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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스크랩 진주시계 7구간 (비리재~창촌교)
조은산 추천 0 조회 277 13.01.29 07: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주시계 7구간

 

 

 

2013. 1. 4 (금)

산길 : 비리재~창촌교

사람 : 객꾼 학봉 조은산

거리 : 20.8km (누계 113.9/167)

 

 

 

구간거리

비리재~5.4~나동공원묘지~2.4~연평고개~2.8~진수대교~4.7~덕천교~5.5~창촌교 / 20.8km

Cartographic Length = 24.4km Total Time: 09:00

 

07(비리재~창촌교).gpx

 

 

 

 

오늘은 제대로 걸은거 같다. 해뜨기 전에 올라붙어 아홉시간을 걸었다. GPS에 찍힌 거리가 24키로 이니 순우리식으로 60리 길이다. 오리탕집에 1시간 퍼져 앉았고 중간중간 쉰 시간을 빼면 시속 3km가 더 나왔는데, 거의 절반이 도로주행이다.

 

 

이번구간 내동면, 대평면, 수곡면을 지나고, 바깥으로는 사천시 축동면, 곤명면에 이어 하동군을 만난다. 내동면은 한자로 奈洞面인데, 奈자의 사전 설명은 [奈 어찌 나(내)] 이다. ‘내’로도 읽고 ‘나’로도 읽는다는 얘기라, 그래서 ‘내동’, ‘나동’이 혼용되고 있다. 나동터널(내동터널), 나동공원묘지(내동공원묘지) 등인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과거 진양군 나동면이었으나 진주시로 통합되면서 내동면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근거가 약한것이 조선시대에 이미 경상도 진주군 내동면(奈洞面)이 있었다. 하기야 옛 문서에 문자표기는 奈인데 어떻게 소리내어 읽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고, 어쨌거나 현재 공식적인 행정명칭은 ‘내동면’이다. 아마도 한자 奈를 한 식견 한다는 식자(識者)님들의 따로 노는 개성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절반가량 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강변길인데, 오늘 강을 네 번 건넜다. 두 번은 다리 위로 건넜고 두 번은 물 위로 건넜다. 강물을 건너가는 시경계를 최대한 근접해서 따라가려다 보니 나름대로 최선책이라고 고른것인데, 안전을 우선시 한다면 경계선을 많이 벗어나는건 물론이고 시간도 그만큼 더 든다. 반면 신속이나 정확을 우선시 한다면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안전은 무시해야 할 판이라. 그 위험이란게 오히려 달리 생각하면 특별한 재미를 부여하는 요즘말로 ‘이벤트’ 정도로 여길 수도 있는 소소한 위험이다.

 

 

진양호를 건너는 진수대교와 덕천강의 덕천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가화강과 덕천강 물을 건너는 일이 이번구간 난제라면 난제이고 이벤트라면 이벤트가 된다. 가화강은 시경계선 부근이 물이 깊지 않아 건널만 한데, 덕천강 시멘트 보(洑)는 물보다 다른 문제가, 못 들어가게 철책 울타리가 쳐져있다는 것이다.

 

 

 

 

 

07:20 비리재

08:10 ×168 (낙남정맥 갈림)

08:43 가화강

09:35 ×176

09:40 진주시폐기물매립장 안부

10:15 내동공원묘지

11:33 2번국도

11:57 낙남정맥 갈림 (150m)

12:06 ×185

12:25 진수대교

12:40 내촌삼거리

13:48 진주시계

14:20 사천녹차단지

14:40 덕천강 (두인보)

15:00 덕천교

15:16 원외교

16:16 창촌교

 

 

 

 

학봉이 친구 참 부지런타. 다른건 몰라도 항상 약속시간 보다 더 부지런타. 부지런하다는 게으르다의 반대인데, 약속시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하면 이제 집에서 나서는 놈이 ‘다 와간다’하는 어느 누구와 반대가 된다는 말이다. 그 어느 누구란 아는 사람 다 안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어느 모임에 가도 이런 사람 있게 마련이다.

 

 

'내서IC 06:00' 약속이지만 늘상 진영휴게소 지날 때 쯤이면 전화벨 울린다. 벌써 나온 것이다. 저도 스스로 병이다 하지만, 이거는 천성이고 요즘말로 스타일이다. 사람마다의 스타일. 이거 쉽게 안 바뀐다. 스타일 바뀌면 죽는거라는 말도 있듯이.

