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과 반찬 그 사이에는 인간이 있다 ⊙ 우리 밥상 같은 맛있고 영양 좋은 책을 독자에게 한 상 차려주고 싶다 ⊙ 人生到處有上手(세상 도처에 나보다 나은 이들이 있다)
유홍준 ⊙ 63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예술철학 석사.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북로 이용우론> 당선(가작)으로 평론가 데뷔. 《공간》, 《계간미술》 기자·편집부 근무. 영남대 동양화과 부교수, 영남대 박물관 관장, 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청장. 현(現)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 저서: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다수.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인디언 소년이 사냥을 하고 돌아온다. 아메리카 대륙 지평선에 거대한 석양이 지고 있다. 소년은 마을 입구에 멈추어 서서 두리번거린다. 낯선 풍경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 군데군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 사람들의 사체가 널려 있다. 멀리 들리는 백인들의 말발굽 소리, 소년은 놀라 언덕으로 올라가 숨는다. 공포감이 스며들고 어둠이 난폭한 전사처럼 몰려온다. 잠시 후, 소년은 언덕에 올라 피리를 분다. 입술이 피리에게 마음을 전하자 피리가 떨리면서 소리를 낸다. 두 뺨에는 초라하게 눈물이 떨어진다. 폐허에 울려 퍼지는 피리소리. 소년의 피리소리는 멀리멀리 울려 퍼져,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명지대학교 행정관 4층 유홍준(兪弘濬) 교수의 연구실에도 다다른다.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 문화는 이렇게 시공간(時空間)을 초월한다. 필자는 ‘유구라’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행정관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에 만난 ‘원조 구라’ 방배추 선생이 한 시절 ‘교육방송’이라고 폄훼했던 유홍준 교수에 대해 “이젠 나의 구라 시대는 가고 유홍준이가 그 자리에 올라가면 되겠어요. 잘하잖아요”라고 한 말을 상기한 것이다. 첫 줄에 서술한 인디언 소년의 이야기와 음반은 유홍준 선생이 미국 인디애나주를 여행할 때 샀다면서 들려준 음악소리와 그 음반 이야기이다.
아는 만큼 먹는다
유 교수가 즐겨 하는 ‘답사(踏査)’는 두 발로 돌아다니는 일이다. 발은 길을 부르고 길은 글을 부르고, 글은 밥을 부른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의 달인 유홍준은 각 지방의 음식에 대해서 좀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그가 왜 미술사학자가 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금방 나온다. 어렵게 마련된 자리인지라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경제 개발 시대에도 외로운 깃발 하나 들고 온통 이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꾸준하게 우리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인 음식, 그는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궁금했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피곤해 보였던 유 교수는 반색을 했다.
“나는 우리 밑반찬을 좋아해요. 그리고 역시 밥이 최고죠. 인사동에 부산식당이 있어요. 이 식당에서는 밥을 그 자리에서 지어줘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막 지은 밥을 내준다는 거 흔하지 않아요. 식당이 지저분하고 손님에게 불친절해도 그걸 감수해야지요. 가볼 만해요. 《조선일보》 방 사장님이 제가 부산식당에 대해서 쓴 글을 보고 연락을 했는데 그런(불친절한) 집에 왜 가느냐고 해요. 그 정도예요. 주인이 신문사 사주에게도 친절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그 후) 다녀오신 모양인데(맛이)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아는 만큼 먹는다.’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서 어떻게 맛있는 집을 찾는지는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도 하다. 여행가들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식당 간판을 보고 맛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도 한다. 유 교수는 어떻게 그 맛집을 찾아낼까.
“지방에서는요. 그 지역 면서기가 먹으러 가는 집이 제일 맛있는 집이지요. 뭐…, 면서기를 다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좀 더 쉬운 방법은 약국에 가서 ‘박카스’ 하나 사먹고 물어보면 맛있는 집 알려줍니다. 손님이 뜸한 약국의 약사들은 보통 11시경부터 점심을 뭘 먹을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하. 직장인들도 뭐 비슷하지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식욕을 타고났어요. 그런데 음식은 말이지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좋은 곳이 많아요. 그중에서 자기 음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그 집을 기억나게 하더군요. 답사팀을 이끌고 강진에 있는 모 식당에서 40인분의 음식을 주문했지요. 물론 한식(韓食)이었고요. 한 시간 후에 오라고 해서 갔지요. 식당에 한 상에 4인분씩 10개의 상이 나란히 있는데, 모조지로 밥상을 덮어놓고는 답사객들에게 절대 종이를 들추지 말라고 합디다. 식당 주인의 엄명이었지요. 보통 식당에 가면 반찬 집어 먹고 하면서 밥을 기다리기도 하는 데 말이지요. 잠시 후에 찌개를 밥상 가운데 놓고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어요. 그 밥상은 가운데 찌개가 들어가야 완성되고, 거기서 맛이 나온다는 거예요. 작은 시골 식당 주인의 자기 음식에 대한 프라이드는 강진에 기거했던 다산의 학문적인 자존심과 다를 것이 없어요.”
