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효용
단 한 번도 걷기가 취미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걷는 시간을 줄이려 애써왔다. 주차하기 어려운 강남 한복 판에도 가끔 차를 끌고 나가고, 틈만 나면 택시를 타며, 건강앱이 제공하는 ‘오늘의 걸음’ 수치는 애써 외면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매일매일 규칙적인 산책을 해야 하는 개과 인간이라기보다 목적 없이 길을 걷는 행위의 즐거움을 도통 알지 못하는 우리 집 고양이에 가까운 인간이었다.(사냥이라면 모를까!) 산책은 나보다 여유롭고 건강한 누군가의 취미로 여겼다. 그러던 내가 요즘엔 하루 두 번, 규칙적으로 산책을 한다. 여유롭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조금은 절박한 상태로.
내가 방금 막 끝낸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산후조리원에 누워 있던 작년 어느 날, 집에 홀로 있는 고양이의 안부가 궁금해 잠시 조리원을 탈출했다. 그런데 매일매일 투덜거리며 올랐던, 집으로 향하는 언덕 길을 걷는데 갑작스레 눈물이 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박탈되어 본 적 없는 ‘이동의 자유’가 사라졌음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다들 대충 짐작할 것이다. 아직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감각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와 나는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느 한쪽이 고통받지 않고 함께 평화로울 수 있는 시간을 간신히 찾아냈다. 그래서 하루 두 번, 규칙적으로 산책을 한다. 머리를 멍하게 하는 높고 복잡한 소리와 환기를 시켜도 빠지지 않는 생활의 냄새, 부자유의 공기가 마구 뒤섞여 있는 집을 탈출해 어디라도 간다. 산책의 방식은 ‘자유 주제’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흘러가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온 이메일에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 지 생각하기도 하고,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새로운 일을 구상해보기도 한다. 가끔은 대담하게도 이어폰으로 어른의 음악을 듣는다. 그 사이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난다. 손바닥만 한 동네에 펼쳐 지는 똑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매일 경이로워 하는 작은 존재가 사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한결 나아져 있다.
“걸을 때 우리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한 이는 리베카 솔닛이다. 그는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에 이런 생각을 펼쳐놓았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내가 산책에 몰입하게 된 것은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어떤 행위가 멈춰버린 듯한 삶의 리듬감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의 말마따나, 산책은 생각의 리듬까지 만들어내는 멋진 효용을 지녔다. 일상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은 (주로 긍정적인 종류의) 생각들이 산책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조금 단련된 것인지, 올해 들어 갑작스레 마주하게 된 ‘여행의 종말’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당황하고 있을 때도 나는 태연했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과 거리를 두고 한 뼘 크기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무언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산책을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걷기의 배경이 되는 풍경은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김지선(프리랜스 에디터)
무념무상 중국어
2020년 5월, 나는 중국어 구몬학습을 시작했다. 물론 시작한 계기는 언어를 배우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덕질이었다. 그 전해에 나는 정말 ‘어쩌다 보니’ 중국 드라마를 파기 시작했다. 십만 년 정도는 거뜬한 대륙의 스케일, 특촬물을 연상케 하는 CG, 그리고 넓은 세상에는 예쁘고 잘생겼는데 연기 잘하는 사람까지도 많다는 발견. ‘중드’는 새로운 세계였다. 2020년이 되고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 시절이 닥치자, 중국 드라마는 이 시기의 좋은 벗이 되어 주었다. 50~60회 짜리 시리즈가 흔하기에 시간 보내기도 좋고, 말 그대로 세속의 일을 잊는 무릉도원이 화면에 펼쳐진다. 드라마를 많이 보다가, 문득 중국어를 배워볼까 싶었다. 조금만 버티면 이 코로나 시련의 시절이 지나가겠지 하던 때였다. 대만 드라마를 보고 겨울에는 대만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였다.
