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수라가 정말 중상을 당했다면 그놈들은 틀림없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
"만일 소의수라가 죽지 않으면 두 수라는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고 찾아올 겁니다. 또 만약 소의수라가 죽음을 당했다면 청의수라 혼자라도 찾아와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노부도 생각한 점이 있기 때문에 벌써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네. "
"황총교두요? 그럼 그분을 내세워 두 놈들이 나타나게 한 다음 제가 기회를 엿보아 없애 버리는 편이 어떻습니까?"
"아 ! 그건 노부도 한 번 해볼 만한 일이군. 그러나 악독한 도사놈을 먼저 없애버린 다음에 하세. "
동방야의 마음은 몹시 두근거렸다. 그는 가명의 생사를 막론하고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밤이 으슥할 때까지 술을 마신 뒤에야 연회가 끝나 동방야는 서원으로 돌아갔다.
그는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녀 홍작을 내보내고 역용(易容) 신공을 풀어 본래의 모습으로 침상에 누웠다.
무쌍보주와 함께 늙은 도사를 제거하는 일은 악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상관없을 듯했다.
그 일이 끝나면 흑응 황서천을 보 밖으로 내보내 뒤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가명의 원수를 갚기로 했다.
모든 일이 다 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관봉 부녀를 구출하는 것만 남는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에 그는 갑자기 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방야는 급히 역용 신공을 펼쳐 모습을 변경하여 객실로 나가 방문을 열었다.
"아니오 소협은 병기를 지니고 빨리 저를 따라 오십시오."
"예, 다름 아니라 보주님의 누이동생이란 아주머니가 또 빠져 나갔습니다. "
"밀실에서 그녀는 갑자기 발광했소. 보주께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려는 틈을 타서 번개같이 도망쳤소."
"아니, 높은 공력을 지니고 계신 보주께서도 그녀를 제압하지 못했소?"
"란고(蘭姑)께서 지니고 있는 독은 무척 악독하여 보주께서도 감히 저지하지 못하오."
"전대공자(田大公子)와 보중의 몇몇 고수들이 추격 중에 있소."
"소협은 독이 침투하지 않으니 그분을 제압해 주시기 바라오."
"곧 신호가 들어 올거요. 그리고 보주께서는 소협에게 우선 미안한 뜻을 전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겸손하신 말씀이오 보주께서 저를 각별히 사랑해 주시니 마땅히 해드려야 할 일이오."
동방야는 즉시 송문고정검을 지니고 철나한 악대와 함께 보 밖으로 나갔다.
막 성문 앞까지 가자 마침 한 무사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말을 너무 빨리 몰다가 갑자기 섰기 때문에 허공에 붕 떴다가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말 역시 기운이 진했는지 흰 거품을 내뿜으며 땅 위에 털썩 쓰러졌다.
"서쪽에서......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소(大小) 보주는 지금 바싹 추격 중입니다. "
"십 리 밖입니다. 도중에 사람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저는 걸음이 말보다 빠르니 총관께선 말을 타고 쫓아 오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쪽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철나한은 약간 멍청해진 채 급히 말을 몰고 뒤따라 갔다.
산으로 들어가야 하니 말을 타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말을 타지 않는다면 철나한과 함께 갈 필요도 없고 또 혼자 가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더구나 미친 사람의 행동은 종종 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마 그속에는 무슨 별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약간 고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을 타기보다는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산모퉁이에 이르니 그곳에는 과연 무쌍보의 한 무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동방야가 걸음을 멈추자 무사는 급히 앞으로 다가와 단정히 포권의 예를 갖추었다.
"방금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일행들이 서쪽 산으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
도중에 배치해 있는 무사들의 말대로 한동안 달리다 보니 날이 밝아오는 데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시 (辰時)와 사시 (巳時) 사이에 그는 이미 장룡곡 밖에 당도했다.
동방야는 의식적으로 곡 안으로 들어갔다. 계곡 끝머리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연못가에 두 사람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몸을 숨기고 자세히 바라보던 동방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중 한 사람은 백제성 본주묘에 은거했던 외팔이 백발 노인으로서 여전히 거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두 번이나 만난 적이 있는 백발 노파였다.
외팔 노인이 동방야의 독을 제거해 줄 당시 노인은 동방야의 목에 걸린 옥상을 발견하고 대번에 자기 모친의 이름을 알아 맞춘 적이 있다.
더구나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버렸던 일이 동방야의 머리에 떠올랐다.
또 백발 노파는 자기를 볼 때마다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동문일 수도 있고 부부지간일 수도 있다.
과거의 일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은 분명 동방야의 부모와 어떤 관계가 있다.
갑자기 외팔이 노인은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을 치켜 들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 천한 계집 년 ! 뭐라 해도 나는 네년을 죽이고 말겠다. "
그러자 노파는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난 지금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그를 꼭 찾아야 해 ! "
노파는 별안간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방야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의혹을 참으며 간신히 억눌렀다.
괴노인의 장(掌)은 노파의 머리 위 아슬아슬한 곳에서 돌연 멈추었다.
