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노회 장로회 서신사건을 통해 본 고신교단의 현주소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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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라고 하면 약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그 충격의 내용에 있어서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최초로 인터넷 상에 보도한 코닷과 같은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요, 필자와 같이 고신에 꼭 필요한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인고 간략하게 설명하면, 전국장로회연합회가 이번 8월에 있을 수련회의 주강사로 섭외한 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 담임)에 대하여 부산노회 장로회가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1차적으로는 이동원 목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2차적으로는 전국장로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공식적인 이의제기인지 아니면 절차를 어긴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인터넷 상에 공지한 코닷의 기사만을 봤을 때는 마치 부산노회 장로회가 불법적인 일을 한 것처럼 밝히고 있지만, 코닷의 기사에 댓글로 달린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김영수 장로의 글을 보았을 때는 역시나 코닷의 기사가 단순히 공정한 사실을 보도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위에 기록해 놓은 링크로 들어가보면 그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냥 간략하게만 말한다면, 부산노회 장로회가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가정교회와 관련한 일련의 사태로 인하여 고신교단 정체성에 대하여 고려하게 되었고 그 시발로서 전국장로회연합회 수련회의 주강사가 침례교 목사라는 점을 이유로 문제를 발생케 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인터넷을 통하여 접하면서 어쩌면 참으로 다행이고 어쩌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번 사건은 그저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고신교단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또한 이 문제로 인하여 고신교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사점들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비록 여러 가지 어려움과 의견마찰 심지어는 교단분열의 위기가 오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신교회가 지향하는 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고신교회 가운데에 새로금 자리잡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겠기 때문이다.
1. 사건의 발생이유에 대한 다각적 검토
왜 갑자기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을까? 왜 느닷없이 부산노회 장로회가 섬뜩한(?) 일을 벌이게 되었을까? 사실 이미 내정된 강사에게 편지를 보내 “오지 말아주십사”라고 부탁하기란 어떤 이유가 있던 간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반면에 필자는 부산노회 장로회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절차상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확인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단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 고신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에 수많은 장로들이 고신교단의 정체성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들을 상실한 가운데 한국교회의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에 도취되어 고신교회 대부분 목사들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현대 복음주의적 경향에 쉽게 빠져들고 있는 시점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그렇게 순수한 관점에서만 보기에는 어려운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들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지만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분석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석은 필자가 계속해서 전개해 나갈 많은 논의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부산노회 장로회가 보인 이번 행동에 대해 표면적으로 나타난 성명서만으로 볼 때는 부산노회 장로회가 그나마 고신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다른 집단에 비해서는 그나마 좀 더 이해가 있다는 것이고(여기에서 필자는 부산노회 장로회의 이해가 완벽에 가깝다고는 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 고신교회에 속한 많은 분들의 관점에 비할 때 낫다는 것이다.) 위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벌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노회 장로회가 “전국 교회 장로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고백을 이야기하고, 교회사를 이야기하고, 칼빈주의 5대교리 가운데 일부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영문을 사용하면서 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만 봤을 때에는 부산노회 장로회에 대하여 다시 보게 되고, 그 글이 정확히 누구에 의해 초안된 것이며 어떤 분들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부산노회 장로회 임원들이 주축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이들이 보이게 될 여러 가지 행동들에 대하여 보다 관심을 가질만 하다.
둘째, 장로직에 대한 위험이다. 이 말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장로직분 자체에 대한 위험이라기 보다는 장로직을 맡고 있는 분들이 체감하는 위기이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정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이 가정교회 문제로 인하여서 장로직에 위기를 느끼게 되고 또한 강남지역 교회를 비롯하여 교단내 수도권의 이른바 개혁세력이 목회하는 교회들에서 장로임기제가 실시되고 또한 지난 총회에서는 남서울노회가 공식적으로 장로임기제에 대한 건의를 하기도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교회 문제는 부산노회 안의 제4영도교회(다름아닌 이 교회에서 가정교회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교단 내 헌법 권위자라고 불리우는 조 모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시무하시다가 수년 전 은퇴한 교회이기 때문이다)를 비롯하여 몇몇 교회에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초장동 교회의 윤 모 장로가 이 문제를 노회에 정식 질의하고 지난 노회에서 초장동 교회 담임목사인 김종선 목사로 하여금 가정교회를 그만두게 하였고 또한 노회 앞에 사과케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다.