중국어 능력자들은 말한다. 중국어는 성조가 있는 언어이므로 초반에는 선생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팬데믹 시기라서 학원에 나가는 건 꺼려졌다. 선생님이 오는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나는 구몬을 골랐다. 그 이유는 그저 아파트 정기 장터에 구몬 가판대가 왔기 때문이다. 주로 그들은 영어나 수학을 할 어린이를 노렸겠지만, 여기 중년의 ‘중드’ 오타쿠가 구독 권유 전단을 유심히 보고 전화로 신청했다. 성인 중국어 구몬의 선택지는 여럿이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이 와서 10분 정도 학습 진도를 체크하는 방식을 골랐다. 우리 동네 구몬 지사에서 내게 배치해준 선생님은 나보다 약간 연상의 긴 머리 여성이었다. 매주 화요일, 선생님은 오후 늦게 와서 학습지를 스마트 펜으로 팍팍 찍으며 발음을 들려주고 내가 어디까지 공부했는지를 확인했다.
선생님이 중국어를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 스스로가 첫 소개에 “잘은 못 한다” 고 이미 고백했다. 이 구역의 일본어 구몬학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중국어 구독자까지 같이 묶어 준 것 같았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나의 중국어가 선생님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게 언어 학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내가 언어학과 교수법 전공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석 달 정도 후에는 학습지만 받아보는 옵션으로 바꾸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깨달았다. 알록달록한 일러스트 아래 “우리 만두 먹으러 가자”를 꾸준히 외운들, 중국어를 필요한 만큼 잘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더욱이 잘하게 되어도 겨울에 대만은 못 간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구몬학습을 계속했다. 처음에 스마트 펜으로 해당 페이지를 찍어 발음을 듣고, 따라 읽은 후, 처음 세 페이지 동안은 로마자로 병음 쓰기만 연습한다. 그다음에는 한자를 한 자씩 쓰고, 응용 문장을 읽어본 후, 다시 네 페이지 정도 글자를 쓴다. 처음에는 실선을 보고 따라 그리다가 나중에는 외워서 써야만 한다. 구몬에서 채택 하는 학습법은 일종의 드릴이다. 반복하다 보면 언어를 익히게 된다는 원리다. 굳은 머리의 어른에겐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열심히 받아써도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어린이용 교재라 문법 설명도 자세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학습지가 좋았다. 어렸을 때도 배달 학습지를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이 단순하게 글씨를 그리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거창하게 비교해서 김환기의 단색 전면점화처럼 같은 글씨를 거의 무념무상으로 반복해서 따라 쓰는 과정에서 오는 선적인 깨달음이 있다. 물론 그 깨달음이 아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고 해도.
지금은 B 과정을 지나 C 과정에 들어간다. 밀린 학습지가 없다는 거짓말은 못 한다. 다만 심란하면 처음 글자를 깨 친 다섯 살짜리처럼 글씨를 써보는 일은 마음에 도움이 되었다. 더디지만 드라마를 볼 때 알아듣는 말이 한 두어 개 늘어가는 것도 기뻤다. 더디지만 늘어간다, 한 해가 증발했다고 여기는 지금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도 많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늘의 구몬도 한다. 이제는 꽤 두꺼워진 다 쓴 학습지의 두께로 모두가 지우고 싶은 2020 년을 기억한다. 박현주(번역가)
50일 동안의 단식
정확히 21일 만에 처음 밥을 먹었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현미 찹쌀밥 덩어리에 지우개만 하게 자른 양배추 잎 3 장을 쪄서 곁들였다. 현미 질감이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양배추가 이렇게나 달콤할 일인가 감탄하며 30분에 걸쳐 식사를 마쳤다. 이런 식사를 30일만 더 하면 단식도 끝이다. 난생처음 엉뚱하게 웬 단식이었냐면, 코로나 블루로 디폴트가 돼버린 만성 태만에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라도 마음껏 멋대로 해보고 싶었다. 비록 나는 못 떠나지만 30년 훌쩍 넘게 혹사시킨 미안한 장기들에게 통 큰 장기 휴가(!)를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가 택한 50일 단식 코스는 처음 10일 본 단식은 해독을 위한 차류만 음용하고, 이후 10일은 거기에 생식 가루를 더하는 회복식, 오늘 내가 돌입한 조절식 30일은 엄격한 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갖 독소를 비워내는 게 핵심인 만큼 화장실을 자주 가도록 설계 돼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먹으면 나온다’는 원초적 공식에 입맛이 떨어져버렸다. 아무리 소량의 음식물도 머지않아 고약하고 뭉그러진 형태로 변형되는 자연의 섭리가 나는 왜 그리 불편했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역대급 몸무게 최저치를 기록했다거나 피부에서 전에 없던 윤기가 난다거나 하는 획기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인풋과 아웃풋의 간극이 극도로 좁혀진’ 경험은 장 청소뿐 아니라 복잡한 내 욕망과 만성 우울감도 일정 부분 청소해줬다.
