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2.4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는 그 종교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메시아’, ‘구세주’로 인정하는 모든 종교적 집단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라는 고백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소위 종교개혁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solo Christo, 라틴어의 탈격)라는 말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기독교’의 시작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들이 마치 소위 ‘종교개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소위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을 ‘오직 그리스도’가 훼손된 것으로 판단했던 소위 ‘종교개혁가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 당시 부패한 기독교를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소위 ‘종교개혁가들’은 확신했다. 물론 이러한 ‘오직 그리스도’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sola scriptura’(오직 성서)와 분리될 수는 없다. 보다 더 명확히 말하면 ‘바울의 글’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소위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가지는 ‘대속’의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교황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패를 척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앞에서 살펴본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에서처럼 ‘오직 바울’과 같은 바울 중심적인 기독교로의 왜곡을 가속화시켰다. 물론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직 그리스도’는 ‘오직 바울’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말’이 마찰될 때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선택하게 되었다. 물론 ‘바울의 말’을 중심으로 소위 ‘기독교’가 전개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소위 ‘종교개혁’을 통해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그것이 ‘말씀’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는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가 ‘바울의 기준’에 따른 것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른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는 사실상 ‘본래적인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인간들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그리스도’로의 변질을 의미한다. 그냥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것이 겉보기가 아닌 본질적으로 ‘신의 뜻’과 ‘신의 나라’만을 위한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명을 걸고 분석하고 검증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종교부패’의 ‘수단’이 될 뿐이다.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오직 그리스도’와 관련된 다음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 논제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체 삶이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Dominus et magister noster Iesus Christus dicendo 'Penitentiam agite etc.' omnem vitam fidelium penitentiam esse voluit.).
* 논제 60 : 그리스도의 공로(노임, 형벌 받은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보물이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Sine temeritate dicimus claves ecclesie (merito Christi donatas) esse thesaurum istum).
물론 ‘95개조 논제’에서는 ‘오직 그리스도’가 전면에 나오지는 않는다. ‘교황의 일반적 사면권’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독려하는 마르틴 루터에 관해서는 앞에서(6.3.2.1.2 면죄) 다루었었다. 특히 ‘논제 88’에서 우리는 그 내용을 살펴보았었다:
* 논제 88 :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에 참여하는 것을 지금 하루에 한번 주고 있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선하고 은혜롭게 되겠는가?
하루에 백번이라도 교황이 사면권을 행하는 것이 교회가 더 선하고 은혜롭게 되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마르틴 루터는 그가 ‘면죄부’ 설교자들을 비판했던 비판을 자신도 ‘교황의 사면 설교자’로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사면권에 관한 것은 돈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고 강조했었다. 문제의 핵심은 ‘사면권 자체’이며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신의 고유한 통치 행위’에 속하는 것임을 배웠다.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마르틴 루터는 ‘논제 1’에서 그리스도의 회개와 관련된 말씀에 중요성을 둔다. 그런데 ‘신자들의 전체 삶이 참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그것이 ‘교황의 사면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연결해서 이해하면 ‘전체 삶의 회개’는 결국 ‘교황의 사면권’과 연결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회개’를 강조할수록 그것은 ‘교황의 사면권’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 ‘성직자의 권력’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경악스럽다. ‘논제 60’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공로’(노임, 형벌 받은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라는 표현도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단화’, 이것이야말로 본질적 ‘종교개혁의 대상’인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인간의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대가로 인간이 ‘부와 권력’을 취하려고 하는 모습은 ‘인간성 말살’의 참혹한 현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소위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수단화’를 향해 내리닫는 차에서 브레이크를 제거해 버렸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이용하게 만들라!”: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과 ‘신의 나라’를 파괴하기 위한 사단의 공식적 전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틴 루터의 사상은 「루터 전집」(WA: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 1883-)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우선 마르틴 루터는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만 가리키고 있다”(WA 10, 73)고 본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마르틴 루터는 특히 복음서가 아닌 서신서들을 복음서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으로 그 위치를 높인다: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구분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리스도만을 설교했기 때문에 그들의 서신들 역시 다름 아닌 복음이다”.(WA 1, 10)
