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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묵상글 ( 연중 제20주일. - 젖은 짚단까지 태우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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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젖은 짚단까지 태우는 사랑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는데
주님 바람대로 제가 타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불이 꺼져가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타올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르고 마른 짚단, 젖은 짚단
가리지 않고 불사르던 때가 있었는데 점점 사그라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그 분기점이 바로 관구 봉사자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형제들에게 악역을 담당하고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견디어내는 힘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감수하고 감당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구 봉사자를 끝내고 나니 진이 다 빠진 것처럼 더 이상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6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관구 봉사자 후보가 되었을 때
형제들께 이젠 형제들을 미워하거나 갈등하면서까지 사랑할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저를 뽑지 말아 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다음에도 본원 원장에다 수련장에다 여러 큰 책임을 맡았는데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쓴소리하고 갈등을 감수하는 사랑은 싫고 그저 좋은 말,
격려의 말만 하고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정도의 사랑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젖은 짚단은 피하고 마른 짚단만 불태우려고 하였습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려다가는 제 불마저 꺼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제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젖은 짚단을 태우다가는 잘 타고 있던 나의 불도 꺼질 것입니다.
불은 서로 불을 붙이며 타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 이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바쳤는데 주변에서 냉담하면 그 열정이 사그라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쓸데없이 바친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공동체를 원망하고,
공동체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마침내 더 이상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공동체를 떠나는데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잘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고 내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의 불이 너에게도 불을 붙여 같이 불타오르는 보람이랄까
기쁨이나 사랑의 충만을 주는 ‘마른 짚단의 너’이고 동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른 짚단이 아니고 젖은 짚단들입니다.
너만 나에게 젖은 짚단이 아니고 나도 너에게 젖은 짚단이라는 뜻입니다.
젖은 짚단을 태우다 보면 연기가 나고 눈물을 흘려야 하며,
젖은 짚이 마를 때까지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런데도 계속 불이 꺼지지 않고 타는 불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불이 그런 불이 아닌 것이 문제이고,
나에게 알 불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알 불을 잘 간수치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알 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있어야 내 불이 꺼지지 않고 젖은 짚단까지 불태웁니다.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의 정의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고,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다 견딜 수 있고,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으며,
성령의 불이 있어야 고독 가운데서도 사랑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로에 알 불을 잘 간수하듯
알 불 곧 성령을 잘 간수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일을 하든 학문을 하든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내 안에 모셔 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꺼지지 않도록 기도 생활을 잘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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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고 도미니코 ofm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은 평화가 아닌 분열이라는 갈라섬의 상징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의 상징을 통하여 우리 또한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피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불은 하느님의 백성이 사막에서 겪은 체험 속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동시에 두렵게 하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불의 모습으로 당신을 현시하시는 까닭은 당신이 지나가시는 통로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된 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불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사랑의 열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령과 불의 세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덕분에 세상을 태우는 불로 살아 왔습니다. 이 불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불타 올랐고(루가 24,32), 성령 강림날에는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내리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불은 심판의 불이 아니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느님 현시의 불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은 성령의 상징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과의 간격이 없어집니다. 이 간격을 없애 주시는 분은 인간의 제일 깊은 곳에 존재하시는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핌은 사랑과 증오가 갈라서게 하고 겸손과 교만이 갈라서게 하고 정의와 불의가 갈라서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이 둘이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분열이 되어 갈라서게 합니다. 그러게 하여 참된 평화와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이 놓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성 보나벤뚜라의 다음의 말을 묵상하면서 눈으로 보아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
는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에 늘 타올라서 하느님 사랑의 불을 세상에 지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지도 말고 은총을 구하십시오. 즉 이해가 아니라 열망을, 연구가 아니라 기도의 탄식을, 스승이 아니라 신랑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명료함이 아니라 몽롱함을 구하고 빛이 아니라 강렬한 결합과 열렬한 사랑으로 온통 불타 하느님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불을 구하십시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8월 성령 열매성월 12주간 인내 / 친절 /성실 ✝️
금주간 성서읽기 유다 1장 / 루카 1-4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첫영성체 날에 성체를 축복함으로써 이루어진 갑작스런 치유
스위스 -1923년
1923년 10월 7일 로사리오 축일에 아말리에 조닌은 6살에서부터 7살까지의 다섯 명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뷰르글렌 성모님의 은총의 제대 앞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불구의 이 소녀가 유모차에 누워서 매우 경건하게 처음으로 하느님이신 구세주를 받아 모시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오후에 아말리에는 길게 행렬짓는 순례와 성체강복으로써 병자를 축복하였는데 그녀는 그것에도 참가하였다.
