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서원
길고 지루한 마른장마가 계속되는 나날이다. 산과 들은 짙은 녹음에 묻혔고 대기는 후텁지근한 습기로 가득 찼다. 이런 절기에 간산(看山)은 최악이다. 덥고 습한 날씨가 산을 오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행룡(行龍)은 녹음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情) 때문일까. 스무 명이 넘는 학풍 회원들이 24인승 전세버스를 가득 채웠다.
강당
학풍회 7월 간산지는 경북 영천(永川)이다. 울산에서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지만 영천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래서일까. 간산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는 ‘영천 대말×’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학설이 소개될 뿐이다.
사당
첫 번째 간산지로 도착한 곳은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위치한 도계서원(道溪書院)이다. 서원은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산자락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를 배향한 서원답게 그 앞에 노계시비(蘆溪詩碑)가 세워져 있고 시비의 뒷면에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柹歌)가 새겨져 있다.
노계시비
조홍시가
서원건물은 강당과 문묘만 있는 극히 단출한 구조이다. 관리인이 상주하지 않는 듯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서원 정면에 조성된 연못을 지나 100미터 정도 떨어진 산록에는 잡목에 싸인 1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박인로의 묘이다.
비석
박인로 묘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과 상석이 아니라면 어느 묘가 박인로의 것인지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조선 중기를 살다간 인물로서 9편의 가사와 70여 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정철·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대시인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안산
도계서원이나 박인로의 묘에서 특별한 풍수적인 고려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인로의 묘에서 바라본 앞쪽 산의 산세가 부드럽고 평탄한 느낌을 주는 정도랄까. 하기야 요즘같이 부단히 객지를 떠돌다 한 생을 마치는 시절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땅에 묻혀 길이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런지.
안산에서 바라본 광주이씨 시조묘의 주산
광주이씨 시조묘
이번 간산의 하이라이트라고 해야 할 영천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始祖)인 이당(李唐)의 묘는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위치해 있다.
성현이 광주이씨 집안을 평한 글
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예를 갖추고 있는 학풍회원들
‘광주이씨’ 집안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서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지은 성현(成俔)이 “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라 하여 당대 최고의 문벌로 인정하였을 만큼 우리역사에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동고(東皐) 이준경(李俊慶: 1499~1572),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등 상신(上臣) 5명, 문형(文衡: 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功臣) 11명을 배출하였고, 현대에 들어서도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용훈 대법원장,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옥 전 외교부 장관, 이중재 전 국회의원, 이종구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광주이씨는 고려말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둔촌(遁村: 오늘날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은 이집의 이 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집(李集: 1314~1387)의 아버지인 이당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문인석
망주석
그런데 경기도 광주를 근거지로 한 광주이씨의 시조 묘가 어떻게 영천에 있는 것일까. 그 유래를 설명해 주는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 사이에 얽힌 아름다운 설화가 전해진다.
주산(主山)
안산(案山) - 낮고 평평하게 이어진 모습이 장관이다. '이끼 야(也)'의 제일 아래 획에 해당한다.
고려 말 공민왕의 스승이기도 하며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온 신돈이 득세하면서 권문세족들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당시 사간(司諫)을 지내던 최원도(崔元道)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최원도와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 또한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화가 닥칠 것을 예상한 그는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친구 최원도를 찾아 영천으로 향했다.
수개월 만에 도착한 영천 친구의 집.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최원도의 생일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고 반갑게 맞이할 줄 알았던 친구는 뜻밖에도 소리를 지르며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집은 그런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고 한밤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날이 어두워지자 이집을 찾아 나섰는데, 마음이 통한 것인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친 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그 이후로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을 보내게 됐는데 최원도는 이 사실을 가족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제비’라는 이름의 몸종이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게 하고 반찬의 양도 늘리게 하고도 그릇을 싹 비워내는 주인을 이상하다 여겨 문틈으로 엿보다가 이씨 부자를 발견하게 되고 깜짝 놀란 몸종은 이를 최원도의 부인에게 알렸다.
