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世界名車 이야기
19. 메르세데스 벤츠 300SE 컨버터블(Mercedes Benz 300SE Convertible, 1965년)-1961년 선보인 300SE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모델로 세단, 쿠페, 컨버터블 버전으로 1967년까지 생산되었다. 3.0리터 직렬 6기통의 고성능 엔진이 장착된 300SL은 최대 170마력의 파워와 최고 시속 190km의 스피드를 발휘하였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테일핀 스타일로 멋을 냈으며 직선과 곡선을 아우른 우아하면서 현대적인 느낌의 디자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모델답게 300SE는 세계 최고의 안전성을 갖춘 차체로 설계되었으며 가죽과 우드의 고급 마감재, 파워스티어링, 에어서스펜션 등 최고급 사양으로 제작되었다.
20. 재규어 D 타입(1955년, 영국)-1950년대 르망24시를 제패했던 재규어의 영광과 유산이 고스란히 담겼다. 1950년대의 르망24시 레이스는 명실상부한 재규어(Jaguar) 천하였다. 1951년을 시작으로 1953년에 C-타입이 또 한 번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어지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 3년 연속을 다시 재규어가 제패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재규어는 무려 5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 그중에서도 세 번의 우승은 모두 당대의 전설적인 모델 D-타입이었다. 1955년 첫선을 보인 재규어 D-타입은 거대한 3.8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이 올라간 모델이었다. 그중 7번째 출고 차량은 드라이버 빕 스틸웰에게 인도되어 호주로 넘어갔다. 그렇게 이 D-타입은 호주에서 스틸웰과 함께 2년간 다양한 레이스를 질주하며 각종 기록을 세우고 승승장구했다. 또한 1970년 르망24시의 우승자였던 리처드 앳우드가 스티어링을 잡기도 했었다.
21. 캐딜락 엘도라도 브로엄(Cadillac Eldorado Brougham, 1957년)-1957-1958년 캐딜락 엘도라도 브로엄 (Cadillac Eldorado Brougham)은 모토라마 컨셉트카 (Motorama concept vehicle)를 베이스로 개발되었으며 궁극의 럭셔리 자동차로 오늘날의 최신 스타일링 트렌드와 기술을 포괄하고 있다.
$13,074의 판매가격으로 생산은 1957년 400대, 1958년 304대 한정생산되었다. 이 차의 고객은 세계에서 가장 엘리트 중 한명으로 선정되어 Cadillac의 럭셔리 이미지를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1957년 Cadillac Eldorado Brougham의 혈통은 일련의 Motorama Concept 차량을 통해 추적할수 있다. GM의 스타일링 보스인 할리 얼 (Harley Earl)은 공공 반응을 모니터하고 소형 울트라 럭셔리카를 꿈꾸며 발전시켰다.
1953년 Motorama에서 Cadillac은 수어사이드-도어(suicide doors) 및 파노라마 윈드실드가있는 기둥없는 4도어 하드톱 Orleans를 보여주었다.
다음 1954년에, Park Avenue, El Camino 및 La Espada 컨셉트카로 할리 얼은 샌딩한 스테인리스 지붕을 소개했다. 자동차가 점점 낮아지면서 지붕은 이제 스타일링 기능이되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스포티하면서도 우아한 4도어 파크애비뉴(Park Avenue)였다.
1955년 월도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에서 캐딜락(Cadillac)은 최초의 컨셉인 Eldorado Brougham을 선보였다. 깔끔한 맞춤형 표면에 특별하게 공식화된 카멜레온-그린 페인트로 완성된 이 모델은 브러시 처리 된 스테인리스 스틸 지붕, 4도어 기둥없는 하드톱 및 파노라마 윈드실드를 결합했다. 쿼드 헤드라이트, Autronic Eye 및 알루미늄 휠과 같은 신기술의 도입은 스위블 시트 및 에어컨과 같은 고급 사양으로 향상되었다.
1956년 Motorama는 Eldorado Brougham의 도입을 보았다. 처음에는 싱글 헤드라이트로 스타일링되었지만 Cadillac 관리 결정을 위해 쿼드 헤드라이트 (여러 주에서는 불법)를 사용하여 이중 프런트 엔드를 만들었다.