 

 

객꾼은 객꾼스타일이다. -저그집 앞에 도착해서 전화해야 나오는- 그래봤자 2,3분이니 이거는 애교로 볼만도 하다. 중앙시장 제일식당. 여러번 갔더니 써빙하는 아가씨도 이제 알아본다. 추운 날씨에 모자를 쓰지 그랬냐한다. 그래도 지 모자 벗어 줄 사이까지는 아닌가보다. 오늘도 점심은 진수대교 근처 식당을 염두에 두고 따로 준비 안했다.

 

 

 

 

 

비리재

 

 

 

비리재 (70m)

진주시 내동면과 사천시 축동면의 경계로 1049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내비에는 ‘유수역’을 찍고 조금 더 올라가면 비리재다. 택시기사님은 축동고개라 하더만 지도에 표기는 비리재라. 영하12도. 지난번에 말짱하던 길이 하얗게 변해 스패츠를 두르고, 안면마스크까지 썼다.

 

 

이정표에는 [솔티고개7.7km]로 되어 있지만 우리도 솔티고개를 가기는 가는데, 가화강을 건너는 지점이 낙남정맥과는 다르다. 땅속에 탱크가 묻혔는지 환기구 파이프가 솟아있는 언덕으로 오르면 과수원이다. 과수원 갓길따라 오르고 내렸다가 큰 물탱크 두 개 있는 다음봉에 올라 돌아보니 일출이 시작된다. 객꾸이가 6분만 기다리면 된다길래 시린발 통통거리며 기다렸다.

 

 

 

 

새해 일출

 

 

일출을 보며 국태민안과 더불어 올해는 연금복권이나 하나 맞아 주십사 기원하고, 과수원 갓길로 계속 가다가 ×168봉 직전에서 지리산 그림을 본다. 그 오른쪽 웅석봉까지는 이견이 없고, 황매산에서 엇갈린다. 날이 추운만큼 하늘도 깨끗하다.

 

 

 

 

 

 

 

지리산

 

 

 

×168봉 (낙남 갈림봉)

 

 

×168 (낙남정맥 갈림)

정점 직전 비탈에 묘 한기 있고, 봉우리에서 낙남정맥과 잠시 갈라진다. 조은길 따라 그대로 가면 낙남정맥 유수교로 가고, 우리는 왼쪽 길 없는 잡목 속으로 내려간다. 남쪽이 된다. 한 차례 급비탈이 다하고 왼편에 묘터가 있어 배낭을 내렸다. 양지쪽이라 눈이 없다.

 

 

 

길이 있을리 없다. 오른쪽으로 굽어지는 능선을 따라 낮은 봉우리 넘어 송전철탑을 지나고 5분 더 내려가니 가화강이다. 다음 스카이뷰와 구글사진으로 가능하겠다 예상한대로다. 완전히 돌밭인 강바닥에 강폭이 넓어 물은 한 두 줄기 좁은 고랑형태로 흐르고 있어 건너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가화강

 

 

 

진주시 폐기물관리사업소 (매립장)

 

 

 

 

가화강을 건너다

 

 

적당한 곳을 골라 강을 건넜다. 멈춘 물은 얼어붙었고, 도랑처럼 흐르는 물은 얼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갑문에서 방류를 않는다면- 두 다리 동동 걷어 올리고 건너 갈만 하겠다. 강으로 내려선 지점에서 300m 남하한 후 건너편 골짜기로 들어간다. 골짜기 맨 안쪽까지 들어가서 우측 능선으로 붙는 시경계선인데, 대나무 숲인 초입부터 능선에 오르기까지 길이라고는 없다. 바짝 마른 덤불이 수북수북 쌓여있어 여름철이라면 도저히 진행이 안되겠고, 골짜기 초입부터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게 좋겠다.

 

 

 

공룡발자국이 있나...

 

 

 

가화강

정맥을 잘라내고 내륙의 물줄기를 역류시켜 해안으로 내려 보내는 가화강. 현재 유수교 아래가 원래의 낙남정맥 분수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는 삼계천이 남강으로 흘러들었고 남쪽으로는 가화천이 사천만으로 흘러갔다. 진주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만나는 창녕, 함안일대의 홍수 문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거론되어 왔고 해결책으로 사천만으로 물길을 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정조실록』(정조 20년5월8일조)에 장재곤이란 자가 사천만으로 물길을 뚫어 경상도 일대의 홍수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장계를 올렸으나,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단다. (정조20 = 1772년)

 

같은 목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남강댐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62년 공사를 재개하여 1968년에 남강 다목점댐이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착공된 남강댐 건설공사와 댐의 여수로를 사천만으로 내기 위한 공사도 동시에 진행되면서 낙남정맥이 잘려나가게 된 것이다.

