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교회를 찾아서ᆢ)
내 고향은 고흥이다.고흥은 풍수지리적으로 모양이 고양이같다고 하여 고흥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통일 신라에서 부터 고이 부곡이 있었는데 이것도 고양이란 뜻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지금도 고흥의 지도상의 그림을 보면 고양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고려시대 때는 풍수도참사상에서 고양이 지방에서 나온 사람이 나라를 망친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고흥의 이미지는 좋지 못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내 고향 고흥을 그래도 나는 좋아한다. 남들이야 무어라 하든 역사적으로 무어라 하든 내가 낳고 내가 자란 내 고향은 더 없는 어머니의 품 속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2013년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어머님께서 맨처음 찾은 교회를 들렀다.
그 교회는 우리 동네에서 4km(십리)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대전 교회(합동 개혁)인데 wcc로 인해 분열되기 이전에는 우리 마을에 있는 두원 중앙교회(통합)와 형제교회처럼 지냈다. 대전교회에 들러 최종철 목사님을 뵙고 큰절을 일곱번 드리고 50만원을 헌금했다. 그 큰절과 헌금의 의미는 나에게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 사연을 지면을 통해서 펼쳐 볼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17세에 이씨집안의 막내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그 시기는 해방직후라 봉건사회였고 경제는 피폐한 상태였다.
큰집에서 대가족이 사는데 그 집에 술을 먹는 남자들만 하여도 아홉 명이었다. 막내보다는 첫째, 딸보다는 아들을 뚜렸하게 귀히여겼던 때라 막내 며느리는 하인중의 하인 취급 받던 시절이었다.
새벽4시 부터 술을 빗고 식사를 준비하며 밭일을 해야 하는 고달픈 날은 밤 늦게야 끝마칠 수 밖에없는 고난의 세월 이었다. 하지만 그 당신 사회 자체가 그러하니 숙명으로 받아드리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큰 아버지는 서당 선생이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서당선생이 그러했듯이 마작을 즐기고 술과 계집을 즐기는 일에 빠져 결국은 두 집 살림하면서 가산을 탕진했다.
막내인 아버지는 천성이 선해서 큰 아버지가 팔아넘긴 논밭을 다시 사들여 큰집 살림을 유지하면서 머슴아닌 머슴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아버지의 곰발바닥 같은 손가락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꼭두 새벽부터 일어나 5백 미터 거리되는 논에 거름을 지어다 날르고 큰집 살림 우리집 살림을 모두 도맡다 싶이 하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받은 교훈은 부모와 조상을 잘 받들고 형님을 잘 받드는게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전부였다. 고생 고생에 찌들린 아버지께서 추구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똑같이 벌어먹는 사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해방이후 혼란한 와중에 박헌영이 이끄는 남한노동당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로 역사적으로 드러났지만 그 당시 공평하게 똑같이 벌어먹는다고 하는 남로당의 슬로건은 그것을 추구한 아버지에게는 더 없는 복음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거기에 동조하게 되고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의 리조직책이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1950년 6.25 사변이 터졌다. 좌파 조직원인 아버지는 징집 명령을 거부하고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라에서는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려 빨갱이 소탕작전을 벌였다. 우리 동네에도 경찰력이 투입되어 좌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한 가족을 이룬 어머니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경찰들이 가족을 심문하여 그 당사자를 찾아낸다는 소문을 접한 어머니는 낮에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새벽에 들어가 밥을 해먹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경찰에 시달한 나라의 명령이 엄하여서 경찰들은 매복을 하여서라도 빨갱이 가족들을 색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밤 경찰들이 아버지를 잡기 위해서 우리 집을 밤새껏 매복하면서 그 단서를 포착할 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른 어머니는 그 날 새벽도 여전히 밥을 하러 부엌에 들어섰다. 한 여인의 등장은 밤새껏 뜬 눈으로 지샌 경찰들에게는 모든 분노를 쏟을 수 있는 센드백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경찰들은 어머니의 머리칼을 뒤에서 낚아 채어 땅바닥에 내 팽개치고 바닥에 나동고라진 여인을 무참히도 짓밟았다. 군화발로 지근 지근 밟아 버리고 결찰 육모 방망이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죽어라고 패었다. 하늘에 별이 번뜩 번뜩하고 온 머리 통은 아무 생각이 떠 오르지 않는 새하얀 백짓장이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둘째 외삼촌이 누나(나의 어머니) 집에서 살았는데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해 버렸다.
그 이후 어머니는 평생동안 고혈압 170 이상으로 사셨다. 온 몸이 파쇄가 되어 온전한 뼈 하나 성한 곳이 없어 방뚜껑이 된 것이다. 경찰들이 소란을 피우고 가자 어머니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살아나가기가 너무나 암담했다.
매일 매일 눈물로 날을 지새웟다. " 살 길이 어딧어. 살 길이 어딧어." 울고 또 울고 또 또 또 울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주체할 수 없는 강물, 흘러나고 흘러나서 바다를 이룰 것 같은 통곡. "내 살 길이 어딧어, 내 살 길이 어딧어...."
이렇게 식음을 전패하고 한 달 넘게 울던 어머니에게 가느다란 젊은 과부의 음성이 들렸다.
"덕산떡,(어머니택호가 덕산댁) 거기 가면 살 길 있어 한 번 가 봐"
하나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어머니에게는 그 과부의 말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권하는 말에 이끌려 연약한 몸을 이끌고 대전교회로 갔다. 그 날 주일은 때마침 고흥 읍교회 당회장 목사인 정규오 목사(호남 개혁신학의 거두)께서 그곳에 세례식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
그 목사님께서 설교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내용은 예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대한 거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에서 어머님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다.
"오마따따, 오마따따, 내 살길이 여기있어 내 살길이 여기 있어....."
어머님은 그동안 사람에게 두들겨 맞은 것이 분하고그 고통때문에 힘들었는데,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힐 뿐만아니라 죽으셨다는 사실에 힘을 얻었고,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부활에 소망을 찾았다.
그렇게 하여 모든 절망감을 극복한 어머님은 새로운 복음의 그늘 속에서 안정을 되찾고 그 슬하에서 4남 1녀의 오남매가 태어난 것이다.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보면 6.25란 전쟁의 절망감에 농약먹고 자살한 사람과 목매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나의 어머니는 그 암담한 절망감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어머니께서 자살했으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도 살아간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본주의 공산주의는 우리 가족을 절망의 나락으로 이끌었으나 우리 하나님은 거기까지 구원의 손길을 펼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그 인자하심과 온유하심이 충만하신가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기에 내 생명과 우리 가족의 생명을 살려준주님과 주님의 교회와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어머니를 대신해서 감사헌금과 큰 절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라 하여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뒷감당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과 거기에 매개자로 선 교회와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가 뒤돌아 보며 항상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려고 발버둥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첫댓글
모든 인생은 철학적 요소다 .........
모든 일에는 카르마가 따른다........
육식은 악마의 식습 이다........
우리의 고향 즉 본향은 하늘 왕국이고.
교회는 주막. 본향을 가지 전에 거하는 곳이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