프라이부르그와 겐프(Freiburg / Genf)의 주교가 성광을 들고 그녀룰 축복하자, 아말리에는 갑자기 유모차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밝게 웃었다. 순간 그녀는 완전히 완쾌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유모차로부터 일어선 소녀는 환성을 지르면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뛰어다녔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었던 것처럼 기쁨에 넘쳐 껑충껑충 뛰었다. 모든 고통이 사라져버렸다. 힘들이지 않고 그녀는 머리를 움직이기도 하고 똑바로 들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성체 안에 계시는 사랑하는 구세주의 힘으로 치유된 불쌍한 이 소녀는 기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면서 자기 스스로 유모차를 되돌려 주려고 서둘렀다. 이 유모차는 착한 사람들이 2년 전에 동정심으로 그녀에게 빌려 주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유모차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고 달릴 수 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산보를 해도 활달한 이 소녀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온 식구들은 이 기적에 대해 9일기도로써 사랑하는 하느님과 뷰르글렌의 성모님께 감사를 드렸다.
* * *
1923 년 11월 8 일 프리보르그: 증인으로서 서명한 사람은 아멀리에 조닌의 아버지인 알풍스 조닌과 간호원인 마리 안드레이(Marie Andrey)이다.
“아말리에 조닌을 진찰했던 의학박사 린스키(Ryncki)는 소녀의 갑작스런 치유에 대해 경탄하면서 다시 한번 그녀를 방사선으로 촬영해보라고 현명한 충고를 해 주었다. 우리는 의사 덕택으로 이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로서 논의의 여지가 없는 방사선 사진을 보유하고 있다. 과학적으로써는 포트병(das Pottsche übel) 을 갑작스레 치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치유를 일컬어 ‘기적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뷰르글렌의 순례사제인 알로이스 콤프테 신부는 이 성찬식의 기적의 목격자로서 이렇게 적어놓았던 것이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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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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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연중 20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대신들의 요청으로 죽음의 저수동굴에 던져져 박해받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고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썩은 세상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더 강하게 외면하고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제2독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히브 12,2)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는”(히브 12,1) 일이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2)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여기서의 불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한편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20,9;23,29)과 엘리야 예언자의 말(집회 48,1)을, 신약에서는 세상에 대한 종말심판(마태 3,11;7,19;마르 9,48;루카 3,16)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불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언자는 더더욱 박해받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새 생명(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이요, “불”로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파괴하고 분쇄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열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표지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인 까닭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회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그 무엇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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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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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인 1972년에는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가 학교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1980년이 되면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품보다는 일본, 독일, 미국의 제품을 선호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수출은 6,400억불이 넘었습니다. 경제적인 수치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에서도 대한민국은 ‘한류’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미나리’와 같은 영화가 국제적인 상을 받았습니다. ‘오징어 게임, 킹덤, 이상한 변호사 우병우’와 같은 드라마는 세계인들이 즐겨보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은 ’방역‘에서도 성공을 보였습니다. ‘추적, 검사, 테스트’라는 방식으로 확진자를 줄였고, 의료진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조로 방역에서도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아시아의 필리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들은 선진국이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낙후되었고, 시민들의 삶은 어렵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탓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30년 동안 거품이 꺼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문턱을 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 때문에 혁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스마트 폰, 스마트 TV에서 발전이 더딘 것은 아날로그에서 세계최고라는 자만심에 취해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연결에서도 일본은 전화선으로 세계최초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전화선으로 인터넷 망을 연결하는 대신에 광케이블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름을 기반으로 하는 차에서는 세계최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차 시장으로 진입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본의 거품 붕괴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듯이 대한민국도 혁신과 도전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하였습니다. 화려한 건축과 예술은 대부분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을의 중앙에는 늘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앙은 삶이었고, 신앙은 생활이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제도와 교리 그리고 신학은 현대사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떠났고 그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럽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유럽의 표본은 교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을 겪으면서 두 번의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신자들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심취하면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급격히 고령화 되었고, 성직자들의 수도 줄었습니다. 신자들이 떠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유럽교회에 영향을 받았던 북미교회의 사정도 유럽교회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성직자 수는 줄고 있고, 고령화 된 교회는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교회가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새로 신축되었습니다. 7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사제들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도 최근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충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거룩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이 없으면 교리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학력과 능력 그리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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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참 좋은 도반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시편84,10-11ㄱ)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색다른 깨달음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가 순간 “살아 있는 보물 창고”라는, 또 수도형제들이 “참 좋은 도반들”이란 깨달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오늘 주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또 여러 수녀님들이 내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고백성사로 영혼을 깨끗이 한 사실이, 오랜만에 정성가득 담긴 성전의 꽃꽂이가, 또 저녁성가연습시 성모승천 대축일 전례 노래들이 흥겹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제 주특기는 자랑입니다. 자랑은 팔불출이라 하는데 제 하느님 자랑, 교회 자랑, 전례 자랑, 형제 자랑은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기에 팔불출엔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에 속한 “참 좋은 도반들”에 대한 자랑입니다. 하나하나 “신의 한 수” 같은 도반들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컴퓨터 사용이 익숙치 않아 도움을 청했을 때, 한 “컴퓨터 도사”인 형제가 말끔히 해결해 주었고, 문제가 있을 시 걱정을 했더니 언뜻 스치던 윗 대답이 참 마음 흐뭇하고 든든하게 했습니다.