 

 

현재는 남강댐 물이 일정수위 이상 차오르게 되면 삼계리에 있는 가화천 배수갑문을 열어 방류하는데 이 물은 가화천을 통해 사천만으로 흘러간다. 한 때, 큰 비가 왔을 때 갑문을 열어 사천만으로 물을 흘려보내자 사천공항이 침수하여 공군부대장이 갑문을 닫으라고 권총으로 위협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실제로 강을 건너면서 눈으로 확인되는 것이 낙남정맥이나 진주시계가 지나는 가화천의 하상바닥이 상류인 유수교 북쪽 삼계리 보다 더 높았다. 이는 인위적으로 잘라내긴 했지만 원래의 지형은 유수교 일대가 분수령. 즉, 강(삼계천, 가화천)의 상류임이 증명된다. 현재의 가화강 그림을 보면 상류(삼계리 일대)가 중류인 가화리 일대보다 바닥이 낮아 저수지처럼 물이 고여있는 셈이다.

 

옛 삼계천의 하류가 가화강의 상류가 되었고, 옛 가화천의 상류는 현 가화강의 중류가 되었는데, 더 헷갈리는 점은 모든 강은 그 발원(發源)이 있게 마련인데 가화강의 발원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인공적인 강이다 보니 그 발원도 역시 인공물인 배수갑문 콘크리트 벽이 정답이겠다. 왜냐하면, 갑문을 열어야 비로소 작동되는 가화강이기 때문이다.

 

 

★조은생각

마루금을 절단내어 물을 역류시켰다는 주장에 대하여,

유수고개(공식명칭 아님. 유수교 아래 원래의 분수령)의 분수령은 현재도 살아있다.

가화강을 건널 때 도랑형태의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남강물이 일정부분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남강댐이 없다면, 즉 진양호의 물을 모두 빼 내고, 배수갑문을 허문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남강 수위는 수십미터 내려가고, 삼계천은 원래의 방향대로 북쪽 남강을 향해 흐를 것이다.  

 

- 아래지도의 배수갑문 바로 아래 지점의 하상 바닥보다 유수교 아래 하상바닥이 높다고 본다.

그 이유는 현재도 유수교 북쪽에는 많은 저수량이 보이는데, 우리가 건넌 가화강 바닥에는 지표면 위를 조금 흐르는 수준이다.

 

 

< 1917년 조선지형도 '진주' >

 

당시에는 진양호는 없고 남강(ナム ガン)있다.

낙남정맥 마루금 (현재 유수교)를 분수령으로 북으로 삼계천, 남으로 가화천이 흘렀다.

'덕천강' 표기가 현재 남강댐 바로 위에 표기되어 있다. (경호강 합수점)

현재,  남강댐 윗쪽은 진양호, 아랫쪽은 매립되어 도심지가 된 평거동이다.

 

 

 

 

 

 

비리재에서 가화강까지

 

 

 

가화강을 건너고부터 능선에 오르기까지 30분간 오늘 최대의 난코스다. 골짝이고 능선이고 간에 조금 더 헐렁하다 싶은데를 골라 이리저리 돌며 올랐다. 도꼬마리와 도깨비바늘이 말도 못할 만큼 옷에 달라 붙었다.

 

 

골짜기로 파고 드는 진주시계조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수렛길이 있다. 빨강색 리본도 걸려있어 누가 진행을 했나 싶었더만, 철탑공사를 하면서 한전에서 낸 길이고 리본이었다. 묘가 있는 ×176봉에 오르니 나무 사이로 공원묘지와 그 뒤로 지리산 상봉이 보인다.

 

 

송전철탑이 몇 개 더 이어지고 폐기물관리소 임도가 보이는 안부를 지난다. 철책 울타리가 열려 있는게 보이지만 저 임도는 공원묘지로 연결이 안된다. 올라가니 아주 넓은 묘터에 봉분 두 개 사이좋게 앉있어 우리도 옆에 앉았다. 객꾼이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오리 한 마리 예약을 했단다.

