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부어주신 성령의 기름』 2024. 5.19 성령강림주일
사도행전 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들어가며 – 하나원 일흔이 넘은 탈북자
북쪽에 오신 분들은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남쪽 사회에 대한 적응 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배치된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처음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비행기에서 남한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라고 인천대교를 보고 깜짝 놀라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포장된 도로를 보고 또 놀라고 언제 어디서나 터지는 스마트폰을 보고 깜짝 놀라고 그동안 속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배우고 싶고 가리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한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우리 권사님들께서도 학교에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셨던 분들, 딸이 제발 대학교 입학금만 내달라고 사정하셨던 분들도 계시지만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실력,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면 우리가 늘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한 권사님 딸이 밖에 나가서 놀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다른 집은 엄마들이 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데 왜 자기는 밥 먹으라고 부르지 않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그날도 역시 저녁 때꺼리가 없었는데 그날따라 딸이 “엄마 왜 나는 저녁 먹으라는 소리 안해?” 이 말 한마디가 지금도 가슴에 얹혀있다고 하십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지난 100년 동안 말씀 중심! 예배 중심!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전국 방방골골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결과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받은 복을 지키고 경작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 축복하며 인사 나누실까요?
“하나님이 주신 축복 지켜냅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삽시다.”
하나님의 축복, 은혜 그러니까 좀 멀리 있는 이야기 같죠?
우리 이렇게 고백할까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 덕분에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축복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감사의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우리가 이렇게 행복을 말하고 감사를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까 북쪽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북쪽에서는 예배 한 번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필요하면 성경구입헌금 50,000원 내고 함 목사님께 구입하면 됩니다. 그런데 북쪽에서는 성경 한 권이 목숨값입니다.
보통 북쪽에서 탈북하시는 분들은 젊은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꿈이 있거나 열정이 있는 분들 또 탈북할 수 있는 건강과 힘이 있는 분들이 탈북을 하시는데 하나원에 일흔이 넘은 분이 오셨습니다. 하나원에 예배하러 가시는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어르신 연세도 지긋하신데 어떻게 남쪽으로 내려오셨어요?” 그러자 그분 하시는 말씀이
“내래 목청껏 찬양 한번 해보고 싶어서 내려왔시오.” 그러시더랍니다.
내용인즉 할머니 때부터 3대째 예수를 믿으셨는데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매번 들킬까봐 이불 뒤집어쓰고 묵음으로 찬양하다가 하루는 ‘내려가자 내려가서 남조선에 있는 교회에 가서 찬양이나 실컷 불러보자.’ 이런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만약에 잡히면 어떻게 하시려구요?”라고 목사님께서 물으셨더니
“잡혀서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가는 것이고 내려오면 내 소원대로 원 없이 찬양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래 그 마음 가지고 내려왔시오.” 그러시더랍니다.
우리는 지금도 너무 편하게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북쪽에서는 예배 한번이 목숨값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가브리엘의 찬양을 듣지만, 만약에 북쪽에 있는 신앙인들이 가브리엘의 찬양을 들으면 얼마나 감동하고 감격하고 감사할까요?
우리 그런 의미로 가브리엘 찬양에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감격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하겠습니다.
2.