음식 섭취를 안 하는 것보다 어려운 도전은 ‘소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 며칠은 여유로워진 점심시간에 해독차를 들이키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산책을 한답시고 회사 주변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서점, 문구점, 옷 가게 등을 구경했고 책이나 다이어리, 목도리 등 반드시 뭔가를 샀다. 먹는 행위를 걷어내자 내가 ‘사는 행위’에 중독돼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면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라면이라는 상품 한 그릇을 ‘사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내가 주문 한 바로 그 커피가 프린팅이 예쁜 종이컵에 담겨 나오는 것을 5분 안에 ‘건네받지 못하는 것’이 초조했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버라이어티와 선택의 홍수에 온 감각이 잠식 되었다는 걸 알았다. 단식을 하니 온 길거리의 한 가게 건너 한 가게가 먹을 곳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다. 온 세상이 나에게 어서 사 먹으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많이 먹은 것들에 대해 나는 과연 뭘 알고 뭘 감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먹는 약속들을 지우고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먹는 욕망 말고 다른 욕망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돌이켜보면 나는 과연 다양한 대안에 관심을 가져왔다. 단계를 높여가며 시도 중인 채식이 그랬고, 나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가공하지 않은 먹거 리만 파는 로컬푸드가 그랬고, 패키지가 없는 물건을 사거나 텀블러를 가져가지 않은 날은 커피를 참는 소소한 실천들이 그랬다. 이런 시도를 꾸준히 이어가게 하는 기저의 믿음은 대략 이런 거였다. 세상에는 나 서서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고, 비교적 조용히 뒷감당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간극이 좁은 사회가 더 살 만해서 나의 걱정을 덜어줄 것이고 그래서 나도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가깝게는 집에서 모두가 자기가 먹을 것을 요리하고 치우는 게 기본이었으면 좋겠고, 분리수거도 투명한 페트병만 배출해서 누군가가 주둥이에 남은 플라스틱 링을 제거하다 손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 바람. 조금 멀리 가면 전 세계 무기 생산국들이 그 무기가 어느 상공에서 누구 집을 폭격하는 데 쓰이는지 알고 책임감을 다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나는 내가 행한 일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갈 때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가야 할지 명쾌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고 싶은 욕망의 소유자이고, 그 컨트롤은 내 오장육부부터 시작하는 게 꽤 타당하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2020년 12월 나는 양배추의 소중한 달큰함을 알았지만, 위가 잠금 해제되는 1월 둘째 주면 떡볶이 국물에 김말이를 찍어 먹고 있을 것 또한 잘 안다. 과연 코로나가 2021년에는 썩 물러나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 기승 여부에 상관없이 내가 2021년 11월에도 잠시 먹는 것을 중단할 것은 알겠다. 또다시 호모 컨슈머리쿠스로 살아온 지난 일 년을 반성하고 조금 덜 사도 문제없는 몸의 느낌을 기억하는 의식을 가질 것을 말이다. 김은아(국제NGO활동가)
끓멍의 날들
얼마 전 불멍과 물멍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불멍은 불을, 물멍은 물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걸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요즘 끓멍을 하는 것 같다. 물이 끓고 있는 걸 멍하니 보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나는 육수를 끓인다. 사실 원래 굽거나 튀기는 것보다 삶거나 끓이는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육수를 자주 끓이긴 하지만, 평시와 스트레스 시의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특정 요리를 만들기 위해 육수를 내고 후자는 다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일단 육수를 낸다는 것이다.
