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영화 욕망 데뷔.
흥행실패. 그러나 연예계에 정윤희의 존재를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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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하고 상큼한 외모로 데뷔와 동시에 해태제과 전속 모델로 발탁.
광고스타 1호의 탄생. 1975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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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말 쇼 엠시. 엠시와 광고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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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청실홍실 시청률 70%
드라마 대박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름
이후 1979년 야!곰례야 시청률 60%
최우수여자연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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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나는 77번 아가씨 개봉.
21만 관객 동원 70년대 흥행작 10위.
1978년 꽃순이를 아시나요 20만 관객동원. 연이은 히트.
영화계 블루칩이 됨.
1979년 트로이카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구도 완벽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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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면서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의 트로이카 체제는 명성으로는
화려했지만 점점 영화 흥행이 부진해지는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정윤희는 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
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
81년 사랑하는 사람아로 백상 여우주연상 수상
사랑하는 사람아는 영화관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이후 티비 방영으로 사랑하는 사람아 신드롬 정윤희 신드롬을 만들어 냅니다. 첫 방영이후로 명절이 되면 이 영화는 꼭 방영을 했었죠. 한국영화 특선으로.
이후 뻐꾸기와 앵무새는 일본으로 수출 되어 일본내에서 정윤희 바람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는 대만에 수출 되어 대만과 동남아시아에 정윤희 붐을 일으키죠. 정윤희는 아시아의 연인이 되고 정윤희로 인해 한국영화 즉 체류탄성 멜로물의 영화들은 아시아권으로 수출되고 아시아권은 한국영화 수입을 1순위로 꼽기 시작합니다. 정윤희가 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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