兪구라
문화재청장 시절인 2008년 2월 13일 유홍준 교수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숭례문 현판을 살펴보고 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역시 강진에서 김밥을 파는 할머니에게 3000원짜리 김밥을 단체로 주문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우리 집 김밥 맛있게 먹으려면 1000원을 더 내라고 해요. 1000원을 더 드렸지요. 매우 훌륭한 김밥이 나왔어요. 투자를 해야 좋은 음식이 나와요. 사실 답사 다니면서 밥 먹은 이야기만 해도 책 한두 권이겠지요. 이런 분들은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해요. 우리나라에 이런 분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가난한 밥상에 정이 있지만, 부유한 밥상에는 맛이 있다. 그의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입에 침이 고였다. 나 역시 음식에 대한 기억이 있고,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가 우리나라의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유산과 함께한 세월은 지난 누천년 동안 ‘거기에 있었던’ 유형 문화유산을 재(再)발견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지난 시절, 먹고살기 힘들어 ‘완상’의 시간보다는 ‘건설’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가 답사를 한 시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바빴던 우리의 가난한 마음에 맛있는 밥상을 준비한 시간이기도 했다.
자, 여기 당신의 정서적인 갈증과 문화에 대한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라. 이것은 우리 음식에 대한 재발견의 시간이기도 했다. 독자와 답사객들은 유 교수의 구라에 감탄하고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읽고 본다. 한번 터진 우리 음식에 대한 구라는 강물처럼 흘렀다.
“조금 여유가 있다면 어디에 가서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방법이 하나 있지요. 김밥 할머니에게 힌트를 얻은 것이지만, 예를 들어 산채 비빔밥이 6000원이라고 정가가 매겨져 있으면 8000원 드리고 뭘 넣든 간에 더 넣어달라고 하면 2000원 이상의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법이에요.”
“내가 영남대 교수를 하던 시절 3일은 서울에, 3일은 대구에서 살았어요. 그 시절 경북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는데 배가 고팠어요. 동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기차 노선에 반야월역이 있어요. 그 역 앞에 있는 식당인데, 이 식당이 좀 묘한 곳이에요. 냄비우동에서부터 회까지 파는 거죠. 냄비우동을 하나 시키고 벽에 있는 메뉴판을 보니까, 간단하게 1만원, 아무거나 2만원, 알아서 3만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일종의 경상도 어법이지요. 간단하게, 혹은 알아서 달라는 걸 응용해서 회를 쳐 주는데, 제가 물었어요. 아주머니 ‘제대로’하고 5만원 받으면 어때요?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하는 말, 제대로 먹는 사람이 우리 집에 옵니까? 하하하!”
유홍준 교수(오른쪽)가 2011년 9월 17일 대구시시각장애인연합회 회원들과 함께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식당 주인집의 음식을 먹는 법
유홍준 교수는 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음식 이야기는 밥과 반찬의 관계에 있다. 그 사이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 담겨서 한 상의 밥상이 차려진다. 예를 들어 인사동 부산식당의 생태찌개가 맛있는 이유는 주인이 수유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방아라는 풀을 키워 찌개에 넣는 정성, 가난한 예술가들이 와서 4인분을 시키면 1인분만 시키고 나머지는 밥을 시켜 먹어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해 주는 아량에 있다. 이런 인간에 대한 정성이 그 음식을 기억하게 하고 결국 사람을 살게 한다. 이웃 나라인 일본에 답사를 갔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준 ‘다쿠앙’ 한 조각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어요.”
