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라똔(Kraton) 왕궁
11시 30분경에 끄라똔(Kraton) 왕궁에 갔다. 왕궁 앞의 노거수가 있는 너른 마당에는 부채, 천으로 만든 가방 같은 관광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다. 아내는 자바섬의 풍광을 담은 그림엽서를 골라서 몇 장을 샀다. 가이드를 따라 안쪽으로 가는데 한 남자가 출입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사진 찍는다.
티켓을 받는 입구 안으로 들어가니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백색의 도노쁘라또로(Donopratoro)문은 좌우에 각 2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 위의 지붕에는 수꾸 사원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연꽃 봉오리가 올려져 있다. 큰 삼각형 꼴의 파사드는 지붕 모양이다. 파사드의 도리 가운데에 자바문자의 구절이 붙어있고 그 위에 카라가 붙어 있다. 카라 위로 마카라 두 마리가 꼬리를 붙이고 머리는 좌우의 내림마루에 솟아 있다. 용마루 위에는 금색 두 날개와 금관, 그 안에 자바문자가 들어 있는 왕실의 휘장이 올려져있다. 휘장 둘레의 원형 고리를 위로 뻗은 팔뚝이 잡고, 아래로 뻗은 팔은 마카라의 두 꼬리를 잡았다. 마카라 꼬리 좌우에는 자바문자와 1998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다.
백색 바탕에 녹색 선으로 장식된 이 문의 파사드는 색상이 아주 평화롭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문은 거친 심성을 통제할 줄 아는 선한 사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고, 문 좌우에 있는 2개의 드와라빨라상은 선과 악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궁궐의 조형물들은 벽사의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답사하고 있는 고대 자바의 불교-힌두교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문 왼쪽에 작은 집이 있는데 아치형 창에는 전통 복식을 한 남자가 앉아서 명상하는 모습의 마네킹이 세워져 있고, 그 안의 방에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닦아야 궁궐에서 명예로운 봉사자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서 정치학을 공부한 가이드 유디씨가 인도네시아 건국 뒤에 이 지역의 술탄이 자치 행정 지사로서의 지위를 보장 받은 정치사와 왕실의 후계 구도와 관련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가믈란
안으로 들어가니 기둥만 있는 높은 지붕의 큰 정자가 있고 그 안에 50명 정도의 전통의상을 입은 노년의 남자와 몇 명의 여자가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인 가믈란(Gamelan) 연주를 연습하고 있다. 금속 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맑으면서도 현란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가믈란 연주 소리를 처음으로 들어본 순간이다.
보로부두르에서 수다나 왕자가 아내 마노하라를 천상에서 찾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에 무희가 가믈란 연주에 맞추어 궁중무용인 레공 댄스를 추는 장면이 있었다. 라우산 수꾸 사원으로 가면서 점심을 먹은 발리 엔데소 레스토랑에 가믈란 악기들이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믈란의 기원은 금속기 시대의 동손동고에 있고, 현재의 형태를 갖춘 건 마자파힛 제국 때의 일이다. 19세기에 유럽 악보의 영향으로 수라까르따와 욕야까르따의 귀족들이 처음 악보를 고안하였다. 1900년 전후 수라까르따에서 보다 적기 편한 오늘날과 같은 숫자 표기가 개발되어 정착되었다. 이에 기반 해 19세기 말부터 가믈란 작곡가가 나타났다.
가믈란은 악기 편성이나 반주 스타일에 의해 20종류 이상이 있다. 각종 행렬이나 의례에 연주되는 벌라 간주르(Bela Ganjur, 8박자 1주기의 반복 패턴)는 본래 지하의 정령들에게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한 음악이다. 지상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어 지하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제물을 바치는 제의에 사용되는 음악이다. 가믈란은 인도네시아어로 ‘두드린다’, ‘장식한다’라는 뜻의 가말(gamal)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나무 막대기로 치는 뚜껑 달린 놋주발처럼 생긴 공 차임(Gong chime), 망치로 두드리는 실로폰, 양손으로 두드리는 길쭉한 북, 걸어놓고 치는 징(Gong)이 가믈란의 기본 구성 악기들이다.
