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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 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平昌歷史史觀의 定立----
평창에서는 지금까지 3종의 지명지가 발간되고 이에 기초가 되는 읍면지에서 평창의 각 동리에 대한 지명의 연구에서도 평창 지명의 제일 기조를 이루는 “평창(平昌)”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은 연구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평창"이란 지명의 어원의 출처와 그 뜻의 고증을 합니다.
"평창"의 어원의 뜻은 공자의 고향 "창평"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선행 연구기록이 있어서 <인용1, 2> 를 인용하며 분석합니다.
<인용1>
엄기종 07.01.13 02:51
◎ 평창(平昌)이란 地名 由來
平昌은 三國時代에는 高句麗의 領域으로 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불리다가 신라의 三國統一 이후 景德王 16년(서기757)에 白烏縣으로 改稱하여 奈成郡(現 영월군)의 嶺縣이었다.
王建이 高麗를 建國한 후, 각 地方 豪族들을 鎭靜시켜 어느 정도 太平盛大에 이룬 뒤, 太祖 23년(서기 940년)경 국가의 기구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당시 각 고을 현(縣)명칭을 개칭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 이 고을을 이끌던 토반(土班)들이 이 고을의 山水와 地形地勢가 中國의 孔子 出生地인 魯나라의 四川省 曲阜고을 昌平부락의 形勢를 꼭 닮았다 하여 현재의 평창읍의 鎭山인 魯城山도 중국의 지명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평창강을 일명 사천강이라 불리어져 온 것도 중국의 사천성을 흐르는 강과 똑같이 닮았다하여 최근까지도 사천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白烏縣으로 불리어 오던 현(縣)명칭도 孔子의 出生地 마을과 똑같은 昌平縣으로 하여 朝廷에 縣名稱의 改稱 을 上申하게 되었으나, 당시 국가 조정에서『공자님의 태생지인 창평(昌平)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고 하므로 부득이 앞뒤 글자만 바꾸어 평창(平昌)현 으로 改稱하게 되었음.
平昌縣으로 改稱된 뒤에도 原州의 屬縣이었다가 忠烈王 25년(서기 1299년)에 와서 縣令이 派遣되고 原州로부터 分離 되었으며, 禑王 13년(서기 1387년)에 郡으로 昇格되었으나 다시 縣으로 降等되었다가 李成桂가 朝鮮을 建國(서기 1392년)한 후 太祖(李成桂)의 5代祖인 穆祖妃의 고향인 관계로 郡으로 다시 昇格되어 오늘까지 平昌이란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음.(03.4.평창군홈에서)
<인용2>
*농산(農山) : 봉평 유림 하찬수씨로부터 운학정 증수 시 운학정 현판 후면에 “평창(平昌)의 배산(背山)엔 노산(魯山)이요, 앞에는 사수천(泗水川)이 흐르고, 사수천 건너 종부(鐘阜)가 있고 농산(農山)이 사수천으로 다가온다”라고 하였으며, 당시 그 구현판을 향교에 보관하였으나 지금 행방을 모르며, 중국 공자의 고향 창평현(昌平縣) 곡부(曲阜)에 “農山 이씨” 대성씨(大性氏)가 있으며, 지금의 종부리 삼방산에서 평창강으로 머리를 두고 내려오는 금구귀당(金龜歸堂)형 낙타봉을 농산을로 일렀다 사료됨.
◉ 분석적 이해
위 인용의 "평창" 지명의 유래에 <인용 1>은 평창군 홈피에 오류도 있지만평창군 지명에 매우 의미있는 연구자료 입니다. 이러한 연구에 감사를 드리며 여기에 이어서 분석적 고찰을 합니다.
1) 平昌이란 어원 뜻의 고찰
평창의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 백오(白烏)로 바뀌고, 고려 태조 23년(940년) 에는 평창(平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새 왕조가 출현되고 기득권층 등에 통치 강화의 신 사조 문명운동으로 신라때의 “우오, 욱욱, 율오”등에서 백오로 바뀌었다.