이러한 그의 글들은 이미 마르틴 루터가 ‘바울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표현들이며 마르틴 루터가 생각하는 ‘믿음’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치 베드로와 바울의 서신들을 복음과 동등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은 베드로와 바울의 글들이 복음을 평가하고 설명하며 제한시키는 기준이 된다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다. 소위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복음의 글들은 베드로와 바울의 글들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더욱 잃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1525년 종려 주일에 빌립보서2:5 이하의 내용으로 설교한다. 성서 본문은 다음과 같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2:5-8)
이러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루어지는 마르틴 루터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이어서 ‘바울’을 높이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의 말[서신서 내용]로 하늘을 연다. 그리고 우리가 신적 위엄의 깊이를 볼 수 있는,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아버지다운 마음의,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은혜로운 의지와 사랑을 볼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해 준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영원으로부터 저 영광스러운 인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해야 하고 행하셨던 것에 기뻐하셨다는 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누군들 마음이 기쁨으로 녹아지지 않겠는가? 누가 사랑하고 찬양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온 세상의 종이 되며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보다 못한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 자신이 그를 매우 높이시며 매우 풍요하게 부어주시며 그의 아들의 순종을 통하여 그의 아버지의 의지를 증명하신다는 것을 알 때 말이다”.(WA 17, 244)
마르틴 루터의 설교는 ‘우리의 기쁨’에 집중한다. 바울 또한 그걸 원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야만 했던 일,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을 우리는 기뻐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죽은 것을 기뻐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을 마구 기뻐해야한다는 말이다. 소름끼치지 않는가? ‘신’이 우리를 위해 죽어야만 했다는 말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라도 주님을 죽였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님이 죽는 것을 기뻐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존재가 사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 주님이 ‘대신’ 죽은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도 소위 ‘내가 사랑한다고 여기는 주님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연쇄 살인범의 기쁨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여기서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는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생각하는 ‘복음’인 것이다. ‘기쁜 소식’인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기쁨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온 기독교에 퍼져 오염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쁨’을 갈망하면서도 ‘신의 고통’에 무감각한 영혼 없는 ‘좀비’(Zombie)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만족’(genugtun, satisfaction)의 측면에서도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만족’을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가[그리스도] 제사장의 직무를 따라 제사장이 되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야 했다”(WA 10, 1, 720, WA 10, 49).
신이 만족하는 것은 어떤 ‘대신하는 것’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마르틴 루터는 믿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서 있고 우리 모든 죄를 그의 어깨 위에 지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만족이고,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화해시킨다.”(WA 10, 49)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 하셨다”(WA 29, 578).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순종하셨다”.(WA 39, 53)
마르틴 루터는 여기서 더 나아가 ‘놀라운 교환’(WA 5, 608)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러한 ‘교환’ 속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지고 있는 모든 부채와 죄책을 자신이 지신다고 확신했다.(WA 31, 339) ‘죄인인 우리’와 ‘죄 없으신 주님’을 맞바꾸는 ‘교환’, 그래서 주님이 ‘죄인’이 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죄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래서 주님이 ‘우리 대신’ ‘죗값’을 치르셔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처형’ 당하시게 됐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단지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간 욕심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악’ 가득한 생각은 ‘사악한 인간의 이기적 본능’에 가장 충실한 생각이며 이러한 생각에 기초를 두고 생겨난 소위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오염된 상태로 사람들을 부패시켰다. 종으로서 신의 명령에 복종하며 신의 나라를 위해 삶을 바쳐야 하는,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장 고귀한 기쁨으로 여겨야하는 바로 그 ‘기쁨’을 상실한 채 오히려 소위 기독교는 이러한 신과의 관계성을 파괴시키며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신을 죽이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라고 독려하는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러한 ‘교환’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사도적 교부 문서 중 하나인 저자 불명의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적 의미에 대한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았었다[2. 사도적 교부들 (90-14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주셨으니, 범죄자들을 위하여 거룩하신 분을, 악한 자들을 위하여 죄 없으신 분을,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의로우신 분을, 썩어 없어질 자들을 위하여 썩지 않으실 분을, 죽을 자들을 위하여 죽지 않으실 분을 주신 것이다. 그의 의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우리의 죄를 덮어 줄 수가 있으리요? 하나님의 독생자를 힘입지 않는다면 악하고 경건치 못한 우리가 어찌 의롭게 될 수 있으리요? 고마운 교환(交換)이로다! 신비스러운 지혜로다! 예측할 수 없는 은혜로다! 많은 자들의 악이 한 분 의로우신 자 안에서 가리움을 받으며, 이 한 분의 의가 많은 범죄자들을 의롭게 하다니!”(Chap. IX)
