수준으로 떨어 졌다. 그날 밤에 도착하기나 할까? 만약 아니라면, 할 수 없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여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이 있는 동안 희망이 있었고, 희망과 함께 마음은 괴로웠다. 해가 저물어 그와 함께 모든 의심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의 암울함이 확실한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경험은 가르침에 있어서 거칠겠지만, 인상 깊은 교훈을 준다. 나는 그날 밤, 길가에 있는 봉놋방에 대해, 따듯한 불 앞에서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많은 독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여관은 조선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처음에는 놀라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잠시 그곳의 사회구조를 고려하면, 그 부족함이 설명된다. 그 이유는 중산층의 부재에 있다. 중산층의 후원이 있어야, 여관 같은 단순한 발명품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역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더 복잡한 것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무력하지만, 계급으로서는 강한 그 계급이 무언가를 원할 때, 숫자의 경제적 힘에 의해 그것을 얻는다. 소수의 부가 조달하지 못하는 편의가 다수를 위해 제공된다. 이제, 여관은(가장 간단하고 그래서 제일 일찍 만들어진 산물들 중의 하나), 한 편으로는 상위 만 명, 다른 한 편으로는 하위 천만 명의 두 계급으로 나뉜 나라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관리들은 소수지만, 그들이 조선이고 나머지는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될 뿐이다. 관료들은 과두정치를 이루며, 여행을 할 때는 당연히 동료들에게 의지해 객사에 숙박하거나, 그들의 길을 따라 중간 중간에 위치한 여러 종류의 관아에 묵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라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얻고, 관아 악단의 도움으로 유흥을 즐기고, 소학도 시킨다. 소수 특권층으로부터의 배척은 대중들 사이에 공통된 형제애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들끼리 여행을 할 때 그의 이웃으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길잡이는 음식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는 주로 쌀을 의미하며, 숙소는 그가 처음 들르려고 했던 집에서 친절하게 제공된다.
대령의 군대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우리는 이 유형들 중 어느 것도 정확히 채택하지 않고, 약간은 군대식 점령의 기미가 나는 어떤 것을 채택할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앞에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조선인들은 말했다. 그 집을 통째로 빌려 밤을 보내려는 요량이었다. 피곤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 마침내 우리가 들었던 바로 그 장소에 멈추었다.
나는 멍한 채로 가마 밖으로 기어 나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여자들은 헛간에서 부엌 불을 지필 나뭇단을 꺼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더니 그들은 무턱대고 도망을 쳤다. 내가 그들에 집중하면서 내 깐에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신중하게 행동했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별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천문학적 목적 외에도 망막의 가장자리는 중간보다 더 민감하다. 그들은 나를 호랑이 정도로 여겼다는 아부성이지만 치명적인 말을 들었다.
객실에 도착했을 때 중국인 통역사들이 제물포로 가는 길에 이미 투숙 해 있는 것을 알았다. 슬프게도 이것을 안 대령은 격렬한 후회에 사로잡혔다. 그는 즉시 나에게 일이 난감하게 된 것에 대해 두서없이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나쁘고, 매우 나쁘다고 말했다. 그것은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그의 후회는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말은 매우 감동적이었지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비슷한 기회가 돌아오면, 그가 아침에 있었던 지연을 정확하게 반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효과적이지 않더라도 후회는 과거를 어느 정도 지우는 것이며, 극동의 예의는 행동보다 말이 훨씬 싸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비참한 저녁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속죄 공식을 반복했다. 마침내 가차 없는 운명에 대한 화해의 기도와 유사한 모습을 취했다. 보아하니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나에게 미치는 것만큼 적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의무상, 나는 그의 유일하고도 정당화된 자기 비난이 근거 없다고 거들었다.
막일꾼들이 쉬는 동안 기다림의 어색한 틈을 메운 어쩔 수 없는 약간의 간식을 먹은 후,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왜냐하면 경호원들이 조금 더 먼 거리 앞에 묵어가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다른 집이 있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시시각각 추워지고 있었고, 밤이 흐렸기 때문에, 이 무렵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잠시 멈춰서 등불을 켰다. 조선에서는 밤에 집 밖을 돌아다니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법으로 등불을 비치도록 되어 있는데, 등불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등불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마치 어둠 속에서 날아다니는 반딧불처럼 보인다. 묵은 초가 흰 종이에 둘러쳐져 있고, 이것은 끈으로 손에 매달려 있다. 때때로 등불에는 이름이 붙기도 하는데, 이는 극동인이 극동의 거의 모든 것에 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결과다. 이러한 뚜렷한 관심으로 인해 불의 광채가 많이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어떤 빛도 통과할 수 없는 커다란 검은 글씨로 이름들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내 등불은 "밝은 달4’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흐린 밤에 유난히 험한 길을 지날 때만큼 달이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이 이름을 그리는 데는 세 글자가 필요했지만, 그것들은 빛 속에서 가려진 것을 만회하려고 애썼다. 그것들은 적어도 두개의 달과 한 개의 태양을 상징한다.
밝다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인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조선인들은 자연을 능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은 한 번에 하나의 조명체 만으로도 조명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명석함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태양과 보름달을 합친다는 개념이 대담하지만 이들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어둠과 등불과 함께 행렬이 낮보다 훨씬 더 그림 같은 모습을 띠었다.