가믈란에 사용되는 주된 타악기는 일정한 음계를 구성하도록 조율된 놋쇠로 만든 대중소 3가지 공(Gong, 징), 목제나 금속제의 강사(Gangsa, 건반 타악기), 껀당(Kendang, 북), 슬링(Suling, 대나무 피리), 또롬뽕(Trompong, 뚜껑 있는 주발 모양의 놋쇠 악기, 나무 막대기로 침), 우갈(Ugal, 놋쇠 실로폰, 나무망치로 두드림), 퍼마데(Pemade, 놋쇠 실로폰), 컴풀(Kempur, 놋쇠 징) 등 14개 이상의 악기를 쓴다. 악단 편성은 큰 오케스타라인 공 거데(Gong Gede)는 35-40명으로 편성되고, 공 꺼바르(Gong Krbyar)는 현대적이고 인기 있는 공의 형태로 25-40가지 악기를 쓴다. 자바의 가믈란은 궁중음악으로 우아하고 느린데, 발리 가믈란은 리듬이 빠르다. 머리와 몸으로 기억한 리듬과 기법이 전승되고 있다.(가종수, 신들의 섬 발리)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는 바그너의 음악을 흠모했으나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인상파 화가의 회화에 대응하는 음악 세계를 열어나갔다. 인상파 화가가 선과 색채를 뛰어넘어서 빛으로 화면을 구성한 것처럼 드뷔시는 온음 음계의 6음이 으뜸음을 가지지 않고 음 사이의 음정이 같으면서도 어느 음에도 중심을 두지 않는 표현 방식을 창조해낸다.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가 큰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의 우키요에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에 영감을 받아 ‘바다(Le Mer)’를 작곡했다. 또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인 가믈란에서 소리의 빛깔을 헤아리는 감성의 흔적을 발견한다.(이일영)
“빛과 바다, 하늘과 바람을 음악에 담고 싶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딱딱한 작곡기법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작곡법은 때로 음악을 질식시킨다.”라고 한 드뷔시는 자연에서 음색을 받아들인 가믈란에 매료되어 이렇게 말했다.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유쾌한 종족이었다. 우리가 숨쉬기를 배우는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레 음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바다의 영원한 리듬과 나뭇잎들 사이의 바람을 배운다. 책을 뒤져 인위적으로 습득한 음악이 아니라 그저 주의 깊게 들어온 수많은 작은 소리들이 그들의 음악을 눈부시게 표현하고 있다.”(조은아)
가믈란은 영화, ‘아바타’에도 배경 음악으로 들어 있다고 한다. 자바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반얀 트리, 죽어서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reincarnation) 화신인 힌두교의 아바타의 관념, 인도네시아의 밀림 등은 영화 아바타가 받아들인 소재들이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화산재 모래를 깔아 놓은 마당이 나오고 아름답게 장식한 2중 지붕의 8각정과 4각 우진각 지붕의 정자, 나무와 회랑이 있다. 평화롭고 정다운 조경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큰 박공이 있고 황금색 쌍용과 왕실의 휘장이 난간에 붙어있는 술탄의 집무실이 있다. 역시 벽이 없고 기둥만 있는 높은 천장의 정자이다.
가운데에 왕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지붕의 가운데는 갓처럼 직육면체가 불쑥 솟았고 천장에는 황금색 화초와 새 모티프로 겹겹으로 사각형 액자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 2개의 황금색 태양무늬가 있다. 태양 사이에는 화려한 유리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
술탄의 집무실에 붙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왕실의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다. 사진이나 의복, 그릇 등이 있다. 하멩꾸부워노(Hamengku Buwono) 9세의 사진, 어린 왕이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네덜란드 친구와 찍은 흑백 사진과 왕이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스카우트 단복이 보였다. 나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보이스카우트 단원이었기에 친근감이 든다. 고종 황제가 독일식 제복을 입었던 것처럼 네덜란드 식민 지배 시절에 술탄이 입었던 유럽식 제복과 칼과 모자가 낯설지가 않다.