육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그 말뜻 그대로 고기 육수. 한때 삶은 닭 요리를 좋아했다. 스타우브 꼬꼬떼 무쇠솥에 닭과 함께 청주(혹은 와인) 반 병과 마늘, 생강, 대파, 양파, 무, 다시마, 표고, 대추, 황기, 월계수 잎, 통후추, 그 외 왠지 넣어도 될 것 같은 부재료들을 모조리 넣고 뚜껑을 덮은 채 약불로 1시간 30분쯤 끓이면 정말이지 다른 영혼은 몰라도 적어도 내 영혼에는 너무나 충분한 닭고기 수프가 되는 것이다. 들어가는 부재료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하나의 맛이 특별히 튀지 않아서 다층적이고 묵직한 바디감(?)이 있는 육수가 되는 게 바로 육수 내기의 신비로움이다. 닭고기 육수는 수제비나 파스타를 넣어서 끓여 먹을 수도 있고 의외로 어느 요리에든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낸 것은 아무래도 멸치 육수일 것이다. 주로 멸치, 솔치, 디포리, 다시마, 대파, 표고, 무 등을 넣고 끓이는데 나는 무를 아주 많이 넣는 편이다. 무를 많이 넣어야 육수가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깊이와 산뜻함을 동시에 갖춘 육수가 된다. 멸치 육수를 제대로 내기 전까지 나는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는데 그것들을 통해 알게 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 가지. 냉동실에 있던 마른 생선은 물에 넣기 전 팬에 굽거나 전자 레인지에 30초쯤 돌려서 물기를 완전히 날린다. 육수 재료가 충분히 익기 전까지는 뚜껑을 열고 끓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 로 불을 끈 뒤 차를 우리듯 육수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그대로 둔다.
요즘의 관심사는 (왠지 ‘열림 교회 닫힘’ 같은 표현이지만) 채소 육수다. 양파, 당근, 버섯, 가지, 호박, 브로콜리 등을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는 것인데, 사실은 아직 사용처를 알아 내지 못해 결국 마늘과 토마토를 듬뿍 넣고 파스타(주로 파르팔레 면)만 해 먹고 있다. 집에서라도 가급적 고기를 먹지 않는 생활을 시작한 뒤로 채소를 활용한 요리를 주로 하고 있는데, 채소 육수는 그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채수 대신 채소 육수라는 표현을 썼다.)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조만간 모든 ‘육수’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무엇이 되었든 육수를 내는 일은 그 자체로 즐겁다. 적어도 기분에 도움이 된다. 그건 아마 그 일이 정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재료를 다양하게 써서 오랜 시간 끓이면 좋은 육수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다. 물론 잡내가 나지 않게 하려면 몇 가지 주의해야 될 사항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기술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랄까? 요리는 대체로 불 조절과 타이밍이 생명이지만 육수를 내는 일만은 그렇지 않다. 마음 놓고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흘려보낸 시간만큼 맛이 든다. 그 단순함이 내게 안정감을 준다. 혼란하고 혼미한 마음도 잔잔한 불에 오래도록 끓이면 왠지 바디감 있는 묵직한 마음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주로 남들 다 자는 고요한 새벽에 육수를 내곤 하는데, 불에 올리고 주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물이 끓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린다. 어찌나 아늑한지! 물론 그렇다고 잠들었다가는 큰일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스레인지를 안전장치가 있는 인덕션으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정영수(소설가)
하찮아 보이지만 위대한 스쿼트
체력은 딜레마다. 체력을 키우려면 체력을 써야 하는데, 체력을 쓰려니 체력이 없다! 울화가 치민다. 사실은 오늘도 포기하고 싶었다. 이래저래 핑계를 늘어놓다가, 딱 한 개만 하자, 하고 잠옷 차림으로 일어났다. 발목을 조금 돌려주고 기지개를 켜고,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려 느리게 허공에 앉았다 일어났다 딱 한 번 움직였다. 그래, 오늘도 해낸 것이다! 하찮아 보이지만 위대한 스쿼트를.
