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 설 때 보인다
루카치에게 객관적 현실이란 외과의사처럼 세계를 그저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사회는 이미 특정한 계급에 의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모습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지배계급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루카치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드러낸다는 것은 현실세계에 은폐되어 있는 본래의 모습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참된 모습은 지배계급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눈으로 볼 경우에 드러난다. 이 다른 시각이란 다름 아닌 사회의 피지배계급의 시각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은 흔히 말하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피지배계급의 시각에 접근할 때 그 참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점에서 루카치의 사상은 니체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와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니체의 관점주의에 내재한 핵심은 진리란 객관적이고 절대불변적인 것이 아니며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루카치의 사상은 니체의 관점주의와 명확하게 구별된다. 니체가 모든 진리를 일종의 만들어진 허구로 보았다면 루카치는 어떤 특정한 관점에 서게 될 때 절대적인 진리가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볼 수 있는 관점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이다. 세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당파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시각은 이미 지배계급의 시각일 뿐이다.
당파성에 대한 루카치의 생각은 어떤 점에서 보자면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생각과 충돌하며 러시아의 구성주의자들의 생각과도 상충한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이란 곧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한 과학적 세계관을 의미하며 이는 곧 자연변증법이라는 과학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편 긴즈부르크(Moisei Ginzburg, 1892~1946), 리시츠키, 베르토프(Dziga Vertov, 1896~1954) 등 러시아의 구성주의자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이란 곧 과학적 세계관으로서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관념도 철저하게 배제된 현실 그 자체를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파성을 강조한 루카치의 생각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은 당파성을 초월한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엥겔스나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생각과 상반된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루카치의 사실주의는 흔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모든 예술적 시도를 퇴폐적이며 부르주아지 예술이라고 간주하여 폐지한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과 공통된 부분이 많다. 물론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사실주의 이론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루카치의 사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회를 미화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던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분석하고 드러내고자 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곧 소비에트 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현실적 모순을 은폐하는 지배계급의 세계관으로서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지 세계관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 설 때 보인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