왕과 왕비의 초상화에서 양쪽 귀가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이 특이하고, 남녀가 입는 치마는 바띡 문양이라서 그런지 기하학적인 무늬가 섬세하게 들어가 있다. 조끼나 블라우스는 녹색 바탕에 문양이 단순하다.
유물전시관에서 나와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나무 그늘에서 쉬는데, 아내가 특이한 나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다. 들어올 때 눈에 띈 열매이다. 벚나무처럼 잎과 가지 아래의 줄기에서 구슬처럼 생긴 갈색의 열매들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철망을 둘러놓고 채취 금지라고 써놓았다. 여행 뒤에 찾아보니 왕궁에 심어져 있어서 왕족들만 먹었던 귀한 열매인데, 자바 이름은 뚬부한 께뻴 아뚜 브라홀(Tumbuhan kepel atu brahol)이고 학명은 스테레초칼푸스 부라홀(Stelechocarpus burahol)이다. 영어로는 케펠애플이라고 하며 맛은 매운 망고맛이라고 한다.
곁에 있는 철조망 속의 비둘기는 머리나 등에 옅은 푸른빛이 돌고 배에는 연한 분홍빛이 나고 날개는 청색과 갈색 빛이 돈다. 얼룩말무늬비둘기(Zebra dove, Geopelia striata)이다. 케펠애플과 이 비둘기는 끄라똔 왕궁에서 볼 수 있는 욕야까르따의 희귀 동식물인지 인도네시아의 우표에도 등장한다.
다시 왕궁 앞의 광장으로 나오니 들어갈 때 찍은 우리의 사진들을 땅에 늘어놓고 찾아가라고 한다.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는 기념이라고 1장에 2,0000루피아(한화 약 2,000천원)주고 3장을 산다. 일행 중 많은 분이 사진을 찾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데 영숙샘이 몽땅 사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섬세한 감성에 애정이 많은 따뜻한 성품이다.
여행 뒤에 인터넷의 백과사전에서 끄라똔 왕궁을 찾아보았다. 면적은 14㎡이이고, 말리오보로 거리(Malioboro street) 남단에 있는 넓은 왕궁 광장의 남쪽에 위치한다. 전통적인 자바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1755년 하멩꾸부워노 1세가 건립한 것으로, 왕궁 주위를 높이 5m, 두께 3m의 흰 외벽이 둘러싸고 있다. 욕야까르따를 통치한 역대 술탄의 궁전이었으며, 현재는 욕야까르따 특별지구의 지사이기도 한 하멩꾸부워노 9세가 거주하고 있다. 궁전은 7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기 특색 있는 건물이 늘어서 있다. 그 일부는 일반에게 개방되어 역대 술탄의 왕궁 안에서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네이버 지식백과)
끄라똔 왕궁은 술탄과 가족의 거처로 자바 문화의 센터이며 왕실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끄라똔 왕궁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식민지 시기 욕야까르따 술탄국의 창건을 인정한 쟌띠(Giyanti) 조약 체결 뒤에 하멩꾸부워노 1세를 위해 1755-1756년에 지어졌다. 두 강 사이에 위치한 왕궁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반얀나무 숲을 왕궁 터로 선택했다.
1812년 6월 20일,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이끄는 1,200명의 영국군이 욕야까르따 왕성을 공격하였다. 수가 많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야까르따는 하루 만에 함락됐고, 왕궁은 약탈과 방화를 당했다. 15,000파운드의 황금, 보석과 50만 파운드의 현금이 약탈됐다. 이 첫 공격으로 술탄국은 식민 정부에 예속됐다. 현재의 대부분 궁궐 건물은 술탄 하멩꾸부워노 8세(1921-1939 재위)가 지었고, 1876년, 2006년의 지진 뒤에 재건하였다.
궁궐의 주 건축주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이다. 건축에 대한 그의 전문성은 네덜란드 학자 테오둘 가우티르 토마스 삐게아우드(Theodoor Gautier Thomas Pigeaud)와 루시엥 아담(Lucien Adam)이 수라까르따(Surakarta, 솔로solo) 술탄국 창건자인 빠꾸보노(Pakubuwono) 2세의 계승자로 평가했다. 궁궐의 외양은 고도 욕야까르따의 기본 디자인을 따랐다.