일본의 아스카 지역을 답사하는 길에 일본 할머니가 운영하는 허름한 우동집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공부하러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음식을 주문했다. 날은 덥고 입맛을 잃어 우동을 먹었는데 단무지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아서 조금 더 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잠시 망설이더니 당신의 집에서 먹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라도 먹겠느냐고 해서 고맙다고 했다. 그 ‘다쿠앙’은 올리브 맛이 나는 단무지였다. 입맛이 심심하던 차에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나중에 지인이 하는 말이 일본의 식당에서 그 집 사람이 먹는 음식을 낸다는 것은 상상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식당에서 주인집의 음식을 먹기는 쉽지가 않다. 아무리 오래되고 견고한 풍습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진심이 통하면 문화는 조금 변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있잖아요. 식당에서 한바탕 손님을 치르고 식당 사람들이 먹는 밥상을 보면 굉장히 먹음직스럽지요. 남태령 고개 어디쯤에서 비빔밥을 먹는데 주인이 먹는 호박잎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같이 좀 먹자고 너스레를 떨었지요. 음식은 그렇게 같이 나누어 먹으면 더 맛있지요.”
문화는 소비자가 결정하는 것
한식 대중화에 성공한 탤런트 이정섭씨.
우리나라의 행정조직은 촘촘하다. 날아가는 새도 관리를 하는 부서가 있는데 음식에 관한 부서가 없다고 유 교수는 지적했다. 문화재청장 시절에도 이런 음식에 관련된 부서가 왜 없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식약청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약을 관리하는 부서이다. 국민이 건강하고 맛있게 먹는 음식을 행정적으로 도와주는 부서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한식의 세계화 문제로 이어지는데, 우리의 전통음식인 한식은 많은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숙제를 안고 있다.
“순천의 대원식당에서 외국인과 식사를 하는데 남은 반찬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질문을 하더군요. 한번 손을 댄 음식이니까 쓰레기통으로 간다는 얘기를 하면서 한식에 대해 각성하게 됐습니다. 한번은 여수 엑스포에서 심사위원들이 우리가 권하는 대접을 안 받겠다고 전화를 해왔어요. 역시 청장 시절이었는데 나는 그분들을 모시고 대원식당에 가라고 했어요. 밥 한 끼 먹는 것으로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경우지요. 그러고 나서 그분들을 모시고 고궁 관람을 시킨 적이 있어요. 재동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심사위원장이 역시 물어요. 한국음식에는 요리가 몇 가지나 나오는가. 그들의 눈에는 우리 음식이 좋기는 한데 너무 많은 음식 쓰레기를 남긴다는 아쉬움도 같이 보인 겁니다.”
유 교수는 한국음식은 요리가 아니라 밥과 함께하는 반찬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다양한 여러 가지 요리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먹은 밥상에 나오는 반찬을 요리라고 칭하기도 한다. 유 교수는 음식을 통해서 문화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문화는 소비자가 결정하는 겁니다. 공급자가 만들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음악이나 공연, 도자기 등등 우리의 문화는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결정합니다. 케이 팝(K-POP)이나 도자기 역시 외국인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해야 하지요.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먹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가, 주인과 주방장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만들어내야 해요.
대한민국 특급호텔에는 한식당이 없어요. 일식, 중식, 이태리 식당은 있어도 한식당은 없어요. 있다가도 금방 문닫아요. 외국인들은 특급호텔에 와서 역시 외국 음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요. 우리 음식이 국제화에 실패했다는 방증이기도 하지요. 이건 누가 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식 세트 메뉴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고 주방장을 비롯한 현장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식 세트 메뉴에 대한 대대적인 콘테스트를 열어서 좋은 음식을 뽑아내야 하지요.”
유 교수는 탤런트 이정섭씨 같은 경우가 모범적이라고 했다. 서울 종갓집 음식의 프라이드를 지키면서도 대중화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케이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문화부의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청와대에서 식사를 몇 번 했는데, 손님상은 백자반상기에 한식 완 세트입디다. 우리나라에는 영빈관이 없어요. 궁중음식을 대중화하는 작업이 우리 음식 문화의 큰 일거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을 좀 더 넓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전통만을 너무 고집하면 머물기만 할 뿐 나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시각도 좀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요.”
元祖가 장땡은 아니다
일본의 국보이기도 한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상을 신라의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은 일본의 한 대학생이 목조로 만든 이 불상에서 떨어져나온 이쑤시개의 10분의 1 정도 되는 불상 조각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라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소나무가 아닌 녹나무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한 이견은 없었다. 백제와 신라가 일본에 불교문화를 비롯한 많은 문화를 전파하였고, 일본인들은 이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나가 일본문화라는 세계적인 문화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간혹, 우리의 선조가 일본에 이러한 영향을 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곤 한다. 유 교수는 말한다.
