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동 사람들 이야기 매립한 땅에는 인천 역사 오롯이 담겨 이 글은 2016년 발행한 <인천의 마을 사람들 이야기> (장회숙 著)에서 우리들의 어린 기억이 남은 만석동 편을 옮겨 적었다. 인천의 포구 중 북쪽에 위치한 섭도포를 모태로 태어난 동네가 화수동, 화평동, 전동, 내동, 용동, 경동, 인현동, 금곡동, 송림동, 송현동으로 현재의 화수부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창포는 서부에 위치해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의 길목을 지키던 포구로 성과 창 즉 창고가 있는 동네라 하여 불렸다. 성이 있었던 곳은 제물영으로 현재의 파라다이스 호텔이 언덕에서부터 외국인 묘지가 있던 변전소 언덕까지이며 창이 있었던 곳은 외국인 묘지에서 묘도(猫島:고양이 섬)까지이다. ◈ 포구에 가장 많은 곡식을 쌓았다는 데서 동네 이름 유래 성창포를 모태로 태어난 마을이 세곡(稅穀) 만석(萬石)을 모아두었던 곳이라는 이름을 얻은 만석동과 송월동, 성의 북쪽에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북성동, 중국인 마을 지나정이 있다. 만석동의 유래를 이훈익 선생의 저서 ‘인천지방향토사담’에서 “옛날 농지세는 현물인 벼, 콩, 잡곡으로 징수하였는데 전국에는 10개소의 조창이 있어 각 조창에 보관하였던 세곡은 정부의 수급계획에 의해 한양으로 운반하여 갔으며, 바다로 운반하는 현물은 배에 싣고 서해안을 통해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를 거쳐 한강으로 올라가 용산에 적치되었다. 만약 지정된 기일 내에 납부가 되지 않으면 해당 고을의 사또가 문책을 당하기 때문에 원거리의 고을에서는 미리 세곡을 운반해 와서 야적하였다. 그 야적하던 장소가 인천에는 만석동, 영종, 경서동 등지인데 특히 만석동 포구에는 가장 많은 세곡을 야적하여, 한 해에 만석을 적치 한다고 하여 만석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만석동에는 인천의 명인 이칙이 화평동에서 살다가 죽어 묘를 인천 화도 뒷산 매화혈 명당에 썼는데 이 산의 안산은 바다를 격한 만석동 괭이부리에 직면한다. 이칙의 묘가 있는 쥐산과 고양이산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나 그 사이는 바다가 끼어 있어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지 못하는 형국이라 명당이라고 하였다. 이칙의 후손인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선조는 이칙의 묘도 파내라는 왕명을 내려 묘를 찾으니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이 끼어 묘를 찾지 못하고 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천하의 명당자리도 쥐섬과 고양이섬을 막고 있던 바다를 메꾸어 육지가 되면서 묘지를 이장하게 되지만 매립된 후에는 유흥가를 조성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남아있게 된다. 화도진을 방어하던 현재의 괭이부리마을 만석교회와 화도진사이의 언덕인 쥐산은 개펄을 매립하면서 사라져 현재 만석고가에서 화수부두로 가는 일직선 도로가 되었다. 개항으로 기회의 땅 인천으로 밀려오는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일본 조계지가 모자라자 인천 앞바다의 매립을 요구했다. 일본인들은 이미 확보가 되어 있는 화정(현재의 신흥동)일대의 땅이 협소하다며 만석동 일대를 조계지에 편입시킬 예정인 화도진을 제외한 만석동 일대의 일본조계예정지의 경계를 정한 도면을 만들어 인천 감리와 상의 끝에 허락을 받아내지만, 독일 영사 등 외국인의 심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시 인천 영사였던 노제가 계획했던 일본조계확정안에 따르면 만석동 일대 해안은 수심이 얕은 개펄이라 수운이 불편하고 게다가 서풍까지 강해 입지면에서 일본조계 앞 해안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지만 개펄을 메우면 당장에라도 2, 3만 평의 토지를 쉽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경인철도 정거장이 인근에 설치될 경우 굉장한 요지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각국 조계에서 비싼 지대와 집세를 내고 생활하는 하층 노동자를 이곳에 이주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도시 하층민의 거주지로 이 일대를 개발하자고 제안하였다. 