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현진 마술사의 이력
현란한 눈속임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마술을 시연하는지 궁금해서 매력적인 마술사 함현진씨를 강남의 한 막걸리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교육마술사 함현진 씨는 이력도 화려하다.
대한민국 최대의 매직 바Bar와 국내 최대의 마술연기학원의 대표. 대한민국 최초의 마술교과서 출판 및 세계 최초의 마술학과를 설립한 교육마술사 함현진. 한국교육마술협회 회장, 한국교육전문가포럼 회장, 장안대학교 엔터테인먼트과 교수, 부산 장신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 매직캐슬코리아(주)대표. 그에 따라다니는 이력이다. 교육과 마술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의 콘셉트로 만들었다. 그는 한 때 촉망받는 교회지도자였다. 그랬던 그가 무대의 광대가 되고 전 세계를 누비는 공연가가 되었다. 왜 마술사를 선택했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술사가 되기까지
사람들은 마술사라는 직업을 생각 할 때 상당히 특별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18년간 마술을 하는 나도 늘 만나는 사람들이 마술사를 첨음 봤다고 하고 가까이서 마술을 처음 봤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내가 더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특히 나를 보는 사람들은 다른 마술사들 보다 좀 더 연예인과 견주는 느낌도 받는데 항상 연예인들과 있고 유명한 인사들과 함께 한 사진과 동영상들이 늘 인터넷에 떠돌기 때문일 것이다. 월드 스타 “비” 겨울동화의 “최지우” 수많은 개그맨들과 인기 가수들 그리고 영화 배우들과 패션 모델들. 나름 내 스타일도 평범한 것은 싫어서 독특한 개성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느 누구도 내가 가난했거나 아주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믿지를 않는 것 같다. 아주 통속적으로 당연히 어려운 일들이 있었을 테고 좀 더 어렵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어야 좀 이야기가 되겠지 싶어 없던 이야기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다산 북스와 계약을 하면서도 가장 불편하고 어려웠던 것은 굳이 내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써야 하는가였고 수 많은 방송에서도 꼭 내가 신용불량자까지 갔던 시기나 어려웠던 청년 시절을 말해야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어릴적에는 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부유하고 잘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테니 각설하고 내가 지금의 화려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지난 시절을 조금 보여주기만 하겠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을 택시기사로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경비를 하시지만 나의 유년 시절 아버지는 술을 정말 좋아하셨고 그 술로 인해서 사고를 일 년에 한 두번은 내시고 말았다. 당시 1980년대에도 300~400만원 정도의 큰 돈을 자주 합의금으로 내셔야 했고 택시 면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친목회에서 돈을 꾸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개인택시를 타기 위해 합승도 안하고 승차거부도 안하고 돈은 참으로 못벌어다 주신 것 같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술 드시고 사고를 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돈으로 막으셨는데 나중에 개인택시 합격자 발표가 라디오에서 발표가 되었는데 2순위에서도 가장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불릴 정도로 개인택시는 특별한 아버지의 꿈이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아버지는 일하시는 날보다는 술을 드시고 신경외과에서 20여일 또는 한 달간 입원했다가 퇴원하시고 어머니와의 잦은 싸움으로 일을 하지 않는 지경에도 이르렀다. 그래서 내 대학 등록금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면서 학자금 대출의 몫이었다. 당연히 생활력이 강해진 어머니는 보험회사의 여왕도 되시고 온갖 네트워킹 다단계와 반지계 등을 하시며 억척스럽게 살아오셨고 마침 고철로 돈을 버는 기회가 오셨었다. 동네에 있는 현기 엄마라는 분이 필리핀에서 고철을 사다가 파는 그런 사업인데 이게 처음에는 두 배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 주며 돈이 불어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뻔하다. 정말 좋은 물건이 있는데 남에게 놓치면 안된다는 말에 그간 벌었던 것까지 몽땅 털어 넣은 어머니는 10원 한 장 건지지 못하고 잃어 버렸다. 같은 동네에서 오랜 동안 신앙인으로 살던 현기 엄마는 그 후 90년 대 후반에 암으로 죽고 말았는데 우리는 23평짜리 2층 빌라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게 되었다.
"노가다" 그 험한 세상에 가다
1992년 겨울.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인해 3억원이라는 돈을 모두 잃어 버리고 믿었던 교회 식구에게 사기까지 당한 우리 집은 없는 형편에 그나마 모았 두었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장남이었던 나는 다니던 신학대학을 휴학하고 동시에 막노동 현장으로 나가야만 했다. 12월 그 추운 겨울 일거리를 찾기 위해 서울역을 오가며 새벽 2시까지는 서울역사 안에 있다가 2시가 넘으면 밖으로 쫓겨나 노숙자들과 함께 신문지로 밤을 새고 새벽에 지하철을 열어 주면 우르르 몰려가선 이야기 꽃을 피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잠시 있다가 새벽 5시가 되면 나는 충무로역으로 이동을 했다. 충무로의 풍전호텔 옆 허름한 옥탑방에는 항상 누워있는 업자가 있었는데 용역업체에서 하루 하루 소개해 주는 일당 막노동을 받아서 돈을 벌며 보냈다. 막노동 일을 하게 된 지도 그로부터 7개월. 1993년 7월 11일 훈련소에 가기 전 7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막노동을 했고, 그중 마지막 3개월은 노량진 수산시장의 4층짜리의 주차타워를 짓는 곳에서 정책했다. 누구보다도 성실함을 인정받았기에 3개월 간 일당 3만원에 직영으로 눌러 앉게 되었다. 이유는 보통 막노동 일군의 하루 일당이 35.000원인데 충무로의 용역업자는 전화를 받아 주는 소개비로 항상 5000원을 항상 떼어 갔다. 거기에 용역업체로 가는 차비에 다시 현장으로 가는 차비까지 하면 차비도 반으로 줄어들 수 있고 보다 안정적으로 출근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용역사무실은 충무로였고 우리 집은 인덕원에서도 조금 들어가는 의왕시 포일단지라는 곳인데 평촌신도시 맞은편에다 동부시장이라고 하는 깊숙이 들어있는 조그만 동네였다. 바로 앞에는 서울구치소가 보이기도 하는 곳에서 매일 새벽 충무로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게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급한대로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노동을 구하다 전화 연결이 된 곳이 충무로였기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했다. 용역업체에서 모이는 사람 중에서 가장 멀리서 출발했지만 나는 대부분 첫번째 아니면 3번째 안에는 들어 있을 정도로 늘 일찍 갔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막노동 일 자체도 없을 때도 있었고 때론 늦어서 이미 일이 다 사라져 버려 아침 8시에 다시 집으로 올 때도 두 세 번은 있었다. 그래서 늘 추운 겨울 버스도 없는 집에서 나와 수원에서 사당동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목까지 점퍼 지퍼를 올린 후 땀이 나도록 뛰었고 4시 50분 경에 첫차가 지날 때엔 어김없이 타곤 했다. 당시는 사당에서 안산으로 가는 지하철이 없었기에 사당에서 다시 전철을 타고 충무로까지 가야했었다. 이러다 보니 차비도 사실 솔찬히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일을 못찾는 날이 간혹 있을 때엔 너무 내가 무능해 보여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동안 충무로 용역사장이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몇번을 보내주었다. 번번히 같은 곳을 가지만 그래도 용역업체에는 들려야만 했다. 난 아는 얼굴이 보이니까 더 반갑게 인사하고 웃으며 일했다. 그래서일까? 너무도 열심히 일을 하니까 노량진 수산시장 주차타워 공사담당자인 공사 소장님과 과장님께서 나를 불러서는 직영으로 일하게 하셨고 함께 일하던 키작은 한씨 아저씨와 난생 처음보는 조선족 구씨 아저씨 그리고 함께 일을 나갔던 동갑내기 친구까지 3개월 가까이 보내게 되었었다.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준공검사만 남고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한일건설은 다음 공사장인 강원도로 간다고 했다. 당시 28살 먹은 김창섭기사란 분이 나를 이뻐해서 강원도에 데려 가고 싶으니까 준공검사 마치고 오라는 말했었다. 모든 팀이 다 떠난 후 준공검사를 마치고도 7일 간을 나 혼자서 큰 건물을 돌며 청소하고 주차장의 바닥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하며 남게 되었다. 혼자 아침먹고 혼자 점심 먹고 혼자 새참도 사먹고 낮잠도 자면서 보낸 일주일은 젊은 아니 어린 나이지만 3개월간 지켜 보며 함현진이면 맡기고 가도 된다는 신뢰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함현진의 성실과 노력이었다.