결국 마르틴 루터는 ‘교환’에 근거를 둔 소위 ‘사도’들의 사상과 사도적 교부들의 ‘그리스도 오해’를 ‘개혁’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당시 부패한 ‘교황권’에 맞서는 것과 같이 보이는 구조 속에서 ‘종교 개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주님을 수단화시키는 ‘왜곡된 그리스도 사상’을 ‘진리’인 것처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죤 칼빈(Jean Calvin)에게 있어서도 별 차이가 없이 나타난다. 아니, 그런 차이는 있을 수 없었다.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 ‘진리’라고 ‘교육’되고 ‘믿어져’ 왔으며 ‘고백’되어진 성서적 전통을 어떻게 ‘한 인간’이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성서적 전통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그 한계에서 그 또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죤 칼빈은 자신의「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서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져야만 한다고 보는 ‘중보의 기능’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숭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본래대로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는 중보 없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기독교 강요, 2권, 12장, 1.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깊고 먼 거리를 연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보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와 신과의 화해를 위해 주님께서 하신 일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는 것’이라고 죤 칼빈은 확신한다: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복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믿음은 이 토대 위에서 안정하지 않으면 굳게 서 있을 수 없다”.[기독교 강요, 2권, 12장, 3.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에 복종 할 수 있었다]
죤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바울의 견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아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그리스도]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5:18-19)
‘주님’이 ‘아담’을 대신해서 ‘신’에게 복종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담’의 죄는 ‘아담’이 감당해야하는 것이다. 결코 누군가 대신 그것을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이미 에스겔 18장에서 “아버지가 먹은 신 포도로 인해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했던 문제들을 개념 없이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의 생각이 ‘구약 따로 신약 따로’라는 말인가? 바울의 견해는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일관성’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18장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5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
9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
13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4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
17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18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19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에스겔18:1-32]
‘신’이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서 다시는 이런 속담을 쓰지 말라고 한 것을 ‘바울’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에스겔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해하질 못했다는 말인가? 아무튼 ‘바울’의 견해는 ‘신’을 공평하지 않다고 공격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것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누군가 대신 그것을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이 ‘신의 법’이다. 그러한 ‘신의 법’을 ‘주님’이 따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주님’이 ‘신’을 거역했다는 말인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러한 ‘신의 법’을 명확히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울’은 ‘신성 모독’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신의 말씀’과 하나인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복종하며 지켜야 함을 강조하신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한복음14:23-24]
결국 여기서 분명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 대신 죗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주인님’인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주님’을 ‘주인님’으로 ‘믿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인님이 우리에게 명령한 일을 주인님이 대신 하시고 우리에게 잘했다고 ‘상’을 준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주인님’에게 말한다면 ‘주인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대답하시겠는가? 이렇듯 말도 되지 않는 것을 편지에 막 쓴 것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아니, ‘주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소위 기독교의 기반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대신’은 없다. 각자가 ‘신’ 앞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삶의 현장에서 지키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단의 공격’이다. 비록 그것이 소위 ‘교회’라는 공간 내에서 마치 ‘신의 말씀’처럼 선포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것이 ‘진리’라고 공인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이며 ‘악’이다.