셋째, 필자는 이 문제가 교단 내 골이 깊은 계파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목사들에게만 영향이 있다고 여겨지던 교단 내 계파문제가 이제는 장로들 간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출된 것이다.
우리 교단은 오래 전 한상동, 송상석으로 계파가 형성된 이후에 지금껏 다양한 형태로 그 계파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소위 돼지파와 개혁파인데 돼지파는 과연 어떻게 남아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최근 몇 해 동안 개혁파가 나름대로 계파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교단 내 여러 가지 직책들을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목사집단의 경우 신대원 동창회라든지 세계선교부 라든지 교단 내 중요한 일에 대하여 계파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교단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이제는 ‘헌금 혹은 후원’마저도 정치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 고려학원을 위한 헌금이라든지, 고신대학과 신대원을 위한 각종 지원 등이 썩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계파의 모습은 장로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맥을 같이 한다. 최근들어 전국장로회연합회의 회장직을 신주복 장로(서면교회)를 비롯하여 엄송우 장로(한빛교회) 등 개혁파 세력이 그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고려학원의 새로운 이사장에도 개혁파인 김국도 장로(범천교회)가 그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 보수적인 성향의 부산노회 장로회가 반발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계파가 이미 현존하다보니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계파가 애초에 없다면 반발도 있을 수 없는 데 말이다.
어떤 분들의 반발인지 필자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초장동 교회의 윤강석 장로도 그 중 한분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윤강석 장로의 경우 오래전부터 교단내 주요한 일들을 맡아오던 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계파의 문제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 가운데 하나는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인터넷 상에 보도한 곳이 바로 코닷이라는 것이다. 왜 코닷이 이러한 보도를 하였을까? 코닷기사에 댓글을 단 부산노회 소속 김영수 장로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코닷이 전국장로회연합회와 직접 관련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계파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계파 문제는 전북노회나 경안노회, 영남노회, 경서노회 같은 곳의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오히려 교회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는 계파적 목사 및 장로들이 교단을 혼란케 하고 있음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사건 발생 원인들”을 모두 전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위의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얽혀서 일어난 사건이 이번 사건임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나의 문제 즉, 첫 번째 문제만이 이 사건의 전적 동인(動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문제들이 사실이라고 전제하게 될 때에 교단의 현주소를 논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장점들을 갖기 때문에 일단은 이렇게 전제하고자 한다. 계속해서 교단의 현주소를 논해 보자.
2. 교단 내 계파 갈등의 심각
앞서도 언급했지만 교단 내 계파의 갈등은 심각하다. 분명 사도는 교회를 향하여서 분파의 형성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지만 말씀 중심이라고 하는 이 교단은 사도적 가르침에 대하여 귀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으며 계파와 무관한 대부분의 총대들 덕택인지 몇 해 전의 총회에서는 교단 내 모든 계파를 해체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과연 현재 그러한가? 아니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진 것은 없다. 이 카페에서 자주 논의되는 코닷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계파가 이제는 공식화 되어 버렸다. 코닷은 언론을 자처하지만 계파의 공식 홈페이지 역할을 하고 있고, 자신의 계파에 속한 인물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좋은 기사를 싣는가 하면 근황에 대해서도 기사화 하고 있다.