 

 

 

 

 

 

삼면봉(낙남정맥 합류)

[39-2] 번호표를 단 송전철탑을 지나 낙남정맥을 다시 만난다. 왼쪽이 사천시 축동면에서 곤명면이 되고, 유수교로 헤어졌던 낙남정맥은 태봉산을 지나 남하하면서 여기로 지나간다. 여지껏 만났던 정맥과는 반대방향으로 마주치는 것이고, 이제 낙남정맥은 지리산을 향해 올라가고 우리는 솔치고개까지 정맥길과 겹쳐 함께 간다.

 

 

 

 

 

내동공원묘지

둔덕에서 아래로 뛰어 내리면서 커다란 돌로 쌓은 담장을 보니 비로소 예전 그림이 기억난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공원묘지도 예전 모습 그대로다. 커다란 십자가와 둥근 봉수대. 객꾼과 학봉이는 봉수대로 올라가 지리산에 백운산 억불봉까지 보인다고... 조오탄다~.

 

 

 

△189.2m

25000 지형도에는 삼각점 표기가 있고, 있을만한 곳은 봉수대뿐인데, 저 봉수대 위에 삼각점이 있는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측량요원도 아니고, 그거 확인하러 기어 올라가겠나.

 

나동공원묘지

 

 

 

 

봉수대 위에 삼각점이 있을까?

 

 

 

지리산

 

 

 

 

 

 

 

 

 

2번국도

진양호캐리비안온천단지 앞으로 내려갔다. 솔치고개는 어딘지, 낙남정맥을 한 때는 연평고개라 한거 같았는데, 더 넓어진듯한 4차선 도로. 횡단보도 건너 왼편으로 주유소 앞을 지나 삼성약국에서 우회전하여 [연평]마을로 들어간다

 

 

2번국도

 

 

 

 

 

연평고개

 

연평마을로 들어가는 첫고개가 솔티고개인가. 여기서 시계와 낙남정맥은 서쪽 옥녀봉(×171)쪽으로 살짝 올랐다 내려오는데, 무슨 시경계를 요따우로 그어놨을까 싶은 것이, 고개너머 안쪽에 있는 연평마을은 사천시 곤명면이고, 이 진입로 일부는 진주시 내동면이다. 망구 내생각이지만 이 도로 포장은 진주에서 하나 사천에서 하나...?

 

 

시경계는 왼쪽 비탈로 올랐다가 옥녀봉 가기전에 우측으로 꺾어 다시 내려 온다만,  그대로 도로를 넘으면 KTX 터널 공사중이다. 왼쪽 옥녀봉 아래로는 굴이 뻥 뚫려있고, 우측 건너편 산에도 굴이 보인다.

 

 

KTX 터널

 

 

 

 

 

 

넓은 광장같은 도로에 산으로 일직선의 수렛길이 올라간다. 위에서 관을 쓴 큰 비석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올라가보니 아래에서 보이던 비석은 여산송공(礪山宋公)이고, 옆으로 해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계단식으로 설치된 문중묘인데, 아래쪽은 面長진주정공이고 위쪽은 秀士진양정공이다. 조선시대 관직에 水使(수군절도사)는 있어도 秀士는 처음본다. 그것보다도 진양정씨와 진주정씨가 한 집안인가?

 

 

낙남정맥 갈림봉

  

낙남정맥 갈림 (150m)

아직 정상은 멀었다. 다시 한비탈 더 쳐 올리면 학생진주정공 묘가 있는 150쯤 되는 봉인데, 여기서 낙남정맥은 우측으로 급히 꺾어 태봉산으로 가고, 진주시계는 곧장 올라간다. 낙남정맥과 이별인데, 이제 다시는 못 만나는 영영이별이 된다.

 

 

×185

진주정공 뒤로 들어가면 사각 시멘트 말뚝이 박혀있다. 수자원보호.. 그런게 아닐까.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진양호 물이 조금씩 보이고 제선충무덤이 이어지다가 185봉을 넘으면 왼편으로도 진양호 물이 보인다.

 

능선의 끝에서 시경계는 왼쪽 연향마을로 내려가지만, 우리는 우측으로 꺾는다. 연향마을로 내려가려면 진양호에 배를 띄워야 가능하다.

 

 

 

진수대교를 향해 내려가면서 시선은 물쪽으로 향하는데 나무가 가려 제대로 된 조망이 없다. 테라스처럼 편편한 반석이 있는 곳에서는 조망이 멋질 장면인데 나무가 가린다. 할 일 별로 없는 객꾼더러 톱 가져와서 나무 두어 개 잘라버리라 했다.