1894년의 만석동 개발계획은 실패하지만 그 후 10년이 지난 1905년 일본인 실업가 이나다 가즈비코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1905년 7월부터 1906년 9월까지 10만 엔의 공사비를 들여 약 10여만 평에 이르는 매립지를 얻는다. 이나다 가즈비코는 메이지 28년(1895) 청일전쟁 당시 나가사키에서 인천으로 건너와서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벌어 인천 정거장 앞에 거대한 여관을 건축하여 이나다 여관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토목 청부 사업을 시작해 철도를 포함한 제 공사에 관계하였으며 특히 만석동 매측(萬石洞 埋築)주식회사의 전신인 매립 공사는 그가 가장 정력을 바쳤다. 준공을 마치고 만(萬) 정의 택지를 얻어 점차로 민가를 건설하여 수년 지나지 않아 번성한 시가를 만들었다. 그는 지세가 뛰어난 산 위에 양관을 건축하여 살면서 옆에 팔경원을 만들어 오락 유희장으로 만들고자 해수 목욕탕, 온천 등의 욕실을 설치한 후 모두 일반인의 휴식을 위해 제공하였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우아하여 호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거류 본국인 사이에서 신망이 대단히 높아 거류민회, 상업회의소 의장으로 추거되곤 하였다. 메이지 30년(1897)에 강화도 동막 석산의 채굴 특허를 획득하여 임산물 처분법 발포에 따라 그곳의 산림 76정보의 석재를 불하받아 채굴하였다. ◈ 만석동 매립지에는 간장, 양조장, 정미소 들어와 이나다 가즈비코의 사업을 물려받은 사람은 아마노 슈이치로인데 1874년 7월 8일생으로 1895년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897년 경인철도 부설 당시 숙부인 이나다 카츠비코(稻田勝彦)가 이나다조합을 조직하자 이나다조합에 들어가 일본에 거주할 당시의 직업인 건축업을 살려 토목. 건축청부업에 종사하며 20년간 근무하였다. 1919년 이나다의 사망으로 이나다조합을 계승하였고 인천에서 일본전관 거주지매립, 인천축항매립, 주안염전, 각 철도공사, 인천 만석정 매립, 인천수도, 일본제분회사, 일본공장부지공사 등을 완성하였다. 그는 1926~36년까지 만석정 17의 주소에서 거주하면서 토목. 건축. 청부업과 석재판매, 금전대부업에 종사하였는데 현재 만석동 주민 센터 길 건너 동아제분 정문 건너편 주유소 일대가 만석동 17번지이다. 이나다는 만석동을 매립하여 부도정(현재의 신흥시장 선화동) 못지않은 유흥가로 조성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매립한 땅 주변으로는 사이토정미소, 아리마정미소, 다카스기 간장 양조장 30년대에 들어와서는 동양방적 등 공장들이 들어선다. 다카쓰기 노보루(高杉昇)는 분큐 3년(1863) 11월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미즈타(水田)였으나 12세 때 다카쓰기(高杉)로 개명하였다. 모리씨(森氏)를 비롯해 여러 집에서 상업을 배웠으며 메이지 15년(1882) 부산에 도항했는데 그보다 앞서 친형 미즈타 사다시치(水田定七)가 한국으로 건너와 부산에 있었다. 메이지 16년(1883) 6월 인천 개항에 즈음하여 인천으로 와 잡화 상점을 연 그는 메이지 17년(1884) 6월 인천으로 온 미즈타와 동업하였다. 메이지 29년(1896) 8월 미즈타씨는 사업이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다카쓰기는 독립하여 미곡상이 되어 크게 상업을 확장하였다. 