노인은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노파는 아직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이다. 반 년만 더 살게 해주겠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 둬라. 반 년이다. "
노파는 몸을 일으켜 혈방을 주시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바로 이때, 그림자들이 쏜살같이 계곡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바로 무쌍보의 총교두 흑응 황서천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하의 무사들이었다.
동방야는 막 몸을 나타내려고 했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다시 몸을 숨겼다.
흑응 황서천은 의형 가명을 해친 사람이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서천이 연못가로 다가가자 괴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모습을 본 황서천은 즉시 몸을 날려 괴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노부는 물어 보지 않았다. 무슨 교두인지 내가 알 게 뭐냐?"
지독한 모욕에 황서천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으나 간신히 참는 모양이었다.
"노인장께서는 혹시 당대의 신의(神醫)가 아니십니까?"
흑응 황서천은 옥관음의 미친 중상을 치료할 수 있는 신의를 찾는 직책을 맡았다.
"실은 본부에 계신 어떤 분이 미친 병에 걸렸습니......"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노인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싸늘하게 말을 가로챘다.
"네 녀석의 잔소리는 끝이 있느냐? 없느냐? 노부는 이만 실례해야겠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만약 노인장께서 그분을 치료해 주신다면 보주께서는 틀림없이 상을 내리실 겁니다. "
"으하하핫 ! 이 늙은이는 밥을 얻어먹는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
이때 동방야는 재빨리 청삼으로 바꿔 입고 역용 신공을 풀어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고는 장검을 뽑아 들고 검 집은 그대로 놔둔 채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괴노인 역시 크게 놀란 표정으로 동방야를 주시했으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이 입을 쫑긋거렸다.
황서천은 동방야의 모습을 똑똑히 보자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동방야는 칼날 같은 시선으로 분노에 가득차 황서천을 노려보았다.
"황서천 ! 네놈은 오늘 사람을 다치게 한 죄가를 지불해야 한다. "
동방야는 갑자기 몸을 날려 바람 소리와 함께 일 검을 공격했다.
많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황서천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동방야는 유령같이 바싹 따라가 두 사람의 간격을 조금도 넓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무사들도 장검을 빼어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여 이윽고 출수할 수 있는 범위에 접어들었다.
황서천은 장검을 비스듬히 치켜들고 상대방을 노려보다가 "이얏 !"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먼저 출수했다.
동시에 무사들도 틈을 이용하여 동방야의 혀를 찌르러 들어왔다.
즉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동방야의 검이 허공에 크게 원을 그렸다.
검과 검이 부딪쳐 불꽃이 튀는 가운데 절규가 울려 퍼졌다.
이미 네 명의 무사 가운데 두 명이 땅에 고꾸라져 목이 달아나 있었다. 검도 절단이 난 채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괴노인의 얼굴 근육에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바로 이 짧은 순간에 황서천은 손을 품속에 집어 넣었다.
동방야는 굉천뢰의 위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대갈일성과 함께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던 우주홍황(宇宙洪荒)의 초식을 펼쳐냈다.
즉시 무지개 같이 영롱한 검광이 동방야의 검에서 쏟아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쿵 ! "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황서천이 검을 떨어뜨리고 고목처럼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몸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서천이었다.
이 광경을 본 나머지 무사는 이미 혼이 달아나 버린 듯 부들부들 떨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동방야가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 두 무사는 힘없이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이놈들 ! 빨리 일어나서 꺼져라 ! 그리고 전모승에게 전해라, 이 청의수라는 먼저 흑응 황서천을 없애 경고해 주더라고 말이다."
두 무사는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도 모를 정도로 급히 일어나더니 꽁무니가 빠지라고 줄행랑을 놓았다.
동방야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검을 잡은 채 괴노인에게 읍을 했다.
괴노인은 몹시 격동했던 모양이었다. 입술을 한참 동안이나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놈 ! 너는 어디서 그런 절묘한 무공을 배웠느냐?"
"하지만 노부는 아직도 손만 들면 네놈을 죽일 수 있어 ! "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를 죽이려는 것 뿐이야. "
"이놈아 ! 이 세상에서 네놈을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이유다"
"노선배님은 바로 그 옥상의 주인과 원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까?"
"노선배님은 후배의 독을 제거해 주신 은호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무인이기 때문에 원한과 은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
"이놈아! 그럼 내가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
"하룻강아지 같은 놈, 너는 반격할 여지도 없을 게다."
동방야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 상대방의 말이 거만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금껏 습득한 무공으로도 반격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방야의 머리 속에는 즉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상대방은 자기가 중독되었던 독을 제거해 주었으니 분명 독을 잘 사용하리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방야는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급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제가 두 가지 일을 여쭈어 봐도 상관없습니까?"
"전에 노선배님께서 저의 독상을 치료해 주신 뒤로 저는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체질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건 선배님의 덕택입니까?"
"맞았다. 노부가 망령에 걸려서 네놈에게 그런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
"이놈아! 너무 잘난 체하지 마라, 네가 다른 인물들이 사용하는 독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도 노부가 사용하는 독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동방야는 내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알고 있다면 다행이다. 또 묻고 싶은 점이 있느냐?"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들과 선배님과는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괴노인은 늙은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동방야의 마음은 갑자기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