똥을 먹다
5월의 노량진 수산시장은 정말로 지독한 생선 비린냄새와 내장들의 썩은 내로 진동을 한다. 겨울에는 맡지 못했던 독한 냄새들이 5월 초부터는 온 시장에 퍼졌다. 특히 그늘이 있는 수산시장 안은 깨끗한 편이지만 주차장을 짓고 있던 공사장 근처는 쓰레기통과 온갖 내장들을 내다 버리고 야채들도 잔뜩 쌓여져 있는 하역장이 붙어 있어서 냄새가 어지간하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루는 김창섭기사가 나를 불러 흥정을 했다. 보통 노가다를 하다 보면 ‘야리끼리’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른바 정해진 일 빨리 끝내면 더 일찍 갈 수 있는 일종의 보너스 타임이었다. 나와 친구는 야리끼리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정말로 열심히 하면 무려 40분 정도는 빠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씨 아저씨나 구씨 아저씨는 별로 반기지 않았다. 그거 해봐야 더 힘만 들고 어차피 정해진 시간에 하는 거나 똑같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언제나 넙죽 받아 먹었다. 하지만 짬밥이란게 생기니까 역시 야리끼리는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한참을 당한 후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은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전문적인 관리자들은 어차피 5시까지 할 일에 대한 견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만큼을 야리끼리로 주면 얼추 시간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처럼 젊고 멋모르는 일군에게는 한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30분만에 마치고 집에 간다는 것처럼 믿게 하지만 어차피 1시간 분량의 일이 되어질 뿐이었고 씻고 옷 갈아 입고 정리하면 결국은 별반 차이 없는 15~20분 정도였다. 오히려 더 힘빼고 땀만 빼버린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김기사는 야리끼리로 흥정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돈이 걸렸다. 그것도 무려 5000원이었다. 시간이 아닌 돈이라니..당시 회수권이 성인요금 340원 할 때였으니 5000원이면 회수권을 10장을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런데 흥정의 조건은 아주 난감했다.
바라시의 저주
노가다의 용어들은 대부분 일본어가 많다. 진짜 일본어인지도 알 수 없는 수 많은 용어들. 나라시, 바라시, 오비끼, 다래끼, 야리끼리, 오시, 매지, 곰빵 등 수도 없이 많은 용어들을 어느샌가 다 알아 듣고 나도 명령을 내릴 정도 되었을 때인데 ‘바라시’를 해 달란 것이었다. 바라시가 모 어렵다고 일당에 5000원을 더 줄까 하고 의아해 했지만 상관없었다. 난 돈이 더 생긴다는 생각에만 집중하고 하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친구도 골똘히 생각은 하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가 더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일당 5000원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길래 그럴까? 하는 고민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이런 내 단순함이 그들의 맘에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어디서 바라시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은채 나를 주차빌딩 우측 뒤로 데리고 갔다. 참고로 바라시란 거푸집에 쓰인 나무와 판자들을 떼어 내는 것을 말하는데 가끔 못이 튀어 나오고 공구리라고 하는 콩크리트들을 망가뜨리지 않고 잘 떼어 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날은 무척이나 더운 5월이었다. 5월 5일도 한참 지나 아마 석가 탄신일이 다가오는 때로 기억이 난다. 김기사가 내게 장화와 우비를 주었다.
“아니 비도 안오고 물 뿌리는 데도 없구만 무슨 비옷을 주고 장화를 준다지?”
옆에 있던 친구는 갑자기 입을 막으며 터져 버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구 웃으며 도망갔다. 그리고 한씨 아저씨도 짓굿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구씨 아저씨만 무표정하게 나를 안타깝게 보는 정도였다. 두 아저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들이 안하겠다고 하니까 어린 우리들에게 말한건데 내가 덮석 물었버린 것이다. 거푸집을 떼어내는 곳은 지상이 아니라 공사장에서 일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정화조였던 것이다. 김기사가 말했다.