메이지 33년(1900)에 이르러 해안동 2가에서 위탁 판매업을 경영하였고 메이지 34년(1901) 2월 무역 및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다카스기 양조장집 아들과 조카는 영업장소였던 해안동 2가와 만석동을 오고 갈 때를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제 어머님도 만석정(萬石町)에서 해안동(海岸町)의 친정(高杉)을 다닐 때, 또는 병원을 다니는데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함께 탔던 일도 있었습니다만, 언덕이 많은 인천 길이어서 인력거 하시는 분들도 참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비가 올 때 포장의 독특한 냄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몇 년 후, 대련의 숙부댁에 두 해 여름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때에 태워주셨던 마차의 포장 냄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久保田(구보다) “인력거꾼들은 일본인이었다.” - 高杉(다카스기) ◈ 각국 묘지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 인천의 노동 운동사를 대표할 정도로 극렬한 파업투쟁이 일어났던 사이토정미소는 제등합명회사 인천지점이었다. 대표는 사이토 히사타로로 공장이 있었던 자리는 현재의 동아원, 동아제분 공장이 대신하였는데 메밀을 가공하던 동아원 공장도 이사 가고 현재는 빈 공장으로 남아있다. 아리마정미소는 1924년 5월 아리마 준지가 창업하였다. 유리를 만들어 내던 인천초자영업소의 대표는 한국인 한덕순이었다. 외국인 묘지로 가는 입구, 현재의 동광 어린이집에 이웃해 있었는데 각국 묘지로 놀러 가던 일본인 아동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다. 만석동 일대에서 살던 일본인들의 추억담을 살펴보면, “각국 묘지의 시절은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일이어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분명하지 않고 환상과 같습니다. 묘지의 입구를 향해서 오른 쪽은 파밭으로, 그 한구석에 유리공장이 있었습니다. 붉은 유리구슬을 가는 관의 앞에 붙여, 입으로 불어서 만들어 빙글빙글 돌려서, 유리병이라든지, 어항 같은 것이라든가, 완성품에는 흥미가 없고, 그 공정을 보는 재미에 저녁 무렵까지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혼이 날까 보아 혼자서 몰래 자주 다니곤 했습니다. 2, 3년 전, 베네치아에서 유리 공방을 견학했을 때, 부는 유리 기술을 설명해 주셔서 만들어 보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60수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붉은 유리 정말 좋아합니다. 以上(이상) -草留浦子(쿠사도메 우라꼬)” 만석, 송월, 북성동 일대에 살던 아이들에게 각국 묘지는 좋은 놀이터였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시작은 만석정의 “외인묘지”(각국 묘지라고도 했습니다) 주변에서부터. 그 근처의 2층 단독 건물로, 소화 4년 1월생인 동생 이랑(二郞)은 아직 없었습니다. 동생인 태랑(太郞)은 “귀여워, 귀여워”하고 근처의 누나들이 번갈아 가며 안아주거나, 손을 잡고 놀아 주거나 하였습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여자 친구가 없어서, 보스?는 “이소베의 데루짱? 같은 또래에서는 타하라의 다못짱”묘지에는 화원이 있어, 좋은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나는 시내에서 살고 있지 않았고, 부친이 엄격해서, 단순한 생활이어서, 남자아이는 전혀 알지 못했고, 친한 사람만 알고 지내는 교우 관계여서,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草留(쿠사도매)씨도 가까이에 살고 계셨던 것 같은데, 각국 묘지(외인묘지)는 나에게도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묘지는 외국 사람다운 밝은 느낌으로 동쪽의 비스듬한 나 있는 올라가는 입구의 언덕은 양옆 가로수는 노란색의 겹벚꽃이 아름답게 핍니다. 무덤의 아래쪽으로 천 평 정도일까, 공원으로 되어 있어서, 주위는 벚꽃(핑크빛깔)의 가로수였습니다. 키 작은 상록수로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화단에 항상 예쁜 꽃들이 피어 있어서, 지키는 키 작은 분의 주거가 가까이에 있어, 그분이 묵묵하게 손질을 하고 있어서, “아저씨 꽃 좀 주세요.!”하고 말하면 “안돼” 하는 한마디. 草留(쿠사도메)씨 덕분에 생각이 난 그리운 장소. 이 공원과 “猫島(묘도)”와 “팔경원”에서 자유롭게 놀았습니다. 가끔은 생각합니다. 