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부인의 유언
KBS 이것이 인생이다
1) 길상화 보살 생의 마지막기록 #1
https://youtu.be/hUl4A_H_V2M?si=1iYhQAwM9x5yVy8U
2) 길상화보살 생의 마지막 기록 #2
https://youtu.be/YVtU9cgGR7w?si=dr0-7Jdg42rSEE5u
길상사(吉祥寺)에
깃든 子夜의 純情
怨恨의 38선을 넘어 함경남도 함흥에서 여자 몸으로 서울로 피난 온 기생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1916 ~ 1999)는 당시 대한민국 3대 고급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大苑閣)'을 설립(1953년), 한국 재력가로 성장했다.
훗날 자야는 당시 돈 1,000억 원 상당의 고급요정 '대원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소유 ‘法頂 스님’에게 시주를 했다. 그 대원각 요정이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지금의 寺刹(절) "길상사(吉祥寺)"이다.
평생을 사랑했던 북한에 있는 시인 ‘백석 (白石)'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았던 기생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를 시주받은 법정 스님은 창건 법회에서 자야(김영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자야는 법회에 참석한 수천 명의 대중 앞에서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 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 전 재산을 시주한 것 아깝지 않았느냐? 라는 한 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
"1,000억원 재산이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요. 내가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 달라."고 했다.
사랑한 사람 백석의 시에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다비식을 마친 뒤 자야의 뼈 가루는 길상사 경내에 쌓인 눈 위에 뿌려졌다.
자야가 평생을 못 잊어하며 사랑한 시인 백석(白石 ; 1912∼1996)은 일제시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지만 아호인 백석을 필명으로 사용했다.
백석은 문학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키, 빼어난 외모로 당시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그를 보고 자지러 졌을 정도라고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자야'와의 러브 스토리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 듣는 이의 가슴이 찡 하게 아려온다.
백석은 함경도 함흥시의 영생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서 기생 金英韓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백석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구에 나오는"자야(子夜)" 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서로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다가 당대 최고의 직장인 함흥 '영생여고' 영어 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겨 강제로 또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다.
백석은 결혼한 첫날밤에 그의 연인 기생 자야(子夜)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를 막아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만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늘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짓는다. 그러나 백석이 잠시 동안이라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 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 버리고 없었다. 그 후 다시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 후 백석은 평생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한에서 혼자서 살다가 1996년에 사망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다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흐르는 깊은 산골로 가서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면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함흥에는 지금도 영생여고가 자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996년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내내 자야를 그리면서 혼자 살다가 숨을 거둔 백석의 순애보도 대단하지만, 백석을 그리워하면서 어렵게 세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세상을 떠난 자야(김영한)의 순정도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
또 대단한 것은 대원각을 길상사에 봉헌을 하고도 10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法頂 스님 또한 이 시대의 위인이셨다.
1997년 개원법회를 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축사를 했고 2005년엔 김 추기경과 수녀들이 모여 이른바 '길상음악회'를 열었는데 종교를 뛰어넘는 감동이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경인TV, 자일대우버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7층석탑을 사찰 경내에 세운 것 또한 종교 한계를 뛰어넘어 문학가의 사랑을 기려 종교의 합의 도량이 되기기도 했다.
‘백석과 자야’ 두 사람의 슬픈 애정스토리는 지금도 성북동 ‘吉祥寺’ 풍경소리를 타고 아름다운 여운으로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다.
<요정정치 시대의 세 여인>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
삼청각의 이정자와 청운각의 조차임 그리고 대원각의 자야 김영한 길상화보살
제3에서 5공화국 시절 대한민국 밀실정치의 대명사인 서울 장안의 3대요정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 중 현존하는 삼청각이다.
옛 청와대 뒤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을 둘러 서울시내를 관망하고, 다음 길상사에 들려 경내를 둘러본 후 삼청각에 들리는 코스가 서울의 신명소가 되었다.
북악 팔각정에서 북한산과 서울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며 차 한 잔하고 잠시 쉬었다가 길상사에 들른다.
다른 방문객들도 경내를 조용 조용히 걸으면서 감상을 한다. 길상사 극락전 마당에는 부처님오신날 지난지가 얼마 안되어서 인지 연등이 빼곡히 하늘을 가린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있는 김영한 사당을 거쳐, 법정스님의 진영과 유품, 유골이 모셔진 진영각에 들리니, 마침 해설사가 길상사에 대한 해설을 해주어서 더욱 좋았다.