“일본에 준 것만을 강조하고 일본인들이 이룬 것에 대해서는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결국 중국에 문화를 전수받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가지는 미묘한 감정이 너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좀 더 넓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화는 강물과 같은 것이어서 그 시원이 어디냐보다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중요하죠. 불상의 경우만 해도 372년 중국 전진의 순도라는 승려가 고구려에 불경과 불상을 들고 와서 우리나라에 전파한 것이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의 사리를 스투파(탑)에 보관하던 시절,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인도에 알렉산더 원정 이후 간다라 지방에서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신을 조각하는 모습을 보고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생겨 불상은 탑과 함께 사찰의 상징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에는 유독 원조라는 음식점이 많다. 찐빵에서부터 갈비집, 족발, 심지어 순댓국 한 그릇도 내가 원조라고 내세운다. 먼저 한 것이 장땡은 아니다. 심지어 장충동에 가면 원조집이라고 내 건 간판이 많다. 이런 의식에 대해 막연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유 교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적인 문화 교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미묘하다. 우리의 정서와 정치적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만져야 한다.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를 예로 들어 유 교수는 말했다.
“우리의 강릉단오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할 때 중국이 반대를 했어요. 이유는 자신들이 원조라는 거지요. 유네스코 위원회에서 맞장토론을 했어요. 난 이렇게 말했지요. ‘농경사회를 먼저 시작한 중국에서 한 거 맞다. 단오제는 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축제이다. 우리나라에는 두레 공동체 의식이 있다. 강릉단오제는 보리농사 추수하기 직전인 5월달에 일주일 정도 쉬면서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이다. 우리나라는 8월 보름 추수하기 직전 농부들이 놀면서 쉰다. 이것 역시 농사를 먼저 시작한 중국에서 시작한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와서 1000년 이상 지속된 문화이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유산, 세계의 문화유산이 될 수 없다면 유럽의 기독교 문화는 그 원류인 이스라엘의 것만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이겼지요. 같은 문화를 놓고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국제적인 설득력은 우리가 먼저라고 주장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문화재도 세계인을 만나게 하라
유 교수의 이 문화적인 구라는 반드시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했다고 해서 일본의 불상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아리랑 문화유산 등재와도 연결된다.
“맹목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바른 이야기를 하면 매국노가 되어버리기도 하지요. 아리랑은 우리 음악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정서적으로 깊은 것이어서 중국인들의 저런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조금 통 크게 보면 이건 중국인들이 자국에 있는 소수민족들의 음악을 보존하고자 하는 조치지요.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긴 쉽지 않지요. 우리가 세계인들을 설득할 저력과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우리 아리랑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세계화 시대에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지켜내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것에만 머문다는 것과는 다르다. 유 교수는 독수리처럼 창공으로 날아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더 넓게 우리의 문화재를 바라본다.
대영박물관의 달항아리
배우 마담 주리를 감탄케 한 대영박물관 달항아리.
예를 들어 가야토기가 대영박물관(유 교수는 영국박물관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국의 문화재는 아니다. 가야토기의 역사적 문화적 의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재가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세계인들을 만난다면 우리에게는 이로운 일이다.
“대영박물관에 한국관이 생긴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전에는 복도의 한구석에 초라하게 있었어요. 관람객 중에 누가 거기에 주목하겠어요. 관람객들은 더 화려한 전시관으로 가기 위해 우리 문화재는 그냥 지나칩니다. 우리의 전용관이 생기고 좋은 문화재가 거기에 전시되어 있을 때 세계인들은 한국의 문화에 감동을 받는 겁니다.
이 일은 우리나라의 한 기업인이 초석을 놓았어요. 한광호 회장이 1997년에 100만 파운드를 기부해서 만든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내가 《조선일보》에 칼럼도 썼는데… 결과가 비참해요. 국세청에서 한 회장에게 세금을 5억 때리고,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문화재는 반출금지이니까, 일본, 미국,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경매로 산 문화재를 전시하게 된 겁니다. 이 관행을 내가 청장시절에 바꾸었어요.
