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문
해가 바뀌었다. 온화한 설날이었다. 많은 연하장들 속에 치가사키에서 도오루가 보낸 엽서도 있었다.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설날은 역시 눈이 있는 데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생각나요. 1월 한 달은 꼬박 이곳에 있으려고 했는데, 20일까지는 돌아가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시고, 그 밖의 분들도 별고 없음.’
나쓰에는 엽서를 몇 번이나 읽었다. 도오루의 엽서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쓰에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특히 “지금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생각나요”라는 대목은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나쓰에는 도오루가 몰래 여행을 떠난 것은 요코와 기타하라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이 이상할 정도 누그러졌다.
몇 해 동안 맛보지 못한 설 기분이라 이 날 하루 동안 났엔느 요코에게도 애써 부드럽게 대햇다. 신년 인사를 하러 온 손님 접대에 지친 게이조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후 나쓰에는 요코에게 명랑하게 말햇다.
“요코, 내일 네 옷을 사러 가자.”
나쓰에는 요코가 쓰지구치 집의 딸로 손색이 없는 옷을 대충 갖추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쓰에는 옷을 좋아했다. 그것이 설사 요코의 옷이라 하더라도 사들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어머, 내일요? 모레 가면 안 될까요, 어머니?”
“왜? 내일은 안 되니?”
나쓰에는 콧대가 꺾인 듯이 불쾌한 어조로 말햇다.
“죄송해요. 내일 기타하라 씨가 온다고 했어요.”
요코는 흰 스웨터를 입은 팔을 가볍게 앞으로 모아 팔짱을 끼듯이 하고는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쓰에가 제일 싫어하는 자세였다. 어딘가 건방져 보였다. 모처럼 기분 좋던 설날이 일시에 요코에게 짓밟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기타하라가 요코를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 나쓰에는 심한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신바람이 났군......뭐야,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누구 자식인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쓰에는 오랫동안 쌓인, 거의 생리적이라고 해도 좋을 요코에 대한 증오심에 갑자기 불이 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좋아, 내일 기타하라 씨 앞에서 낱낱이 폭로해 버릴 테야.’
나쓰에는 갑자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기타하라는 당연히 깜짝 놀라 요코에게서 떠날 것이다. 그것이 치가사키로 떠난 도오루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별로 나쁜 짓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아무튼 내일 기타하라에게 모든 것을 고해 바치자고 작정하니 화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기타하라 씨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더라?”
나쓰에는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나쓰에의 말에 요코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타하라 씨는 카레라이스를 좋아한대요.”
“어머, 카레라이스라니 딱 질색이야. 추울 때는 냄비에 끓인 음식이 제격이지. 모듬냄비나 이시카리 냄비 요리는 어떨까?”
나쓰에는 난데없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글쎄요.”
“맥주는 잘 마시던데, 정종은 어떨까? 위스키 쪽이 좋을까?”
“글쎄, 모르겠어요, 전혀.”
“어머, 그래서 쓰나, 요코. 소중한 친구의 식성을 전혀 모르다니. 이번엔 그런 것에 대해서도 잘 물어 봐.”
나쓰에는 가볍게 요코의 어깨를 치면서 웃었다. 요코는 갑자기 나쓰에의 수다스러운 태도에서 무언가 불안한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쌀쌀했던 나쓰에의 태도가 어째서 갑자기 변했는지 요코는 이상했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거라.”
“안녕히 주무세요.”
요코가 사라지자 나쓰에는 소파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타하라와 요코 앞에서 모든 것을 폭로할 내일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는 괴로워할 것이다. 피해자인 자기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달려 왔는데 가해자측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부당하게 생각되었다. 요코도 괴로움을 나누어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애라면 모를까, 요코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도 어른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제는 알아도 괜찮아.’