“일단 뻠부(펌프)로 최대한 빼냈으니까 거의 없을거야”
이 말은 정화조 안의 똥과 오물을 빼냈다는 것이었다. 난 5000원에 너무도 가혹한 벌을 받는 느낌을 받았고 한 순간에 동물원의 흑돼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고 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다. 양말은 물론 한 낮의 뙤약볕에도 사람들 앞에서 훌러덩 벗어 버렸다. 어차피 여자가 없는 공사 현장이었고 난 삶이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이왕 할거면 웃으며 해야지 내가 아니면 불쌍한 구씨 아저씨나 한씨 아저씨가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도망간 친구놈이 좀 야속하긴 하지만 어차피 1명만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약간 연한 녹색빛이 도는 긴 고무 장화를 신고 머리까지 씌여지는 최신식 노란 우비를 입고 후드티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는 각부목 나무로 대충 만들어진 사다리를 타고 조심스레 내려갔다. 사실 한 낮에 코를 찌르는 생선냄새와 썩은 내장 냄새도 맡았는데 모 이런거 정도야 하며 내려가면서도 노란 진흙밭처럼 보이는 오물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는건 그리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맨홀 구멍으로 가슴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목이 들어가게 되자 사람들의 신발과 복숭아 뼈가 보였다. 떨어져 있는 담배 꽁초들과 아이스크림 껍데기 등이 보였다. 나는 숨을 힘껏 쉬었다. 어차피 10분은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숨 한번 참는다고 모가 달라질까 싶지만 이것도 살기 위한 본능이라면 본능이었다. 벌써 몸은 한낮의 열기로 덥혀져 있었다. 거기에 내 체온이 절대로 빠져 나갈 수 없는 비닐 우비와 고무 장화로 인해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가 맨홀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각부목과 합판등으로 얼기 설기 지어진 거푸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낮이라 특별한 조명없이도 잘 보였다. 다행히도 거푸집쪽은 합판 나무 색이나 똥색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그런대로 보기 좋았다. 그런데 똥이 어디까지 차있나 확인차 내려다 본 장화쪽에는 내 복숭아뼈 약간 위로 똥이 그득했다. 그 덕에 내 엉덩이에도 똥이 닿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지만 맨홀에 들어오기 전에 들이 마셨던 숨은 벌써 턱까지 차오르고 나는 원하지 않게 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아! 정말 싫었다. 이건 아니다. 이런 똥통 속에서 헐떡 거려야 하다니..’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마지막 숨이 나가는 동안까지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숨이 나간 순간 이젠 적절히 타협하듯 숨을 쉬어야 하는 그 독약같은 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명언 같은거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생각도 못했을 것이었다. 몇 초가 지났고 사람들 몇 명이서 맨홀 뚜껑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나도 그들을 봤다. 처음 맡아본 똥통 속에서의 깊은 호흡. 뜨거웠다. 맨홀 안에서 느껴지는 그 뜨거움을 느낄 찰라에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냄새..냄새가 안나는 것이었다. 분명 나는 더럽고 지져분 해서 토하는게 당연할 것 같은 곳에서 냄새를 다시 맡아보았다. 내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아침마다 변을 보는 것 보다도 냄새가 안났다. 그때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운 상식이 생각이 났다. 중 2학년 때 키 작은 여자 과학선생님께서 인간의 감각 기관 중에 가장 예민한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었다. 다들 혀 또는 눈을 말했는데 답은 의외로 ‘코’였다. 코가 가장 예민하기 때문에 냄새에 민감해져서 지쳐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길 “똥뚜간에 가면 똥냄새 금방 잊어버리지? 하나님이 인간들 냄새때문에 힘들지 말라고 코를 제일 예민하게 만들어다”는 것이었다. 다들 여선생님의 괴변에 웃었지만 난 그 때 배운 과학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순간이었지만 나는 동그란 하늘을 쳐다 보며 씽끗 웃었다. 사람들 몇명이 빼꼼이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구씨 아저씨에게 연장을 달라고 했다. 연장은 두 개였다. 못을 빼는 망치와 긴 연장인 장도리였다. 연장을 받을 때엔 조심해야 한다. 만일 놓치기라도 하면 내 얼굴로 떨어지기 때문에 조심스레 연장을 받아서 정화조의 거푸집 나무를 하나 하나씩 걷어내고 뜯어 내었다. 뜯어낸 나무는 손을 뻗쳐서 맨홀 위로 올려야 한다. 내가 올려 주는 목재들이 점점 많아졌다. 땀복을 서 너개는 입은 것처럼 흘러 넘치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뜯어 내다가 잠시 발 아래를 보았다. 쭈구려 앉은 상태에서 위를 보며 계속 무거운 연장으로 뜯어 내려니 목이 너무나 아팠다. 어깨도 결리고 다리는 저려 올 듯 했다. 하지만 어디 한 군데 앉을데도 없고 쉴 수도 없다. 재빨리 제거 하고 나가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미켈란젤로가 성베드로 성당의 벽화들을 다 완성할 즈음 목에 혹이 났다고 하던가? 그 심정을 조금 이해했다. 너무 올려다 본 내 목이 미칠려고 하길래 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데 의외로 재밌다. 내려 올 때 바라본 정화조 안은 그저 노랗게 보였고 숨을 쉬지 않을 때엔 그저 황토색처럼 보였는데 숨을 쉬며 다시 보니 의외로 다양한 칼라가 펼쳐져 있었다. 조금은 붉은 기운도 있고 약간은 노랗고 더러는 진한 황토색 본연의 색을 내게 보였다. 만일 지금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있었다면 그 장면을 찍어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했을 것 같다. 내가 있는 곳이 똥통이 아니라면 나름 괜찮은 작품처럼도 보일만 했다. 생각보다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걱정했던 냄새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땀이 너무 나서 정말로 장화에 물이 고이는 것 같았고 엉덩이 쪽은 이미 땀이 차서 더운 온수가 있는 듯 했고 가려운 나머지 따갑기 까지 했다. 목과 가슴에는 간지러움을 느껴야 했고 미끄러지지 않는 비옷은 움직일 수도 없게 붙어 버렸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가 보다. 빠르게 거푸집을 떼어 내려다가 위험한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망치와 장도리를 들고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못이 달려 있는 긴 각부목이 내 얼굴로 떨어 지는게 아닌가. 내 머리 위쪽의 각부목은 붙어 있었지만 다른 것을 떼다가 벽 쪽의 나무가 얼굴로 날아 왔다. 난 살짝 뒤쪽으로 움직이며 이마 쪽으로 날아오는 못박힌 나무는 간신히 피했는데 이마가 뒤로 젖혀지자 턱이 약간 위를 향하듯 앞으로 나가는 상황에서 하지 말아야 할 키스를 하고야 말았다. 누구의 거시기인지도 모르고 수 개월간 숙성되고 산화되어 버린 이 정체 모를 똥이 잔뜩 묻은 나무가 내 입술을 강타하고 만 것이다. 입술에 붙어 버린 똥나무는 바로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내 입술에 붙어서 멈춰버린 나무를 연장을 들고 있는 내 두 손으로 떼어 내야만 했다. 정말 눈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인지라 난 잠시 찔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같으면 차라리 여기서 나왔어야 할테지만 나는 끝까지 5000원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지를 달라고 할 새도 없이 비닐로 만들어진 우비라는 것을 까먹은 채 오른 팔로 입을 쓰윽 닦았다. 