22. 들로리안 DMC-12 : 들로리안 모터 컴퍼니에서 1981~1983년까지 생산했던 차량. 흔히 드로리안이라고 읽으나 L 발음이어서 들로리안으로 발음된다. 창립자 존 재커리 들로리안 (John Zachary DeLorean)의 과감한 추진에 의해 무도색 스테인리스 스틸 바디와 걸윙 도어를 채택했다. 이렇게 당시에는 너무 파격적인 구성으로 내놓아서 이 차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는 신문이 없었을 정도였으나, 재정적으로 실패하면서 DMC와 들로리안은 사라지게 되었다.
1976년 10월에 미국인 수석 엔지니어인 윌리엄 T. 콜린스(William T. Collins)의 지휘 하에 첫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 초기 개발 당시에는 4도어 버전도 구상했고, 샌드위치식 플라스틱 패널에 반켈 로터리 엔진을 얹으려고 했으나, 코모터(Comotor S.A.)가 엔진 생산을 중단하자 포드의 쾰른(Cologne) V6 엔진을 장착하려고 했고, 결국은 푸조-르노-볼보의 3개 업체가 공동개발한 PRV 연료분사 V6엔진으로 바꾸었다.
게다가 설계 역시 리어 미드쉽 대신 뒷엔진 뒷바퀴굴림(RR)로 바꾸었으며, 차대 역시 중량과 생산비를 낮추고자 위에서 말한 플라스틱 구조의 Elastic Reservoir Moulding(ERM)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너무 새로운데다 충분히 실험하지 못한 기술이라 결국 폐기되었다. 대신 로터스와의 협업을 통해서 완전히 재설계를 했는데, 로터스의 설립자인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 역시 플라스틱 차대에 실망해 대신 로터스 스포츠카 특유의 "뼈다귀" 모양 유리섬유 차대로 바꾸었다.
참고로 외장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담당했으며, 차량 명칭은 들로리안의 미들 네임인 재커리(Zachary)와 아버지의 이름인 타비오(Tavio)를 섞은 Z Tavio로 명명하려고 했지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차체 패널 역시 플라스틱 패널 대신 스테인리스 스틸로 바꾸었으며, 페인트 점착성을 이유로 차체 도장 옵션은 제공되지 않았다. 또한 들로리안은 새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해 할리우드에 있던 자신들의 인맥들을 설득해 1억 7천 5백만 달러의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공장은 본래 푸에르토리코에 지을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실업난이 상당했던 북아일랜드에서 이를 타개하고자 들로리안에게 1억 파운드를 지원 해주면서 공장을 유치하려 했고, 그 결과 벨파스트에 공장을 설립했다. 1978년 10월에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 차를 출시하려고 했지만 기술 문제와 초과된 비용을 문제로 1981년 초반까지 생산이 미루어졌다. 하지만 일단 차가 공개되고 나서는 반응이 상당했으며, 웃돈을 주고 차를 계약한 사람들도 많았다.
23. 기아 프라이드(Pride, 1987년 3월~1999년 11월)-1987년 3월 5일에 출시되었다. 2.28 조치(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된 이후에 기아산업이 처음 대한민국에서 판매를 개시한 승용차로, 1981년 제정된 2.28 조치(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연차적으로 해제되기 이전에 개발을 완료하였다. 소하동 공장에서 생산하여 일본, 북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지로 수출부터 먼저 개시하였는데, 2.28 조치로 인하여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기아산업에서 승용차 판매가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브리사의 단종 이후 약 6년 동안 비었던 소형차의 자리를 채운 프라이드는 3도어 해치백과 5도어 해치백의 경우는 일본의 마쓰다가 설계를, 대한민국의 기아산업이 생산을, 미국의 포드가 판매를 담당한 3사의 합작을 통하여 월드카로 개발되었으며, 베타의 경우는 4도어 세단을 선호하는 대한민국 시장을 위해 기아자동차가 독자 개발하였다. 미국과 일본(오토라마 판매) 등에서는 포드 페스티바로 판매되었다. 엔진은 1.1리터와 1.3리터가 있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온 후 1.3리터로 통일됐다. 1.1리터는 카뷰레이터식이고 1.3리터는 카뷰레이터식으로 나오다가 전자제어식으로 변경됐다.