자바 건축은 궁궐 천장의 부조와 같이 꽃문양을 쓴다. 정원은 남쪽 해안에서 가져온 모래를 깔았다. 궁궐문은 두꺼운 티크목으로 만드는데 문의 앞이나 뒷면은 독특하고 전통적인 장식이 있다.
궁궐의 목조 건물은 동식물, 자연 문양으로 장식된 자바 전통 건축 스타일이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 같은 외국의 영향도 나타난다.
마름모꼴 지붕은 붉은색이나 회색의 널판, 기와, 함석으로 덮인다. 중심 기둥과 부차적인 기둥들은 황색, 연두색, 붉은색, 황금색과 함께 짙은 녹색이나 검은색의 것을 쓴다. 기타 목조 건물의 요소들은 기둥과 색을 맞춘다.
검은색 기단은 금색 장식과 조합이 되고, 백색이 건물 벽에 칠해진다. 보통 백색 대리석이나 전형적인 타일로 만든 바닥은 모래 마당보다 더 높다. 몇 건물은 더 높은 바닥을 가지며, 다른 건물들은 술탄의 왕좌를 놓기 위해 네모 돌이 있다.
각 건물은 용도에 따라 차등이 있다. 술탄이 쓰는 주요 등급 건물에는 장식이 단순하거나 없는 낮은 등급의 건물보다 더 많은 장식이 있다.
왕실 가족이 사는 끄라똔은 타마린드나무와 스페인 벚나무가 구도심인 욕야까르따 뚜구(Tugu) 끄라뺙 훈띵 하우스(Krapyak Hunting House)에서 왕궁까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데, 이것은 왕과 인민 간의 단합을 상징한다. 또한 창건 군주와 백성의 일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께다똔(Kedaton) 구역으로 들어가는 도노쁘라또로(Donopratoro)문은 거친 심성을 통제할 줄 아는 선한 사람을, 2개의 드와라빨라상은 선과 악을 표현한 것이다. 궁궐의 조형물들은 벽사의 힘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다.
왕궁은 가믈란(gamelan) 음악, 자바 춤, 시가(詩歌) 마짜빹(macapat), 그림자 인형극 와양(wayang) 공연을 주관한다.(위키피디아 Wikipedia)
자바 전쟁
18세기 후반 마따람 왕조는 하메꾸부워노 2세(재위 1792-1810, 1811-1812, 1826-1828)의 욕야까르타 왕국과 수라까르따 왕국으로 분열하여 대립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5년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예속되자, 네덜란드의 빌럼 5세는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우고, 런던의 거처인 큐에서 ‘큐 레터’를 통해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에 모든 해외 영토를 영국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하였다. 1800년 1월 1일에 200년 가까이 서구 중상주의의 상징이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해체되었지만, 자바에서는 그대로 운영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점령지에 친정 체제를 강화하고자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영국의 인도네시아 진출을 막고자 자바의 강력한 식민지화를 명령하고 군인인 헤르만 빌럼 다엔덜스(재임 188-1811)를 바타비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욕야까르따와 수라까르따 두 왕국을 식민지로 간주하며 네덜란드 주재관들은 의전에서 자바의 군주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였다. 정치, 군사적 입지가 탄탄한 하멩꾸부워노 2세는 완강하게 버텼으며, 그의 매부인 라덴 랑가가 네덜란드동인도회사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1810년 다엔덜스는 3,200명의 군대로 욕야까르따를 공격했고, 하멩꾸부워노 2세는 폐위되고, 그의 아들 하멩꾸부워노 3세(재위 1810-1811, 1812-1814)가 새 술탄이 되었다.