아뿔싸 천이 아니다보니 똥을 가져가는게 아니라 내 입속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어 버리는게 아닌가! 많지는 않았다. 아주 소량이지만 난생 처음 신원이 확실치 않은 무언가를 내 혀 끝으로 느껴야만 했다. 내가 소물리에의 입장이라면 뭐랄까 정말로 석연치 않은 맛이었다. 몇 번을 퇘 퇘 거리며 입속을 비우고 싶었지만 뭔가 계속 느껴지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입술에 묻은 것을 깨끗이 닦으려면 내 혀로 입술을 촉촉하게 하지 않고는 닦을 수 없을 것 같아 일단은 참았다. 결국 입술에 똥을 묻힌채 난 마지막 남은 나무거푸집을 다 해체하고 동그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되었다. 이미 위에서는 내 상황을 봤기 때문에 다들 안쓰럽게 쳐다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따로 있었다. 난 입술에 묻은 똥 보다도 내 온 몸에 가득 고인 땀이 더 문제였다. 같은 쌍 ‘ㄸ’ 인데 이 순간만큼은 숨막히는 정화조 ‘똥’보다 내 몸을 뒤 덮은 ‘땀’이 더 괴롭혔다. 땀의 공포는 숨이 턱까지 막히는 뜨거움에 간지러움과 따가움이었다. 한참을 앉아있던 내 무릅 뒤쪽 접혀진 관절쪽은 이미 땀띠에 쓰라린것 같았고 사타구니 쪽도 상당히 힘든 상황까지 가 버렸다. 10분이 안걸릴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좀 더 오래 걸린 바라시 사건은 한발 한발 올라서는 사다리 위쪽에서 마쳐질 거란 생각에 참을 수 있었고 드디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거란 기대로 가슴이 설레일 정도였다. 5월의 중순~ 나름 밖도 상당히 더울텐데 이미 원형의 맨홀 뚜껑 위로 나가는 내 정수리는 비닐 모자를 벗겨낸 가벼움에 시원함이 느껴져 행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겐 다른 고통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냄새였다. 정말 고약하고 극심한 냄새. 10여분 이상을 정화조 똥통 속에서 있었던 내가 오히려 참을 수 없었던 그 냄새는 바로 생선의 죽은 냄새였다. 내가 올라오다가 잠시 멈칫 하며 다시 코를 막는 모양으로 고개를 떨구자 사람들은 다들 놀라 내게 물었다. “왜 그래?”
난 신학대학 다니던 시절 읽었던 한 성인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냄새는 향수가 썩은 냄새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나는 가장 독한 냄새는 사랑이 썩은 냄새이다 ”
이후 나는 이런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의 분뇨 냄새보다 더 추악하고 더러운 냄새는 생명이 죽은 냄새이다.”
어쨌든 나는 지상으로 올라 왔고 덥게만 느껴졌던 오후의 뜨거움은 정화조 안보다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시원했다. 나는 누가 보는 것도 생각하지도 않고 똥이 잔뜩 묻어 있는 장화를 벗어 버리고 찢어 버리고 싶었던 우비를 위 아래로 벗어버렸다. 다시는 노란색 우비를 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웠었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김창섭 기사의 말은 내가 한 일이 잘 마쳐졌다는 말로 들렸고 난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물 호스를 있는대로 쎄게 틀고 머리부터 사정없이 부려대고 있었다. 어쨋든 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소중한 경험이자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결론은 반전에 있었다. 그날 그렇게 고생한 5000원은 결국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직영이다 보니 일당을 월급으로 받았는데 김창섭 실장이 강원도로 떠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지급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 어떠랴~세상 누구도 갖지 못한 지혜를 깨달았지 않은가. 세상 가장 추접하고 더러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나보다 더 지독한 냄새 속에서도 그 지독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불쌍히 여기던 사람들. 생명이 썩어 버린 온갖 냄새를 맡으면서도 그 독함과 역겨움을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오히려 불쌍했던 것은 아닌지 순간적이나마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 방위
이일 이후 시공을 맡은 한일건설은 나의 사람됨을 보고 강원도 공사도 함께 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이미 입대 통지서를 받은 후였다. 그렇게 1993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남자로써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신검 당시 나는 해병대를 지원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신체 조건이 맞지 않아 일반 보병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대 한 달 전 엽서가 왔는데 그것은 현역이 아닌 단기병 입대 통지서였다. 일명 방위 그것도 동사무소 18개월 방위였다. 72~73년대 베이비 붐 시대이다 보니 너무나 많은 입대 대기자가 있어서 1급을 제외한 2, 3, 4급은 단기병이 된 것이다. 나는 발 모양이 요족이라고 하는 오목발이어서 4급 현역을 받았던 때였다. 함께 신검을 받으러 갔던 어릴 적 교회 친구가 2도 전신 화상에 평발이었는데 면제가 될 것이라던 친구의 바람과는 달리 2급이 나온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게 평가되었다. 그만큼 신체가 불리한 것인가 했지만 오히려 집안의 일을 도와가며 18개월을 보낼 수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51사단에서 한 달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의왕시에 있는 청계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전 대원이 4명 뿐인 아주 작은 중대본부였다. 사실 51사 전 중대부대 중에 가장 적은 규모의 예비군 대대였다. 나는 신윤석이라는 키가 아주 외소한 동기와 함께 갔는데 소집해제를 하는 고참 2명을 대신하여 업무를 배워 나갔다. 단기병 즉 방위는 현역과 상당히 다른 명칭들이 많다. 현역은 군 복무를 마칠 때 제대라고 하고 단기병은 소집 해제라고 한다. 집에서 부대로 또는 동사무소로 출근하는 것을 마친다는 의미란다. 거기다 근무지 이탈이라 불리는 탈영도 현역만 쓸 수 있었다. 우리같은 방위는 탈영이 아니라 분실이었다. 분실? 이건 동사무소에서 잃어버린 어린이나 노인을 찾을 때 쓰거나 키우던 강아지가 집을 나갔을 때 쓰는 말 아닌가? 어쨋든 자랑스럽게 소집해제를 하고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가는 군 선임이 한겨례신문을 돌리는 중이었는데 고향으로 가니 신문 돌릴 후임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 생각도 안하고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어차피 새벽에 일하고 출근하면 되겠지 싶었다. 노가다를 하면서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집을 나서는 것에 익숙한 터였기에 가능하다고 믿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시티100이라는 오토바이도 준다는 말에 가장 마음이 끌렸다. 사실 군인이나 단기병은 오토바이를 타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걸리게 되면 신병으로써 징계를 크게 당할 일이었다. 하지만 시티 100이라는 중고 오토바이도 공짜로 생기고 오히려 돈을 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을 돌린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제대하는 선임은 한겨례신문이란 일간지를 돌렸는데 신문의 정체성을 몰랐던 나는 오토바이를 타면 무척이나 빨리 끝낼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돌리는 아주머니들은 약수터에서 물통을 옮기는 작은 바퀴달린 손수레에 신문을 싣고 돌리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는 나는 정말로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완벽한 착오였다. 