이러한 계파가 어떡하다가 형성되었을까? 신대원 졸업회수를 확인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간략한 예를 언급해 보면 29기에 정근두, 장희종을 비롯한 분들이 있고, 신대원 동창회장도 29기 그리고 이 글을 쓰다가 신대원 홈피를 보니 동창회장이 새로 교체되었는데 그 분 역시 29라고 한다. 게다가 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황창기 교수님까지도 29기다. 그 밖에도 많다. 33회를 보면 김성복, 남교희, 신상현, 장교종 등이 있다. 그 밖에도 SFC 간사들의 명단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길 바란다.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는 이러한 계파를 막기 위함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게다가 목사들의 계파는 어쩌다가 장로들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었는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현주소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3. 강단교류를 비롯한 각종 집회의 강사와 관련하여
“강단교류”.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교회의 예배 가운데 ‘설교’가 중요하다면 당연히 강단교류는 아주 중요하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전통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강단교류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설교’를 가벼이 생각하고 설교를 감독하는 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시점에서 강단교류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지 모르나 이러한 현상은 신약성경이 엄중한 경고에 대한 외면일 수 있으며 종교개혁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중요한 전통에 대한 외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15-2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필자가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 시작 전에 장로님들과 설교자인 담임목사님이 예배당 뒤편에서 걸어나오면서 강단에 올라가는 목사를 향하여서 장로 대표가 악수를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통이 언제부터인지 사라졌다. 아마도 그 악수의 의미를 모르고 그저 ‘전통’으로서 행하다 보니 필요없다고 여기게 되고 그 외형 뿐만 아니라 그 의미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 악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의 악수’(갈2:9)이다. 특별히 과거 종교개혁의 어간에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많은 목자들이 있었다. ‘진리’에 대하여 민감한 당시의 성도들은 그러한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거짓목자의 설교를 듣기 원치 않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대표이며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들이 설교단에 올라가는 목사와 악수함으로써 “이 설교자의 설교는 안심하고 들으십시요”라는 의미로 악수하였던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고 필자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럽의 개혁파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오늘날 고신교회는 과거 진리에 대하여 민감했던 때와는 달리 급성장하는 다른 교단 교회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숫자에 대한 미련을 극복하지 못하여 이제는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거의 버려버리고 다른 혼합주의 경향으로 빠져가고 있다. 코닷의 언급에서 드러나듯 마치 ‘한기총’에 속하지 않으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과연 한기총이 건전한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단순한 태도는 고신교회의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전체가 배교의 길로 걸어갈지라도 우리는 바른 길로 걸어가야 한다. 비록 우리의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고신교회는 강단을 쉽게 열어줌으로써 고신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이제 더 이상 순수한 말씀으로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물론 열어준 강단 뿐 아니라 고신 설교자들에게 맡긴 강단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 고신교회 가운데에 개혁주의 정통 설교에 부합하는 설교자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최근 유행하는 베스트셀러가 설교의 본문이 되고 있지 않는가? 최근 들어 유행한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인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어디 있는가?
강단교류의 문제는 이제 고신에서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느닷없이 부산노회 장로회가 강단교류라고 하는 문제를 언급한 것은 아직도 그 전통과 말씀에 대한 관심을 가진 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요즘 젊은 목사들이나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강단교류”라는 말 자체를 잘 모른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러한 지적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강단교류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고신교회의 설교가 과연 다른 교단에게 강단을 열어줄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형태로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고신의 설교를 지켜야 할 정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단교류는 대한 철저함은 오히려 강단교류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행위이다.
예컨대, 현재 고신교회의 설교자들의 설교가 신앙고백에 충실하며, 언약에 충실하며, 성경에 충실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또한 전국장로회 연합회 주강사를 veto하는 상황에서 부산노회 주일학교 연합회에 초청된 강사들은 과연 교단 정신에 부합되는 사람들인가와 같은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번 부산노회 주일학교 연합회에 초청된 강사를 볼 때에 개혁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현대에 유행하는 목회와 교육방법론을 도입하는 분들 뿐이다.