 

 

진양호

 

 

 

 

진수대교

 

 

 

 

 

 

진수대교

진양호 조성으로 내동면 내평리(內坪里) 상촌마을과 대평면 내촌리(內村里) 내촌마을을 연결하던 도로가 수몰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설치된 다리로 2차선 도로에 총연장 830m에 2000.10.28.완공되었다.

 

 

 

 

 

[남강]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 경호강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 덕천강이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 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어왔고, 일제강점기 때 남강 유역의 상습적인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댐을 건설하는 낙동강 개수계획이 착공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960년대에 비로소 경제개발계획에 치수사업으로 포함되어 1969년 남강다목적댐이 완공되었으며, ‘남강댐 숭상공사’로 불리는 새로운 댐 건설이 1989년 착공되어 2001년 준공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댐 저수량의 확대를 통하여 서부경남 일대의 생활·공업용수와 관개용수 등 용수를 확보하는 데 중점이 있다.

 

 

[남강의 홍수와 진주 시내 침수]

남강 하류의 잦은 범람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강 치수사업으로서 남강댐 건설이 요구되었다. 대평면 아래에서 경호강과 합류하는 남강은 그 유량이 평시에는 본류인 낙동강 전체의 27%이지만, 홍수시에는 42%에 달하여 남강 유역이 낙동강 하류의 홍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연강수량은 남강 유역이 1,300mm, 낙동강 본류인 경상북도는 900~1,000mm로 남강 유량 비중이 높다. 특히 낙동강 하류의 삼랑진에서 물금 구간은 홍수 시 유통이 불량하여 수위가 급속히 상승함으로써 삼랑진 일대와 진주를 포함한 남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극심하였다. 1910년대 진주지역의 2대 현안은 경남도청을 진주에 머물게 하는 도청 이전 방지와 남강 치수사업의 실시였다고 한다.

 

 

[1936년의 남강 홍수 참상]

1940년에 발행된 『진주대관』에 의하면, 근세에 와서 남강 범람에 대한 기록적인 것은 1920년, 1925년, 1933년의 대홍수였으며, 그 중에서도 1936년 8월의 것이 가장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이 해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쏟아진 집중호우와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27일 밤은 진주읍내 전 시가지가 침수되는 공포의 밤이 되었으며, 또한 미증유의 태풍 피해를 입음으로써 3만5천의 진주읍민은 복구의 희망조차 가지기 어려울 정도의 참화를 입었다. 이때 남강의 수위는 최고 9.5미터에 이르러 장대동 제방이 터지고,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해서 시내는 순식간에 침수되었으며, 5천5백호의 가옥이 침수되어 진주읍내는 죽음의 거리로 변하였다.

 

 

 

 

 

 

 

 

 

내촌삼거리

다리를 건너면 대평면을 알리는 표석이 있고, [사천녹차단지(다자연) 3.3km] 팻말을 무심코 봤는데 나중에 여기를 지날줄 아직은 몰랐다. 우측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도 아이들 데리고 가볼만 하단다.

 

 

내촌삼거리에 [호반백숙촌] 간판을 단 식당이다. 미리 예약을 해놨기로 자리에 앉으니 바로 내온다. 상황한방오리백숙 1마리에 5만원. 오리백숙, 탕, 죽까지 나오는데 셋이서 먹기엔 너무 많더라. 배터지게 먹고나니 움직이기가 쉽지않다. 

 

 

 

내촌삼거리

 

 

 

 

오리집

 

 

 

 

상황, 음나무, 헛개나무, 기타등등 한약재를 많이 넣었다.

 

 

오리집에서 한 시간이 지났다. 진국이나 죽이나 맛이 있는데 배가 너무 불러 다 먹지도 못했네. 셋이서 한 마리는 과하고, 다섯명이면 적당하겠다. 산봉우리 처럼 솟은 배를 두손으로 떠 받치며 걸을 지경이라. 

 

 

사천시 곤명면

 

 

진주시계

진양호를 건너 온 진주시계를 다시 만났다. [사천시 곤명면] 도로 이정표가 있고 시계는 우측 ×168봉으로 올라, △186.2봉을 넘어 덕천강으로 내려간다.