경기도 의왕시의 내손동에서도 5층짜리 주공아파트가 대부분인 포일단지는 엘리베이터도 없지만 한겨례신문 구독자는 한 동에 불과 1~2가정만 구독하는데다 405호 또는 502호처럼 4, 5층에서 구독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계단 올라가는 핸들을 잡고 정말 불이 나게 달려야만 했다. 가끔 3층이나 2층에서 구독하는 분들이 너무도 고마울 정도였다. 달랑 신문 한 개만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신문을 들고 왼손으로는 계단손잡이를 잡고 두 세 계단씩 뛰어 올라가서는 꼭대기 층에 한개 놓고 다시 세 네개의 계단을 뛰어 넘으며 부리나케 내려 와선 시동이 켜진 채로 날 기다리는 고물 오토바이와 만나야만 했다. 가끔 오토바이 시동을 끄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나를 중심으로 있는 주변 동에 여러개의 신문을 넣을 때 뿐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각 동에 한겨례신문을 보는 독자들은 많아봐야 2가정 뿐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다닐 때만 오토바이가 멋질 뿐 다른 신문을 돌리는 아주머니들은 한 동에 3~4개의 신문을 번갈아 올라가며 돌리는 것이었다. 나 한 개 돌릴 때 아주머니들은 툭 툭 툭 올라가며 신문을 내던지면서도 절대로 뛰지 않았다. 같은 시간이라도 일명 조선, 중앙, 동아일보 같은 4대 일간지 신문을 돌리는 분들이 부수가 훨씬 적은 나보다 빠를 수 밖에 없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들이 적어서 당연히 배달하는 지역도 훨씬 넓었는데 당시 170여부 돌리는 것만으로도 2시간 반이 걸렸었다. 나중에야 오토바이를 준다는 것은 사탕발림일 뿐이라고 선임병에게 큰 소리 친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덕에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약 3개월 정도 지난 후 신문을 돌리는 일만 해서는 한참 기울어진 우리 집을 도울 수 없었던 나는 5시 퇴근 후에 같은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의 대형슈퍼에서 배달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신문을 돌려서 약 17만원을 슈퍼에서 4시간 알바를 해서 약 15만원을 벌었다. 슈퍼에서 일을 마치게 되면 밤 11시가 되었고 나는 바로 앞 우슈 체육관에서 쿵후를 연마하고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이렇게 매일 잠이 부족하게 살다 보니 업무를 외워야 하는 동사무소 일 속에서 졸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고 당시 정병준이라는 고참에게 참으로 많이도 혼이 났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4시엔 눈뜨고 신문을 돌렸다. 약 8개월 정도를 하고는 다시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벼룩시장과 교차로 신문을 뒤적이게 되었다. 마침 겨울이 되서 찹쌀떡 판매원 모집이 있어서 1993년 겨울엔 약 15일간 안양과 의왕시에서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기도 했다. 밤 10시 이후부터 새벽까지 팔았는데 이건 별로 재미도 못봤고 상당량을 우리 가족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먹어야 하는 일로 변해서 오래 가질 못했다. 다시 또 무언가를 지역광고신문에서 찾았는데 우연히도 연세우유를 돌릴 사람을 찾는 광고를 보았다. 이미 여러개의 우유 배달에 대해 알아는 봤지만 보증금이라는 것을 어찌 구할 방도가 없었다. 막노동을 할 당시도 나는 약 80만원 정도는 집에 가져다 주는 편이었다. 당시로는 참 많은 돈을 어머니께 드리곤 했는데 군생활 중에는 그만큼의 돈을 벌 수가 없었고 모아 놓은 돈이 없으니 우유 배달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 우유배달은 보증금이 수 백만원씩 있었어야 했는데 우유를 먹는 가정의 수와 지역에 대한 권리금과 우유에 대한 보증금이었다. 방위병 생활 중에 일 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새벽이나 밤이었다. 많은 단기병들이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생활로 인해 비교적 건전한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결국 목돈이 들어가는 우유배달을 가까운 지역에서 구할 수 없게 된 나는 다른 지역에도 눈을 돌렸는데 마침 의왕시의 부곡이라고 하는 곳에서 기회가 오게 되었다. 하지만 부곡은 같은 의왕시라고 해도 수원 옆에 붙어 있는 정말 먼 곳이었다. 나의 집은 서울 구치소 정문 앞이었고 우유배달을 하게 된 곳은 철도 박물관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우유배달은 하고 싶은데 돈은 없다고 했고 전화 수화기에서는 조용하게 나를 만나 보고싶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난한 신학생인데 방위병을 하면서 일하려니 신문이 너무 돈이 안되서 우유배달을 하고 싶다는 말에 자신도 교회의 전도사라고 하면서 보자고 하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한 참을 가서 만나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어디서 계시는지는 몰라도 그 분은 40대 초반이셨고 지하 개척교회를 하는 노총각 전도사였다. 하지만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배달을 할 수 없고 교회도 처분해야 한다면서 내게 선물로 그냥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백만원의 보증금을 포기하시고 내게 준다는 말에 얼떨떨하긴 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 후에 연세우유를 돌리던 중 덴마크 우유가 처음 한국에 출시되면서 보증금 일체 없이 내게도 돌릴 기회가 오게 되고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에 보템을 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뭐든지 쉽지는 않는 법이던가. 거리가 너무 멀어 새벽 일찍부터 의왕시 내손동에서 의왕시 삼동이라는 부곡으로 가려면 안양과 군포를 지나 한참을 가야했다. 지름길로도 오메기라고 하는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어느 비가 온 다음날 부리나케 가다가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우유는 다 돌리고 동사무소를 가는 중이었는데 늘 군복을 입고 우유를 돌리던 나는 왼쪽 무릎에 커다란 상처와 함께 너덜 너덜해진 바지를 입고 출근을 해야 했다. 상처보다 걱정되는 것은 중대장께서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눈치 챌까봐 걱정이었다. 오타바이는 동사무소 앞 농협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출근을 했었다. 이미 몇명의 동사무소 직원들은 오토바이의 존재를 알았지만 늘 이해해 주고 넘어가 줬다. 눈치를 아셨는지 중대장님은 생활을 위해 일은 하더라도 오토바이는 불법이니 타지 말라고 충고도 해 주셨다. 동사무소 출근 후에 나는 바늘과 실을 환경미화원 아저씨들께 빌려서는 대충 손바느질로 꼬맨 후 상처도 감추고 꿋꿋이 결국 나는 18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억척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난 늘 즐거웠다. 2번 있는 15일간의 휴가와 10일간의 휴가에도 지금은 미국에 가있는 심재덕 집사님이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배달을 했고 소집해제 후에도 평촌신도시 입주로 활기찬 평촌에 배달맨으로써 13층까지 엘리베이터 없이 걸어서 아니 뛰어서 맛있게 음식을 주고 내려온 적도 있었다. 원래 아파트 입주때는 엘리베이터가 이사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6층 8층 정도는 늘 뛰어 다니면서 배달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활기차게 살던 내게 가슴이 뛰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 본다면 나는 확실하게 말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술과의 만남이었다.