스쿼트란, 여러 가지 변형 동작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허벅지가 무릎과 수평이 될 때까지 앉았다 섰다 하는 동작이다. 혹자는 하체 운동 중의 하체 운동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엉덩이를 빼며 허공에 앉는데, 허리를 과하게 꺾지 말고 내려갈 수 있는 만큼 천천히 내려가는 게 좋다. 코어에 중심을 잡고 발바닥으로 바닥 전체를 누르면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운동 목적에 따라 꼭 무릎과 허벅지의 수평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스쿼트를 시작한 것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올해 2월부터다.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스쿼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몸과 친해지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이었다. 몸이란 내게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몸이란 변덕스럽게 내게 고통을 주는 악마 같은 주인 놈에 불과했다. 이건 뭐 스스로 몸의 노예임을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근 삼십 년 내내 벌 받는 노예처럼 살았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몸에게!
나는 왜 몸을 미워했을까? 몸이 싫었기 때문이다. 먹은 것을 바로 에너지로 전환하지 못하는 비효율성, 사회에서 바라 마지않는 여성으로서의 거동이나 맵시에 대한 챙김, 한 달에 반절은 시달리는 생리 등등 이유는 많았다. 하여간 오랜 시간 나는 몸을 데리고 사느라, 여행이고 연애고 뭐고 만사가 다 싫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일으켜야 하는 상황 자체를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매사 최소한의 것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말로 하고 싶은 일-시 쓰기-이 생겼고, 그러자 내 몸과 내가 맺는 관계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쓰고 싶은데, 심지어 잘 쓰고 싶은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잘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서 몸을 돌보기로 했다. 잘하려고 하니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몸이 해낼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몸에게 해주어야 했다. 술을 마시는 만큼 끼니를 거르지 말아야 했고, 잠을 잘 자야 했으며, 읽고 쓰는 만큼 눈과 귀를 쉬게 해 주어야 했다. 읽고 쓰기 위해 척추와 허벅지를 단련시켜야 했다. 흐물흐물한 몸 상태에서 이것저것 바보처럼 했고, 무턱대고 달리고 매달린 탓에 발목 손목이 다 나가서 우울감이 더 커지기도 했다. 결국 재활 전문 트레이너를 만나 말했다. 살려달라고. 트레이너는 내게 스쿼트를 가르쳐주었다. 물론 이것저것 많은 걸 가르쳐주었지만, 스쿼트가 개중 내게 가장 만만했다.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혼자서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스쿼트가 만병통치약일까? 글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꽤 잘 듣는 약이었다. 여전히 나는 생리통에 시달리고 추위를 못 견디고 잠을 못 자 술에 의지하곤 한다. 스쿼트를 해서 내 삶이 달라졌어요! 갱생! 인간 승리! 이러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오늘처럼 겨우 딱 한 개 하고 아 몰라, 하고 쓰러져 눕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개라도 일단 하고 나면, 덜 울적하다. 몸도 더 따뜻해지는 것만 같다. 사람들에게도 더 다가갈 여유가 생긴다. 그럼 세상이 덜 두렵다. 한 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견디지 못할 일이 줄어들 것 같다. 더해서 그런 내가 참 기특하고 좋아진다. 몸이 내 듬직한 친구가 되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멀리 가게 해줄 바람처럼 느껴진다. 내일도 누워서 오래 고민하겠지만, 꼭 한 개만은 할 수 있기를, 위대한 스쿼트 한 개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복희(시인)
비밀스러운 도수 치료
고대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쓰이는 영속적인 유행어를 만들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Mens sana in corpore sano”는 말은 헬스장과 무도장 및 각종 체력 증진을 추구하는 공간에 가장 많이 붙어 있는 슬로건 아닐까. 보통 훈육을 위해 활용되던 이 문구가 논리적인 진실을 갖게 된 것은 심리학과 신경과학, 그리고 뇌에 대한 연구가 깊어진 덕분이다. 개인의 의지 박약이나 유리 멘탈의 결과로 치부되는 우울증이 사실 자율신경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건 요즘 누구나 알고 있고, 알아야만 하는 상식이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서로 균형을 고요하게 유지하지 않고 한쪽으로 쏠려 흥분하면 그로 인해 몸이 반응하고, 이는 곧 정신세계에 직접적인 파동을 낳는다. 정신 건강은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힘으로 복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뒤틀어진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행위를 병행해야 마음의 기울어진 추도 다시 정중동의 조화에 다가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육체란 얼마나 복잡하고 신비한 존재던가. 가벼운 운동 30분, 산책 1시 간처럼 애매모호한 말로 몸의 움직임을 끌어내는 것보다 좀 더 유기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바로 도수 치료다.