부산노회에 속한 교회의 설교와 목회는 과연 어떤지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듣기로는 고신의 모교회격이라 불리우는 삼일교회에서도 이윤삼 목사가 집회했다는 것을 듣는다. 뿐만 아니라 김영수 장로가 댓글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지적하듯이 부산노회 소속 은항교회는 우리교단의 대표적인 은사주의적인 교회이다. 또한 지난해 말 은항교회의 모 교회격인(은항교회의 원래 이름은 제2장림교회였다) 장림교회의 경우 침례교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물론 그에게 편목과정을 이수케 하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신교단 내에 수많은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침례교 목사를 청빙하였다는 문제, 그리고 그 청빙에 대하여 부산노회가 허락하였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부산노회 장로회가 장경동 목사(대전중문침례교회)는 안되고 김문훈 목사(부산포도원교회, 고신)는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번 부산노회 장로회의 주장은 설득력을 크게 잃을 것이다. 예컨대 스펄전이 살아있어서 지금 고신에서 설교한다고 하면 못하게 할 것인가? 그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침례교인이라고 해서 그를 설교못하게 할 것인가? 또한 로이드 존스 목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신 한경직 목사가 설교하겠다고 하면 그는 장로교 목사이므로 가능하다고 할 것인가? 존 오웬을 초청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회중교회 목사이니 그를 청할 수 없다고 할 것인가? 회중교회는 장로교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정치체제인데 말이다. 대신 이윤삼 목사(마산제일문창교회)를 초청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할 것인가? 그가 비록 금니현상의 대표주자이지만 그가 고신교단 목사이니 가능하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총동원 전도주일을 빌미로 연애인들의 간증으로 설교를 대신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질타해야 한다. 강단교류의 문제를 단순하게 요소요소의 문제로 다룬다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어떤 분들은 이번 강단교류 문제와 관련해서 단순하게 “침례교는 불가하냐?” 라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문제를 단순히 요소요소만으로 도식화하는 아주 수준 낮은 발상이다. 실제로 이번 부산노회 장로회의 행동은 단순히 이동원 목사가 ‘침례교’ 목사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부산노회 장로회의 성명서를 자세히 보면 이동원 목사를 veto하는 주 이유 가운데 하나는 최근 고신교단 내에 문제가 되고 있는 가정교회와 알파코스와 관련되어 있다. 이동원 목사가 한국교회 내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특별히 가정교회와 알파코스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산노회 장로회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횡설수설한 면이 있어서 정리한다면, 강단교류란 1차적으로 우리의 강단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이후에 그 강단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강단교류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순수한 강단을 다른 설교자로 인하여서 타락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강단교류의 엄격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교단이 합동측과만 강단교류를 허락한 것이고, 예전에는 강단교류를 노회 허락하에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 2007년의 시점에서는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 없다. 합동측은 워낙 다양한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코닷은 부산노회 장로회의 이번 사태를 비난하면서 총회가 강단교류에 대하여 각 당회가 알아서 하도록 한 결정을 언급하고 있다. 맞다. 그러한 결정이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결정이 언제 있었는지를 한번 생각해야 봐야 한다. 그 결정이 과연 순수하게 결정되었는지를 말이다. 단순히 그러한 결정이 있었는데 이제와서 왜 그러느냐 라고 물을 질문이 아니다. 그 결정이 어느 시점에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 결정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정은 밀레니엄의 어간에 있었다. 한목협에 속하여 열심히 교회연합과 일치에 힘쓰는 고목협이 한참 교단의 중심을 잡고 있던 시점이다. 샘물교회는 당시에 기장교회의 목사를 불러서 설교시킴으로써 마치 엄청난 개혁을 단행한 듯한 일을 보였다. 이 시기에 강단교류를 당회가 알아서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결정이 고신교회의 현실 속에서 과연 타당한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개혁주의 교회 원리에 의하면 개교회는 완전한 독립적인 교회로서 충분히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원리’이지만 현실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교단이 개혁교회의 정치원리보다는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따른다는 면에서 봤을 때에 과연 이러한 논리가 바른지를 생각해 보야 한다. 강단교류의 문제를 왜 당회가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놨을까?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
4.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한 이해
부산노회 장로회의 성명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4번에 나오는 “우리는 교회일치와 교회연합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복음 전파를 위한 연합 사업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교파들이 함께 연합적인 행사 등을 추진할 수는 있으나, 개체교단의 주요행사에 강사로 초빙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선정하는 것이 교단총회가 결정한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라는 대목이다.
놀라운 문구이다. 고신의 신학자보다 부산노회 장로회가 나음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있다고 답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교회연합의 문제와 관련해서 부산노회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과거 삼일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한 최해일 목사는 우리교단에서 교회연합과 관련하여 거의 최초로 활동한 분이고,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분이다. 한기총과 같은 단체와의 연합에 이 분이 선두에 있었다.