그 전쟁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난도 모르게 지냈을 텐데 등등……大正 태생은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요. 以上(이상) – 天野百合子 ◈ 조선인들은 먹고살고자 송월시장, 선창에서 악전고투 만석동에서 볼 수 있었던 섣달의 풍속도 그리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섣달에 접어들면, 삯방아상이 돌아다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그때만을 위해 만들어진 6~7명 단위로, 내가 살고 있던 지역(송판‘松板’, 화방‘花房’, 지나‘支那’, 만석정‘萬石정’ 등)에는 水搗組(수도조)라고 불리어지는 그룹이 물색의 머리띠를 동여매고 씩씩하게 왔습니다. 붉은 머리띠나 푸른 머리띠 등, 각양각색의 그룹이 각자 자신의 구역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지.” - 小山(고야마) “당시 만주에서의 「만보산사건」의 여파로 조선인의 선린동(支那町지나정)습격이 있어, 제가 자란 만석정의 양조장 소스 제조 담당자였던 중국인 오씨가 습격을 당했습니다만, 우리 일본인 스탭과 동료인 조선인 스탭의 옹호 덕분에 무사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무어라고 해도 언짢은 암시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久保田(구보다) 만석동에서 1930년대를 살았던 조선인들의 추억은 현덕이 ‘남생이’에 잘 나타나 있다.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각국 묘지 언덕 다른 방향 선창에는 먹고 살기 위해 몰려든 조선인들이 송월시장에서 선창까지 각자의 생업을 찾아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시커먼 화물차가 한참 지나가고 훤하게 앞이 열리자, 건너편 일대는 전부 볏섬이 더미더미 산을 이루었다. 말 구루마, 소 고루마가 길이 미어 나온다. 볏섬 사잇길을 왼편으로 꺾어 나서면 바다, 제2 잔교서부터 제3 잔교 일폭은 크고 작은 목선이 몸을 비빌 틈이 없이 들어찼다. 놀라움 밖에 더 표현할 줄 모를 커다란 기선이 떠있다. 잔교 한편에 여객선이 붙어 서서 사람과 짐을 모아들인다. 통통통 고리진 연기를 뽑으며 발동선이 우편으로 물살을 가르며 달아난다. (중략) 마침내 발동선은 시커먼 중국 배 뒤로 사라진다.’ 각국 묘지와 묘도 사이에는 염전이 있어 중국 정크선으로 들어오는 중국 소금을 취급하였고, 석탄을 실은 시커먼 화물차가 지나가는 철로는 석탄 저장 부두로 들어가는 지선으로 만석동이 군수 산업을 기지화하자 공장과 공장을 이어주는 지선들이 사이토 정미소와 동양방적 사이를 지나 대성목재, 조선기계제작소 등에 연료를 실어다 주었다. ‘쓰레기꾼이란 정작 볏섬도 산으로 쌓이고 낙정미도 많이 흘려 있는 지대조합 구역 내에는 얼씬을 못 하고 목채 밖에 지켜 섰다가 벼를 싣고 나오는 마차가 흘리고 가는 나락을 쓸어 모은다. 그러나 기실은 구루마 바닥에 흘려 있는 나락을 쓸어 담는 척하고 볏섬에다 손가락을 박고 치마 앞자락에 후비어 내는 것을 본직으로 꼽는다. 그러나 들키면 욕바가지를 들씌운다. 쓰레받기 몽당비를 빼앗긴다. 앙가슴을 떠다박 질리고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노마 엄마는 낙정미를 줍다가 돈벌이가 좀 더 나은 속칭 ‘들병장수’로 나선다. 당시 손 구루마에 떡과 막걸리를 싣고 다니며 술장사를 하는 사람을 들병장수라고 했다. ◈ 동양방적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의 모델로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마지막 황제 부의에 의한 만주국을 세우면서 대륙침략의 서곡 15년 전쟁이 시작된다. 북부 해안일대를 매립하여 군수공장을 만든다는 계획이 다음과 같이 세워졌다. 부의 북측 해안매립공장지대 : 예정 3,000만 평 기존 약 40만 평, 근처에 철도선의 시설이 있고 공업용수 풍부 제일 먼저 기존의 약 40만 평의 부지 중 이나다가 매립하였지만 쓰이지 않았던 땅이 동양방적의 부지로 선택되었다.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소설가 강경애(1906~1944)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의 모델이다. 