도수 치료는 말 그대로 맨손을 활용해 척추와 관절, 연골 부분을 중심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말한다. 보통 허리 디스크, 척추 측만증, 거북목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이 정형외과에 가서 비수술 요법을 활용한 치료 행위로 많이 선택한다. 비슷한 예로 한의원의 추나요법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인 <황제내경>에도 수록되어 있을 만큼 추나요법의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손으로 밀고 당기거나 마찰을 일으키며 특정 부위에 힘을 가해 비틀린 체형을 교정하는 동양적인 물리치료 기법이다. 서양에서 유래한 카이로프랙틱이라는 치료법도 있다. 추나요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근골격계를 중심으로 신경계까지 복합적으로 다룬다. 나는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우울증이 있을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외로움, 우울함, 충동 같은 애매모호한 마음의 영역에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른 형태로 증세가 강화된다. 왼쪽 목을 중심으로 강하게 발생하는 근육 수축과 전신의 근육통, 편두통, 이명 현상 등 아주 명징한 신체의 신호다. 이렇게 알람이 울릴 때에는 사실 의지란 바람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몸의 감옥에 갇혀 의지의 발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수 치료는 이런 경우 매우 요긴하면서 나를 살리는 비밀스러운 비법이다. 개인적으로 카이로프랙틱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당장 맞닥뜨린 고통이 놀랄 만큼 경감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머리 쪽 신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경추를 교정하면 목의 긴장이 풀리면서 귀를 앵앵거리던 압력과 편두통, 눈에 가해지던 안압까지 마법처럼 모든 게 정상화된다. 그리고 몸의 특정 부위를 적당한 힘으로 누르고 문지르는 행위만으로 몸 구석구석을 괴롭히던 불편함의 정도가 낮아진다. 몸을 지배하던 고통이 희미해지면 곧 사슬에 결박된 의지가 솟구치기 시작하고, 청명한 신체의 흐름을 타고 온몸으로 확산되어 뇌를 자극하고 물리적인 행위를 만들어낸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소우주란 말이던가! 스트레스로부터 정신 건강을 지켜 내는 방법으로 명상, 독서, 음악, 산책, 향기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음에 영향을 주는 외부 자극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다시 되찾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이는 내면을 조절하는 의지의 힘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신체적 아픔에 민감한 사람은 몸의 즉각적인 반응에 의지가 소거된다. 이런 신호를 의지 박약으로 잘못 해석하면 의지를 몰살시키게 된다. 사람이 생존하려면 물과 산소가 필요한 것처럼 의지가 살아나려면 물리적인 보금자리인 신체에 생명력이 고여야 한다. 도수치료는 마음이 손을 쓸 수 없는 물리적인 영역에서 이를 가능케 한다.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100분 동안의 영적 경험
고전음악의 아이콘은 단연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1954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이후 그는 클래식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건 베를린 필이라는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을 정상의 자리에 올린 푸르트벵글러 이후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고 많은 지휘자가 경쟁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 오이겐 요훔, 카를 뵘, 요제프 카일베르트 등이 비중 있게 거론됐지만 최종 승자는 카라얀이었다. 카라얀 이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인물이 있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다.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논란과 건강 문제로 베를린 필 지휘대에 오르지 못하는 동안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음악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그는 단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고, 단원들에게 폭언은 물론 물갈이를 입버릇처럼 말했다. 독불장군인데다 독설과 폭언으로 리허설 현장을 공포로 물들였다. 악화된 관계 속에서 단원들의 선택은 결국 카라얀이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첼디비다케는 한참을 유럽을 떠돌며 객원지휘자 생활을 하다 1979년에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는 생전 베를린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카라얀에 대한 비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삶을 마무리하던 시점인 1992년이 돼서야 수십 년만에 베를린 필 지휘대에 섰다.) 독설로 유명했던 그는 동시대 지휘자에 대한 품평도 빼놓지 않았다. 카라얀에 대해선 “끔찍하다”는 말로 시작해, “그는 재능 있는 사업가이거나 청각장애인이다. 카라얀이 유명한 것은 코카콜라가 유명한 것과 같은 이치다”란 독설로 마무리했다. 내가 코카콜라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인성이 좋지 않았던 건 분명해 보인다.
