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에 할 수 없이 묵호종고로 전학을 왔다.
3학년 2학기 때는 전학이 될 수가 없었는데,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의 실력(?)으로 묵호로 오게 되었다.
오자마자 먼 친척뻘의 담인 선생님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내가 머믈렀던 방이 선생님 바로 앞이었으니 아버지나 선생님 생각에는, 감히 내가 쉽게 설치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라는 짐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의 생각을 여지없이 부수어 버렸다.
전학 오던 날부터, 내 짝이 된 녀석과 묵호역 앞의 포장마차에서 교련복을 입고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교실에 들어와서 술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는 아이들을 두둘겨 패주었다.
다음 날, 그 사실이 체육 선생 귀에 들어가서, 교무실에서 빠따를 숨이 넘어 갈 정도로 맞았다.
내가 다녔던 강릉의 학교는 그렇게 무식하게는 매질을 하지 않았다. 강릉의 학교는 그렇게 매질을 할 필요도 없는 모범생들 투성이었으니까.
그것을 핑개로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씨름부 아이와 합의가 되어 녀석의 자취방에서 살았다.
저녁이면 발한 삼거리가 나의 무대였다. 묵호역 앞은 카바이트 불빛이 환한 포장마차가 수십개였다.
수 차례의 싸움 끝에 운 좋게 겨우 승리하여, 나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불이 타서 사라진 묵호극장 앞은 창녀들의 본거지였다. 사문재 넘어가기 전의 버스 터미널도 놀기에는 그만이었다.
물론 검은 석탄 가루가 날리던 묵호역 굴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친구 하나가 지배인으로 있었던 고고장은 수시로 돈 한푼 없이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를 만났다.
“동생 대학 보내려고요.....”
그녀의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그 한 마디를, 나는 여러 글 속에서 몇 번이고 소개했다.
나는 죽어도 대학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나는 마음만 먹으면 서울의 어느 대학이라도 갈 수 있는 성적과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 한 마디는 묵호에 있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를 치고 서울 망우리 이모집으로 도망을 와서 종로 2가 제일 학원에 등록을 한 것은 오로지 그녀 때문이었다.
그리고 20 년이 흘러 묵호에 다시 돌아왔다.
장삿꾼이 되어서.
장삿꾼이 되어서 묵호에 돌아온 것은, 묵호를 떠나서 20 년 세월 동안 내가 무엇을 했던 것과는 별개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호는 그렇게 돌아와야 맞는 것이다. 내가 만약 동해시청 공무원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대게를 팔면서 어판장에서 어민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그렇게 편하고 행복 할 수 없었다.
내가 돌아와야 할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발한 삼거리의 그녀가 있었던 묵호극장 주변과 창녀촌은 빈집과 폐가가 수두룩 했다.
비록 그녀는 가고 없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다정스럽게 다가왔다. 발한 삼거리는.
사춘기 시절 방황하던 나에게 짜릿한 행복을 주었던 묵호의 거리가 다시 나를 품어 주었다.
일본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 나는 항상 묵호항의 오징어를 생각했다.
오징어가 찍어낸 돈들이 묵호의 거리에 낙옆처럼 풀어져 날아가던 모습들은 나의 경제학 공부를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총생산 및 소득의 분배를 연구하는 微視經濟學과 경제성장· 물가안정· 완전고용을 목표로 하는 巨視經濟學의 보수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은 묵호항의 경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칼 맑스의 ‘자본론’과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 여러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경대학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내가 사춘기 시절 묵호에서 신천지를 보았듯이.
이제 나는 묵호의 학자가 되기로 했다. 묵호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기록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내가 공부한 자본주의 경제학이 전혀 쓸데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
묵호에 살면서 나는 묵호에 살던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죄를 진 것 같았다.
그것은 창녀촌에서의 그녀의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한국형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동문산 자락에 무허가 집을 살면서, 기가 막힌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동해 바다 만큼 아름다운 일이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이 틀렸다는 것은 묵호가 말해주었다.
나는 묵호에서 죽을 때까지 살면서 묵호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남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