4-1. 사도신경으로 충분한가? 와 관련하여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요소요소만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앞서도 지적하였다. 그런데 교회연합과 관련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는 연합할 수 있다”라고하는 이 단순한 문장만으로 교회연합의 성격을 다루는 것은 고백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암송하면 고백하는 것이고 안하면 안하는 것인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confess)과 고백하는 것(utter)의 차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과연 오늘날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참되게 고백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신경을 정말 참되게 고백한다고 한다면 다른 신조들이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대마다 다양한 고백서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논하겠지만 코닷은 1977년의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는 연합할 수 있다”라는 결정을 근거로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하는데 도대체 고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의문스럽다. 과연 사도신경으로 충분한가? 사도신경에 구원론이 있는가? 사도신경에 칭의론이 있는가? 성화론이 있는가? 오늘날 루터교회가 카톨릭과 감리교와 연합하여 이상한 칭의교리를 말하는 시점에서 사도신경만으로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가? 구원파의 이상한 구원론을 사도신경으로 반박할 수 있는가? 구원파도 사도신경을 믿을 터인데 그들과도 교제할 수 있는가? 왜 청교도들이 사도신경을 놔두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로 만들었는가? 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문구가 많은데, 웨신에서는 구원에 관한 문구가 많은지를 모르는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연합할 수 있는 자들인가? 그렇다면 과정신학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과도 연합할 것인가? 언젠가 내가 이 카페에서도 지적했지만,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짧은 문장을 믿는다고 해서 다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상대인가? 사도신경이 작성되던 당시에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없었으므로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문구로 충분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문구로만 충분하다면 왜 안영복 교수를 쫓아내었는가? 그 분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던가?
반면에 웨신과 하이델베르크가 사도신경을 중요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사실은 웨신과 하이델베르크를 작성한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던 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에 동일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던 카톨릭이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서 ‘고백’(confess)하던 것을 생각해 보라.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다. 마치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 ‘바람소리’라는 닉네임을 쓰시는 분께서 코닷에서 옮겨온 지구촌교회의 사도신경에 대한 입장을 올려두었는데, 그 글을 보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도 하다. “Sola Scriptura”라는 말은 “Tota Scriptura”(전체 성경)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말이다. 이단도 “오직 성경”을 말한다. 지구촌 교회가 사도신경 대신 “오직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성경에 충실하고 고백에 충실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오직 한책”이라는 말이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지 모르지만 조지 휫필드와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한 책의 사람”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 될 수 있어도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순한 문제들을 코닷의 수많은 목사들과 학자들이 깨닫지 못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노회 장로회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코닷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아직이다.
오늘날 고신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삼고 있는데 과연 이 신조가 고신교회를 움직이는가? 박장친 목사와 같은 분들이 버젓이 고신에 속해 있지 않은가? 신앙고백이 가진 역사성에 대한 아주 상식적인 지식조차 갖지 못한 분들이 고신의 목사로 장로로 속해 있으니 이 얼마나 우리 고신교회가 신앙고백적이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는가?
5. 신학자들의 침묵이 가져오는 문제들
이번 사태는 신학자들의 침묵이 가져오는 문제와 그 결과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일들은 더더욱 복잡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진작에 침묵하지 않고 나섰다고 한다면 좀 나았을 것을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김영수 장로의 글에서 보듯이 이제 교단 내 많은 단체들은 신대원을 향하여 질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 시점에서 답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에서는 아무리 객관적인 답변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 감정의 골이 생기기 전에 입장을 분명히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절대로 아니다. 김영수 장로의 질의에 대하여 전 원장인 한진환 목사가 침묵한 것을 필자는 백분 이해한다. 한진환 목사가 뭣하러 이 시점에서 답을 하겠는가? 그의 말한마디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복잡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신대원에 있는 것이 너무 골치가 아파서 이제 겨우 서문교회 담임으로 갔는데 괜한 소리 때문에 목회인생 꼬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답하기 어려운 시점에 와있다. 가정교회에 대해서 좋게 말할 수도 나쁘게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교회연합과 관련해서도 지금껏 침묵해 오던 분들이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시점이 되어 버렸다.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좋게 말해도 찍히고 안좋게 말해도 찍힌다. A라고 말하면 B팀으로부터 욕을 먹고, B라고 말하면 A팀으로부터 욕을 먹게 될 것이다. 결국은 교단이 나뉘게 될 지 모른다.