마술이라 부르는 행복
마지막 방위라 불렸던 동사무소 방위 소집 해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우연히 집을 향해 가던 지하철 4호선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벼룩시장을 넘기다 발견한 노란 광고. 그것은 ‘마술학원’이었다. ‘마술을 가르쳐 드립니다!’
에디슨 월드 매직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마술학원 광고였다. 마술이라는 한 줄의 광고를 보고 집에 돌아와 전화를 걸고 경기도 의왕시에서 강남 논현동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정하성 원장님이 보여주는 동전과 카드 마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세상이었고 내 눈으로 확인한 그 세계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동아시아를 주름잡다
나의 마술 이력을 설명할 때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경력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 절강성 이우시는 세계 최대의 도매 물류가 있는 도시다. 상무역이 발달한 이우시의 최대 호텔에서 열린 ‘2005년 이우시 한상인회 송년의 밤’에서 나는 통역 없이 단독 마술공연을 열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오갔지만 한국어를 이해 못하고 한국 문화를 이해 못하는 중국간부들이었다. 하지만 그 날 만큼은 너무나 즐거웠다고 했다. 당시 나는 광주에 있는 전 중국 기예협회 회장인 다이우치씨를 통해 상해에서 이우시까지 엄청난 거리임에도 특별히 부탁한 5마리의 비둘기를 공연 하루 전날 현지인을 통해 전달받았고 하루 만에 길들이고 연출한 완벽한 비둘기 마술과 현지 통역 없이 모든 공연을 중국어로 진행한 나에 대해서 과연 누구길래 이렇게 마술과 중국어를 잘 하는가 하여 감동한 그곳 고위층 공무원은 내게 최고라 박수치며 다음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2005년 산둥성 청도시에서 했던 공연을 본 청도시의 최고 실권자인 비서실장과 문화국장은 나에게 90도로 머리를 숙이며, 스승님이라고까지 했다. 누가 내게 말하길 나의 마술 세계는 감동을 넘어 경외의 단계에까지 이른 게 아닐까하는 농담도 했다. 그 후 청도시에서 나와 대동했던 현지 부동산 사업가인 박수완대표는 실제로 청도시의 호텔과 골프장 사업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고 청도시에서 무엇을 하든지 청도시가 50%를 투자하고 땅이면 땅 건물이면 건물 모두 다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에서의 공연도 인상적이다. 2009년 2월 베트남 한국 수교 17주년 기념 호치민방송 HTV 특별 생방송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오프닝 마술공연을 했다. 시청율도 67%나 되는 경이적인 방송이었다. 이 성과에 맞물려 호치민 중앙공원에서 2만명의 시민들과 호흡했던 60분 동안의 단독 마술공연의 감동은 또 다른 그만의 자랑거리다. 빈 철장 속에 불을 지르고 아름다운 미녀가 나타나면 그녀를 상자에 가두고 아주 작게 접은 다음 거대한 세 개의 칼로 찌르자 호치민 시민들은 열광을 했다. 그리고 미녀를 공중에 뜨게 한 뒤 테이블도 함께 하늘을 날자 마술을 처음 보는 그들은 너무나 놀라 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베트남 사람들이 평생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을 만들어 보여 주기로 하고 깨끗한 생수 한 병을 이용해서 맑은 물이 마법처럼 하얀 눈으로 만들어지게 하여 뿌려 주었다. 그들이 보지 못했지만 보고 싶었던 세상을 내가 보여준 것이었다. 이런 눈 마술은 캄보디아와 필리핀에서도 보여 주었는데 동남아인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고 여러 관계자들이 전해 주었다.
마술사의 목소리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에게는 팬들이 존재한다. ‘소녀시대’는 여학생 팬들도 있지만 단연 삼촌 팬이 많다고 한다. 마술사 이은결과 최현우도 청소년 팬과 젊은 팬들이 많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줌마 팬들이 유독 많다. 이유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전적 결과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을 올백으로 넘기면 탤런트 김형일 씨를 닮았다고 한다. 조금은 터프해 보이는 김형일 씨의 스타일이 마님들을 자극하는 것 같다. 또 수염을 살짝 기르면 조금은 살 찐 이승철 씨를 닮았다고 한다. 왠지 노래를 잘 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리고 두툼한 입술과 눈웃음이 아줌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고 한다. 입술이 왠지 푹신푹신해 보인다나? 사실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였던 두꺼운 입술이 사회생활 중에는 오히려 득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어필하는 것은 언제나 목소리였다. 항상 듣는 말이 내 목소리를 들으면 한결같이 감미롭다는 말을 한다. 전화 목소리를 듣고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도 참 많다. 적절한 유머 감각이나 재치가 많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목소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정말 높은 편이다. 사실 나는 내 목소리에 자신이 별로 없고 발음도 부정확해서 늘 고민이었다. 대신 좀 더 편안하고 부드러운 어투를 노력하게 되자 성우같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었다.
몇년 전 유명한 후배 마술사의 공연을 제자들과 함께 보러 갔다. 너무나 재미있게 진행하다가 공연 마지막 부분에서 프로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다. 내용은 이랬다.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여자는 한사코 거부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들으니 여자가 암을 선고받은 시한부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끝내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인데 잔잔하고 약간은 우수에 젖은 듯 한 멜로디는 눈물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있었다. 아마도 마술 공연에서도 눈물을 흘리도록 한다는 것은 특별한 감동이 있을 수 있기에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눈물도 특별한 애잔함도 얻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 생각은 어땠니? 왜 눈물이 안 나왔을까?"
“글쎄요 .특별히 그런 느낌이 없네요.”“그럼 내 공연에는 사람들이 왜 눈물이 났다고 했을까?”