식민지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과 당시의 노동운동을 생생히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공장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굴뚝 세우는 현장의 이야기는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첫째는 흙짐을 지고 낑 하고 일어나며 멀리 대동방적공장의 연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은 연기가 풀풀 흘러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간 저 연돌! 그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아뜩하다. 그가 대동방적공장이 낙성할 때까지 거의 매일 인부로 채용이 되었다. 그때 그는 그 공장 건축만은 아무러한 위험을 느끼지 않았으나 저 연돌을 쌓아 올라갈 때 벽돌 나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앞이 아찔아찔하고 핑핑 도는 듯하다. 벽돌 삼십 장씩 지고 휘청휘청하는 나무판자 다리로 올라갈 때 나무판자가 금방 부러지는듯하여 굽어보면 몇십 장이나 되어 보이는 아득아득한 지하가 마치 깊은 호수를 들여다보는 듯이 핑핑 돌았다. 동시에 그의 다리가 풀풀 떨리며 머리털 끝이 전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앞이 캄캄하여 한참씩이나 정신을 가다듬어 올라가노라면 그 연돌이 움실움실 확실히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위험을 느끼는 데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연돌의 높이가 높아 갈수록 명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 연돌이 금방 쓰러지는 듯하고 그가 저 연돌과 함께 저 지하에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위험을 느끼면서도 그는 아침이면 번번이 그 나뭇길을 다시 올라가곤 한다. 그때마다 에크! 내가 여기를 또 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할 때, 그가 지금 연돌 위에 올라선 듯하여 무의식간에 우뚝섰다. 그리고 등에 진 흙짐이 흡사히 벽돌 같아 등허리에서 땀이 버쩍 났다. 따라서 손발이 가늘게 떨리므로 그는 사면을 휘 돌아보고 눈을 감아 겨우 정신을 진정하였다. 그는 그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연돌만은 그의 머리에서 빼낼 수가 없음을 이 자리에서 발견하였다. 보다도 요즘 꿈속에 그 연돌을 보는 것이 아주 질색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연돌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것이다. 저 연돌! 바라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저 연돌! 그때! 저 연돌에서 떨어져 죽은 동무도 몇몇이던가? 하루의 임금에 몸뚱이와 내지 생명까지 그들에게 맡기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에 나타나는 대동방적의 내부가 선비와 간난이의 삶에서 나타났다면 외부에 보여지는 모습은 연돌을 바라보는 첫째에 의해 공포로 표현되어 있다. 이 당시의 만석동은 월미도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해안을 매립하여 얻은 땅에 배터리를 생산하는 시바우라(도시바의 전신 공장자리는 현재의 일진중공업) 조선이연주식회사(현재의 현대제철) 대성목재와 잠수함을 제작하던 조선기계제작소 등이 들어섰다.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함을 조립하기 위한 도크가 배수리 공장으로 두산(주) 옆에 남아있다. 이 도크의 형태는 영국인 글로버가 최초로 나가사키에 설치한 형식으로 주판을 닮았다 하여 명칭을 소로반 도크라고 했다. 소형 철선을 건조할 때 주로 쓰인다고 하는데 선박 건조라기보다는 조립할 때 쓰인다는 것이 더 맞는다고 한다. 소로반 도크는 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다고 하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일반적이지만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하는 형식으로 미쓰비시 회사에서 만드는 독특한 도크 형식이라고 한다. 