작년 겨울에 요코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 된 증거래요. 요코도 이제 어른이 된 거예요.”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고는 나쓰에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애는 괴로워하지도 않고 가슴을 쭉 펴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요코의 중학교 졸업식 때의 답사사건을 상기했다. 그때 요코는,
“울리려는 사람 앞에서 울면 지게 됩니다. 그럴 때야말로 생긋 웃으면서 살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었다. 무슨 일이 드러나도 요코는 태평스럽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쓰에의 증오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요코도 괴로움을 당해야 해.’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났다. 침실에 들어가니 게이조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혹시 깨어 있지 않나 해서 전기 스탠드의 갓을 기울여 얼굴에 가까이 비춰 보았으나 역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당신도 요즘은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 같군요.’
나쓰에는 자기 혼자만 괴로워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문득 도오루의 일을 생각했다. 도오루만은 두려웠다. 요코의 비밀을 폭로한 사실을 알면 도오루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코는 절대로 고자질을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나쓰에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밖엔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 끊임없이 덜거덕거렸다. 나쓰에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이렇게 눈보라가 심해서는 기타하라가 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쓰에는 고개를 들어 베갯머리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야광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쓰에는 눈을 뜨자마자 오늘 모든 것을 폭로해 버릴 것을 생각하니 눈이 말똥거렸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왓다. 이윽고 거실에서 난로를 쑤시는 부젓가락 소리가 났다. 요코도 바람 소리에 잠을 깬 걸까, 아니면 기타하라가 오늘 날이라 잠을 설쳤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쓰에는 이불 속에서 거실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람이 시끄럽군.”
옆의 이불 속에서 게이조가 몸을 뒤척거렸다.
“신년 초부터 극성이군요.”
“응.”
게이조는 엎드린 채 베겟머리의 전기 스탠드를 켰다.
“저도 치가사키에 갈 걸 그랬어요.”
“3월에 가는 게 좋을 거요. 요코도 데리고.”
“요코는 수학 여행을 간대요.”
“하지만 치가사키에는 들르지 않을 게 아니오?”
“여보.”
“응?”
“요코는 치가사키에 뭣 하러 보내려는 거예요?”
“뭣 하러라니?”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저는 데리고 가지 않을 거예요.”
“알았소.”
게이조는 말없이 전기 스탠드의 갓을 기울였다. 불빛이 나쓰에의 머리를 비췄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였다.
“하지만 나쓰에, 요코 부모의 일은 이젠 잊어버려도 되잖소?”
게이조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쓰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살인의 시효는 15년이오. 더구나 당사자는 벌써 죽었소.”
게이조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하지만 그 애는 살아 있어요. 제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는 걸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그 애한테는 아무 죄도 없소.”
“어이가 없군요.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다니요. 요코에게는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 애가 누구의 자식이라는 생각만 하면 전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요.”
게이조는 요 위에 일어나 앉았다.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거실에 요코가 있었다. 게이조는 말소리가 새어 나갈 것이 두려웠다.
“일어나지 않을 거요? 잠이 깨면 이불 속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게이조는 나쓰에의 입을 봉하려는 듯이 방에서 나왔다.
“눈보라가 약간 수그러든 것 같군.”
게이조는 세수를 마치고 따뜻한 거실로 돌아왔다.
“기차 몇 대는 운행을 중단한다고 텔레비전에서 말했어요.”
요코가 난로의 재를 털면서 말햇다.
“그럼 기타하라 씨는 못 올지도 모르겠구나.”
나쓰에는 아까 침실에서 한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 오늘 기타하라 군이 오기로 했나? 도오루가 없어서 안됐구나.”
밖은 이제야 겨우 희끄무레하게 밝아 왔다. 시계가 일곱 시를 쳤다.
“기타하라 씨는 도오루에겐 볼일이 없어요.”
나쓰에의 말에 요코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게이조는 나쓰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 버리고 신문을 펴면서 말했다.
“요코는 올해 몇 살이지?”
“열아홉 살이 되었어요.”
나쓰에는 식탁을 닦고 있었다.
“허, 열아홉 살? 열아홉 살 봄이라. 액년(厄年)이군. 세월 참 빠르기도 해.”
게이조는 신문에서 얼굴을 들고 요코를 바라보았다. 볼에서 턱에 이르는 선이 한껏 부풀어올라 한결 팽팽한 게 아주 싱싱해 보였다.
“싫어요, 열아홉 살이라니요. 전 아직 열일곱 살인걸요.”
