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고통에 대한 역사 철학적 성찰
1.인간과 고통
고통은 인간에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주어졌다. 그것의 원인과 목적이 분명
하든 분명하지 않든 관계없이 엄연한 사실로 주어졌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어떤
사실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절실한 인간 경험 가운데 하나다. 고통이란 단순히 감각적이
고 감정적이라고 해서 과소 평가한다면, 그 사람은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기의 경험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가 죽음을 부인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통은 부인할 수 없다.
고통은 논리적으로 설명되거나 다른 현상으로 환원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이며 인간의 인간이란 사실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다. 고통은 우리가 아는 한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고통을 죽음과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즉 고통이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에 종속된 것으로 설명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유한성을
대표하는 것이고, 고통도 같은 유한성의 표현이라 한다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고통 가운데는 죽음이란 현상으로 직접 설명될 수 없는 것들도 얼마든
지 있다. 예를 들어 모독을 당함으로 겪는 마음의 고통은 죽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2.고통과 역사의 의미
1)고통의 역사성
사람의 고통은 짐승의 고통과 달리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 확정적으로 말할 수
는 없으나,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한 짐승들은 과거와 미래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고통도 현재에 국한된다고 상상된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현재에 가해지는 원인에 의한 고통보다는 과거와 미래 때문
에 당하는 고통이 훨씬 더 많고 크다. 과거의 원인에 의하여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짐승에게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 다를 바가 없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그 사실
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하여 좌절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
러나 사람은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므로 현재에 주어지는 고통과 함께 후회, 원망,
무력감과 절망감이 동반되어 지금의 아픔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짐승들이 당장 눈앞에
다가 온 위협 외에는 미래에 주어질 고통에 대하여 미리 걱정하지 않는 반면 사람은
고통, 특히 정신적 고통의 거의 대부분을 미래 때문에 느낀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는 시간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은
역사성을 갖는다. 고통의 과거, 현재, 미래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의
미를 갖는 시간의 흐름, 혹은 충만한 시간이다. 현재의 고통을 가져 온 과거의 원인이
나 지금을 고통스럽게 하는 예측되는 미래 사건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
회적이요, 도덕적이며, 정치적이요, 종교적인 것들이다. 즉 의미를 가진 원인이요, 의식
의 내용으로 대두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
식적인 행위와 그 결과도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그 고통이란 결과를 가져오는 과
정도 의식 작용과 그 산물에 의하여 형성되며, 그 고통을 느끼는 주체도 생물학적인 신
체일 뿐 아니라 전인격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통은 단순히 시간이 아
닌 역사와 관련된다.
2) 역사 철학적 반성의 한 계기로서의 고통
고통은 역사에 대하여 반성하게 하는 기본적인 계기이며, 특히 역사의 의미를
묻게 하는 계기다.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반성도 인간에게 독특한 하나의 정신작용이라
면 거기에도 고통이란 사실이 그 계기로 작용했겠거니와 무엇보다도 역사의 의미에 대
한 물음에는 특히 고통이 작용했다 할 수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의 왜를 묻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지적인 호기
심에서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부정적인 것에 대해
서는 그 원인을 앞으로 제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긍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그 원인을
앞으로 영속시키거나 반복시킬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
적인 것에 대한 왜가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 고통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의 왜를 묻
게 한다. 그것은 삶의 정상적인 흐름을 깨고, 삶에 대한 합리적이고 통일성 있는 이해
를 방해한다. 고통 그 자체도 괴롭거니와, 인간에게 있어서 이유 없는 고통은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고, 그 자체로 다른 사
건의 의미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행복과 다르다. 행복
은 그 자체가 목적 혹은 의미가 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이나 목
적을 묻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은 그 해명을 요구하고, 그것의 해명을 요구
한다는 사실이 곧 고통이 궁극적인 것으로 직관되지 않음을 뜻한다.
바로 여기서 고통의 문제가 역사 철학적 문제임이 드러난다. 고통이 역사적인
사건이며, 고통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미래, 혹은 과거가 동원되는 역사일 수밖에 없
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경험
이며, 고통이 있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바로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3. 고통에 대한 역사 철학적 이해
1) 허무주의와 비극의 주인공들
고통은 우연적이며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허무주의는 이론적으로 가능
하나, 실재적으로 주장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과 나체의
초인만이 견딜 수 있는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은 아무 합리성도,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는 비인격적인 운명의 장난에 의하여 당해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노래했다.
비극 작가들은 운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제공하려고 노력하였다. 운
명에 대해서 시지프는 Hydris(신성모독, 용기, 교만)로 대항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세계에 합리성, 정의. 질서, 가치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제공했다.
{{
Edward G.Ballard,"Senes of Tragic" in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s,studies of
seldcted Pivotal ideas,Vol.IV,New york,Scribners,1978,p.414.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영웅에 국한된 것이고, 비극의 영웅들이 반드시 인간세계의
합리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사 철학적 의미는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이다.
2) 변신론과 고통의 합리성
운명의 장난에 의하여 고통이 불가피하나 아무 의미도 없다는 비극의 고통관
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합리적이며, 따라서 역사도 결코 불
합리할 수 없다는 견해는 라이프니츠 등의 변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라이프니츠는 피조계의 악과 고통이 결코 신의 유한성이나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피조계 자체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
{{
G.W.F.Leibniz,"The Theodicy, the Abridgement of the argument reduced to syllogistic
form",1719,in
Ph.p.Eiener ed.Leibniz selection,New York,1951,pp.517
}}
에서 파생된 것이고, 그 유한성이
도덕적 악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더 큰 선을 가져오기 위
하여 신이 악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죄의 근원인 아담의 타락도 하느님의 아
들의 성육신이란 더 큰 이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행복한 죄(Felix culpa)>였다는 것
이다.
{{
같은 책,p.510.
}}
3) 변증법적 역사철학과 고통의 긍정성
고통의 합리성이 역사 철학적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고통과 그것
은 극복으로서의 긍정적 결과가 다 같이 시간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것은 우
리는 헤겔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추상적이며 불확
실한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고, 그것은 오히려 세계 역사의 차원에
서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절대정신 혹은 이성의 자기완성 과정이며, 일어나는 모
든 것은 그 발전의 수단이다. 심지어 모든 부정적인 것도 그것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이성의 간계"에 의하여 이용된다. 그런 부정적인 것의 대표적인 것은 고통이다. 고통
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가장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고통은 자유를 위하여 필수
적인 것이야, 부정적인 것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고통은
그것의 극복을 위한 자극제로 작용하며 그것의 극복을 위한 혁명 과정의 고통은 필연
적이여, 따라서 긍정적인 의의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방을 위한 <산고>
일 뿐이다.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자극이었지만, 그 자체로는 하
나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여 가장 절실하게 중요한 고
통이 신비로 남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은 영원한 신비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 자신에 대
한 인간의 인식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고통은 합리
적인 설명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해명에 의해서만 이해되며 이해가 아니라 믿
음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구원 역사의 한가운데 둠으로 고통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은 신앙에 의하여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적
해결이지 철학적 해결은 아니다. 고통의 신비는 역사 신학을 허락할 뿐 역사철학은 허
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