현재까지 유해무 교수와 변종길 교수가 각각 코닷과 부산노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어느정도 밝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의견을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순수하게 말하더라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성구 교수가 단 댓글에 나오듯이 80년대 박성복 목사가 한탄한 한탄은 이제 더 큰 한탄이 될 것이다. 신학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없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탓은 교회로 돌릴 일이 아니다. 신학교 자신들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총회 결정을 근거로 한 주장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코닷은 1977년에 있었던 제27회 총회 결정인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는 연합할 수 있다” 라는 문구를 근거로 삼아 이번 사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2004년의 이성구 교수 건에 대하여도 이번 기회를 삼아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지적할 수 있는 바가 있지만 일단은 코닷은 과연 “총회결정”을 자신들의 주장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
수년전 총회는 교단내 모든 계파를 해체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그 이후 소위 포스트돼지파라 불리우던 계파의 경우 그 실체가 현존하는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활동이 없다. 거의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포스트돼지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용호 목사(서울영천교회)의 경우 지극히 일반적인 대외활동 외에는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현재 맡고 있는 총회세계선교위원장으로서의 활동만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신상현 목사(울산미포교회)의 경우에도 과거와 비교하였을 때에 그 활동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개혁파’라 불리우는 계파의 경우 어떠한가? 보란듯이 총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지난 2006년 7월에 코람데오 닷컴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1996년부터 시작된 고신정신잇기 목회자협의회(이하 고목협 이라 함)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아마도 고목협은 이제 없다고 말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이는 마치 한나라당이 자신들은 신한국당이 절대로 아니며 민정당이 절대로 아니라는 주장과 같으며, 열린우리당이 우리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니며 민주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96년에 시작된 고목협은 지금은 코닷이라는 형태로 더 교묘하게 교단 내의 계파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코닷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의 면면을 확인하면 코닷과 고목협과의 상관관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코닷에서 종종 보도하는 ‘인물란’ 혹은 ‘동정’을 보더라도 그 면면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미리 예견되는 반론에 대하여 반론하자면 아마도 몇몇 분들은 교회 내에 계파가 존재하는 것은 나름대로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치 일반정치계에 다양한 정당이 존재함으로써 서로의 정책에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할 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장이 얼마나 잘 말해주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G.C. 벌까우워가 그의 교회론에서 이러한 주장을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코닷은 총회 결정 운운하는 일은 좀처럼 자제할 필요가 있다. 총회의 결정을 운운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총회의 결정에 충실히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코닷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있는 분들이 여전히 정치적 행동을 하고 있고, 계파적 행동을 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더 지적하면 총회가 이성구 교수에 대해 내린 결정에 대한 전국의 고신교회의 태도와 그에 무반응하는 총회의 모습을 지적할 수 있다. 총회는 2004년 총회에서 이성구 교수에 대하여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졌다 하여 그가 속한 중부산 노회에 지시하여 목사제명을 시켰다. 그렇다면 그는 현재 목사가 아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성구 교수가 자유주의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보지만, 일단 잠정적으로 총회의 결정이 맞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이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다.
만약 총회가 이성구 교수에게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고, 그의 목사직에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면, 총회에 속한 고신의 1500여 교회는 모두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과연 따르고 있는가? 이성구 교수는 총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의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총회에 속한 천안의 모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봉직하고 있고, 고신의 많은 교회가 그를 설교자로 초청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떻게 자유주의자라고 지목해 놓고 그를 설교자로 부를 수 있는가? 자유주의자가 아니던가, 아니면 설교를 못하던가 말이다. 침례교 목사에게 강단을 허락하느냐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부산노회 장로회는 자유주의자가 설교해도 되는지를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인정해 주든지 말이다. 그는 고신의 대표적인 교회인 서면교회, 서울영동교회에서도 설교한 바 있고, 그 밖에 많은 교회들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열린 교단 선교대회에까지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성구 교수는 코닷의 지지를 받고 있고, 코닷은 이성구 교수의 글도 간혹 올리고 있으며, 지난 2006년 12월 7일(목)에 열린 코닷 창립총회는 연구위원장직을 맡겼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총회결정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만한 자격을 가진 단체는 내가 볼때 고신교단 내에 하나도 없다. 모두가 총회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노회와 모든 교회들이 말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누구도 "강단교류"를 말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미 강단을 활짝 열려 있는데 말이다.
7. 코닷, 이동원, 부산노회 장로회
코닷에 속한 분들은 사실 이동원 목사와 같은 분들을 동경하는 분들이다. 이번 2007년 미래교회포럼에 초청된 강사도 이동원 목사이다. 이 목사가 이번에는 ‘관상기도’라는 것으로 미래교회포럼에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가정교회, 알파코스, 관상기도 등등........