 

 

 

문제는 △186.2봉이 아니라 그 너머의 덕천강을 건너는데 있다. 즉, △186.2봉 올라가봐야 시계를 따라 내려가면 폭 200m되는 강물이고,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좌든 우든 멀리, 그것도 아주 멀리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꽤 다각도로 연구를 했는데, 종이지도와 항공지도, 로드뷰 등을 통해서 판단한 두인마을 앞의 ‘두인보’가 잘하면(?) 건널만해 보였다.

 

 

 

 

진수대교부터 내촌삼거리를 지나 왼사쪽으로 가는 도로는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 자전거나 마라톤 코스로 좋단다. 천하의 길치인 객꾸이도 이 길은 훤한것이,  훈련하러 여러번 뛰었다네.

 

 

진양호

 

 

 

 

 

금성리에 한 동 있는 빌라(강변빌라) 직전에서 우회전하여 시멘트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내려가니 지도상 두인마을 앞에 논으로 보이던 그림은 전부 녹차밭이다. 두인마을은 없고 내촌삼거리에서 본 [사천녹차단지(다자연)]이다.

 

 

 

녹차밭

 

 

녹차밭 건너편에 제방이 보이고, 지도상 방향은 우측으로 녹차밭 갓길을 따라 올라가면 되겠는데 정면 건너편에 다리 같은게 보여 혹시 저게 강을 건너는 다린가 싶어 녹차밭을 가로질러 서쪽 제방아래까지 갔더니 그거는 다리가 아니라 녹차밭을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나무 데크가 낡아 구멍이 뚫릴 지경이지만 살살 올라가니 녹차밭 전체가 조망된다. 한 10만평될까... 그 넓은 평수에 놀라고, 이 넓은 밭에 녹차잎은 누가 다 따노... 객꾼의 걱정이 태산인데,

 

 

 

녹차밭 전망대

 

 

 

2003년 「사천녹차원영농조합」에서 진양호 둑을 높이 쌓으면서 생긴 남강댐 하도 개량지구 15만평에 녹차단지를 조성, 150만주의 녹차 묘목을 식재해 2007년 첫 수확을 거두었다. 다른데와 달리 평지에 재배하여 기계화가 가능하고 평당 수확량이 월등히 높단다.

 

15만평의 밭에 채엽을 수작업으로 할 경우에 연간(연인원) 4만명 정도가 필요하고, 1인당 3만원 잡아도 12억이다. 여기서는 ‘승용채엽기’ 4대를 사용하는데 기사 4명만 있으면 된다.

 

 

녹차잎이 무르익을  6월에는 ‘다자연 패스티벌’을 개최하고 문화센터에서 각종 체험이나 시음도 할 수 있으므로 아그들 데불고 와도 좋을 만하다.

 

 

15만평이란다.

 

 

 

 

 

 

 

전망대 뒤 둑으로 올라가니, 덕천강을 가로지르는 보(洑)는 저 위쪽이다. 제방을 따라 올라가는데 강쪽으로는 키보다 조금 높게 철망울타리가 쳐졌다. 어디쯤 터진데가 있는가 찾았지만 터진데는 없고 보로 내려가는 곳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으나 잠겼다. 객꾼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그 요령을 배운 우리는 시키는대로 따라 넘었다. (들키면 모든 책임은 객꾼이다)

 

 

 

  

 

 

 

 

두인보

 

 

 

진주시계는 저 어디쯤에서 물을 건너간다.

 

 

 

덕천강을 건너다

 

 

폭 2m 정도 되는 시멘트보 위를 넘어 흐르는 물의 수심(?)이 2~3cm 정도라 등산화 신고 걸어가면 될 것도 같다. 당연히 선봉장은 객꾼이다. 물을 잘박잘박 밟으며 걸어가니 일도 아니다. 여름이면 등산화 벗어 들고 가면 되겠고... 다 건너가서 어도라 하나 보의 높이가 쬐끔 다른데가 있는데, 텀벙거리며 뛰어 넘었고, 문제는 통제구역이라는게 문제지, 물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어도 = 고기 길

 

 

 

보를 다 건너고 건너편(사천 곤명) 제방에도 역시 같은 울타리가 쳐져있고 문은 잠겼다. 통과방법은 이하동문이다.

강물을 건너지 않고 금성교를 지나 완사쪽으로 도로를 따라 돌아왔다면 5.3km이고 우리가 걸어 온 길은 2km다. 제방을 따라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축조된 ‘본촌제’ 제방이다.