“눈만뜨면 일입니다. 보이는게 일이요, 끝없는 일입니다.”
어제는 멀리 온종일 외출하여 감곡에까지 가서 복숭아를 가져온 형제가, 토요일 오후에도 일하고 돌아왔기에 “일하고 왔느냐?”에 대한 화두같은 위 말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앞서 형제가 “컴퓨터 도사”라면 이 형제는 “일의 도사”입니다. 수도원내 다방면에 걸쳐 행하는 무수한 일들을 보면 절로 그 일눈에 경탄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어느 방면에 도사의 경지에 이른 수도형제들이요, 그리하여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수도원이 “참 좋은 도반들”로 가득한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감사로이 깨닫고 행복했습니다.
또 엊저녁 오랜만에 길게 참석한 공동휴게 시간 역시 사랑의 소통시간에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깨닫고, 또 성가연습시 늘 부르던 내용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아 행복했습니다. 새삼 행복도 은총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연습시 새롭게 와닿은 내용은 전례 자랑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노래로 흥겹게 부른 찬미 감사기도입니다.
“어느덧 새벽해도 꺼져가오니, 빛이요 영원한 빛 성삼이시여,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여. 그 빛을 우리맘에 부어주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내용의 찬미가인지요! 이어지는 셋의 후렴에 이은 응송, 계응, 마리아의 노래 후렴 모두가 영혼에 큰 기쁨을 줬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주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 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주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원토록 높이 올리셨도다.”
“해뜨는데서부터 해지는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같게 하옵소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하는도다.”
이런 은혜 충만한 내용의 전례가 삶을 만듭니다. 삶의 전례화를 통한 존재론적 변화의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이니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전례 은총의 힘이, 공동체의 힘이,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도움이, 어려움을 타개해 가는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님이 세가지 가르침입니다.
첫째, “목표를 지녀라!”입니다.
아무리 구름 짙거나 비오는 캄캄한 날에도 그 배후에는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태양, 사랑의 태양인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를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면서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참된 목표입니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말씀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이요,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예수님 사랑의 불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의 평생 내적 고뇌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 또한 받아야 할 온갖 시련과 마침내 죽음의 세례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분열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기보다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과정중의 창조적 분열입니다. 참평화이신 예수님 앞에 거짓평화는 그 정체가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자체로 인해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이 둘로 나뉘니 저절로 분열이요 이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의 잠정적 분열, 창조적 분열이니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끝없이 인내와 기다림의 믿음중에 묵묵히 잘 견뎌내면 됩니다. 참으로 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 목표를 바라볼 때 온갖 분열, 불화, 갈등중에도 꿋꿋히, 반듯하게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평화로, 주님 사랑의 불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절망하지 마라!”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영어로 “Christ is alive!” 한눈에 감격스럽게 와닿던 말마디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참신하게 안 와닿는 것입니다. “You are ‘the now’ of God” 한눈에 감동으로 와닿던 말마디가 “너희들은 하느님의 ‘지금’이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역시 참신하게 안 와닿으니 참 신기하네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이기에 결코 절망할 수도 없고 절망하지도 않고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목표로 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은 불신에서 기인하는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참으로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절망적 사지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구출되는 예레미야입니다. 저수 동굴에 빠져 여지없이 죽게된 예레미야를 주님은 에벳 멜렉을 통해 치드키야 임금을 움직여 살려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주님을 목표로 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없다는 깨우침을 주는 실화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처럼 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은 좋은 이웃을 통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제가 여기 불암산 기슭에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三望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셋째, “꾸준하라!”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 경주입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도중하차하여 무너져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무너져 내리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지금부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요, 끝까지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 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의 주님을 내다 보며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역시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얼마나 좋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믿음의 증인들인지요! 교회가 바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특히 저희로 말하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안에 있는 “참 좋은 도반들”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목표를 향하여 바라보며 살게 하고, 절망하지 않게 하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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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하루 8시간 일을 마치자마자 삶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일하는 8시간이 분명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요즘 사람은 너무 놀고먹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겠다면 일하는 시간은 분명히 줄어야 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일에 대한 보수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의 강도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는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좋아해서 그 안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만족스러운 삶이 될까요? 유튜브, 게임 등은 어떨까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만족스러운 삶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기 취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영역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야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도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악을 실천할 때 얻을 수 있을까요? 반대인 선을 실천할 때 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악이 아닌, 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시작하는 예수님 말씀은 평화가 아닌 불화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의 반대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가족 안에서 일치가 아닌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도 악은 있을 수 있고, 가족을 위해 악이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악을 합리화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악보다 선을 실천하면서 삶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힘내서 진리를 향해 갑시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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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보다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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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연중 제20주일. 키엣 대주교님.