이 무렵 빌럼 5세의 큐 레터에 따라 영국이 인도네시아군도에 진출하였다. 1810년 1월 말 영국은 자바 정복에 돌입했고, 8월 26일 바타비아와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였다. 다엔덜스는 5월에 얀 빌럼 얀선스(재임1811)에게 인도네시아동인도회사 총독직을 넘기고 바타비아를 떠났고, 얀선스는 9월 18일에 항복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이 기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영국은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재임 1811-1816)를 자바 총독서리로 임명하였다. 앙시앵 레짐(ancient regime, 구체제)의 군주제도를 반대하는 혁명주의자 래플스는 하멩꾸부워노 2세와 관계가 냉랭하였다. 네팔 구르카 용병을 포함하는 영국군이 1812년 6월에 욕야까르따 궁전을 포위했다.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으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나따꾸수마와 수라까르따의 빠꾸부워노 4세가 영국을 지원했다. 영국은 나따꾸수마에게 광활한 영지를 주어 마따람 왕조는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말레이반도의 삐낭으로 유배되고 아들 하멩꾸부워노 3세가 다시 즉위했다.
래플스는 욕야까르따 세습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여 영국의 식민지에 합병하고, 그들이 중국인 징세청부업자에게 위탁하였던 시장세와 통행세 징수권을 박탈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토지세와 토지 임대차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근대 싱가포르를 건설하고 보로부두르를 재발견하였다.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나고 다음 해에 네덜란드 왕정이 복고 되자, 영국은 바타비아를 네덜란드에 반환했다. 이때부터 1825년까지 10년 동안 네덜란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유럽인과 중국인이 중부 자바에서 설탕, 커피, 후추 등 열대 환금작물 재배를 위해 넓은 지역을 임차하며, 임대차 관습법이 무시되어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화폐경제의 도입으로 현금이 필요해진 농민들이 중국인에게 농산물을 헐값으로 팔아야 했다. 자바 농민 사회가 동요하고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대한 불만이 증폭했고, 아편 사용도 늘어나 심각한 병리 현상이 되었다.
이 무렵 하멩꾸부워노 3세의 아들 디뽀네고로는 전통 이슬람 학교인 뻐산뜨렌에서 생활하면서 자바의 고전, 역사, 이슬람 교리에 심취하였고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1821년 벼농사가 흉년이었고, 자바 전역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듬해에 하멩꾸부워노 4세가 사망하자 독살 소문이 퍼지고 하멩꾸부워노 5세의 후견인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 1822년 말 머라삐 화산이 대폭발했다. 총독 판데르 카펠런 남작(재임 1816-1826)이 개인의 토지 임대를 금지하여 세습 귀족이 수입원을 상실하고, 임대료로 받은 선금을 환불해야 했다.
이러한 불안과 혼란 중에 디뽀네고로가 1825년에 욕야까르따에서 봉기를 하자 농민과 귀족이 적극 가담하였고 이슬람 사회도 나섰는데 끼야이 마자가 정신적 지도자 되었다. 봉기는 중부 및 동부 자바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 되었다. 1862년엔 중부 자바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욕야까르따 왕실과 자바 동북부의 마두라가 네덜란드를 지지하자 디뽀네고로 세력의 증오는 술탄에게로 향했다. 네덜란드는 하멩꾸부워노 2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이런 가운데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등의 전염병이 돌아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1830년 3월 네덜란드는 협상장에 나온 디뽀네고로를 체포하여 마두라로 추방했고, 그는 술라웨시의 마까사르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55년 삶을 마감했다. 1825년에서 1830년까지 5년간 지속된 이 ‘자바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군인을 포함해 약 1만 5,000명이, 자바인은 최소한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네덜란드는 욕야까르따 왕실에 책임을 물었고, 만짜느가라 지역과 수라까르따 외곽 지역이 네덜란드 식민지에 합병되었다. 이 전쟁에서 군주와 많은 세습 귀족이 네덜란드 편에 섰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대부분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위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자바 전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거머쥐고 인도네시아군도 전역을 식민지로 확장해 나갔다. (소병국, 동남아시아사).
자바가 네덜란드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의 역사는 세도정치와 흥선대원군,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조약, 1894년 동학 농민 항쟁, 청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 러일전쟁, 가쓰라 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이 있고, 1910년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