24. 기아 브리사 K-303(1979년)-기아 브리사(Kia Brisa)는 기아산업(현 기아)이 그 동안의 노하우 축적을 통해 갖고 있던 자동차 기술로 만들어진 기아산업(현 기아) 최초의 후륜구동 승용차이자, 소하리 공장의 첫 양산 차종이다. 1973년 8월에 적재량 500kg의 픽업 트럭이 먼저 출시되었고, 1974년 10월에 세단이 출시되었다. 차명인 브리사(Brisa)는 스페인어로 '해안에 부는 바람'이나 '산들바람'을 뜻하며, S-1000은 소하리 공장과 배기량 1,000cc라는 뜻이다. 마쓰다 패밀리아(3세대)를 베이스로 했으나, 국산화 비율을 90% 이상으로 높였다. 출시 직후에 큰 인기를 얻어 점차 판매량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후 포니의 등장으로 인해서 타격을 받았고, 포니에 대항하기 위해 1977년 1월 에 브리사 Ⅱ, 1978년 6월에 스테이션 왜건을 근간으로 한 K-303을 선보였다. 브리사 Ⅱ와 K-303은 마쓰다 그랜드 패밀리아를 베이스로 제작되었으며, 당시 소형차로서는 대배기량이던 1,300cc TC형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다. 이와 함께 기존 브리사에도 1,300cc 엔진을 장착했다. 이후 2.28 조치(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 自動車産業合理化措置)로 의해서 브리사는 1981년 12월에 후속 차종 없이 강제로 단종되었다. 이후 한동안 기아자동차는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어 크게 경영난을 겪었다가, 봉고를 내놓아 회생하게 된다. 1987년에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기아자동차는 승용차 생산을 재개하게 되었고, 제휴선이었던 포드 및 마쓰다와 함께한 월드 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온 전륜구동 소형차인 프라이드가 기아자동차 소형차의 계보를 이어갔다. 브리사는 현재 노후화로 인해 보기가 상당히 힘든 차종이다.
25. 아시아 피아트 124(1970년)-피아트 124(Fiat 124)는 과거 기아자동차의 계열사였던 아시아자동차공업에서 생산한 후륜구동 방식의 소형차로, 1966년에 1300/1500의 후속 차종으로 처음 출시되었다. 실용적이고 경제적이어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자동차공업의 피아트 시리즈는 피아트와 합작하여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 4월에 시판되었다. 당시 잘 달리기로 소문난 피아트의 차답게 경쾌한 달리기와 돋보이는 실용성, 경제적이면서 내구성이 좋아 잔고장이 없는 차로 대한민국의 오너 드라이버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1.2L 엔진은 페라리의 아우렐리오 람프레디가 설계한 엔진이기도 하다. 최고 출력 65마력에 최고 속도 145km를 냈고, 디스크 브레이크와 코일 스프링 서스펜션 등 당시 소형차 기준으로는 고사양의 메카니즘이 적용되었다. 쿠페와 컨버터블, 그리고 스테이션 왜건형도 있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세단만 판매되었다. 1971년 7월에는 원형 헤드램프가 더블 헤드 램프로 바뀌고, 라디에이터 그릴의 폭이 좁아지는 등 소폭의 디자인 변경이 이루어졌다. 1970년에서 1973년까지 6,800여 대가 팔렸다. 124는 꾸준한 판매를 보였으나, 대한민국에서는 피아트와의 계약 문제로 1973년 4월에 단종되었다. 이후 아시아자동차공업은 승용차 사업을 접고, 상용차에만 집중했다. 해외에서는 1974년에 단종되어 131이 후속 차종으로 계승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1974년에 기아자동차에서 출시한 132가 후속 차종으로 계승되었다. 2014년 현재 아시아자동차공업이 생산한 124는 3대로 추정되며, 그 중 유일한 1세대 124는 서울에 거주하는 유강준이 1970년에 80만 원을 주고 구입하여 30년 동안 관리하다 현대자동차에서 보존을 위하여 매입 이후 복원 중이다.
26. 신진 코로나(1970년)-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와의 기술제휴를 통하여 당시 토요타의 소형 모델이었던 코로나 3,4세대 모델을 반제품조립생산(SKD, Semi Knock-down)방식으로 도입하여 일부 국내 부품을 사용하여 1966년 7월부터 조립생산했던 소형차이다.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상류층의 자가용 및 택시로 판매되었다. 초기 국산화율은 21%였으며, 정부의 강력한 국산화정책에 따라 1969년에는 국산화율이 39%까지 올라갔으나, 여전히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우 4원칙때문에, 계약기간 5년을 채우자 토요타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1972년에 갑작스럽게 단종되었다.
