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자전거 길
중학생 되자마자 성인용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지만, 레저용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내 고교 동기동창 동호인 그룹과 타 고교 동기동창 동호인 그룹, 두 개의 그룹에 소속되어 이중으로 라이딩을 즐기는데, 내 모교 동창 그룹은 주로 한강을 따라 서울 근교를, 타 고교 동창 그룹은 남한강 금강 낙동강 등 원거리 라이딩을 함께 해왔다.
수년 전부터 섬진강 자전거 길을 꼭 한번 달려보자고 소망해 오던 터에, 마침 모교 동창 팀에서 작년 11월 납회 모임 때, 추운 겨울 지나고 새봄이 오면 4월 초순 벚꽃이 만개 할 때쯤에 섬진강 라이딩을 시도해보자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금년 들어 숙고 끝에 드디어 4월 5일(금)∼6일(토), 일박이일의 일정이 구체화 되었다.
隊員은 모두 5명, 나를 제외한 本隊 4명은, 서울∼남원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이동, 남원부터는 섬진강 따라 달려 저녁에 압록 숙소에서 나랑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서울에서 새벽 고속버스에 자전거룰 싣고 임실읍에 도착하면, 임실읍에서 자전거를 타고 강진면으로 17km를 이동, 강진에서 섬진강 라이딩을 시작하여 압록까지 72km, 압록 숙소에서 本隊와 만나 숙박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 구례구역을 거쳐 화개장터에서 점심 먹고 하동을 지나 광양 중마버스터미널까지 73km를 달려, 터미널에서 마지막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로 귀환한다.
임실읍에서 강진면에 이르는 17km(30번 도로) 도중에 <국립임실호국원>이 있고, 이곳에 나의 부모님 두 분이 봉안되어 계시기 때문에 잠시 들러서 참배를 할 계획이라, 첫날은 本隊의 코스와는 다르게 별도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임실 터미널에 내려, 호국원을 향해 막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 하는데 택시 기사 한분이 어디로 가느냐고 지긋이 묻는다.
호국원이라고 대답하자 방금 출발채비를 하고 있는 시외버스(순창행)를 가리키며 타고 가기를 권유한다.
좋은 낯으로 버스 기사에게 다가가 요청했더니, 용케도 태워준다.
만만치 않은 고갯길이 하나 있어서 자전거로는 다소 부담되던 터라 버스 탑승 허락이 여간 고맙지 않다.
조금 여유 있는 버스 속에 승객들이 자전거를 잡아주며 거들어 준다.
버스가 청웅 근처를 지날 때, 도로 좌편에 이 지역 출신 동창생 친구가 운영하는 태양광 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홀어머니 노모를 평생 모셨던 외아들 효자는 모친 별세후 조상 땅에 설치한 발전시설이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어, 지극한 효성에 대한 보상이라고 주변에서 칭송받고 있다.
버스는 정확하게 호국원 정문 앞에 내려준다.
마침 4월 5일이 한식날이어서 부모님 성묘가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는 호국원 참배객 수가 두 배는 되어 보인다.
그윽한 숲 내음과 신록의 연록색 풍경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호국원을 둘러보며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향토마을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해 본다.
호국원 참배를 마치고 강진에 이르는 길은 평탄한 4km, 강진의 이름난 맛집에서 이 지역 출신 고교동창생이 기다리고 있다.
평생 서울의 대학교 강단에 있다가 은퇴 후에는 고향 본가에 간간이 내려와 소규모 영농으로 소일하며 머물고 있단다.
점심을 함께 하며 오랜 만의 회포를 다 풀지는 못했지만 갈 길이 바빠 아쉽게 떠나려는데, 보따리 하나를 건네준다.
먹기 좋게 깎은 과일과 손수 키우는 닭들의 계란을 삶아 가지고 왔단다.
속 깊은 그들 부부의 정성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나 홀로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달리며, 자연의 섭리, 인간관계의 인연, 우리 민족의 본성, 일제와 6.25 전쟁의 참극,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길섶에 쑥 캐는 아낙네, 산 두릅을 따고 있는 노부부, 노년의 삶, 세상일 다 알면서도 무심한 듯 흐르는 강물, 국회의원 사전 선거와 나라의 앞날 .....
많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체계산 인근에서 쑥 캐는 아낙네는 나보다 세 살 위인데, 55년 전에 시집와서 이곳에서만 평생을 살아왔단다.
체계산은 책처럼 생긴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형상이라 원래 이름이 책산 이란다.
강가에 있는 산 치고는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형세이다.
달관한 듯한 미소로, 이 여인은 살아온 삶과 섬진강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 준다.
초저녁 계곡 물에 산 그림자가 드리울 무렵, 압록 숙소에 도착했다.
예약한 온돌방은 따뜻하고 단정하다.
본대 일행과 반갑게 만나 인근 마을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홀로 달려온 여정과 강진의 동창생 소식을 나누고 그가 건네준 과일 계란을 나누어 먹었다.
이튿날 새벽, 안개 덮인 섬진강 건너편에는 벚꽃 가로수가 요염한 자태를 보일 듯 말 듯 환상처럼 연출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서 마을로, 새소리 들으며 강변 숲길을 따라 자전거는 달린다.
구례구역 앞을 지나며 지난 날 추억에 잠긴다.