우리의 것도 나갈 만하면 나가야 돼요. 영화 <007>에 나오는 마담 주리 아시죠. 그 사람이 참으로 대단한 말을 했어요. 이 배우가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을 관람하고 나서 한국관인 삼성 한국 전시실에 있는 박영숙씨의 달항아리를 보고 한 말이 있어요.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바로 달항아리이다. 이 작품은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진력이 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이 박물관에서 하나만 가져가라면, 나는 이 달항아리를 가져가겠다’고 했는데 참으로 인상적인 발언이었어요. 우리의 문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감동을 잘 전해준 경우지요.”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은 1857년에 건립된 세계적인 장식예술 박물관이다.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이름을 따왔다. 세계 전 지역의 장신구, 도자기, 가구, 보석, 그림, 사진, 조각 등 450만 점의 장식예술 관련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일부를 145개의 갤러리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는 대규모 박물관이다. 유 교수는 청장 시절에 우리 달항아리 5점을 보물로 지정했다.
兪구라의 대중문화론
인터뷰를 하고 있는 탁자 위에도 달항아리가 있었다. 좋아하는 물건이 뭐냐는 질문에 힐끗 달항아리를 본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 뭐냐는 것, 특별한 사연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건, 그리 좋은 질문은 아니다. 사연은 세월에 따라 변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는가. 어머니의 ‘반지’라든지, 아버지의 담배 파이프 같은 그런 낭만적인 질문이 끼어들 틈새가 유 교수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우리의 모든 문화재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가장 사랑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는 우리의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세계 경제가 개판입니다. 왜 그런가, 그 분야 전문가에게 물어봐도 어떤 대안이나 답이 없어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대중문화가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어요. 문화는 이렇게 흘러들어 가는 겁니다. 우리의 저력이 뭔가 생각들을 하지요. 과거 문화 수입국에서 이제 공급국으로 변신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속 시원하게 분석해 주는 사람이 없지요.”
“그건 유 교수가 해야지요”라고 반문하려다 참았다. 왜냐하면 바로 이야기가 이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세련화시키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들녘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코스모스처럼 말입니다. 코스모스가 외래종이라고 해서 우리의 것이 아닙니까, 이번 책에도 그런 이야기를 적었어요. 해외문화에 대한 콘셉트가 확실해야 한다는 거죠.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이 문화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펴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은 정치죠. 북한 정권이 쌀밥에 고깃국을 인민에게 먹이는 것이 정치라면 우리는 우리 밥상에 올라온 외국문화를 어떻게 우리 국민에게 대접하는가, 이것이 정치입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동력이 거기에서 나오는 거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법을 제정하고 말이지요. 1년에 300조가 넘는 예산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그 에너지가 문화입니다. 정치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G12의 위상에 올랐다면 국민들의 의식도 이제는 변화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국제화하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고, 그 결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한 시절 미제라면 똥마저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세계는 이제 글로벌 문화로 나아가고 있는데, 유럽의 젊은이들이 케이 팝을 듣기 위해 밤새워 줄을 서고 있어요. 팝이라면 자기들 것인데 왜 우리의 젊은이들의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가. 1등은 1등의 약점도 가지고 있는 법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다라는 생각이 바로 약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이가 대중문화를 통해서 다른 걸 보여줘요. 유럽의 젊은이들이 거기에 열광하는 겁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철학사를 저술하면서 책 제목을 《서양 철학사》라고 명명한 것은 그가 중국에 다녀간 후에 인식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을 보지 않았다면 그는 《세계 철학사》라고 자신의 저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미술사 역시 서양인들은 자신의 것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본다. 이젠 지구가 말 그대로 한 울타리다. 이 울타리 의식은 우리 사회의 좌우, 진보·보수의 영역까지도 이어진다.
진보로 분류되는 내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이유
유 교수는 말했다.
“한국 사회는 진보·보수, 좌우를 너무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보고 극심하게 나누었어요. 하지만 항아리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죠. 인간은 음과 양이 서로 스미고 보완하는 완전한 존재로서 좌나 우로 나눌 수 없는 존재예요. 이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의 가정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완고한 입장이에요. 신문도 마찬가지예요. 모 신문은 보수라고 하지만 복지예산에 관해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모 신문은 남북문제에 대해 매우 진보적이라는 모 신문보다도 진보적이죠.”
이 대목에서 유 교수의 말은 거침없이 계속됐다.
