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주례를 사랑하는가
2017. 3. 금계
2017년 3월 18일 오후 두시, 도청이 있는 남악 신도심 스카이 웨딩 컨벤션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조창익 선생의 둘째아들 조용현 군의 결혼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신랑 아버지, 주례를 맡은 나, 신랑, 신랑 어머니, 신랑의 형.
신랑 조용현 군, 신부 우수연 양.
신랑 아버지 조 선생의 아우님 되시는 분이 이끄는 관악대가 색소폰과 플루트로 축하 연주를 해주었다. 참 이색적이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연주였다. 사랑은 음악을 타고 온다. 새 가정에 부디 배려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주례사 : 14년 전인 2003년 초 목포에서 상하이로 향하는 배를 타고 스물네 시간 걸려 상하이 구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부부와 조 선생 부부가 함께 갔는데 소년이었던 조 군도 부모를 따라왔습니다. 이제 그 소년이 어엿하게 성장하여 씩씩한 신랑으로 결혼식장에 서 있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오늘 출발하는 새 가정에 하늘의 보살핌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대중연설에 약하다. 이제까지는 주례사를 미리 써가지고 가서 읽었다. 이제 주례를 열 번 넘게 섰으니 그냥 말로 해도 되지 않겠나 싶어서 원고를 써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웬걸, 아무래도 서투르고 더듬거려서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앞으로는 다시 주례사 원고를 써가지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1988년 3월에 나는 목포제일중학교에서 평교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가 미운털이 박혀 교장의 직권 내신으로 목포여자중학교로 강제 전출되었다. 나는 직권내신의 부당함에 맞서 목포여중으로 부임하지 않고 3일 동안이나 제일중학교에서 침묵농성하며 버텼다.
목포교사협의회에서는 제일중학교 담벼락에 학교장의 부당 전출에 항의하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시내 곳곳에 부당 인사를 항의하는 전단지를 배포했다.
결국 사흘 만에 다시는 부당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학교장의 각서를 받고서야 목포여중으로 부임했다.
그러고 몇 년이나 흘렀을까. 마흔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누군가가 권해서 첫 주례를 맡게 되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청년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부당 전출에 항의하여 제일중학교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시내를 돌아다니며 몰래 전단지를 뿌렸던 사람이란다. 나는 쾌히 주례를 승낙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출판사인가를 하더니 요즘에는 무슨 회사를 차려 탄탄대로를 걷고 있단다. 한 번은 나를 비롯한 목포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몽땅 불러 덕인주점에서 거창하게 한 잔 대접했다. 나는 얼큰한 김에 그가 너무나 고맙고 대견해서 어깨를 끼고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주례보다는 신랑이 더 걸쭉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첫 주례도 첫사랑만큼 애착이 간다.
하루는 전교조 목포지회 사무실에서 김 선생과 바둑을 두다가,
“어야, 적령기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언제 결혼할란가?”
그러자 김 선생이 양복 속주머니에서 무언가 부스럭부스럭 꺼내더니,
“그러잖아도 선생님한테 가장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받아보니 청첩장이었다.
“오메, 재주도 좋네, 잉!”
신부도 내가 잘 아는 전교조 활동가 김 선생이었다.
“주례 좀 서주십시오!”
“아무렴, 좋고말고.”
쾌히 승낙하고 주례를 서주었다.
누가 누구인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광주에서 열린 결혼식장에는 신랑 김 선생과 신부 김 선생의 양쪽 학교 선생님들과 교장 교감도 모두 참석하였을 터였다. 나는 당시 전교조 해직교사인데다가 평교사였다. 신랑 신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 터이지만 주례를 맡은 나로서는 그 교장 교감 선생님들 심정이 얼마나 불편하였을까 생각하니 신경이 여간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교장 교감 선생님들 앉혀 놓고 평교사가 주례를 서는 모양새가 꽤 거북살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뒤로는 젊은 후배교사들이 주례를 부탁하여도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때로는 좀 더 무난한 사람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신부는 주례를 사랑하는가.’
이 말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예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전해오는 말이다.
주례를 서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와 신부 김 선생은 우수영중학교에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허물없는 신부 김 선생한테,
“신부는 주례를 사랑하는가?”
신부 김 선생은 까르륵 숨넘어가게 웃으며,
“예이,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사랑하구 말굽쇼.”
그 뒤로도 신부 김 선생은 무슨 행사장에서 나만 만나면,
“아이고, 주례 선생님, 걱정하지 마셔요. 아직도 신부는 여전히 주례 선생님을 사랑한답니다.”
까르륵 숨넘어가게 웃으며 나를 놀린다.
그 뒤로 나는 누구한테나 또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
“주례 설 때마다 조심스럽다니까.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느냐고 물어야 할 대목에서 입버릇이 잘못되어 주례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 같아서 말일세.”
그래도 지금까지 나는 김 선생 내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진도군 조도는 평소에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데 태풍이나 폭풍이 지나간 다음이면 바닷물이 뒤집어져 큰 고기가 잡힌단다. 신부 김 선생이 목포여중 근무할 때에는 조도 사는 학부형이 큰바람 지나간 후 잡힌 튼실한 돔, 농어를 대형 스티로폼 상자에 담아 보내서 나까지 잘 얻어먹었다. 그것도 이 년에 걸쳐 두 차례씩이나.
조도 물고기 말고도 김 선생 부부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우의를 나눈다.
요즘은 누가 주례사랍시고 경청하지도 않고, 주례사가 길어지면 하품을 하기 십상이고, 아예 주례 없는 결혼식도 있다는데, 사회적으로 떠르르한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을 주례랍시고 늘 환대해주는 김 선생 내외가 참으로 황송스럽다.
나는 ‘신부는 주례를 사랑하는가?’가 그저 우스갯소리거니 생각했는데 프랑스 어떤 대통령 전기를 읽어보니 그것만도 아니었다. 그 양반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가까운 친구로부터 주례 서줄 것을 부탁받았는데, 모델 출신인 신붓감을 보고는 미모에 홀딱 반하여 주례를 서주기는커녕 자기가 꼬셔서 자기 신부를 만들어버렸단다.
주례도 좀 나이 지긋한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친구한테 부탁했다가는 프랑스 대통령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앞으로는 우스갯소리라도 주례를 사랑하는지 따위의 말을 조심해야겠다. (끝)
첫댓글 선생님... 제 아들놈 주례까지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창익선생도 그랬겠지만 저도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의 큰 형님으로 우뚝 서계시는 조명준선생님과 고진형선생님께 제 두 아이의 성혼선언을 부탁 드리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답니다. 이제 곧 그것을 다 이루게 되었으니 청년 시절부터 노년까지 쭈~욱 감사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따뜻이 배려해주시는 선생님을 저는 평생 따라다녀도 못 배우겠습니다. 4월 후반에 허브꽃 피어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