예술의 아이러니는 인성과 예술의 깊이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첼리비다케가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는 건 틀림없다. 변방의 오케스트라에 가까웠던 뮌헨 필은 첼리비다케의 부임 이후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됐다. 첼리비다케와 뮌헨 필이 남긴 유산은 많지만 그 가운데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은 고고한 봉우리로 남았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가진 종교적 경건함을 첼리비다케는 가장 아름답고 성스럽게 표현해냈다.
첼리비다케의 지휘 특징은 무척이나 느리게 연주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휘는 더 느려졌다. 일본 선불교에 심취해 종교철학을 음악에 대입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들려준 음악이 그의 ‘성질머리’와는 달리 종교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실이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위대한 작곡가 브루크너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교향곡을 만들었고, 첼리비다케와 뮌헨 필은 그 음악을 갖고 영적인 세계에 가장 가까이 가 닿았다.
특히 8번 교향곡은 브루크너와 첼리디바케의 세계를 말하는 데 가장 걸맞은 음악이다. 브루크너는 이 곡을 쓰는 동안 많은 죽음을 접했고 자신 또한 쇠약해지는 걸 직접 느꼈다. 자연스레 음악에 묻어 있는 어두움과 심연, 장중함은 첼리비다케를 만나면서 더 위대해졌다. 보통 70~80분 정도에 끝나는 8번 교향곡을 첼리비다케는 특유의 느림으로 100분 가까이 이끌어간다. 인내심을 갖고 100분을 듣다 보면 정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우주 그 자체다. 12 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디스크 안에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함과 영적 경험, 신비로움, 우주를 떠도는 듯한 부유함 같은 다양한 감정이 생겨난다.
이 영적인 세계가 끝나면 다시 세속이 기다리고 있다. 첼리디바케는 생전 자신의 지휘를 녹음된 음반으로 남기지 않으려 했다. 어느 순간부터 녹음을 혐오하게 된 그는 사후에도 음반을 만들지 말아달라는 뜻을 밝혔지만, 그의 유족은 기록용으로 녹음해둔 음원을 모두 음반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음악과는 달랐던 그의 성정,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고 판권 계약으로 돈을 번 그의 아들, 이런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속세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교향곡 8번을 듣는다. 세속적인 것 때문에 2020년 한국 땅에서 1993년 그가 독일 뮌헨에서 남긴 녹음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브루크너와 첼리디바케의 음악은 더욱 영적으로 들린다. 김학선(음악평론가)
http://www.gqkorea.co.kr/2021/01/19/%eb%b6%88%ec%95%88%ea%b3%bc-%ec%9a%b0%ec%9a%b8%ec%9d%84-%ea%b7%b9%eb%b3%b5%ed%95%98%eb%8a%94-%eb%a7%88%ec%9d%8c-%eb%8b%a4%ec%8a%a4%eb%a6%ac%ea%b8%b0%eb%b2%95/?utm_source=naver&utm_medium=partnership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나중엔 읽는데
저의 집중력이 떨어지네요.
감사합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