“한국전쟁 중에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깜깜한 방 안에서 라이트를 얼굴에 비추고 너는 좌냐 우냐라고 물어보는 소설이 있어요. 이런 극단적인 생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좌파, 우파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어야 해요. 나는 속칭 진보주의자로 분류되면서도 《조선일보》에 글을 쓰고 있어요. 박원순 시장의 멘토도 하고요. 사상이나 성향은 운동회의 청백전이 아닙니다. 나는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우리나라의 미술사에 대해서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학자죠. 나는 자신이 있어요. 나의 어떤 행동이나 글은 어떤 지면에 실려도 편집자가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아요.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성숙하게 풀어야 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좀 더 조화로운 사회로 가는 공간을 내가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안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하는 구석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혹시 매국노 소리를 듣지 않을까,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 눈치를 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못한다.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이면 회색주의자라고 매도한다. 열린 광장의 토론 문화가 빈약한 것은 우리 근대부터 시작된 편 가르기의 뿌리가 깊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일제 치하 임시정부에도 얼마나 많은 파가 있었던가.
유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문화와 연결된다. 우리의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거리낌없이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 미술사학자로서 유홍준은 박물관에 있는 국보들을 길거리에 나와 활보하게 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언변과 더불어 글 솜씨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아이스쇼에 비교하기도 한다. 미술사와 관련된 전문 저서들이 쇼트트랙이라면 말이다. 그는 대중적인 글쓰기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현학적인 문장이나 전공 논문은 전문가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세종대왕에 이어 2등 차지
유 교수는 현학적인 전문 분야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다가간다. 다가가서 보여준다.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여인의 이름은 가야의 작품이다. 자, 내가 옷을 벗긴다. 볼래, 말래. 독자들이 그의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문화유산에 대한 글이 쉽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물가물했는데, 뭔가 확 벗겨지면서 눈앞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다.
“세상은 2등을 좋아하지 않아요. 선거, 올림픽, 포커 등 하여간 2등은 주목하지 않지요. 하지만 언젠가 내가 2등을 해서 기뻤던 적이 있었어요. 한 인터넷 서점에서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만든 사람을 뽑았는데 내가 2등을 했어요. 1등은 누구일까요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기분 좋은 2등이지요. 하하하.”
그는 무척 바쁘게 산다. 수첩의 두 페이지를 3등분, 4등분 해서 쓸 정도이다. 글을 쓴다는 건, 시간이 고여 있는 정소에서 심심해야 쓴다는 불쌍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의 왕성한 저술활동은 매우 부러운 일이다. 현재 그는 문화유산답사기를 모 월간지에 연재하고, 신문에 국보순례를 연재한다. 일주일에 3일, 화·수·목은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강의를 하고, 강연과 답사가 줄줄이 사탕이다. 도대체 언제 글을 쓰는가?
“저는 글을 발표할 때 8번 정도 고쳐서 내보내요. 강의하고 남는 쪽시간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잠도 물론 덜 자지요.”
간혹 하는 경험인데, 몰두하면 신기루처럼 보이는 확연한 세상이 있다. 추론하건대 그의 글은 긴 세월 우리 국토를 걸어서 다닌 그 뚝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제 환갑을 넘긴 유 교수에게 늙은 이미지를 볼 수가 없다. 그가 젊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아직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여기에 담지 못한 좋은 이야기도 내 노트에 남아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유 교수가 최근에 낸 문화유산답사기의 부제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고수(高手)가 있다. 그 역시 고수 중 한 명임에 분명하다. 음식 이야기로 이 글의 시작을 열었다. 이 글의 마지막도 음식 이야기로 하자. 유 교수는 말했다.
“자, 여기 입에 맛있는 음식이 있고, 몸에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이 있어요. 어떤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면 좋을까요. 내가 식당 주인이라면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립니다. 책이 나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이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 관건이에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 번째 책은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에 원고료 없이 쓴 글입니다. 내가 돈을 벌려고 그런 책을 썼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오버센스예요. ‘아는 만큼 보인다’ 식의 어떤 테마를 잡아서 쓴 것도 아니에요. 20여 년 우리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답사를 한 결과물로 눈물처럼 새어나온 글들이에요. 그걸 독자가 잡아준 겁니다. 음식은 배고픈 사람이 찾아요. 그때 한약이나 피자가 아닌 우리 밥상 같은 맛있고 영양이 좋은 그런 음식 같은 책을 독자에게 한 상 차려주고 싶은 겁니다. 내가 이 땅을 돌아다니면서 맛있게 먹었던 그런 밥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