그 연유를 묻는 부인에게 최원도는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며 가족과 몸종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할 것을 일렀다. 하지만 행여나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지화를 입을까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던 몸종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사실을 안 최원도는 애처로워하며 그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자기 어머니 묘 부근에 묻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의 부친 이당도 다락방에서 운명을 달리하게 되자 최원도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마냥 매우 슬퍼하며 자기의 수의까지 내줘 정성껏 염하게 했다. 그리고 묏자리도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의 어머니 묘 부근에 내어줬으니 이곳이 바로 이들의 우애에 하늘도 감복한 명당이 됐다.
광주이씨 시조묘에 대해 설명하고 계시는 호림당(虎林堂) 선배님
이로 인해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후손들 간에는 이집과 최원도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최원도의 어머니 영천이씨의 묘 - 이당의 묘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조선의 8대 명당 중 하나라고 하는 이곳 광주이씨 시조묘 터는 야(也)자 형국이라고 하는데 이당의 묘는 ‘이끼 야’(也)자의 아래내림 획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무덤으로 이어지는 행룡
본격적으로 무덤을 답사하기에 앞서 안산에 해당하는 산에서 무덤 터를 바라보니 무덤 뒤의 산세가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당의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및 조산
왕릉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고 완만한 둔덕에 자리 잡은 이당의 묘에서 좌우를 바라보니 잘생긴 좌청룡, 우백호의 산자락이 부드럽게 터를 감싸고 무덤 주위로 빽빽하게 심어놓은 소나무들도 읍(揖)을 하는 듯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무덤 주위의 소나무숲 - 소나무가 모두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 좋은 터의 나무들은 지기를 받기 위해 혈처를 향해 가지를 뻗는다고 한다.
그리고 무덤 앞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낮고 길쭉한 산줄기가 긴 타원으로 무덤을 환포하고 그 산줄기 너머로 다시 여러 갈래의 산줄기가 서로 겹치고 포개지며 무덤을 향하고 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진다.
학풍회원들
한편, 이당의 무덤 뒤로 또 하나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무덤이 최원도의 어머니 영천이씨의 묘라고 한다. 불과 몇 미터의 차이로 혈처와 비혈처가 갈린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임고서원 -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영광루
포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은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위치해 있다. 1553년(명종 8)에 창건되어 1555년에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에 옮겨 건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5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성역화 사업을 한다고 곳곳을 파헤쳐 놓았다.
강당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년~1392년)는 이곳 영천 출신으로 고려의 문신이자, 정치가·유학자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죽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익양 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강당
정몽주는 같은 시기 다른 정치적 노선을 택해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된 정도전과 흔히 대비되는데 당대의 정치적 업적에 비해 그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다. 포은의 절개에 대한 조선왕조의 지나칠 정도의 표창은 다분히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인 고려로 보인다.
여막(廬幕) - 정몽주는 부모상을 당해 이와 같은 여막에서 3년상을 치뤘다고 한다. 성리학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그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관혼상제 등 예법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수용된 듯하다.
서원 한 모퉁이에 포은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3년 시묘 살이를 하면서 지내던 여막을 재현해 놓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을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이라는 수직적 질서로 치환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가 효 사상의 지나친 강조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리학이 구축해 놓은 교묘한 상징 조작들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이상의 강력한 힘을 가진 듯하다. 조선왕조가 몇 차례의 중대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5백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일 수는 없을 터이다.
경주김씨 지사공 종택 전경
대문
본채
경주김씨 지사공 종택은 임고서원에서 멀지 않은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 위치해 있다. 조그만 둔덕의 한 자락에 위치한 ‘ㅁ’자 형태의 집인데 집 가운데 우물을 낀 마당이 있고 마당 앞쪽에 사랑채와 그 양쪽의 곳간 채가 붙어있어 ‘ㄷ’자 형태를 취하고, 마당 뒤쪽에 ‘ㅡ’자형의 안채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가 된다.
사당
남강정사
집 뒤로 높은 축대 위에 사당건물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김연(金演: 1552~1592)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또 집 앞쪽으로는 제법 널찍한 연못이 있는데 그 못 귀퉁이에 김연의 아들 김취려(金就礪)가 강학을 하던 남강정사(南岡精舍)가 세워져 있다.
점심식사 전의 간식
점심식사 장소에 매어져 있던 백마 - 마사회가 영천으로 옮긴다는 말이 있다. 어쩌다 영천은 말의 고장이 되었을까.
