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과 음악에 아주 젬병이다. 그래서 미술사와 음악사를 눈여겨보고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럼에도 목사인 내가 꺼려지는 음악 장르가 있는데 CCM(현대기독교음악)이다. CCM을 소비하는 시장은 교회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예배 이벤트에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예배를 돕기 위한 찬양들은 감정을 고양시켜 심리적인 엑스터시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7,80년대 기도원에서 북을 치며 감정을 고양시키던 방법이 음악적으로 세련되게 포장되었을 뿐, 음악의 기저에 깔린 동기와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 CCM 가수들이 보여주는 노래들에서 자아도취형 은혜를 본다. 간혹은 스타십에 취하고 세속적인 멋 부림을 은혜로 위장한 가수들을 본다. 기독교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것을 CCM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없이 하나님을 노래(설명)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 상징 없이 기독교를 노래(설명)할 수 없는 게 작금의 한국 개신교 상황이다. CCM은 기독교인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음악이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지 못한다.
경직된 교리의 울타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콘텐츠를 만들어낼 만한 인재를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인재가 나와도 교회가 그것을 배격하고, 소비해주지 않기 때문에 창작을 고려할 수도 없다. 그래서 CCM은 오직 교회와 교인을 위한, 그리고 예배만을 위한 음악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교회라는 좁은 시장에서 생태계를 만들고 연명하는 CCM 가수들의 삶은 그것이 본업이 될 때 대형교회와 그들의 논리에 더욱 궁색해지고 비굴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적인 언어나 상징들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노래하며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독교 가수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중 한 분이 홍순관 선생이다. 비록 그는 CCM이라는 장르에서 벗어났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을 웅숭깊게 노래한다. 그의 노래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지 않는다’, ‘쌀 한 톨의 무게’, ‘계절이 우릴 아름답게 하기를’ 같은 노래는 나의 이런 기대를 아름답게 충족시킨다.
그리고 또 한 분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가수가 있다. ‘나무엔’이다. 그의 노래엔 멋부림이 없다. 가벼운 은혜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매우 절제되었고 깊이 가라앉아 하늘을 보듯이 노래를 한다. CCM 가수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과잉된 자의식이나 감정의 폭주가 없다. 매우 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탄력을 받아 솟구치는 힘이 있다. 대지를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 같다. 그의 목소리에서 슬픔을 깊이 안고 있는 숲의 영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벼랑이다.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그 끝에 서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세력과 힘을 많이 잃고 종교 시장에서 지분을 잃어갈 것이다. 교회에서 이탈한 그리스도인들이 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가나안 성도의 시대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이동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를 찾아 이동하는 부족이다. 그 가치 찾기에 실패한 부족들은 교회, 아니 기독교를 떠날 수 있다. 70년대 미국에서 기성의 가치와 기독교적 세계관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 대안으로 찾은 것이 동양의 실존주의와 동양 종교의 신비적 체험이었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을 때, 시대와 삶이 매말라 종교적 갈급함을 추구할 때, 상처받은 이를 위로하고 돌아갈 곳을 알려주는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일 수 있다. 노래는 백 마디의 설교보다 힘이 있다. 나무엔에게 나는 그런 미래를 본다.
나는 목사로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목회를 성공시키기 위한 꿈을 꾸지 않는다. 그것은 경영 마인드와 심리적 속임수 같은 것들이 적절히 가미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적 가치를 교회를 넘어 사회 저변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도록 작은 돌 하나라도 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몇 개의 노랫말을 써서 나무엔에게 슬쩍 건넸다. 부담 갖지 말고 읽어보라고. 혹시 마음이 동하면 곡을 붙여 보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말했다.
나무엔이 내일(18일)과 모레(19일) 저녁 7시 30분에 세종 박연문화관에서 공연을 한다. 그는 나에게 바람처럼 스치듯 말한다. “목사님의 글에 곡을 만들었어요. 부르면서 울컥하고 빠져드는 곡이라 더 이상 수정을 못하고 있는데, 그 날 기분이 좋으면 그 곡을 부를 수도 있어요.”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부르든지 말든지...’ 그와 나는 늘 그런 식이다. 누가 강요해서 뭘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쪼대로 하는 것, 눈치보고 비굴하게 엎드리지 못하는 성깔머리가 닮아서 만날 때마다 피붙이처럼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의 노래를 무대에서 들을 수 있는 기쁨은 교회의 내일을 위한 기대와 전망을 함께하는 즐거움도 포함된다. 나는 나무엔의 노래에서 상처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위로와 성령이 베푸시는 소망을 본다. 내일은 위로받는 날이다. 그리고 소망을 얻는 날이다. 나무엔에게...
첫댓글 나무엔~~
찬양 들어보니 너무 너무 좋아서 자꾸 듣게 되어요~^♡^
이번에 새로 알게 된 홍순관과 나무엔.. 정말 멋지네요♡
성령이 베푸시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CCM이 되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나무엔의 찬양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힘이 있어요.
저도 며칠 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뭐, 처음 알게 된 게 한 둘이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