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30.『성령의 은사와 일상의 삶』
고린도전서 12:4-11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들어가며 – 대서양 횡단 비행
1919년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급유 없이 논스톱 비행에 도전하는 일이 큰 화재였습니다. 상금은 25,000달러 그 당시 급유 없이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기름을 가득 실은 후 날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중간에 기름이 떨어져 대서양에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항공우편 화물운반 비행사 25세 찰스 린드버그가 이 모험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비행기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그래야 연비가 잘 나오니까 가장 먼저 낙하산을 버렸습니다. 파부침선이죠. 낙하산을 버렸더니 버릴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조정석 앞까지 기름을 실은 후 앞을 보기 위해서 잠망경을 사용하여 운행을 하였습니다.
1927년 5월 20일-21일 33시간 30분 동안 5800km를 비행하여 최초로 미국과 프랑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세 번째 말씀을 나눕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성령에 충만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을 버리고 포기할 때 우리는 성령에 충만할 줄 믿습니다.
내 안에 탐욕, 탐심, 탐물이 가득한데 어떻게 성령에 충만할 수 있을까요?
하늘을 나는 새 특히 수천km를 나는 철새들을 보면 뼛속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나를 비울 때 하나님께서는 채우시는 줄 믿습니다.
2.고린도와 고린도 교회 상황
성령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때 다시 한번 우리가 되짚어 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와 고린도 교회 상황입니다.
고린도는 상업이 발달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곳 그래서 우상과 미신 타락과 부패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처음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당시 고린도에 간다는 말, “저 사람 고린도로 가네.”라는 말은 타락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 사람’이라는 풍자는 탕자처럼 해석되던 시대입니다.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첩을 사이에 두고 다투고 성도와 성도가 세상 법정에서 고소 고발하고 재판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는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등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앎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강했습니다. 마치 그 당시 철학과 학문의 중심이었던 아테네와 비슷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우상과 미신이 판을 쳤던 것처럼 고린도도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그 어떤 곳에서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실이 없었고 이 일이 상처가 되어 고린도에 와서는 1년 반 동안 설교도 목회도 선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설교를 못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아테네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다른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옷을 찢고 회개한 반면 아테네에서는 “이 사람이 전하는 말이 제법 흥미롭기는 한데 내일 다시 듣고 싶지는 않군. 이 사람은 결국 자기가 전하는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군.” 그러면서 고개를 흔들고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지적 교만이 있던 그들은 바울이 말이 들리지 않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교만이 있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설교를 들어도 판단하고 비판하고 예배를 평가하는 일은 잘하는데 정작 중요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물질이 풍부하고 부족한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는 도시일수록 그래서 은혜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면 소아시아지역 지금 튀르키예 지역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고 어디죠? 드루아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리잖아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바울이 설교하면 회개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에 도착해서 빌립보 이후로는 역사와 기적, 은혜가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부유해서 아쉬운 것이 없어지고 간절함과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영적인 교만, 지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후서 곳곳에서 ‘신령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진의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너희들의 신앙과 생활을 돌아보라는 뼈가 담긴 말입니다.
은사를 사모한다고 하는데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고 하는데 고린도 교회를 보고 성도들을 보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첩을 사이에 두고 다투고 성도와 성도가 고소 고발 재판을 하고 교회 안에서도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사분오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신령한 것, 성령 충만한 것이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3.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이유
진짜 성령충만,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서 오해받을 일, 손해을 봐야 하는 자리, 누가 봐도 궂은 일을 해야 본전도 못찾을 일꺼리가 있을 때
누군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그 일을 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또 그를 위로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행하리라. 내가 알고 있다.”라는 징표로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1절 이하를 보면 성령의 은사가 소개되는데 섬기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 등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빛나고 조명을 받고 나를 알아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무도 하지 않는 그 일. 누구도 나서지 않는 그 일. 내가 감당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세상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4.직분 믿음도 은사
이렇게 볼 때 직분은 은사일까요? 은사가 아닐까요?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카리스마’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손해 보고 오해당하는 사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직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뜻대로 포기하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할까요?
믿음은 은사일까요? 은사가 아닐까요?
내가 믿는 믿음. 내가 행하는 믿음은 은사가 아닙니다. 주체가 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셔서 순종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게 하시는 믿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나는 도구가 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7절에서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을 때 믿음에서 믿음으로 옮겨진 믿음이 바로 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값없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성령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 내가 해야 할 그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의 영광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