“하지만 아버지에겐 만 나이보단 달력 나이가 훨씬 실감이 나. 옛날의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는 특별한 느낌이 있었단다. 그래, 네 어머니는 요코의 나이 때 약혼을 했지.”
나쓰에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스무 살에 결혼했어. 요코도 그런 나이가 되었단 말이지?”
게이조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코가 벌써 처음 나쓰에를 만났을 때 그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게이조에게는 감개무량했다.
요코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가끔 밖을 내다보았다. 기타하라는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코의 모습을 흘끔흘끔 보면서 나쓰에도 기타하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기타하라는 요코에게서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엾은 일이 있나.”
신문을 보던 게이조가 큰소리로 말햇다.
“뭐가 났어요?”
나쓰에가 밥공기를 게이조 앞에 놓으며 물었다.
“응, 개척 농가의 과부 집에 도둑이 들어 현금 2만 엔을 훔쳐 갔다는군. 그래서 한 집안 식구가 집단 자살을 한 모양이오.”
“어머, 그건 지난 연말 기사 아니에요?”
“아, 그래, 12월 30일자 신문이군.”
게이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 수저를 들었다.
“2만 엔쯤은 남자분들이라면 하루이틀 사이에 다 써 버릴 돈이잖아요. 그 정도의 일로 죽을 것까지는 없을 텐데......세 살과 다섯 살짜리 아이도 죽은 모양이군요.”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수저를 멈췄다.
“2만 엔쯤이라고 하지만, 개척 농가에서 세 살과 다섯 살짜리 두 아이를 키우면서 번 2만 엔은 큰돈이오.”
이렇게 말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나쓰에도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을 결심을 했을 정도라면 달리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함께 죽은 아이들이 가엾잖아요.”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게이조는 그 과부는 무엇이 동기가 되었더라도 죽어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여자 혼자 몸으로 꾸려 나가는 개척 농가의 생활에서 2만 엔이라는 돈을 손에 쥐자면 필사적인 노력이 따라야 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한 나머지 그 부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갈 때에는 조그마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게이조는 마사키 지로가 퇴원을 앞두고 자살한 것을 떠올렸다. 생활고에 지친 이 개척 농가 과부의 죽음에 비하면 마사키의 죽음은 사치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죽으려고 결심했을 때는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절망인가?”
게이조는 중얼거렸다.
“네?”
나쓰에가 물었다.
“당신은 자살을 어떻게 생각하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나쓰에는 문득 루리코가 죽임을 당했을 때도 죽지 않고 모질게 살아온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게이조는 그것을 지적한 것 같았다.
“자살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짓이에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하긴 그렇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짓인가?”
게이조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가볍게 웃으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요코는 어떻게 생각해?”
“자살 말이에요? 전 어디까지나 두고 보자는 주의에요. 죽고 싶지 않아요. 죽임을 당해도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자살한 사람의 심정은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살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갖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만 생각하고 제멋대로 하는 짓이에요.”
나쓰에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자기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면 말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만 단정할 수도 없어.”
“당신은 절대로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냉정하니까요.”
나쓰에는 차를 따르면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글쎄, 갑자기 무슨 유혹이라고 받은 듯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게이조는 행방불명이 된 지 몇 해가 지난 마쓰사키 유카코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카코와 함께라면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1월이 되면 혹시 어디서든 살아 있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유카코의 연하장은 올해도 오지 않았다.
2일에 오기로 약속한 기타하라는 눈보라 때문인지 끝내 오지 않았다. 철도가 복구되면 곧 오지 않을까 해서 요코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도, 열흘이 지나도 기타하라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요코는 날마다 외출도 못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요코 이상으로 나쓰에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 날, 14일은 아침부터 온화한 날씨였다. 요코는 오후 1시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어서 외출을 해야만 했다.
“만일 기타하라 씨가 오면 전화할게.”
하고 나쓰에는 요코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말했다.
“고마워요.”
요코는 깍듯이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요코가 나가자 나쓰에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요코는 나쓰에에게 거역하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코가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요코의 존재 자체가 성가셨다. 요코가 자기 앞에서 고분고분 할수록 나쓰에는 약이 올랐다.