내가 평생 봉직했던 공직을 마치고, 전주 한옥마을 노모 집에 머물며 10년 넘게 인근 대학에 강의 나가던 시절, 때때로 시간 나면 전주역에서 기차로 구례구역에 내려와 지리산 화엄사 노고단 피아골 쌍계사를 종종 돌아보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리산 산행 후 구례구역에서 전주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던 때의 흐뭇하고 고즈넉한 낭만, 고향 집엔 노모께서 저녁밥을 지어놓고 이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포근하고 평안했던가.
벚꽃이 만개한 화개장터는 인파로 요란하고 성황중이다.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지천이다.
맛있어 보이는 수수떡 나물 전 등을 점심으로 나누어 먹고, 갈 길을 재촉한다.
하동이 좌측 강 건너로 보이고 이제 섬진강은 넓어지면서 점차 남해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흘러간다.
지금까지는 산과 계곡의 풍경이었다면 이제는 간간이 배들이 떠다니는 포구가 보인다.
조금 더 내려가면, 섬진강 자전거길 종점인 <배알도 수변공원>이 나오고 그 직전에 그 유명한 <尹東柱 遺稿 保存 鄭炳昱 家屋>이 있다.
소중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이곳은 내 개인 역사에도 나름 뜻있는 사연이 연루되어 있다.
아주 오래전, 1969년 1월,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국어 과목에 나온 두 개의 문항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일제 때 민족운동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시인의 이름과 숨겨둔 그의 시를 모아 해방 후에 출판한 시집 이름을 쓰라는 문제였다.
배점이 자그마치 6점이나 된다.
당연히 정답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 터이다.
당시에 시험장에서 문제를 접하자 나는 언뜻 엊그제 일이 떠올랐다.
시험 하루 전에 우연히도 국어과목을 총정리하면서 윤동주의 시집 이름이 길고 외우기가 어려워서 그냥 “하바별시”라고 단순화해서 암기했던 생각이 났다.
또 다른 문항은 삶의 애환과 자연을 노래하던 조선조의 시인(윤선도)과 같은 심정으로 생활 속에서 자신이 겪는 고난을 극복하는 자세를 적어보라는 작문 문제였다.
나는 이양하 선생이 쓴 <페이터의 산문>을 인용하며, 수험생의 외로움과 괴로움 불안증 등을 극복하는 내 나름의 관념적 해탈 방식을 서술했고, 배점 10점에 근접하는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기억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수년전, 산행 친구들 10여명과 함께 청와대 뒷산 북악산을 오르기 위해 입구에서 수속을 밟다가 하필 내가 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아 불허되는 바람에 우리 일행 전원이 불가피하게 인근의 <윤동주 문학관> 탐방으로 전환했던 일이 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윤동주(1917∼1945)와 정병욱(1922∼1982)의 운명적인 인간관계를 듣고 알게 되었는데, 69년 당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계시던 정교수께서 이 입학시험 문제를 출제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학 후 재학시절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서 정교수를 자주 뵈었으련만 그분의 강의를 한번도 듣지 않았던 나의 무지가 통탄스럽다.
윤동주와 정병욱의 인연은 한편의 희귀하고도 애절한 드라마 같다.
윤동주는 만주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1938년 4월9일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1941년 12월에 졸업한다.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자필 시집을 3부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스승인 이양하교수(1904∼1963)에게, 나머지 한부는 친동생처럼 지내던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1942년초 일본 유학을 떠난다.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학과 재학중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1945년 2월 옥사하였다.
정병욱은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1940년 4월 연희전문에 들어갔다. 기숙사에서나 누상동 서촌 하숙집(1941년)에서나 윤동주와 정병욱은 의좋은 친형제처럼 지냈고, 1944년 1월에 일제 학병으로 징집되면서, 윤동주 시집 원고(시 19편)를 광양의 망덕포구 집에 계시는 모친께 맡긴다.
1945년 해방후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아들에게 모친은 마루 밑에 숨겨 두었던 시고를 꺼내 주시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1948년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기적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윤시인은 정교수 보다 5년 연상, 학교는 2년 위다.
1940년 4월, 신문에 게재된 정병욱의 수필 <뻐꾹이>를 읽고 윤동주가 정병욱을 기숙사 방으로 찾아가 만난 이후로 두 사람은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정병욱의 회고담을 읽어보면, 윤동주의 인품은 너무나 고결했음이 뚜렷하다.
시와 문학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문인들이지만, 양인은 모두 술을 하지 않았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동주는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남을 헐뜯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고 한다. 모자든 의복 단추든 신발이든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한 외양을 갖추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시의 세계에서든 현실의 생활에서든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주어진 길을 따라” 살았으리라.
5살 연하의 정병욱에게 맡긴 시집의 겉면에는 이렇게 정중하게 적혀 있다.
鄭炳昱 兄 앞에
尹東柱 呈
윤동주에게 드린 졸업 축하 시조 두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1941년 12월)
祝卒業
언니가 떠난다니 마음을랑 두고 가오
바람 곧 信있으니 언제 다시 못 보랴만
이 깃븜 저 시름에 언니없이 어이 할꼬
祝卒業
저언니 마음에사 冬栢꽃 피면지고
冬栢꽃 피온 고장 내 故鄕이 아닌가
몸이야 떠나신들 꽃이야 잊을소냐
정병욱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섬진강 자전거길 종점에 다다르면서, 광양 망덕포구 옛 가옥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윤동주와 정병욱 두 분의 운명적인 인연을 되새겨 본다.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이 두 분의 전생 인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때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의 본성이나 품성은 과연 어떤 것일까.
(2024.4.10. 박성훈)
(계간시학 202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