야기에 휜 白자는 고어에서는 백두산, 백덕산등과 같이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또한 미탄의 한치의 찰한(寒)자나 한림원 할 때의 翰, 홍성의 洪, 큰 德자, 말馬자등 대부분의 고어는 크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다. 고려가 개국하며 새로운 왕조의 출현에 다시금 기득권 층의 통제와 통치 강화를 위해 군, 현의 새로운 지명으로 개정하기에 평창군에서는 "平昌"이란 지명을 선택하였다. "平昌"이란 어원은 공자의 고향 " 창평향"에서 유래되었다 한다.(鄕은 당시 고을 단위)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平昌"이라는 지명도 문헌으로는 고려 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공자의 고향 창평향이란 최근의 연구로는, 공자(孔子; BC551~BC479)는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창평군의 이름은 이후 진나라의 상방(相邦)으로 본래는 초나라 의 왕자(BC 270년대)이자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부추(負芻)의 이복 동생의 이름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용1>의 설명에서 아래의 예문의 이해는 상반된다.
그때까지 白烏縣으로 불리어 오던 현(縣)명칭도 孔子의 出生地 마을과 똑같은 昌平縣으로 하여 朝廷에 縣名稱의 改稱 을 上申하게 되었으나, 당시 국가 조정에서『공자님의 태생지인 창평(昌平)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고 하므로 부득이 앞뒤 글자만 바꾸어 평창(平昌)현으로 改稱하게 되었음.
고려 태조 23년(940년) 전국적 지명 정비작업의 일환으로 신라시대의 白烏에서 "平昌"으로 개정된 바, 이때 현 전남 담양군에 편입된 창평현은 757년 신라시대(景德王16年)에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정하였다가 940년 고려시대(太祖23年)에는 창평현(昌平縣) 다시 개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초 조정에서는 담양에서는 창평이란 지명이 수용되고 평창에서는 창평을 조정에서 모방할 수 없다 하는 점에서 담양의 경우에는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창평현으로 기록되고 있는 바, 이 점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평창에서는 공경하는 성현의 고향을 그대로 모방함은 예의가 아니란 점으로 “창평”을 “평창”으로 돌려 쓴 점은 겸손을 가진다 하겠습니다.
또한 <인용 1>에서 "평창강이 명 사천강이라 불리어져 온 것도 중국의 사천성을 흐르는 강과 똑같이 닮았다하여 최근까지도 사천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라는 문장에서 사천성은 양즈강 상류로 서해바다 산둥반도의 산동성의 곡부이며, 사천성은 내륙으로 일만리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위 문장의 사천성은 산동성으로 바꿔야 한다.
2) 평창의 지명 중 종부리의 鐘阜의 지명고찰
평창읍 종부리의 鐘阜는 공자의 고향마을 曲阜에서 淵源한다고 한다.
◎ 취푸(曲阜/곡부)
곡부는 BC 6~BC 4세기에 춘추전국시대에 번창했던 작은 제후국인 노(魯, BC 1055~BC 249)의 수도였으며, 유교의 발상지로서 유교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2,000여년간이나 儒家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사상으로 삼아왔다.
중국 산동성 취푸(曲阜)시는 유교의 창시자이자 4대 성인의 한사람인 공자 (孔子, BC 551~BC 479, 72세 )가 태어난 곳이며, 전국을 주유하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죽었다.
취푸에는 유명한 山과 江은 없지만, 니산(尼山)과 사수(泗水)가 있어 山水의 품격을 제대로 갖춘 곳이다. 니산(尼山)은 높지는 않아도 孔子의 출생지로 神이 있는 山보다 더 신령스러워 仁과 道德의 근원이며 사수(泗水)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평창의 종부(鐘阜)는 이러한 취푸(曲阜)를 바 볘껴 쓴 점이 아니라 경각심을 가지고 모방하여 쓴 것으로 사료합니다.
3) 평창강이 사수천(泗水川)이란 점의 고찰
서강인 현 평창강은 이전에는 사수천으로 불리웠다. 사수천은 공자의 고향 곡부의 강과 똑같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곡부에는 강과 산이 없다.
(곡부와 사수천의 위치)
사천군 지명유래 설명에서 泗水은 곡부 북쪽 인근의 강으로 그곳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설을 하고 가르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이 사수천의 이해입니다.
4) 평창의 진산 노산(魯山)의 뜻과 의미는??