‘아무리 상냥해도......’
밝은 웃음소리를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웃을 수도 없는데.......’
아무튼 나쓰에는 요코가 역겨웠다. 그것은 루리코의 어머니로서 갖는 당연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를 사랑해야 할 책임도 감정도 나쓰에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 주고 학교에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요코가 동창회 때문에 집을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짤막하고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나쓰에는 이런 식으로 벨을 누르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라이 야스오는 부부 동반으로 3일에 세배를 다녀갔다. 무라이가 찾아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쓰에는 현관으로 나갔다. 기타하라였다.
“어머,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쓰에는 기타하라와 무라이가 벨을 누르는 방식이 비슷한 것에 가벼운 놀라움을 느꼈다.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다.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응접실로 안내하고 가스 난로에 불을 붙였다. 기타하라는 썰렁한 방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머, 어서 앉으세요.”
딱딱한 얼굴로 서 있는 기타하라에게 나쓰에는 손위 사람답게 상냥하게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해요.”
나쓰에는 평범한 새해 인사를 정중하게 한 다음,
“다키가와에서 기차로 오셨나요?”
하고 미소를 지었다.
“네.”
“다키가와는 여기보다 눈이 많이 왔지요?”
나쓰에는 어디까지나 상냥했다. 어머니처럼 부드러웠다. 이것이 기타하라가 제일 바라는 태도라는 것을 지금은 나쓰에도 잊지 않고 있었다.
방안이 따뜻해졌다. 가스 난로 위에 얹은 주전자의 물이 끓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추운 방으로 안내해서.”
“아닙니다.”
기타하라의 딱딱한 표정이 어느새 풀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대접해 드릴까요? 술 드시겠어요?”
기타하라는 자신도 모르게 나쓰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삿포로의 다방에서 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실례를 범했던 것을 이 사람은 잊어버렸을까? 그때 이 사람이 나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였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기타하라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나쓰에는 아주 상냥했다.
“........전 술은 별로 마시지 않습니다.”
기타하라는 솔직히 말햇다.
“신년 초잖아요? 조금은 괜찮겠지요?”
“네, 위스키라면 조금.......”
이 세상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얼굴이 또 있을까 하고 기타하라는 무심코 나쓰에를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쓰지구치 녀석은 행복하겠구나.’
기타하라는 모성적인 것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다. 나쓰에가 응접실에서 나가자 기타하라는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요코와의 일도 나쓰에가 양해해 주려니 하고 마음을 놓았다.
나쓰에는 위스키와 치즈를 가져왔다.
“도오루의 군것질은 언제나 초콜릿이에요. 아시죠?”
“그래요? 전 몰랐는데요.”
“어머, 기숙사에서는 초콜릿을 먹지 않던가요? 그건 역시 창피한 일일까요?”
나쓰에는 기타하라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녀는 요코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기타하라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저, 도오루는 집에 없습니까?”
기타하라는 차마 요코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못했다.
“도오루는 치가사키에 가 있어요.”
“아, 치가시키요? 좋은 곳에 가 있군요.”
기타하라는 나쓰에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도오루가 어째서 치가사키에 가 있는지 이 사람은 모르는구나. 도오루가 요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저......요코 씨도 치가사키에 갔나요?”
기타하라는 얼굴을 붉혔다.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특히 그녀는 그의 딱 벌어진 어깨와 팽팽하게 살찐 넓적다리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숨이 막혀왓다. 슬그머니 몸을 비꼬고 나쓰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코 씨도 치가사키에 갔나요?”
기타하라는 나쓰에가 무슨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나쓰에는 강렬한 질투를 느끼면서 기타하라가 요코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듣고 있었다.
‘요코가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요코는 동창회에 갔어요.”
나쓰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유리창이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동창회에요?”
한시름 놓이는 듯이 기타하라가 말했다.
“어서 드세요.”
나쓰에는 기타하라에게 위스키를 권했다. 그녀는 기타하라의 어떤 면에 이끌리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청년다운 시원시원함이나 자주 수줍어하는 순진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기타하라가 자신을 이성으로 대해 주지 않자, 나쓰에는 자기가 생각해도 속상할 만큼 그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기타하라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에게 멸시를 당할까봐 두려워서였다. 나쓰에는 다시 기타하라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위스키를 드시지 않으세요?”