이것을 반대하는 부산노회 장로회. 이런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부록: 수평이동을 막은 샘물교회
이 문제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말그대로 부록이다.
코닷은 지구촌교회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샘물교회가 최근 수평이동을 막게 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왜 느닷없이 샘물교회를 언급하고 박은조 목사를 언급하는지 모르겠다. 이 역시 코닷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코닷이 얼마나 정치성을 띄는지를 말이다. 자신들은 끝까지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누구나 다 안다. 김영수 장로의 댓글을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수평이동을 막은 것. 과연 대단한 일인가? 그럴 수도 있고, 절대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수평이동을 막았다”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샘물교회가 처음부터 수평이동을 막았다면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껏 실컷 하다가 이제야 막은 것이 뭐 대단한 일인가? 지금 샘물교회가 수평이동을 막는다고 해서 샘물교회로서는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수평이동을 막겠다”라는 선언 때문에 괜히 자신들의 name-value만 높아질 뿐이다. 처음부터 막던지, 아니면 이제 막으면서 과거에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있어야 한다. 지금껏 계속 해 와놓고 이제 막으면서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인양. 그래서 지금껏 하지 못하다가 이제 좀 수평이동을 해서 교회성장을 해 보려는 교회로 하여금 바보 만드는......
수평이동이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개인의 신앙을 제한하고 성도 개인의 교회선택권을 제한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샘물교회와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성도가 샘물교회 바로 앞에 있는 분당의 모 아파트에 이사를 왔는데 샘물교회가 수평이동을 막는다고 해서 약간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예수소망교회로 가야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좋은 일일 수 있는가?
샘물교회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다. 분립개척을 교회 설립의 이유로 들었던 그 교회가 과거 서울영동교회의 규모를 훨씬 넘어선 시점에서 여전히 현재의 형태로 유지하고 가정교회를 실시한다는 면에 있어서 과연 그 당시의 말이 진실성이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부분을 비롯해 말이다. 더 할 말이 많지만 줄인다.
무조건 요소요소로만 생각하는 현실을 말하기 위해서 그냥 부록으로 지적해 봤다.
결론
지난 4월 부산노회 정기노회 당시에 있었던 이승미 교수의 설교문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번 부산노회 장로회의 행동에는 이승미 교수의 설교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 하다.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고신교회에 대한 한탄이 담긴 그 설교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부산노회 장로회로 인하여 빚어진 이 사건들이 고신교회를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 분열이 되더라도 말이다. 좀 털 것은 털어버리고, 그래서 고신교회 안에서 조용하게 참된 고백을 지키고, 참된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들이 이제 서서히 겉으로 드러남으로서 진정한 고신교회가 남기를 바란다. 부산노회 장로회의 성명서나 서신들을 볼 때에 아직 미숙한 면은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부산노회 장로회에 그나마 손을 들어주고 싶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은 면이 많이 있기 때문에....(예컨대, '유아독존'이라는 말과 관련하여서 그것이 불교용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쓴 코닷을 질타하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불교용어가 얼마나 많은데 단순히 그 단어가 불교용어라는 이유만으로 코닷을 질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뉘앙스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일례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p.s : 두서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이고, 현재 A4 11장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을 3일만에 대충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는 많이 있는데 정리가 잘 안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그냥 올린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대부분 공감합니다. 3일만에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 글을 코닷의 게시판에 올려 모두가 보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급하게 올린 글이라 중간중간에 제가 읽으면서 수정할 경우가 있는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월네월 목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나무가 흔들릴리 없을텐데... 시간날 때 천천히 다시 음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저는 목사님이 아닙니다....그냥 고신교회를 사랑하는 평범한 신자일 뿐....