 

 

 

<진수대교에서 덕천교까지> 

덕천강 : 두인보를 건너지 않을 경우, 완사로 돌아가야 된다.

 

 

사천시 곤명면 정곡리에 ‘완사’마을이 있다.

서부경남에서 정곡리는 몰라도, 곤명은 몰라도, 완사는 안다. 완사역, 완사시장이 있고 해방 전에 개교한 완사초등학교가 있었다(현재는 곤명초등학교로 개명). 그런데 우얀 일인지 지금은 행정리 명칭도 아닌 부락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완사(浣紗)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설치될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고,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된 오래된 지명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완사, 사창, 신기, 곡내 수변을 병합하여 ‘정곡리’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진주의 ‘개양’ 역시 이와 비슷한 이름이라는 짐작이고, -진주사람 객꾸이도 잘 모르더라-. 부산에도 ‘서면’이 있다. 이외에도 기찰, 적기, 하마정 등이 나이 좀 먹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이런 옛 지명들은 살려 후대에까지 이어지는게 좋지 않겠나.

 

완사라는 특이한 이름에 대해 찾아봤다.

완사 : 浣(빨 완), 紗(깁 사) = 빨래를 함 (옥녀가 베를 짜서 덕천강에 씻었다는데서 유래)

 

옥녀봉전설 : 옥녀라는 처녀가 용모도 아름답고 품행도 단정한데다 베 짜는 솜씨까지 훌륭했다. 이 처녀는 베를 짜서 덕천강에 씻어 팔아 살았다. 마침 인근을 지나던 민도령이 옥녀에게 반하여 청혼하였으나 옥녀는 과거에 급제하면 허락하겠다고 한다. 민도령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길에 오르고, 옥녀 또한 민도령의 과거급제를 예견하고 옷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고을 사또가 옥녀를 탐하여, 민도령을 위한 옷감을 모두 잘라버렸다. 이에 낙담한 옥녀는 덕천강에 몸을 던지고, 사또 또한 급사, 민도령도 과거급제 후 금의환향중 이 사실을 알고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한다. 이후 이 벼랑끝을 지나는 혼인행차는 어김없이 화를 당했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옥녀봉과 완사라는 지명이 생겼다한다.

 

 

진주시계로 잘 나가다가 잠시  삼천포 (=사천)로 빠져봤다.

 

 

본촌제(제방)

 

 

 

 

 

 

 

덕천강

지리산 천왕봉(天王峰:1,915m)·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 등 여러 산과,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웅석봉(熊石峰:1,099m) 줄기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산청군 삼장면(三壯面) 유평리에서 지방2급하천이 시작되고, 진주시에서 남동쪽으로 흘러서 수곡면(水谷面)에서 국가하천으로 바뀐다. 이후 진주시·사천시·하동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사천시 곤명면(昆明面)의 진양호(晉陽湖)에서 남강(南江)과 합류한다. (두산백과)

 

 

거림골, 중산리골, 내원골,·장당골, 조개골, ·유평계곡, 홍계계곡...· 지리산 동부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물은 모두 여기로 내려와 남강댐으로 들어간다.

 

 

 

 

광명원 마을 앞 제방

 

 

수곡면(水谷面)은 물이 많아 수곡이고, 원내리 원외리 일대를 원당이라 한다. 원당 일대는 딸기를 주생업으로 하고 있어 일대의 하우스는 전부가 딸기 하우스다.

 

여름철의 강우로 남강댐의 수위가 높아지면 원내리는 상대적으로 댐 수위보다 낮은 저지대가 되어  여름철에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배수펌프장을 설치했다,

 

 

원외리 원외교 앞

 

 

 

 

원외리는 섬이다.

 

 

원외교 다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있는 원외리는 덕천강의 샛강이 원내리와 갈라 놓았다.

두만강의 간도(間嶋)를 사이섬이라 하더만, 원외리가 바로 사이섬(간도)이다.

 

원외교에서 서쪽으로, 원외리 덕천강 건너편에서 사천시가 끝나고 하동군을 만난다.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천왕봉 천왕샘에서 시작한 물이다.

 

 

 

 

멀리 창촌마을이 보인다.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창촌교

 

택배기사가 대기중이다.

 

 

 

 

[조선시대 댐 제방과 사천만 방수로 논의] 『정조실록』정조 20년 5월 8일조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로 흘러가 다시 김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녕·밀양·진주·성주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 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 원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려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하니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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