기타하라는 잠자코 있는 나쓰에에게 말을 걸었다.
“난 금방 얼굴이 붉어져서......”
나쓰에는 마냥 취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을 노크하고 요코가 들어왔다.
“아니!”
요코를 보자 기타하라의 얼굴이 금세 환히 밝아지는 것을 나쓰에는 놓치지 않았다.
“어머, 역시 기타하라 씨였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코의 목소리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기타하라 씨 언제 오셨어요?”
요코는 추위로 빨개진 볼을 양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나쓰에는 기타하라가 오면 전화로 알려 주겠다고 했던 말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2일에 오시겠다고 해놓고 오늘에야 오시다니 너무해요, 기타하라 씨.”
요코가 밝은 목소리로 원망했다.
“미안해요. 실은 그 눈보라가 치던 2일에 감기가 들어 엊그제까지 줄곧 누워 있었어요. 나도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어요. 작년에 맹장을 도려 낸 후론 몸이 좀 약해진 모양이에요.”
기타하라는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쓰에는 흘끔 기타하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 큰일날 뻔했군요. 이제 완전히 나으셨어요?”
“걱정 없어요, 보시다시피.”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나쓰에는 자기는 완전히 무시당한 것 같았다. 가스 난로의 불을 낮추는 나쓰에의 옆얼굴에 빈정거리는 미소가 떠오른 것을 기타하라와 요코는 알아차리지 못햇다.
“어머, 위스키 드세요?”
요코는 기타하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조금은 마시죠.”
기타하라가 수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코는 기타하라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듯이 서로 미소지었다.
“참 잘 어울리는군요, 두 사람.”
나쓰에도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웃음 짓는 얼굴처럼 보였다.
‘어울리는군요’라는 말을 듣자 요코와 기타하라는 수줍어했다.
“아주머니, 저희는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잘 몰라서 여러 가지 오해를 했지만 이제 겨우 화해를 하게 되었어요.”
기타하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기회에 요코와 교제한다는 것을 나쓰에 앞에서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요? 하지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쓰에는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기타하라와 요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좀 어렵지만........”
기타하라는 당황한 듯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전 이제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요코가 덧붙였다.
“오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요.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과대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과대 평가요? 그건 누구에게나 약간씩은 있는 게 아닐까요?”
기타하라는 나쓰에의 말에 독기가 서려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조금이 아니에요.”
나쓰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기타하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우리가 교제하는 것을 별로 찬성하시지 않는 것 같군요.”
“어머, 그걸 지금에야 알아차렸어요? 언젠가 당신의 편지를 요코 대신 되돌려 준 적이 있었지요? 그것으로 두 사람이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나요?”
“아주머니, 우리 둘 사이를 그야말로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우리는 성실하게 사귀고 있다고 자부해요. 불순한 교제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껏 손도 잡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난 모르지만.....모성적인 것에 이끌린다고 하면서 내 어깨를 주물러 주던 기타하라 씨인 걸요.”
나쓰에는 싸늘하게 웃었다.
기타하라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청히 있었다.
“아주머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상한 오해를 한 것은 당신 쪽이에요.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삿포로의 다방에서 갑자기 자리를 뜨고......나는 전엔 그런 창피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나쓰에의 미묘한 말투에 기타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는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기타하라 씨는 여자 친구도 많다지요? 도오루가 그러더군요.”
나쓰에는 우선 요코의 마음에서 기타하라를 몰아내고 싶었다.
“어머니, 기타하라 씨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실례예요. 언젠가 그 사진의 아가씨도 어머니는 애인일 거라고 하셨지만, 사실 여동생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타하라 씨에게 사과했지만요.”
나쓰에는 찌르는 듯한 눈초리로 요코를 쏘아보았다.
‘흥, 사이시의 딸년 따위에게 질 수야 없지......아직 고등학생인 주제에 공공연히 애인 행세를 하다니......’
“아주머니, 어쩐지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신 것 같은데요.......”