우리는 아픔과 통증이 있으면 반응을 합니다. 아프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고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겁니다. 특별히 영적인 아픔과 통증을 다른 말로 하면 영적인 성장통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과 연단은 그래서 내가 주인공인 1인칭 주인공시점에서 보면 그저 아픔이고 통증이지만, 하나님의 자리인 전지적 하나님 시점에서 보면 영적인 성장통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증인들은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여호와 로이의 하나님, 여호와 삼마 지금 이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때마다 영적인 성장통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혹 지금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 영적인 성장통, 그 시간, 그 과정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길 축원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도 지금 영적인 성장통, 그 과정, 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금, 이 시간, 이 과정이 그저 아프고 고통스러운 버려지는 순간이 아니라 축복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똑같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 얘기랑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업이 망했든지, 첫 사랑에 실패했다든지, 가족들과 겪었던 아픔이라든지’ 그런데 누구는 그 장면을 보고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떠올라서 그 장면을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넉넉하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저거 내 이야기에요. 작가가 어떻게 알고 우리 집 이야기를 썼을까요?” 그러면서 웃어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 과정이 있어서 지금은 제가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평생 시부모를 한집에서 모시고 사신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힘드셨대요. 반찬하는 것부터 주방 살림 하나 하나 모든 것에 참견하고 지적하고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 ‘도망치고 싶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럴 때는 남편이라도 좀 내편이 되어 주고 나를 다독여 주면 좋은데 저녁 먹고 차 타고 드라이브라도 좀 시켜 주고 이불 속에서는 내 이야기 조금만 들어주면 마음이 좀 녹을텐데 남편도
“니가 문제야 니가 잘해봐 우리 엄마가 그러겠니? 나는 다른 건 다 참아도 우리 엄마 우리 집 건드리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그 권사님 표현대로라면 숨이 안 쉬어졌대요.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고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또 어떻게 살지? 어떻게 버티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혹 이런 비슷한 생각하시는 분들? 하나님께서 버티고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을 존경하는게 특히 그분이 환하게 웃을 때마다 저까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 만났잖아요. 하나님이 없었으면 아마 못 버텼을 꺼에요.”
그 말씀이 맞죠. 아픔과 통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똑같은 아픔과 통증인데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상처가 되어서 들추기만 해도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만져주시고 안아주셔서 그 아픔과 통증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픔과 통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훈장처럼 자랑이 되고 간증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픔과 통증이 상처가 아니라 훈장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영적인 성장통을 겪고 있는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오순절이 이르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경에 이것보다 중요하고 이것보다 기가막힌 사건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요한의 아들 시몬이 주님 말씀대로 베드로 반석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쓰고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는 하늘이 열려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던 도마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 자신이 부인하고 의심하던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아픔과 통증이 그저 상처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경험하였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이 된 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3.성령의 변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은 첫 번째 믿음의 귀가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2장 2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에게 들렸습니다. 성령의 사람에게 있어 첫 번째 변화는 세상과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모세에게는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요?
앞에서는 망망대해인 홍해의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뒤에서는 애굽 바로가 보낸 전차부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내부에서 히브리들은 요?
“잘못된 것 아냐? 여기서 죽는 거 아냐? 차라리 돌아갈까? 우리가 왜 애굽을 버리고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그때 모세는 세상과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집중합니다. 하나님 말씀만 듣습니다. 왜요?
우리의 모든 문제 그 해답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우리의 해답은 하나님 말씀에 있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세상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에바다’ 열리고 들리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성령의 사람은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3절을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져 그들에게 보였다고 합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 한복판에서 유라굴라를 만나 14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살기를 포기하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의 눈에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보인 줄 믿습니다.
스테반 집사에게 수많은 돌이 날아오는 순간 그러나 그의 눈에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이 자신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가 포기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성령의 사람에게는 입술의 권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을 보면 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큰 무리가 그들이 하는 말과 기도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소동합니다. 왜그랬을까요?
성령충만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을 때 귀신이 떠나고 병든 자가 낫고 웃음이 다시 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립 집사에게 입술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그들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리고 성령을 받은 후 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요즘 새벽마다 시편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지만, 비파와 수금을 들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옥같은 시편을 남기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도 성령에 충만하여 입술의 권세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4.갈무리
오늘 말씀 정리하겠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아픔과 통증은 그저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 그 과정은 영적인 성장통이었고 그들은 주님 말씀대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처마다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그들은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성령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령이 주신 입술의 권세를 통해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의 귀가 에바다 열리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의 입술이 변하여 저주와 절망과 죽음이 아니라 감사와 소망과 축복을 선포하는 능력의 입술, 권능의 입술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위에 잠시 기도하는 시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