죤 칼빈은 ‘구속자’로서의 주님이 ‘다윗의 후손’이어야만 했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대망했던 구속자는 하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 즉,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이 일은 경건자들에게 혜택을 더한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무수한 신탁이 환영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더욱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방금 설명한 점을 특히 지지해야 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모두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은 육신을 제물로 바치셔서 그 대속 행위로 우리의 죄를 말소하시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기독교 강요, 2권, 12장, 3. 참 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에 복종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성서에 나타나는 ‘구속자’는 정치적 메시아였다. 대신 죽는 구속자는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고난과 연결되어 많이 사용되는 이사야53장의 경우도 그것이 ‘주님’과 연결되는 구절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비약시켰다. 이사야53:10에는 소위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설명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구절을 ‘주님’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면 주님이 자식을 가지게 되고 오래 살게 될 거라는 말이다. 틀렸다. 따라서 죤 칼빈이 주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이기에 ‘다윗의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은 성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아무튼 죤 칼빈은 ‘주님’을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신의 진노’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통해 신을 달래겠다는 ‘야만적인 믿음’일 뿐이다.
물론 죤 칼빈은 이에 관한 성서적인 근거를 대고 있다:
“그리스도가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오신 이유를 설명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써 우리를 모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증언을 하였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가르치기 전에(요1:14) 인류의 반역을 말한다(요1:9-11).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왔으니, 듣는 자는 살리라”(요5: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18: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9:12). 모든 구절을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기독교 강요, 2권, 12장, 4.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근거라고 여겨지는 구절들은 ‘인신공양’을 자명한 ‘진리’로 오해하는 자들이 잘못 해석한 구절들일 뿐이다. 결코 그 구절들은 ‘신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함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신공양’을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죤 칼빈의 생각에는 마르틴 루터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확실히,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예로운 제사장직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신인(神人)간을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임명되기 때문이다(히5:1). 또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아니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위해서(고후5:19)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성경이 그에게 드리는 모든 칭호를 잃으셨을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는(롬8:3-4) 바울의 발언도 소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셨을 때에,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무한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딛2:11)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사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기로 결심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이 명령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로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아버지의 진노를 푸는 희생이 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기독교 강요, 2권, 12장, 4.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아니다! 틀렸다. 그래서 ‘신의 진노를 푸는 희생’ 운운하는 바울의 발언은 소멸되어야 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처럼 가르친 것도 허사이다. 아니, 범죄이다. 그래서 그러한 바울의 불법적 말들과 행위들을 금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을 높이고 동조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신의 진노’를 푸느라고 희생되었다고 동일하게 말하는 죤 칼빈의 글들 또한 소멸되어야만 한다.
죤 칼빈은 바울의 글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주님에게 해당되는 ‘인신공양’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 15, 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3:14). 또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 23)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육신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리신다. 즉, 우리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희생과 속죄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같은 의미에서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눅1:79)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오셨다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는 알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며”(골2:3), 그를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울은 자랑한다(고전2:2)“.[기독교 강요, 2권, 12장, 4.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바울의 글이든 복음서의 글이든 그것이 주님의 ‘인신공양’을 당연시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주님의 ‘인신공양’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틀린 것이다. 주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행하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결단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인신공양’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을 제거하기 위한 사단의 공격일 뿐이다.
결국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는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야할 제일 좋은 희생 제물, 우리가 선택한 죽을 대상,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만족이 되고 기뻐할 일이 되는 ‘유익하고 좋은 존재’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존재 덕분에 인간들은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러한 생각들이 어떻게 그 오랜 기간 ‘진리’라고 여겨질 수 있었는지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니 자랑스럽게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며 다닌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