기타하라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점잖게 말햇다.
나쓰에는 말없이 기타하라를 쳐다보았다. 끝내 기타하라는 자신을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쓰에의 마음을 다시 자극했다.
“어째서 요코 씨와 제가 사이 좋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
기타하라는 요코를 생각해서 정중히 말했다.
“그 이유를 대라는 거예요, 기타하라 씨?”
나쓰에는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별로 지장이 없으시다면.......”
기타하라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요코는 이 자리는 기타하라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의 쏘는 듯한 나쓰에의 시선이 요코를 불안하게 했다.
“지장이 있어요.”
나쓰에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제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전 아주머니한테는 다방에서 이야기 도중에 먼저 자리를 뜨는 실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전 저 나름대로 진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도 언짢은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칠 테니까요.”
기타하라는 고개를 숙였다.
‘저렇게까지 해서.....요코를 차지하고 싶을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저렇게 무모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나쓰에는 말을 어떻게 끄집어낼까 고민햇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어한 말이 아닌 것처럼 꾸며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장이 있다고 한 말은 요코에 대해서예요.”
“요코에 대해서요?”
기타하라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네. 말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내 입으로 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애초에 당신 편지를 되돌려 주었던 거예요. 그건 내 호의였어요. 두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요.”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요코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소리냐고? 기타하라 씨가 들으면 도망칠 소리야. 그런데도 말해도 괜찮을가?”
나쓰에는 요코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저는 도망치거나 하진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기 어려운 얘기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전 제가 알고 있는 요코 씨로 충분하니까요.”
기타하라는 나쓰에의 말에 요코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것 봐요, 역시 기타하라 씨는 내 얘기를 듣는 게 두려운 모양이군요.”
나쓰에는 비웃었다.
“두렵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시기 어려우시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면 기타하라 씨가 너무나 가엾어요.”
“제가 가엾다고요? 가엾다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기타하라는 더욱도 요코 앞에서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알고 싶어요. 어머니. 저 때문에 기타하라 씨가 가엾다면 기타하라 씨에게 죄송하니까요.”
요코의 눈이 아름답ㅈ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나쓰에의 증오심을 부채질햇다.
“정말 말해도 좋겠니, 네 비밀을?”
나쓰에는 요코를 뚫어질 듯이 보았다.
“좋아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아주머니, 그만두세요.”
기타하라는 비밀이라는 말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 애가 말해도 좋다지 않아요.”
나쓰에의 얼굴은 창백햇다.
“어서 듣고 싶어요.”
요코의 말이 나쓰에한테는 뻔뻔스럽게 들렸다.
“기타하라 씨, 이 애의 아버지는 도오루의 여동생을 죽인 범인이에요.”
나쓰에의 목소리는 흥분한 나머지 매우 거칠었다.
“아주머니!”
기타하라는 대들 듯이 벌떡 일어났다. 요코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표정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요코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놀랄 수조차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몇 번이라도 말하지.”
나쓰에는 어깨로 크게 숨을 쉬었다.
“루리코는 네 아버지 손에 죽임을 당한 거야.”
요코는 희미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거짓말이에요!”
기타하라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요코 곁으로 달려갔다. 요코는 어느새 피아노 옆에 가 서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나쓰에는 눈을 치뜨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요코가 살인범의 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기타하라는 요코의 어깨를 껴안은 채 나쓰에를 노려보았다.
“지금 증거를 보여 주지요.”
나쓰에는 급히 응접실에서 나갔다. 요코와 기타하라는 화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쓰에가 돌아오기를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쓰에는 빛이 바랜 낡은 신문과 일기장을 들고 들어왔다.
“이것 봐요. 이게 루리코가 죽었을 당시의 신문 기사예요. 이 사진의 남자가 사이시 쓰치오라는 범인이에요. 이 사람이 바로 이 애의 아버지라구요.”
기타하라는 신문을 손에 들고 쭉 훑어보았다. 이윽고 다 읽고 나서 그는,
“이 신문이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어디에 이 사나이가 요코 씨의 아버지라고 씌어 있죠?”
