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듯이 현대의 사회도 문제를 안고 있다.폭발적인 인구의 증가,급속한 에너지와 자원의 고갈,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등이 모두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들이다.문명비평가로 알려진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세종연구원)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리프킨의 주장은 단순하다.즉, 에너지 변환이 일어나는 모든 자연 변화와 인간의 활동은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자연법칙 때문에 엔트로피라는 벌금을 물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저에너지-저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프킨의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열역학법칙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고, 그의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책임하고 상투적인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자연으로 돌아가지 말자는 건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상기한 것 중에서 마지막 문장에만 답변을 하고 싶군요. 나머지는 토를 달 필요를 못 느낍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제레미 리프킨의 책을 읽고, 문제를 구조적으로 풀지 않으면서 원론적인 수준의 글로 지면을 장식하는 그의 대안은 심하게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생태주의를 왜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하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현실의 어려움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태주의가 왜 어렵고 비현실적일까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왜 무책임한 주장일까요?
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을 단순화, 최대효율화 시킨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불필요한 것들에 의지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만일 사람들이 톱으로 나무를 베어서 의자를 만들고 집 앞에 상추심고 배추심어서 먹으면 [과다했던]시장이, 공장이, 식품업체가 망합니다. 삶의 일상 사이클이 늦추어지고 택시회사, 버스회사가 망합니다. 환경이 좋아지고 사람들이 건강해지면서 병원, 약국이 망합니다.
하지만 그 역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미국의 군수산업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peacekorea.org/databank/databank012.html
그렇지만 이런 장사도 그 기초를 화석연료에 두고 있으며, 그 화석연료는 유한합니다.(자연자체의 변환과정을 훨씬 초월하는 속도로 소비된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고민하면서 대안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 꿈과 희망의 도시 꾸리찌바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라질의 꾸리찌바를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에 꾸리찌바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와 지구의 정반대편에서 사는 사람들은 축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세상을 검색해보시고 얼마든지 생태도시, 생태주의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히 안양 시민구단과 관련해서 방법을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b. 태양에너지의 도시 프라이부르크
핵발전을 포기하고 투자비용대비해서 매우 비효율적인 태양에너지를 도입하는데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독일은 이미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축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녹색당이 집권할 수 있는 나라. 세상에서 나무를 가장 잘 가꿀 수 있다는 독일 사람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도시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의 환경 수도로 불리 우고 있습니다.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엔트로피는 ‘평형’ 상태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향을 예측하기 위하여 도입된 열역학 개념이다.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불가능한 ‘고립계’에서는 언제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흔히 인용되는 열역학 제2법칙이지만, 그런 단순한 표현이 열역학 법칙의 전부는 아니다.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닫힌 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물이 얼거나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이슬이 되는 경우에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감소한다.그러니까 리프킨의 ‘엔트로피 법칙’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고, 경제학자인 죠르제스크 레겐이 처음으로 제창했다는 ‘열역학 제4법칙’도 당연히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열역학법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처음부터 개념정리를 한 것입니다.
‘사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정의 할 때, 물리학에서 의미하는 ‘질서’의 개념과 또 다른 분야에서 정의하는 ‘질서’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의 엔트로피를 이렇듯 사회 전반의 현상이나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것은 다소 개념의 혼동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무리한 해석이 따른다는 측면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 글에서 그것은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사용가능한 것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차이가 있는 것에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분류된 것에서 혼합된 것으로 진행되는 것을 엔트로피증가라 정의할 것입니다.‘ 꿈꾸기-1중에서
열역학 제4법칙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리프킨의 역사관이나 현실 인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예를 들어 리프킨은 “인류의 역사는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고 한다.그러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역사 진보의 척도일 수는 없다.지금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진보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오히려 누구나 평등한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명백한 역사의 진보라고 해야 한다.
많은 인용문과 통계를 이용한 그의 현실 분석은 선동적이고 비논리적이다.예를 들어 현대 농부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그러나 현대 농부가 외부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인식해야 한다.먹을 것을 위해서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려야 했던 ‘저엔트로피’의 구식 농부의 삶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했던가를 말해주는 역사적 기록은 너무나도 많다.
엔트로피와 같은 과학 용어는 엄격하게 정의된 틀에서만 그 생명력이 유지된다.자연과학의 이름아래 논리를 전개하는 ‘저엔트로피 사회’의 실체는 질병과 굶주림,그리고 불평등이 전부였던 우리의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그나마 그런 행운이라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0억을 넘지 못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글을 쓴 분의 주장은 지금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오히려 누구나 평등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진보된 사회라는 건지 독해가 어렵습니다만, 그래서 여전히 개발주의 정책을 견지하여야 하고 ‘지역개발 가로막는 환경단체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싶은 것이군요. 이 글을 2000년에 쓰셨던데 지금도 여전히 같은 주장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부분과 관계있는 글을 나중에 따로 올리려고 준비 중입니다.
첫댓글 두번을 정독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저같은 문과 사람들은 어디서 부터 접근을해야 이해가 빠르죠?
꾸리찌바, 프라이부르크 검색해보세요. 김낙원님께서 만들어 주신 구단 모델과 연계하면서 저는 아주 재미있는 결론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하셨나요? 용식님
메일로 대신 했는데...... 도망 갔어요
엔트로피를 저나름대로 정리하면 어떤 물질이 있고 이물질은 분자로 구성되었으니 점점 분자로 나누어지고 이분자는 원자들의 결합체이니 또 원자로 분리되는 것 을 엔트로피의 증가 법칙 이라고 하는 건가요
완근님 그런 부분은 당근 검토되어야하고요, 순환에너지라는 개념 그러니까 잉여 자본과 에너지는 시민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시설(진디구장 등)과 축구인프라(유소년과 각급별 학원축구단)로 우선 지원합니다. 주주가 되는 시민들과 뿌리가 되는 축구인프라에 잉여 에너지를 돌려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시장을 키우는
것이 되며 안양 지역사회와 시민구단이 함께 안정적인 삶의 질적 저성장을 도모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닫힌계 전체를 고려하는 개념, 그러니까 안양시민구단은 안양시의 사회적 매카니즘과 함께 한다는 것 등등을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앞서 가는군요.
이학도로서 말씀드리건대, 자연과학에서 나온 개념을 이상하게 차용하는 것이 사회학에서 진보를 일으키는 것을 흔히 봅니다. 따지고 보면 서로 오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저는 여기에 대해 이 이상의 토를 달지 않으려 합니다.
낙원님 잘못된 개념이 있으면 얼마든지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쓰는 글이 걸레가 되면 어떻겠어요? 그러면서 배우고 안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지요.
완근님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요.
신희석님의 오류가 아니라, 원래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사회현상에 차용할 때의 이해가 결여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신 멋진 이론인 '저엔트로피사회'가 등장했으니 불쾌하게 생각할 것만도 아니죠. 이에 대해 비평을 한 관점은 철저히 이학적인데, 이것 또한 유쾌한 오해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