매산고택과 그 뒤의 주산
3칸 솟을 대문
오리불고기에 막걸리를 곁들인 늦은 점심을 먹고 찾아간 매산고택(梅山古宅)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에 위치해 있다. 이 고택은 18세기 중엽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가 짓기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 정일찬(鄭一鑽)이 완성한 것이라 하는데 3칸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약 1.5m 높이의 기단 위에 본채가 서 있다. 본채의 건물은 ‘ㅁ’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가 일품이다.
사랑채
본채
집안에서 바라본 안산
이곳의 형국은 매화낙지형(梅花落枝型)이라고 하는데 집안에서 바라본 앞산이 둥그스름한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어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는데 집밖을 나와 주위의 산세를 돌아보니 과연 이름은 헛것을 전하지 않았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사방의 산이 모두 둥글둥글한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어 마치 마을 전체가 꽃잎에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거조암 영산루
거조암 영산전
거조암 영산전
은해사의 부속암자 거조암의 영산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집이다.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등과 함께 여말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점심때 마신 막걸리가 남긴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고건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라며 속인의 무절제한 삶을 경책하는 듯한 눈빛의 500여위 나한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발렌타인 30년산
울산대학교 근처의 한 돼지국밥집에서 간산 뒷풀이가 이어졌다. 기표당(騎彪堂) 선배님이 당호주(堂號酒)로 30년산 발렌타인을 내놓았다. 30년의 세월이 맥주에 희석되고 왕생, 왕생, 왕생혈이 외쳐졌다. 우리 학풍(鶴風)도 저 30년의 세월로 숙성되기를....
2010년 7월 10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첫댓글 영천 주위를 돌면서 많은 발걸음을 했군요.역시 매산고택의 사랑채가 눈길을 끕니다. 사실 거조암의 영산정도 눈여겨 볼 만한 건축양식인데 예전과 달리 손을 댄 흔적이 많습니다. 영천의 길지라 하면 임고의 free님과, 금호의 들국화님 자택이 아마 제일 명당자리라 믿어봅니다. 암튼 날도 더분데 댕긴다고, 글 쓴다고 월지아우 욕 봤심더.
그러게요. 개인적으로 갔다면 미리 연락해서 두분의 생가를 둘러보고 풍수적인 감평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다음에 우리 연하고질에서 한번 가지요 뭐.ㅎㅎ
담에 갈 때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은퇴 후에 영천서 살자고 영천 친구가 권해서 ...
영천에 땅값도 싸던데 오막살이 집한채 지아가 같이 살지 뭐~~~!
예로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영천땅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사실은 월지대사의 간산기를 보고야 알았네....
김문수 지사도 영천 사람이라 하던데...
하긴 연하국에도 몇사람있지..백고무신님을 비롯하여 ㅍ씨, ㄷ씨....
근데 영천 거시기의 유래는 와 안적어 놨누????
영천시는 과거 몽골 말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산악지형에 길들여지며 '영천대말'이 됐다는 유래에 착안해 경북도축산연구소와 공동으로 대말의 신체특성을 살리고 한국지형에 맞도록 육종개량을 통한 영천대말을 만들기로 했다. 또 영천대말축제를 열고 시 상징동물을 비둘기에서 말로 바꾸기로 했다. 김영석 영천시장은 "영천대말의 웅장한 의미를 살려 지역발전의 기폭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갈산님, 이제 궁금한 것 풀렸시유.ㅎㅎ
상세한 유래 해설 감솨합니다....영천말에 대하여 그런 깊은뜻이 있을줄이야...
영천시장이 말하느 영천대말의 "웅장한 의미"가 참 궁금합니다. ㅋㅋㅋㅋ
그래도 그렇지, 영천 大馬가 '대단하다' 정도는 이해되지만 '웅장하다'라는 표현은 거품이 좀 심하다. 덩치 큰 아프리카 코끼리도 그 정도는 아닌데...
정철, 윤선도에 대해선 국사시간에 약간 배웠지만 박인로에 대해선 몰랐네요. 귀중한 정보를 한 수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최원도와 이집의 돈독한 우정에 감복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그집의 몸종은 오히려 죽지 않는 방법이 현명할텐데요....옛과 비교할순없지만 박용하와 소지섭의 우정도 아름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