조립을 위해 여기에 세트가 되는 것이 입구에 있는 철봉모양의 장치인데 크레인을 부착하여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그 밑에 깔려 있는 철판들도 하나의 세트이다. 글로버는 나비부인의 모델이었던 나가사키 상관의 주인 글로버인데 그의 딸 글로버 하나가 현재의 신포동 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광창양행을 경영하면서 영국영사 임무까지 맡았던 영국인 베네트와 결혼해서 현재의 파라다이스호텔 자리에 있었던 영국영사관에서 살았다. ◈ 동구의 공장들 보존은 인천의 정체성을 알리는 일 해방 후 원료 재고가 풍부하고 전망이 뚜렷한 기업체는 가동을 보기 시작했지만 평화 산업으로의 전환이 어려운 군수 공장들은 폐기 상태로 파괴에 맡겨졌다. 이들 공장 가운데서 재빨리 가동할 수 있었던 공장이 있었는데 1936년 6월 7일 만석동 38번지에 설립한 조선목재공업㈜로 1945년 10월 초 손병도가 군정청으로부터 관리위임을 받은 기업이다. 조선목재공업은 항공자재(라왕합판)를 제조해오던 군수공장으로 손병도가 관리인으로 들어앉으며 대성목재㈜로 명칭 변경하고 합판과 가구 등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후일 신흥재벌 천우사(天友社)의 기틀을 다지는 기업이 되었다. 인천 목재 업계의 대명사로 1999년 동화기업에 인수되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수행기지로 조성되었던 만석동 공장지대에서 만들어진 공장들은 산업화의 시기를 견인해 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몰려오는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일자리를 제공한 기업 중의 하나가 대성목재다. 필자의 부친도 대성목재 노동자로 정년까지 일하셨다. 내가 태어나던 때 높은 데서 올라가 작업을 하던 아버님이 떨어져서 허리를 다쳐 5년을 누워계시게 되었다. 물론 산재 처리 같은 복지제도는 없었고, 보험 처리도 되지 않던 시대였다. 가족들의 생계를 떠맡은 어머님이 대성목재에 대신 근무하면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형제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들을 챙겨야만 했다. 이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 문학작품이 김중미 작가가 달동네 아카사키촌에서 ‘기찻길 옆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이들이 이 마을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지금은 인형극단을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못살고 가난하던 시절 우리나라의 산업화시대를 열어가던 동구 만석동의 공장들은 이제 하나씩 문을 닫아가고 있다. 군산으로 떠난 판유리 한국유리를 시작으로 대우, 1930년대부터 인천을 대표하던 동일방직, 동아원, 일진 중공업 등의 기업이 인천을 떠나 지방으로 이전했다. 공장들이 이사 가고 노동자들이 떠난 자리는 그대로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지역의 희생을 강요하며 기업을 키워온 자본들이 떠난 자리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기면서 그나마 지역을 지켜온 주민들을 내몰려고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의한 군수산업도 부강한 미래의 조국을 꿈꾸며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동구의 공장들도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동구의 공장들을 지역의 자산으로 보존하여 ‘근대 산업의 태동에서 무덤까지’를 증언해 주는 근대산업에 있어서의 인천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인천의 미래유산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글 : 장회숙 (‘도시자원연구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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