하고 엄중히 따졌다. 나쓰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 낡은 일기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요코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다카기 씨가 촉탁으로 있는 유아원에 맡겨졌어요. 내가 다카기 씨한테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여자아이를 기르고 싶다고 부탁했는데 하필이면 요코를 맡긴 거예요.”
“이야기가 좀 이상하군요.”
기타하라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뭐가 우습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얘기만으로 요코 씨가 범인의 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분명한 증거는 아무 데도 없잖아요?‘
기타하라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자 방안이 어두컴컴해졌다. 기타하라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니까 이 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잖아요. 나는 범인의 자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애지중지 길렀는데......이런 변이 어디 있겠어요?”
나쓰에는 얄미운 눈초리로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기타하라의 어깨에 기댄 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카기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범인의 딸을 댁에 보내야만 했을까요? 그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기타하라는 이제 침착해졌다.
“남편이 나빠요. 다카기 씨에게 범인의 자식을 달라고 부탁했대요.”
“무엇 때무에 아주머니 몰래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쓰에는 대답할 수 없엇다. 무라이와 자기 사이를 게이조가 질투해서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아저씨가 그렇게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요코 씨가 반드시 범인의 딸이라고는 볼 수 없잖아요. 범인의 딸이라고 말하고 나서 다른 아이를 맡겼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무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전 그 증거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요코 씨?”
기타하라는 옆에 있는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코는 새파랗게 질린 채 말없이 나쓰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거라고요?”
나쓰에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기타하라 씨는 기타하라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인지 아닌지 무슨 증거로 믿을 수 있지요?”
“............”
기타하라는 나쓰에의 역습에 약간 당황했다.
“그것보세요. 당신이 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우리 부부도 다카기라는 사람을 믿어요. 다카기 씨는 남편의 절친한 친구예요. 당신은 다카기라는 분을 잘 알지 못하니까 증거 운운하지만 다카기 씨는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에요. 시원스럽고 남자다운 분이에요.”
나쓰에의 말에 기타하라는 다시 웃었다.
“점점 이야기가 우습게 돌아가는군요. 그 시원스럽고 남자다우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카기라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아저씨와 짜고 아주머니를 속였을까요?”
비웃음을 당하자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말해도 요코가 범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거부하는 기타하라가 야속했다.
“아무튼 요코 씨는 범인의 딸이 아니에요. 저는 삿포로에 가서 다카기라는 괘씸한 사람과 담판을 지을 거예요. 분명한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 오겠어요.”
“아무쪼록 듣고 오세요. 분명히 요코에게는 살인범의 피가 흐르로 있으니까요.”
요코는 기타하라의 팔에 안긴 채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요코 씨?”
요코는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아주머니, 분명히 말씀드리겠느데요. 설사 요코가 살인범의 딸이라도 저는 도망치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요코 씨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는 일이니까요.”
요코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래요, 요코 씨? 이럴 때야말로 기운을 내야 해요. 당신은 절대로 살인범의 딸이 아니에요. 그걸 믿어야 해요.”
“이젠 됐어요.”
요코가 가볍게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뭐가 됐다는 거예요?”
요코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쓰에에게 목을 졸렸던 것, 중학교 졸업식 때 답사가 백지로 바뀐 것, 그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를 요코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요코는 말없이 나쓰에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나쓰에는 겁이 나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요코는 그런 나쓰에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증오의 눈이 아니었다. 슬프도록 쓸쓸한 눈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너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
나쓰에는 뒤로 물러서면서 이렇게 말하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요코는 나쓰에가 나간 문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따위 엉터리 이야기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기타하라는 요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코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요코는 한 장 한 장 자세히 읽어 나갔다.
<범인 사이시의 자식 (생후 1개월)은 시립 유아원에 맡겨졌다>는 기사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번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요코는 읽고 또 읽었다. 요코의 모습은 두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요코 씨, 그런 걸 읽으면 안 돼요.”
기타하라는 요코에게서 신문을 빼앗았다.
“내일은 삿포로의 다카기라는 사람에게 가서 따져 보겠어요.”
기타하라는 이렇게 말하고 요코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됐어요.”
“이제 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요코 씨답지 않아요. 자, 좀 기운을 내요.”
