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잊다 있다 ③ 그대들의 다운타운 동인천
‘시청(현 중구청)의 동쪽에 있다’해서 그 이름을 얻은 동인천(東仁川). 그 영역은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좁게는 기차역과 그 관련 시설이 있는 중구 인현동 일부 정도, 넓게는 용동 마루턱을 넘어 신포동과 자유공원 그리고 반대편의 중앙시장과 배다리까지 본다. 이곳은 ‘한때’ 인천 최고의 중심지였다.
그 한때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말한다. 역사(歷史)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 처음 기찻길이 놓인 1899년부터 2016년 오늘까지 동인천이 만들어 낸 갖가지 서사(敍事)가 있다. 2015년에 발행한 <동인천, 잊다 있다> (유동현 著)에서 happylong7님이 발췌한 이야기를 옮겨 본다.
◈ 명물당, 만복당 그리고 대동학생백화점
경인철도의 개통으로 축현역이 조선인촌 복판에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조선인촌의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동인천 땅은 역이 들어서면서 점점 금싸라기가 돼 갔다. 이른바 ‘역세권’이 된 것이다. 역이 생기기 전에는 동인천 지역은 너른 갈대숲이 펼쳐져 있는 거의 쓸모가 없는 한적한 ‘교외’였다. 실제로 축현역 개통 당시 사진엽서에는 ‘교외의 역’이라고 쓰여 있기도 했다.
홍예문이 건설된 해는 1908년으로 축현역이 현 동인천역 자리로 이전한 해와 같다. 홍예문이 생기면서 중앙동, 송학동 등에 살던 주민들의 축현역 이용이 한결 쉬워졌다. 이때부터 축현역 주변에 본격적으로 편의 시설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1969년 동인천 인근의 중구와 동구에 인천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살고 있었다. 1969년 말 인천 인구는 58만 명가량 되었다. 그중 중구(9만)와 동구(17만)에 26만 명이 거주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동인천 지역은 1960년대 들어 땅값이 계속 상승했다. 특히 80년대 중반까지는 인천에서 가장 높았다.
1973년 전국 6대 도시 땅값을 보면 서울 명동 입구 평당 168만 원, 부산 창선동 2가 150만 원, 대구 동성로 1가 102만 원, 광주 충장로 3가 54만 원, 대전 중동 70만 원 그리고 인천 인현동 60만 원이었다. 특히 1974년 8월 15일 전철 개통으로 동인천역 일대의 부동산이 꿈틀거려 인현동 1번지 일대는 평당 1백만 원을 넘어섰다.
1976년 인천시는 토지 등급을 재조정했는데 중구 인현동 27 한국양복총판매장(현 맥도널드 건너편)이 평당 1백만 원이었다. 가장 싼 곳은 북구 관내 임야로 평당 200원이었다. 10년 후인 1986년 건설부가 고시한 기준 지가를 보면 인천 최고는 여전히 중구 인현동 27 일대로 평당 900만 원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동인천은 서서히 변방이 되면서 땅값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특히 지하상가는 동인천의 지상 땅값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한다. 지하상가가 생기면서 동인천은 사(4)등분된다. 먼저 지상과 지하가 나눠지고 다시 지상은 대한서림 쪽과 인영극장 쪽으로 양분된다. 지하도가 생기면서 지상에 있던 횡단보도가 없어졌고 두 지역의 흐름이 끊겼다. 이로 인해 대한서림 쪽은 학생들의 구역이 되었고 인영극장 주변과 용동 지역은 어른들의 구역으로 서서히 구분되었다.
거기다 인천시청의 구월동 이전과 인현동 호프집 화재는 동인천 상권을 죽이는 결정타가 되었다. 반대로 90년대 들면서 주안과 부평 지역의 땅값은 계속 상승 곡선을 그렸다. 결국, 6.25 전쟁 후 4, 50년 동안 지켜왔던 인천 땅값의 왕좌를 부평동 명신금은방 지역에 내주고 말았다.
동인천역 부근 인현동은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학교가 밀집해 있던 스쿨존이었고 인천의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경유하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의 출입구였던 덕분에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곳이다.
이곳은 곳곳에 교복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동네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성여고, 인천여중, 상인천여중, 인성여중, 축현초등학교. 인현동 일대에 있던 학교들이다. 이렇게 많은 학교가 반경 300m 이내에 있는 예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다. 1970년대, 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과 관련된 업종이 번창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문구점과 체육사를 비롯해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한데 모여 성업을 이뤘다.
인천에 백화점이 없던 시절, ‘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었던 곳이 대동학생백화점이다. 1층에는 문구점과 화방, 체육사 그리고 2층에는 DJ가 있는 분식집으로 구성된 복합 건물이었다. 아직도 ‘대동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지금은 1층에 문구점과 화방만 운영하고 있다. 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은 1년 내내 학생들로 붐볐지만, 특히 3월 신학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용품과 체육복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신학기가 되면 올리비아 핫세 같은 외국 배우의 사진이 박힌 학용품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아침 일찍 백화점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쳤다. 한창때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줄의 꼬리가 50m는 예사였다. 이제 학교도 많이 떠났고 학생 수도 줄었지만, 대동백화점 아래쪽으로는 아직도 체육사와 문구점, 그리고 화방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곳에 오면 학창시절 깔깔대며 이 거리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용동 마루턱을 기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학생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미국 LA까지 진출한 쫄면의 고향을 자랑하듯 분식집은 한 집 걸러 하나씩 있었다.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 등 ‘당’자 돌림의 분식집은 먹성 좋은 학생들의 방앗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개발에 의해 축현초, 상인천여중, 인천여고 등 한 둘씩 교외로 터전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남은 학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
현재의 신흥초교였던 인천공립고등소학교는 취학 아동이 증가함에 따라 별도의 학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현동에 별도의 교사를 신축하고 인천공립심상소학교라는 이름으로 1919년 4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일본인 자녀들이 대다수였다. 광복 후 일본인 학교였다는 이유로 존립 위기가 있었고 미군 숙사로 사용되었다. 축현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입학생을 모집했고 초기에는 신흥국민학교, 송학분교, 창영국민학교에 분산돼 수업을 받았다.