경내 뜰에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와 수련화, 이름 모를 꽃들이 우리들을 반긴다. 서원장은 꽃에 관심이 많아 연신 사진을 찍고, 황총무는 불심이 깊어 극락전에 들려 참배하고 나온다. 5시 반경에 삼청각으로 이동했다. 두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자동차로 일화정으로 가는 경로, 또 하나는 걸어서 솟을대문을 거쳐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대단히 화려하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런지 안내원이 차량통제를 하고, 올라가는 길옆에 많은 차가 정차 되어있다. 안내 해주는대로 건물입구까지 들어가서 주차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니 오늘 결혼식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예약 해둔 한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평일보다는 저녁 식사비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오늘은 내가 쏜다고 걱정들 말라고 했다.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옛 요정 삼청각에 귀한손님이 되어 온것같은 기분을 상상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난 후, 삼청각을 뒤로하고 휘향 찬란한 서울의 밤거리를 누비며 귀가했다.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그 당시 서울의 3대 요정의 안주인이 어떤 분이였는가를 소문과 자료를 통해 살펴본다.
삼청각의 이정자는 일제 강점기부터 자리 잡은 서울 장안의 일류 요정인 옥류정의 둘째딸이었다.예쁘장하고 상냥한 성격이였다고 한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삼청각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대표하는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다.
여야 고위 정치인의 회동과 1960년대 한일회담의 막후협상, 1972년 남북 적십자회담 장소로 이용 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등장한 룸싸롱의 기세에 눌려 고급 요정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운영하던 이정자 역시 경영난으로 건설회사에 넘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만 남아있다.
2001년 서울시에서 인수,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요일을 제외하고 연중 전통공연, 결혼식을 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맡고 있다.
청운각의 조차임은 1905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30대에 젊은 나이에 홀로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서울로 상경,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청게천 변에서 국밥집도 하며 6.25 전쟁의 시련을 격어가면서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모은 돈으로, 1956년 대 저택을 매입, 고급 요리집 청운각을 차렸다. 당시 정부 고위 관리와 공기업, 언론기관 및 대기업 임원들이 찾는 모임장소가 되었고, 청운각의 전성기에는 다른 요정보다 더 유명 하였다고 한다.
청운각이 유명세를 탄 계기가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이 뛰어난 미모와 영어실력도 갖추어 이 요정의 얼굴 마담으로 있었고, 한 때는 이 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도 사용 되었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정계의 이후락, 정일권이 아지트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차임은 돈을 많이 벌게 되자,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이 힘든 고학생들을 도왔으며, 건강악화로 63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장학사업과 학술사업을 펼쳐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전재산을 털어 유언에 따라 ‘우산 육영회’장학재단을 설립하면서 청운각은 사라졌다.
피땀으로 번돈을 정승처럼 쓰고간 여걸이라 하겠다.
대원각의 김영한은 191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몰락과 결혼의 실패로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眞香)이라는 기생이 되었다.
길상사는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이 있다. 당대 꽃미남이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 천재 백석 시인과 기생 진향의 사랑 이야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회식 자리에서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첫눈에 반해 자야(子夜)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유명한 시 한편을 남겼는데, 그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3년 동안 동거하고 사랑을 나누다가 남북이 분단되면서 백석은 북한에 김영한은 남한에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그후 서울로 내려온 김영한은 1955년 성북동 배밭골 일대의 땅을 사들여 청임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자, 요정인 대원각으로 키웠다.
30여년 요정집을 운영, 당시 시가로 천억이 넘는 재산을 모았다. 부를 얻었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평생일군 전재산 대원각을 시주하여 절로 만들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의 철학인 법정스님의 거절로 10년 가까이 권유와 거절로 이어오다가 결국 법정스님이 시주를 받아 들여 1997년 창건되어 길상사가 탄생되었다.
요정 대원각이 아름다운 변신을 한 것이다. 시주한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을 받았다.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천억원이 그사람 시 한줄 보다 못하다고 하였다고 했다.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김영한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눈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하고 1999년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 건채 83세 나이로 운명한다. 한달후 12월14일 길상사에 눈이 내리자 스님들은 그녀의 재를 길상사 앞마당에 뿌렸다.
장안의 영웅호걸들이 내로라하면서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집은 시대의 변화와 세월속에 뒤안길로 이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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