요코는 기타하라에게 메마른 눈길을 돌렸다. 기타하라는 순간 뜨끔했다. 어두운 눈이었다. 그 눈에서는 요코 특유의 타오르는 듯한 빛이 사라져 있었다. 기타하라는 뭔가 섬뜩한 것을 느꼈다.
“안 돼요, 요코 씨. 당신이 범인의 자식일 리가 없어요......”
기타하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요코를 꽉 껴안았다. 요코는 기타하라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요코 씨! 당신은 어머닌가 하는 사람의 말을 믿어요?”
“걱정 마세요. 범인의 자식이든 그렇지 않는 결국 마찬가지니까요, 기타하라 씨.”
요코는 쓸쓸하게 웃었다.
“천만에. 같다니요? 크게 다르죠.”
기타하라는 요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요코와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벽시계가 네 시를 알렸다.
기타하라는 요코를 혼자 두고 가기가 불안했다.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요? 차라도 같이 마시고 방금 아주머니가 한 히스테릭한 잠꼬대는 잊어버리도록 해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요코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죽을 생각 같은 걸 하는 건 아니지요?’
하고 물으려다가 기타하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하면 어쩐지 요코가 정말 죽어 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요코는 어떤 위로의 말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데.....너무도 잔인한 얘기를 들었어.’
기타하라는 나쓰에에 대한 증오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요코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위로 치켜올렸다. 요코는 그가 하는 대로 내맡겼다. 기타하라는 살짝 입을 맞추고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의 창백하고 메마른 입술이 까칠했다. 기타하라는 얼굴을 떼었다. 다시 입을 맞출 수가 없었다.
겨울방학 동안에는 하루 세 끼의 식사 준비를 대부분 요코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엔 다섯 시가 지났는데도 요코는 거실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네 시가 좀 지났을 때 기타하라가 현관에서 요코에게 뭐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쓰에는 배웅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요코는 밖에 나가는 기색이 없엇다. 아마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아무리 심장이 강한 요코라도 자기 아버지가 루리코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으니 오늘은 저녁 준비 같은 건 못하겠지.’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두어진 창의 커튼을 젖혔다. 조금 전의 침착한 요코의 표정을 떠올리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것이 이상하게 얄밉게 생각되었다.
‘좀더 많은 말을 해줄 걸 그랬어.’
요코가 범인의 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기타하라가 어리석은 말을 하는 바람에 생각해둔 말의 절반도 하지 못한 것이 나쓰에는 못내 억을하여 화가 치밀엇다.
그리고 요코의 출생에 얽힌 얘기를 들어면 기타하라가 요코를 버리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범인의 자식이라도 무방하다고 말한 것도 화나는 일이었다.
‘도오루도 기타하라도 젊은 남자들은 애인의 부모가 살인범이나 도둑이라도 별로 상관이 없는 가봐. 나라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살인범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도망치지 않고는 못 배길 텐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일부터 요코가 어떻게 나올지 볼 만하겠군.’
그러나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던 요코를 생각하자, 나쓰에는 정말이지 뻔뻔한 계집애로 여겨져 더욱 정나미가 떨어졌다.
식사 준비를 끝냈을 때도 요코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구태여 내 쪽에서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부르러 갈 필요는 없어.’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두 사람 분의 식사만 식탁에 차려놓았다.
게이조가 식탁을 보고 물었다.
“요코는 어떻게 된 거요?”
“글쎄요, 무슨 비위 상하는 일이라도 있는지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에요.”
“허, 요코답지 않군. 내가 가볼까?”
“아녜요, 제가 가보고 올께요.”
복도에 나가 보니 별채에 있는 요코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쓰에는 요코의 방에까지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자고 있나 봐요.”
나쓰에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래요? 요코가 없으니 역시 쓸쓸하군. 그런데 도오루는 언제 돌아오지?”
두툼한 연어 토막을 젓가락으로 헤치며 게이조가 말했다.
“엽서에는 분명히 20일경까지는 돌아오겠다고 씌어 있었는데요.”
나쓰에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도오루가 돌아오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오늘이 14일이니 아직 며칠 남았군.”
아무것도 모르는 게이조는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