내 마음 속의 어둠과 빛
세상에는 수 많은 빛이 있습니다. 태양과 달빛, 전기불 등 그러나 그 빛들은 사물을 비추어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비추어 낯선 얼굴을 우리의 형제 자매로 변화시키는 빛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제자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멀리 있는 소와 물소를 구분할 수 있으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멀리 있는 망고나무와 잭 플룻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은 그들의 대답에 머리를 가로 저었습니다. 말하려는 사람이 없자 스승이 이야기했습니다.
“얼굴을 보고 ‘형재 자매’를 알아볼 수 있으면 비로소 어두운 밤이 걷히고 환한 낮이 온 것이오.”
어느 날 마더 데레사와 수녀들은 보잘것없이 초라한 한 할아버지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곳은 어지럽게 쌓여있는 쓰레기와 낡은 모기장, 헌 옷 등이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람을 싫어해서 밖에 나가지 않고 쓰레기 같은 집안에 자신을 가둔 채 고독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와 수녀님들이 청소해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자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가구와 물건들을 정리하고 깨끗이 닦았습니다. 구석에 쳐 박혀있는 시커먼 램프도 깨끗이 닦으니 반짝거리고 예쁜 램프가 되었습니다. 램프를 본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말을 했습니다. “그건 아내가 나한테 선물한 것이오. 그런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한번도 램프에 불을 켠 적이 없어요.”
그 때부터 수녀님들은 매일 할아버지 집에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램프에 불을 켰습니다. 차츰 할아버지는 수녀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이웃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삭막했던 할아버지 집은 다시 따뜻해졌습니다. 할아버지 집은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두웠던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 꺼져있었기에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램프에 불을 켜서 밝아진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마음의 불이 밝게 켜져 집도 밝아진 것입니다. 마음의 불이 꺼져 사람을 피했던 할아버지는 다시 마음의 불씨를 켜고 이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빛의 신비로움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마리아 사람이 다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엎드려서 상처에 붕대를 감아 줄 때 갑자기 불빛이 밝게 비추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불빛에 비친 얼굴을 보고 그들은 바로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신비한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빛과 불이 퍼져 온 세상을 비추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직 타지 못하고 멀리 퍼지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간절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으로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 국가간 화합에 많은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1980년대 냉전이 종식되었을 때 우리는 금방이라도 세계 평화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르완다, 코소보 같은 인종과 종교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비방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아직도 그 곳까지 비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한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어 서로가 형제 자매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복음의 빛이 나를 밝게 비추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속의 불만과 시기, 욕심 등으로 마음이 닫혀서, 나의 어둠이 불빛을 가려 ‘나의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불을 밝혀라. 어둠과 전쟁, 원수를 쫓아내거라.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베풀고, 이기심과 소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어라”
주님의 빛으로 형제를 알아보고 서로 아픔을 보듬어주고 하나되는 시작, 그것은 바로 말씀의 실천입니다. 어둠이 빛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야 어두운 밤이 걷히고 낮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 사랑의 불빛으로 저희 마음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나는 어둠과 빛 어느 쪽에 가까이 있습니까?
2.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밝고 따스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만이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진실되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주님의 빛으로 형제를 알아보고 서로 아픔을 보듬어주고 하나되는 시작, 그것은 바로 말씀의 실천입니다. 어둠이 빛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마음을 열어 복음의 불빛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도 사랑의 불빛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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