목소리였다. 그 공연은 목소리 때문에 감동을 이끌어 내기가 어려웠다는 생각이었다. 코미디를 할 때의 목소리와 신비한 카드 마술을 할 때의 목소리가 같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동을 줘야 하는 연출이나 눈물을 자아내야 하는 연출에 나오는 목소리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슬픈 음악과 슬픈 내용 하지만 코미디 연출 때 했던 목소리가 그대로 나온다면 결과는 예상보단 감동이 적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난 제자들에게 목소리 훈련을 시킨다. 때에 따라서 내용에 따라서 목소리의 칼라를 바꿀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흔히들 자동차를 개조하는 것을 튜닝Tuning이라고 하는데 목소리에도 튜닝이 필요한데 이는 보이스 콘트롤Voice Control이라고 봐도 된다. 분위기에 따라 목소리의 톤과 음색이 달라질 수 있다면 특별한 무기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눈물의 마술공연
연극을 보다가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 이야기가 그렇고 장면에서 그렇다. 내가 가장 뜨겁게 눈물을 흘렸던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의 <퍼펙트 월드>와 최민식 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었다. 그리 대단한 영화가 아닌데 눈물이 나온 것은 주인공의 죽음이 오기 전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고 누군가를 아껴 주었다는 것이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는 영화야 말로 최고의 영화라고 혼자 말한 적이 있지만 마술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던가? 나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데이빗 카퍼필드의 공연을 두 번을 직접 보고는 무한한 감동을 느끼고 그 경이로움과 장대한 스케일에 탄성을 냈지만 거기에도 눈물은 없었다. 그런데 내 공연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물을 흘렸다고 찾아오는 관객에 대해 나도 당황해 하며 “그래요? 아..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6월 강남의 뱅뱅사거리에 위치한 동부교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주일 낮 예배에 나를 초대하였다. 전통 있는 교회에서 그리고 밤 예배도 아닌 11시 낮 예배에 마술사를 초대하여 공연을 하다니 정말 스스로도 놀랐다. 담임 목사님은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실력있는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오래 전부터 가스펠 매직(복음마술)을 생각해 오다가 나를 방송에서 봤다고 하셨다. 그리고 장로님을 시켜 날 섭외했는데 교회도 아주 고풍스런 고딕양식에 자유롭기 보단 왠지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설교가 끝나고 나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5마리의 비둘기가 나타나는 현란한 마술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나중에 목사님은 말씀하시길 자기 목회 인생에 큰 획을 긋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엄청 많이 했다고 했다. 교회에서 그것도 오전 11시 대예배 시간에 마술을 한다는 것에 반발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몇 장로와 임원들은 의아했지만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목사님도 긴장은 했는지 창립일 전 주일에 복음적인 마술이 성경에서 말하는 마술과 다르며 문화의 한 장르라고 아예 설교를 했을 정도였다. 2층까지 꽉 찬 예배당에서 화려한 공연들이 마쳐지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마술을 할 차례가 왔다. 오직 신문지로만 하는 스토리텔링 뉴스페이퍼 매직인데 야곱의 사닥다리를 주제로 하는 마술이었다. 이 마술들은 원래 존재하고 있던 신문지 마술 5가지를 한 데 모아서 이야기하는 연출법인데 마술 자체는 기존의 것과 같지만 풀어내는 방식이 기존의 어느 마술사와도 다른 방식의 공연이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신문지 마술은 모든 신문이 찢어진 후에 다시 회복이 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상의 뉴스는 우리의 가슴을 찢어지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우리의 가슴도 이 신문처럼 찢어집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라고 불리는 복음은 우리의 상처받은 가슴과 영혼을 회복하게 해 줍니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온다. 산산이 찢겨진 신문이 다시 똑같은 신문으로 멀쩡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문을 집어 들고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자 하지만 그 믿음을 인정받고 죽이지 않고 아들 이삭과 함께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40살에 아내 리브가를 만나 결혼 후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큰 아들은 에서라는 용사였고 둘째는 야곱이라는 여성스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냥에 익숙하고 늠름한 에서를 장자(큰아들)로써 사랑했고 야곱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마 리브가는 야곱이 가진 꿈과 비젼을 보고 야곱을 더욱 사랑했습니다.”신문을 사각형으로 찢고 난 후 난 공중에 하트를 그렸고 신문을 펼치자 놀랍게도 사각형은 하트로 변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야곱은 엄마 리브가와 짜고 이삭과 사냥터에서 배가 고파 하는 어리석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라고 하여 빼앗아 달아납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몸에 털을 붙여서 마치 에서인 듯한 연기를 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합니다.” 이 때 신문지 뭉치를 꺼내 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막은 한 낮에 50도를 넘는 무더위 때문에 그늘을 찾아야 합니다. 큰 바위 밑이나 나무 아래서 쉬어야 하는데 사막의 나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이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처럼 잎이 뾰쪽합니다.”하며 위로 쭉쭉 잡아 빼면 천정 꼭대기까지 닿을 만큼 높은 신문지 나무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하늘 높이 올라가는 신문지 나무를 높이 뽑을수록 박수가 크게 터져 나온다. 그리고 네 번째 신문지를 들고 계속 이야기를 전한다. “사막은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정말 춥고 무서워요. 독이 있는 벌레들과 뱀, 늑대들이 야곱을 위협하지요. 하지만 야곱은 양털조각 하나를 덮고 평평한 돌로 베개를 삼아 잠을 잡니다. 무섭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배고픈 야곱은 엄마가 알려준 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땅으로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알려주는 별을 보며 위로를 얻습니다.” 가위로 자른 신문지는 너무도 예쁜 별 모양으로 나타나며 기뻐하는 관객들을 볼 수 있다. 다섯번째로 아주 큰 신문지 뭉치를 들고는 야곱의 이야기에 마지막을 향해 가며 이야기를 한다.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 잠을 잔 야곱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사들이 나타나 하늘 위에서 땅 아래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네요. 날개 달린 천사들이 커다란 사다리를 타고 있군요.” 하며 손으로 자른 신문지에서 진짜 사다리처럼 하늘 위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타나면 관객들의 손은 박수로 입은 함성으로 크게 울리게 된다. “이 때 야곱은 깨닫습니다. 이 사막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신 다는 것을 알고 야곱은 기뻐했어요. 그리고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 자기가 베고 자던 돌 베개에 갖고 있던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약속을 했어요. 바로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야곱은 4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를 낳고 거대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축복입니다.”