수고한 결과물이 나왔네요....애썼습니다....^^
.... 이 사건들이 고신교회를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 분열이 되더라도 말이다. ...... 정직하게 속시원히 하신 말씀인 것 같다. 부디 분리주의자, 신성파, 독선주의자라는 소리에 담대할 수 있기를 빈다. 구구한 변명하지 않고, 주를 위해 받는 핍박으로 여기고 ...... 고신교회사는 박윤선박사를 세우려 할 때, 박형룡박사와 경중을 신학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로 비교했음을 증언한다. ..... P.S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
개인적으로는 이번 기회에 고신교회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정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월네월님이 마음으로 고통하는 것이 있다면 역시 다른이들도 마음으로 고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리부동한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선명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용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신앙고백은 드러내지만 나뉘어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정 양심적으로 고통을 느낀다면 다양한 교회들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가능할런지 모르지만 양심에 편한 교회로 자유롭게 출석할 수 있도록....)
어중간한 목사보다 신학자보다 평범한 성도님이 훨씬 훌륭하십니다.급하게 쓰신 글 이라지만 제가 하고싶은 말 다 있어서 속이 후련 합니다.신학교 선생들 몇분외엔 자격없습니다, 말들은 다 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라고, 자신들은 사람눈치 보면서 말입니다.이번일을 기점으로하여 결판이 나면 좋겠는데... 회개하고 하나되든지 정 아니면 갈라서든지...
그 옛날 처럼 이번에도 원하는 분들이 갈라서 나가시면 될까요? 산마루강나루님은 외부인으로 아는데, 맞다면 이런 글은 곤란합니다.
침묵님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 했는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다들 이 글을 두고 칭찬을 하는데, 나는 필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모르겠다. 논지가 뚜렷하지 않다는 말이다. 필자의 말대로 필자는 횡성수설하고 있다.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필자의 말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글은 분명 논지가 없는 글이다. 분명한 논지, 그런 글을 기대한다. 지난번 글에는 그런 것을 볼 수 잇어 좋았는데...
제글은 칭찬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읽었다니 곰곰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아울러 회개해야 할 문제와 그 본질을 바르게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칭찬"????.......무슨 이곳이 글짓기 경연대회 하는 곳도 아니고......제가 이곳에 글짓기 평가 받으려고 글을 올렸습니까? 고신의 어두운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3일의 수고를 헛되게 마소서....
저는 님의 수고를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뚜렷한 논지의 글을 기대하는 것이지... 저는 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로회 행위를 긍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하는 것인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말합니다. 님의 말에 공감을 못해 이런 댓글을 단 것이 아닙니다. 글짓기 경연대회하는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분명한 논지는 드러나는 글은 썼으면 하는 마음에서 위와 같은 댓글을 단 것입니다.
님은, 제가 보기에, 이번 사태와 관련된 여러 현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필자의 분명한 논지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것이 고신의 현상이긴 하지만, 그런 속에 우리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 것인가요? 고신의 정체성? 이번 사건의 발단이 그런 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계파 싸움의 관련하여 일어난 것인가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 것인가요?
세월네월님의 위의 글을 읽고 논지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과연 목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세월네월님의 위 글을 읽고 논지파악을 하지 못한다면 과연 목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매우 깊이있는 글입니다.문제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글입니다.
개혁주의 님께 말합니다. 위의 글을 한 논지로 표현을 해보기를 바랍니다. 최교수님은 어떤 글이든 전체를 대표하는 수정같이 맑고 고래 등의 심줄같이 두드러진 논지가 있게 마련이다, 고 하셨는데... 목사의 자격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부터 말씀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을 합니다. 저는 위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수님의 말씀처럼, 문제를 폭넓게 바라보게 하는 글이긴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뚜렷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고신의 문제 가운데 또 하나는 위 글을 읽고 동감하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위 글을 읽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분이 공존한다고 하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가지 여쭈어 봅시다. 부산장로회 행동의 명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고신의 정체성? 님의 말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조차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제게는 고신의 정체성을 내세워 상대(계혁파라고 하면 될까 싶은데...)를 공격하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순수성을 잃은 명분은 명분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고신의 정체성도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수단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세월네월님은, 그나마(!) 부산장로회의 행동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님의 속에도 이런 인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 진흙탕에 뒹굴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고신의 정체성 운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껏 리플 다시는데 형태상 굉장히 보수적이신 목사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성급한 모습을 보이시는지...
일부러 며칠 들어오지를 않앗습니다. 이런저런 논쟁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너무 잠잠하군요. 광주행님, 무엇이 그렇게 성급하다는 것인지요? 지난 번 글의 제목처럼 전 요즘 참 우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