평창군 홈피에서 평창의 노산은 공자의 고향의 산과 닯았다고 하지만, 정작 곡부 부근에 노산(魯山)은 없습니다. 노산(魯山)은 중국 어디에도 없으며, 곡부 가까이에는 니산(尼山)이 있다.
공자는 태어날 때 머리통이 가운데는 낮고 가장자리가 높아서 그 모양이 니구산(尼丘山)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을 공구(孔丘), 자(字)는 중니(仲尼)라고 지은 것이라 한다. 이렇듯 공자의 얼굴 생김새는 노산(魯山)이 아닌 니산(尼山)과 닯은 꼴의 각별한 입장이다.
니산(尼山), 원명 니구산(尼丘山)은 산동성(山東省) 제녕시(齊寧市)의 곡부시(曲阜市) 동남쪽 30km경내,해발 340여m의 산으로 공자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 인근에는 작은 산인 니산이 있으며,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安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 공자가 태어났다. 지난해에는 니산에서 2021 중국(취푸·曲阜) 국제 공자문화제 제7회 니산(尼山)세계문명포럼이 열렸다.
이렇듯 공자와 연관이 있는 산은 니산(尼山)이지, 평창군 홈피에서 거명한 노산(魯山)은 어디에 있슬까??
곡부 인근에는 니산이 있으며 노산은 없다. 중국 전역 어디에도 노산(魯山)은 없다. 다만 곡부와 같은 산동성내에 산둥반도 아래의 청도에는 노산(崂山/ 라오산)이 있다.
(곡부와 산동반도의 노산 위치)
◆ 위 지도를 보면 곡부는 지닝시에 위치하며 100여리 위에 타이안 시에는 중국 5악의 하나인 태산이 위치한다. 그리고 여기서 산둥반도로 370km떨어진 곳, 청도시에는 라오산(노산/崂山)이 있다.
노산(崂山)은 지리산 보다도 넓은 면적에 산 이름이 명명된 산봉우리는 38개가 있는데 그 중에는 영월의 진산인 태화산의 동명의 산도 있으며, 강(川)도 수십개 천을 만들며 해안선을 따라 90km를 산으로 병풍처럼 어우러진 바위들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이다.
남연의 지리학자 안모는 “태산이 비록 높지만, 노산만 못하다.” 라고 하였고, 천하명산을 유람한 도사 구처기는 “5악 중 4악을 가보았지만 노산에 비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강유위는 “노산에 오르니 기암괴석이 온산가득 파도처럼 넘실거린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노산(崂山)은 노자(老子)가 창시한 도가(道家)의 산으로 여기에 노(崂)자는 옥편에 찾아보기 힘든 험준한 산악 “로”자로 아마도 이 노산(崂山)을 공자와 같은 시대의 출현한 魯나라의 노자(老子)의 魯山으로 바꾸어 썼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러한 노산(崂山)을 여기서 조명하는 이유는 평창의 지명에 강이 고부의 사수천과 닯았다. 하지만 魯山이 곡부의 산으로 평창의 魯山이 닯았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아마도 평창에 이러한 명칭이 도입될 시기인 고려 초는 중국의 무위자연의 노장사상과 공자의 유학사상이 발현한지 천오백년 지난 시대로 고려시대에 유교와 노장사상이 숭배되는 시기이기에 평창에서 이러한 지명을 발원한 土班들은 공자의 고향만 착원한 것이라기 보다 공자의 유학과 같은 산동성 내에 꽃피어진 노장(老莊)사상 까지에 대하여 성현들에게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평창을 공자의 禮와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으로 인간성의 범주에서 삶의 이상적인 사회로 회기하고자 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사수천, 노산등의 지명에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러한 공자, 노자의 사상을 따라가고 싶은 당대의 평창의 지명은 타 군, 현의 어떠한 지명보다도 성현의 자취를 따라가고저 하는 취지로 이는 밝은 사회를 조성하고자 하는 선별력있는 우수한 지명이었던 것으로 판단 합니다.
5, <인용2>번의 松鶴亭 편액과 “農山 이씨” 대성씨(大性氏)란?