교회 안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최고의 공연을 본 보답으로 박수와 환호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축하와 악수를 받고 사인을 해 주는데 2명의 여자 청년들이 다가왔다. “저 너무 감동받아서 울었어요.” “저두요.” 마술을 15년 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놀라게 하기도 했다. “감동 받았어요” 하며 인사를 받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눈물이 났다고 하는 이 말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부터 눈물이 났다는 말은 매번 교회 공연에 갈 때마다 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가 아닌 일반 공연에서 눈물을 흘린 여러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2010년 2월 유명 작가인 이지성 작가의 첫 번째 팬미팅에 300여명의 팬이 몰려들었다. 실제 좌석보다 많이 와서 보조의자를 놓고 서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수익금 전액을 노숙자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말에 흔쾌히 공연을 허락했다. 오프닝 공연으로 시작한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비둘기 마술을 보여줬고 이어서 관객을 무대로 올린 뒤 웃음이 나오는 코미디 동전마술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중국의 링마술로 인연을 표현하고는 가장 사랑하는 신문지 마술을 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공연이 마친 후 내게 몇 명의 여성들이 찾아 왔다. “저 울었어요.” “저 감동 먹어서 눈물이 막 났어요.” 눈물이 났다는 말은 자주 듣던 말인데 이번엔 좀 달랐다. 교회에서는 눈물이 났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일반 공연에서까지 눈물을 흘린 관객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감동과 희망을 주었기에 눈물이 났을까? 화려하고 신비하고 웃음을 주는 다른 마술사들과 나는 어떤 것이 다르기에 관객들의 입에서 ‘재밌었다’는 말보다 ‘신기했어요’라는 말보다 ‘눈물이 났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일까? 나는 그 실마리를 이지성 작가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꿈꾸는 다락방
이지성 작가는 다산북스와 책 계약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2009년 12월 우리는 다산북스에서 최소영 수석팀장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번도 마술을 본 적이 없다는 이지성 작가를 위해 간단한 마술을 보여 주게 되었는데 처음엔 젓가락으로 하는 벌레 마술로 웃음을 주고 동전마술로 놀라움을 주다가 고무줄 마술로 넘어가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데이빗 카퍼필드가 TV에서 했던 고무줄이 통과되는 마술을 보여주었는데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넘어 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희망의 별을 보여주는 고무줄 마술을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사람들은 마음에 바라는 것이 생기면 교회의 종탑위의 십자가를 보며 소원을 빕니다. 어떤 이들은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고 싶어 했고 실제로 달나라로 가는 기적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 여기 별 속에 또 다른 별이 있죠? 이건 바로 희망의 별입니다. 자~ 맘 속에 있는 소망을 생각하며 후!하고 불어보세요.” 마술사의 말대로 따라한 이지성 작가는 평범한 고무줄이 자신이 방금 보았던 진짜 별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맺는다.
“자 이렇게 당신의 꿈은 이뤄질 것입니다.”
사실 평범한 고무줄이 별 모양이 되는 것과 실제로 내 꿈이 이뤄지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와! 진짜 이뤄지나요?”하며 행복해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되새겨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마술을 본 후 이지성 작가는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해 주었다.
“마술사님의 마술을 보는 게 내 책 3권을 읽은 것보다 더 낫네요!”
이지성 작가는 꿈꾸는 다락방 3권을 합쳐 170만권을 판매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런 최고의 작가가 “자신의 책 3권보다 더 낫다”라는 말을 한 것은 물론 나에게 칭찬을 해 주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마술사 함현진이 추구하는 마술의 핵심을 알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나는 마술을 통해 아이들로부터 어른들에게까지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주고 싶었다. 내가 진정 착하거나 인류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한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악한 모습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내 무대와 내 공연에서 만큼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꿈을 갖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을 나눴으면 했다. 하나님이 내게 마술을 하라고 허락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마술사 함현진 인터뷰
Q 언제 마술을 접하게 되었으며 마술 경력은 얼마입니까?
A 지하철에서 누군가 읽다 버린 벼룩시장 광고였다. 흑백광고 좌측 하단에 있던 노란 마술학원 광고를 보고 찢고는 학원을 찾아갔다. 그 이후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Q 마술 공연을 하며 정한 중요한 원칙은 있습니까?
A 관객에 대한 저속하거나 거친 표현은 하지 않는다. 종종 어린 마술사나 다른 마술사들이 관객을 놀리거나 외모로 웃기려는 것을 싫어한다. 최대한 관객을 존중하고 최선으로 기쁘게 하고자 한다. 인생 자체가 마술 아닌가? 상상했던 것이 이뤄지는 순간들 꿈꾸는 것이 이뤄지는 순간들 정말로 마법의 세계 그 자체 아닌가? 나는 그것을 오롯이 관객의 마음 속에 전달하자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다.
Q 인간 함현진이 앞으로 세상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A 아프리카 중국 동남아 빈민 아이들에게 사랑의 마술쇼와 자선공연으로 모음 기금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싶다. 중국에서 2년간 청도한인교회(중국 최대의 한인교회)전도사로 있으면서 중국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동남아 공연을 다니면서 빈민들에 대한 사랑이 생겼다.
지금도 매년 2회씩 결식아동과 빈민들을 위해 수많은 연예인들과 자선공연을 하고 있다. 앞으로 재능으로 기부하는 더 멋진 동역자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남을 위해 날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내 자신을 위해 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Q 마술사 함현진의 인간관계론은 무엇인가요?
A 사람들은 함현진을 좋아한다. 특별히 마술을 하는 함현진은 너무 열광하고 좋아한다. 누구든 함현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난 어떤 누구를 만나든 이용할 가치로 만나진 않는다. 마술을 보여 달라는 말에 불쾌해 하지도 않는다. 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웃음이라도 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더 달라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은 마술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텔레비전, 스마트폰, 엘리베이터, 비행기. 이모든 게 신비하고 놀라운 물건이 아닌가? "마술이 과학이다가 아니라 과학이 마술이다." 물론 나의 인생도 마술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이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잘 생각해 보라. 당신의 삶도 사실은 마술과 같은 놀라움이 가득하지 않은가? 상상하고 꿈꾸면 반드시 이뤄지는 마법 같은 세상. 바로 당신이 만들어 가는 기적 같은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 나온 마술 영상은 아래의 카페에 회원 가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함현진 마술사의 홈페이지 http://www.edumagic.co.kr/
한국교육마술협회 카페 http://cafe.daum.net/edumagicschool
영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브리튼즈 갓 텔런트"에서 폴포츠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코니 텔벗"이 한국을 방문하여 유일하게 함현진 마술사와 함께 공연을 했다.
특히 마술을 좋아하는 꼬마 숙녀답게 마술을 먼저 배워서 자신의 노래와 함께 하는 열정으로 보였다.
한국을 방문한 뒤 함현진 마술사와의 공연을 위해 영국의 초등학교 일정을 뒤로 하고 약속을 지켜 청중들에게도 감동을 선사해준 아름다운 천사 코니 텔벗에게 하늘의 축복과 행운을 빈다.
30분간 6곡의 노래를 선사한 꼬마 천사 코니 텔벗..
출처: 한국교육마술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