전기형의 계기판은 상자형 속도계와 원형 송풍구 등 5, 60년대 미국차의 것을 그대로 붙여 놓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스티어링 휠에는 부채꼴형 스포크가 달려 있었는데, 이 부채꼴형 스포크에 경음기와 방향지시등 스위치가 일체로 되어 있었다. 부채꼴형 스포크의 양쪽 중 한쪽을 누르면 경음기가 동작하고, 부채꼴형 스포크를 좌, 우로 돌리면 방향지시등이 작동하는 구조였다. 변속기는 컬럼식이 쓰였고, 이 방식은 70년 출시된 뉴 코로나가 71년 1600cc 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플로어식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 쓰였다.
27. VEB 작센링 트라반트 P601S(VEB Sachenring Trabant P601S, 1988년)-독일 통일 이전 구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츠비카우의 작센링 자동차 공장에서 만든 4인승 경차이다. 독일 분단 당시 구 동독 지역에서 민간인이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승용차였다. 트라비(Trabi)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독일 분단 당시, 구 독일 민주 공화국 정부는 츠비카우에 있던 옛 아우토 우니온(현 아우디)의 자동차 생산 공장을 모태로 1958년 작센링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고 1959년부터 국민차 트라반트를 생산하였다. 첫 출시 당시 트라반트는 2기통 2행정 0.5리터 18마력 엔진을 탑재하였으나, 1963년 엔진 배기량과 마력수를 0.6리터 23마력으로 높인 트라반트 601이 출시되었다. 이 차종은 시판 당시부터 1991년 단종 때까지 공랭식 2행정 엔진을 고수하였으며, 카세트 라디오 등 일부 편의장비를 제외하고는 차량의 외형이나 사양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공산주의 경제의 특성상 차량을 주문하면 10년 가까이 걸려야 차량을 인도받을 수 있었다.
트라반트 601의 심장인 엔진은 2기통 2행정 공랭식 595cc 23마력 엔진으로서, 비슷한 사양의 차종들에 비해 출력이 낮고 연료 소모가 많다. 그러나 트라반트는 시속 123km까지 낼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차체를 철판이 아닌 FRP(섬유 강화 플라스틱)로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차종인 대우 티코의 무게가 640kg인데 비해 트라반트 601의 무게는 615kg으로 훨씬 가볍다.
트라반트의 특징은 이러한 경량 플라스틱 차체 외에도, 타코미터 대신 공기 흡입량을 색상으로 표시하는 게이지가 계기판에 장착되어 있어 이를 기준으로 운전자가 변속을 하도록 하였고, 변속기는 칼럼식 4단 수동 변속기를 장착하여 좁은 내부 공간의 활용성을 높였다. 트라반트는 차체가 부식에 강하고 가벼우며, 구조가 간단하여 수리가 쉬운 장점이 있었던 반면, 2행정 엔진의 특성상 휘발유에 윤활유를 섞어 태우도록 되어 있어 매연이 심하고, 공랭식 엔진이어서 장거리 주행시 자주 쉬어 주어야 하며, 플라스틱 차체 특성상 사고시 복원이 어렵고 탑승자의 안전에 치명적이며 재활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낮은 엔진 출력의 한계로 제원상의 최고 시속은 123km였으나 실제로 40~60km 이상의 속력을 내기는 힘들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폭스바겐의 4기통 4행정 수냉식 1.1리터 엔진을 장착한 차종도 만들어졌으나 공해가 심하고 승차감이 나쁘며 안전성이 떨어지는 차량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1991년 트라반트는 생산을 중단하고 이후 작센링 자동차 공장은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약 300만대 이상의 트라반트가 생산되어 동독 지역에 존재하였고 공산권 국가로 수출되기도 하였으나 공해 문제로 구 서독 지역에서의 등록이 금지되고 독일 통일 이후 대다수의 동독 주민들이 트라반트를 버리고 서독제 차량으로 대체하면서 대다수의 트라반트가 폐차되어 현재는 동독 지역에 약 100대 정도의 트라반트만이 남아 있으며, 그나마도 개인 소유가 아닌 관광용, 시승용 및 사진 촬영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