이 학교는 1948년 졸업을 ‘제1회’로 친다. 1955년 6월 학교에 불이 나 본관 12개 교실을 몽땅 태웠다. 1960년 3월 28일 당시 김정렬 인천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복구 기공식이 열렸다. 새로 지은 교사는 학교가 옥련동으로 이사 갈 때까지 존속하다가 그 자리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서면서 헐렸다.
2001년 3월 축현초교는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사했다. 새로운 배움터를 마련하면서 이홍렬 작곡, 윤석중 작사의 교가(校歌)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후렴 ‘싸리 싸리 싸리재 만세 만만세’를 ‘길이 길이 빛나리 축현 만만세’로 바꿨다. 학교가 동인천 ‘싸리재’에서 아주 멀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사를 바꾸었다.
바늘이 닳아 음이 ‘직직’ 거린다. 턴테이블 암(arm) 위에 10원짜리 동전을 올려놓는다. 무게에 눌린 바늘은 레코드판의 미세한 골을 긁으며 힘겹게 소리를 낸다.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바늘은 점점 무뎌지며 제 음을 전달하지 못한다. 제 몸을 다 닳도록 쳇바퀴 돌며 레코드판을 쉴 새 없이 긁은 전축 바늘은 이제 명(命)을 다한 것이다. 새 바늘을 사기 위해 동인천으로 향했다.
옛 축현초교 옆에 있던 전자상가 안에 들어가면 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 골목에 들어서면 먼저 ‘향기’부터 달랐다. 박스에서 막 뜯어낸 신품 오디오에서 풍기는 그 특유의 냄새. 쇠와 플라스틱이 혼합된 그 냄새는 오디오 매니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팝송에 막 귀가 트이던 젊은이들에게 인현동 전자상가는 꿈의 궁전이었고 별천지였다. 그곳의 냄새, 소리, 그리고 조명까지 늘 그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인현동 전자상가는 서울의 세운상가를 빼고는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세운상가가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고 뻥 친다면 소형 헬리콥터 정도는 조립한다고 맞받아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인현동 전자상가였다.
한때 축현초교 담장에는 한 평 남짓한 하꼬방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집들은 주로 고물이나 중고품에서 부속을 빼 팔거나 수리를 하는 가게들이었다. 상인들은 좌판 위에 광석라디오, 선풍기, 진공관 등 온갖 부속품들을 늘어놓고 팔았다. 과연 고쳐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물들이었지만 그들 손을 타면 새 생명을 얻는 ‘보물’이 되었다. 좌판은 1970년대 후반 학교 앞에 큰 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계속 장사할 사람은 남아 양조장으로 사용했던 앞 건물로 입성하면서 인현동 전자상가의 역사를 계속 이어갔다.
진공관 시대를 거쳐 IC, IT, 그리고 디지털 시대를 거치면서 이 거리의 외관은 많이 변했다. 일제강점기 때 마쓰다 양조장으로 사용했던 빨간 벽돌 2층 건물을 중심으로 빙 둘러 전자부속, 오디오, 조명기구 그리고 나중에 전자오락 제작업체 등 크고 작은 전자 관련 점포들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섰다.
양조장 건물 2층은 한때 디스코장으로도 사용되었다. 낮에는 아래층 전업사에서, 밤이 되면 윗층 디스코텍에서 음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양조장 2층은 나중에 단란주점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양조장에서 단란주점 까지, 이 건물은 태생적으로 술을 가까이하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하다. 긴 세월을 힘겹게 보낸 양조장 천장은 훤히 뼈대가 보이지만 여전히 튼실해 보인다.
◈ 고장 난 시계나 라디오 팔아요
골목을 다니며 라디오 등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거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천 각 동네에서 수집된 고물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전선 하나 나사 하나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었다. 장기 이식하듯 고장 난 물건에서 부속품을 적출해서 다시 각각 조립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은 이곳 솜씨 좋은 전자상가 기술자들의 몫이었다. 신제품보다 훨씬 싼 맛에 주머니 얇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발걸음을 했고 조립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그냥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가끔 후미진 가게에서는 밀수되거나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라디오, 다리미, 전기면도기 등이 거래되곤 했다. 어쩌다 인근에 사는 양색시 손에 전축이나 TV가 들려오곤 했다. 그렇게 이 골목에서는 세상의 모든 전자제품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돌고 돌았다.
한때 동인천 주변에는 기술학원들이 많이 있었다. 수리기술 하나만 있어도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부속품 사러 이곳을 기웃거리다 아예 전자상가에 조수로 취직하고 후에는 자기 가게를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굉장했어요. 나도 수리기술을 배우고 부속품을 사러 많이도 왔다 갔다 했지. 기술 배우는 사람들이나 공구가 필요한 사람들은 이쪽으로 몰려들었어요. 당시 인천에서 전자기기 파는 데라곤 여기밖에 없었으니까.”
‘신흥전자’의 진흥범 씨는 축현초교 담장 앞 좌판 상인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가게 문을 열었고,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인천 전자상가에서는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오고 가는 사람들도 드물어 바람만이 골목을 배회한다. 오랫동안 동인천 한편을 지켰던 아날로그 풍경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디.
글 :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