남자들의 고함소리, 가끔 비틀거리는 소리, 그리고 특별히 필요한 땅 위의 작은 달들이 멀리서 보면 수많은 도깨비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그렇지 않으면 불편해 보였을 것 같은 행진이 즐거운 광경을 연출했다. 그런 광경과 소리가 마치 바다의 배처럼 흔들리면서 가마 속에 있는 내게 다가왔다. 앞쪽으로 다리를 꼬고 담요로 덮어 따뜻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내 발은 추워서 통증이 왔고, 갑자기 흔들리는 동작이 멈추고, 가마가 격렬하게 땅에 내려앉을 때,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마꾼의 행동에는 때때로 그저 놀랍기만 한 단호한 돌발성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목적의 보다 일반적인 자동적인 비융통성, 즉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는, 칭찬할 수 없는 끈질긴 결심과 같은 뜻이다. 그것들은 한번 작동하면 멈출 수 없고, 한번 멈추면 다시 멈추는 데 영원히 걸리는 잘 조절된 기계와 같다. 이 경우, 이번만은 그들의 행동이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나의 욕망과 일치했다. 나는 특히 발이 저려 가마에서 나와 혈액순환이 다시 잘되길 바라며 위 아래로 빠르게 발을 굴렀다.
그러는 동안, 주인은 그의 입장에서 망설일 수도,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를 맞이하기 꺼려할 수도 있음에도 티를 내지 않았고,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청하였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벽의 입구를 지나서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밤은 너무 어두워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검은 하늘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땅의 구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시뻘건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로 보건대, 사방이 막히고 움푹 꺼진 공간 한가운데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 구멍 속에 바쁘게 덤불을 쑤셔 넣고 있었다. 반 지하에 있는 불구덩이와 그것을 관리하는 악귀들 만이 보이는 전부였다. 그것은 따뜻한 조선식 환대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지옥문을 생생하게 암시했다. 그것은 조선어로 적절하게 "입”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주막의 입구에 있고, 전혀 해롭지 않은 일종의 지하 난로로서, 돌과 나무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연통이 집의 지하실 역할을 하고, 그 위에 있는 방바닥이 일단 데워지면 밤새 따뜻해지게 된다.
사내들이 우리를 위해 구들을 데워주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방은 매우 작아서 겨우 사방 8피트의 작은 감방 같았고, 작은 출입문과 기름종이로 완전히 덮인 조그만 구멍만 있었다. 그래서 늘 빛도 거의 안 들고 공기가 결코 잘 통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는 마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준비 중이었고, 그 사이에 나의 일본인 젊은이와 나는 두루마기로 몸을 감싼 채 감방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선집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바닥이 데워질 것을 갈망해서인지, 기대감으로 인해 벌써 약간 더 따뜻해진 듯했지만, 오래 기다려도 어떤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방바닥의 모든 부분을 세심하게 만져본 결과, 마침내 한쪽 모서 리 온도가 약간 상승한 것을 알았다. 온기가 방 밖의 불에서 가장 가까운 모퉁이로부터 서서히 퍼져나가 장판의 모든 부분 이 만지면 따뜻했다. 열은 바닥에서 공중으로 전달되었고 우리는 걸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해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되었을 때쯤, 방은 아주 아늑했다. 덮고 잘 이부자리에 기대어, 우리가 도발한 악귀의 특성을 무시한 채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나 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궁이 내부에 있는 느낌이 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황급히 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숨을 쉬려고 했지만 문은 매우 작았고, 문은 야외로 통하는 대신 한쪽으로만 열린 마루로 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환기는 거의 되지 않았다. 아래에서 오는 열은 줄어들지 않고 더 많아졌다. 바깥의 공기는 영하 아래로 많이 내려갔음에도 나는 남아 있는 내 옷의 대부분을 과감히 벗어 던졌고, 그래서 다시 살 만해져 잠을 청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나는 고통스럽게 깨어 있었다.
그러므로 과학을 시도했고,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실험적으로 두 가지를 대조할 수 있는 예외적으로 유리한 기회를 가진 김에, 극심한 더위와 추위를 비교함으로써 그 불편함을 냉정하게 추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느낌은 과학을 압도했다. 외국인이 원주민보다 온도에 대한 민감성 이 훨씬 크다는 것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지금 덕보고 있는 것은 조선인들의 친절이지 않나? 어쩌면 이러한 일반화는 성급했다. 비록 조선인들은 이웃한 몇몇 방에서 아주 조용히 자고 있었지만, 그들이 편안하다고 해서 나도 편안하리라고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금 전의 내 욕망을 너무 완전히 충족시킴으로써 발생한 희생자였다. 나 자신도 현명하지 못하게 그들에게 불을 충분히 때라고 종용했다.
그리고 난 불행에 빠졌다. 인간의 소망이 지나치게 허영됨을 되새겨 보았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 때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적어도 한 번은、많으면 많을수록 더 적어지는 자비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고, 열이 식는 징후를 감지했다고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한동안 나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조차 실패했다. 마침내 나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아궁이에 땔감을 넣던 사람들이 잠든 지 오래 되었고, 뗄 감이 고갈되면서 몇 시간동안 끊임없이 내뿜던 열기가 문을 통해 빠져 나간 효과 덕분에 방이 다시 한 번 살 만하게 되었고, 나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