현 송학정은 일제때 조선관아 앞의 누정 대외루가 헐리자 평창주민들은 그 목재를 옮겨다가 남산에 정자를 세우고 송학루란 편액을 걸었습니다. 이때 가장 송학정을 건립함에는 김영주님(평창군 기획감사실장 역임)의 증언으로는 왜정 때 남산에 가서 보니 정자를 건립함에 기금을 기부한 명단에 김영주님의 조부님이 당시 최고 많은 금액 2원을 기부한 명단을 보았으며 6,25때 일부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야기가 회자되는 하리의 고, 오목수, 최목수 님은 전란이후 보수 시 공사를 하였던 듯 하며, '97년 중수공사에서는 편액이 바래고 낡아서 새로운 현판으로 "송학루"을 걸은 듯 하며 이때인 듯 봉평의 한학자 고,하찬수 씨는 송학정 현판의 뒤어 쓰여져 있는 위 <인용2>의 글을 보고서 평창 지명의 이야기를 전한 겄입니다.
현재 송학정 아래 여러 바위들 중에는 동편쪽으로 수직의 면이 크고 반듯한 바위에 金泰東의 존함 석자가 각 한자 크기로 반듯한 해서체로 정결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여러면 평창군수 선생안도 뒤져 보던 중 김영주님의 증언으로 이 이름이 새겨지게된 것은 조부님이 평창 향교 전교를 역임하였으며 송학루 건립에 주도적 역활의 공훈에 후일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이러한 고마움에 대한 추모적 기념으로 새겼기에 정성으로 상당히 수려한 조각으로 현재도 정결하게 보인다.(이 점에는 다시 증언을 보완하겠습니다)
공자의 후손 곡부공씨의 후손으로는 오산시에 권리사라는 사당을 가지고 공자의 제를 지내는 후손도 있으며 경상도 쪽에서는 고려말 노국공주를 보좌한 사신이 귀하하여 후손들이 있습니다만 이보다 500년 앞서는 고려 초에 평창의 지명을 언급하기에는 곡부나 산동성을 이해하기에는 <인용 2>의 큰 씨족의 대성씨라 하는 “農山 이씨” 가 평창에 土班으로 거주하였다는 가설이 성립되며 엄기종 님은 이에 대한 증언 조사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인용하지 않은 엄기종님의 또 다른 글에서는 “農山 이씨”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일전 "수정산은 진산인가"의 글에서 언급한 세종 때 동국여지승람에 영월군은 300호에 인구는 700여명이란 기록(주천은 당시 원성군 소속으로 제외)로 볼 때 이보다 5백년 앞선 시기에 평창군에 씨족 가문은 어떠했슬까? 평창군의 기록으로 토호의 성으로는 이. 손, 라, 지, 우씨를 들고 있는 바 “農山 이씨” 에 의해서 군명이 만들어졌다면 “農山 이씨” 는 당시 평창에 실세의 세력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도 있지만 더 이상 사료의 기록이 없기에 이 점에서 추정치의 연구는 금합니다. 따라서 엄기종님이 보내주신 상당히 귀중한 연구기록인 <인용2>에 대해서는 더이상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도 평창에서는 산동성의 지명의 연원을 찾기 힘든 여러 지명으로 창평, 종부, 사수천, 노산등의 지명을 고려 초에는 어떻게 알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집니다. 또한 이로부터 천년 후 송학루 현판 뒤의 기록은 어떤 기록에 의한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이는 필히 당시 중국에서 넘어온 문중이 평창에 세력을 가지는 토반으로 자리했어야 하는 바, 이것은 어느 문중에서 언제라도 평창이란 지명을 만들었다고 내세울 때에는 그에 따른 연구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상 평창의 지명 고증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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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 昌 !
언제 보아도 산과 물이 충만한 나의 고향 平昌!!
푸른 하늘아래 맑은 江과 싱그러운 산과 들
태백의 정기를 받은 평창은 평온하고 창성할 平昌!
산천이 융결하여 산이 솟고, 물은 산을 감아 돌면서도 그 흐름이 그침이 없다. 산수가 복되고 후덕한 땅에 모여 사는 우리 평창인들은 자연 너그럽고 온화한 마음들 뿐이리오. 오곡백과 풍요로운, 아쉬움도 없고 부러움도 없는 풍요의 고장으로 고구려, 신라. 고려시대엔 于烏, 旭烏, 白烏縣이라 불리울 만큼 풍요한 들판의 평화스럽고 창성할 마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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