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수월관음도 국립중앙박물관 품으로
0가라쓰(唐津) 카가미
신사(鏡神社)소재 고려 수월관음도의 유래(이영).pdf
1. 국립중앙박물관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함에 찍힌 도쿠가와 문양의 비밀은?
고려 불화의 백미로 꼽히는 ‘水月觀音圖’ 한 점이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마침내 고국의 품에 안겼다. 돌아온 수월관음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전 세계에 단 46점뿐. 5점이 국내에 있지만 리움미술관과 호림박물관 등 모두 사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만 소장하고 있던 터라 이번처럼 국립박물관이 ‘수월관음도’를 소장하고 관리하게 된 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뜻있는 기업인의 문화재 사랑으로 '환수'
‘수월관음도’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한 기업인의 문화재 사랑 덕분이었다.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윤 회장은 올해 초 일본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25억 원에 이 작품을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윤 회장은 “7년 전 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에 들렀을 때 해설사가 수월관음도를 설명하며 ‘한국 국립박물관에는 없다’고 말해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하며 ‘수월관음도’와의 운명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을 풀어냈다.
‘수월관음도’ 기증식. 기증한 한국콜마홀딩스 윤동환 회장이 참석했다.
‘수월관음도’ 700년의 세월을 건너오다
수월관음도는 불경인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거처와 형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덕이 있는 고승을 찾아다니던 선재동자가 달빛이 비치는 보타락가산의 바위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찾아뵙는 장면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기증된 수월관음도는 14세기 중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화면 크기는 세로 91cm, 가로 43cm로 다른 수월관음도에 비해 작은 편이다. 공개된 수월관음도는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박락과 훼손이 진행됐다.
하지만 제작한 지 약 700년이 시간이 흘렀다는 점을 감안해서 보면, 화면의 중요한 부분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가치가 크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특히 적외선 사진을 통해 보면 관음보살의 온화한 미소와 깨달음을 구하는 선재동자의 모습 등 그림이 본래 간직하고 있는 고려 불화의 특징들을 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보존 처리에 앞서 11월 13일까지 상설전시실 2층 불교회화실에서 ‘수월관음도’를 일반에 공개한다.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모습을 적외선으로 보면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 보관함에 찍힌 도쿠가와 가문 문양의 비밀은?
특히 이 그림의 족자와 보관함에는 일본에 유입된 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묵서와 문양이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족자에는 “중국 장사공(張思恭)의 그림”이라는 문구와 “세이간지(誓願寺, 아이치현의 사찰로 추정) 보물로 영옹(英翁)이 (족자) 보수에 기여했다”는 문장이 나오고, 보관함에는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이 있는 문양이 찍혀 있다. '미쓰바 아오이(三つ葉葵)’ 紋章 세 잎의 접시꽃이 그려진 문양이다.
보관함에 이런 문양이 찍혀 있는 이유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정명희 학예연구관은 “도쿠가와 가문이 이 그림을 소장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림을 소장했던 사찰을 도쿠가와 가문이 후원했을 가능성 등 여러 추정이 가능하다”며 “향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또 원나라의 불화가(佛畵家)인 장사공이 언급된 건 1970년대까지는 일본에서 고려불화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어 좋은 그림은 모두 원나라 불화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려불화의 소장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도쿠가와 가문의 문양이 찍힌 ‘수월관음도’ 보관함
문화재 제자리 찾기 나선 기업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문화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파악한 해외 유출 우리 문화재는 현재 16만 여 점. 하지만 복잡한 외교적 협상에다, 정부 예산도 충분치 않아 환수 자체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해외 반출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기업들의 ‘기증’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예로 지난 2014년 국내로 돌아온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상자인 ‘고려나전경함’을 들 수 있다. 이 문화재는 하나금융그룹 김정태 회장이 주도하는 국립중앙박물관회가 일본에서 구입해 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또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 역시 한 외국계 게임 회사의 기금 지원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물 구입비가 턱없이 부족한 박물관이 선뜻 엄두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뜻있는 기업이나 개인의 기증이 절실해지는 이유이다.
이 같은 기업들의 문화재 기증 활동에 대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국제협력실 강임산 팀장은 “문화재 반환에 대한 이력, ‘어떤 기업이 참여했다’ 라는 부분들이 문화재의 반환과 함께 계속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해외로 유출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비싼 돈을 주고 다시 구입해 올 수밖에 없는 현실은 다소 씁쓸하다. 정부가 문화재 유출 경로를 밝히고 불법성을 입증해야 하는 등 어려운 과정이지만 외교적 노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기업들이 나서서 문화재를 구입해 기증하는 사회적 기부 방식은 가장 현실적인 문화재 환수 운동이 될 수 있다. 수월관음도를 귀향시킨 윤 회장의 자존심이 다른 기업들도 해외 문화재 환수에 동참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민경 기자 mkdream@kbs.co.kr 입력 2016.10.18 (18:51)
2. 水月觀音圖(리움)
고려 후기, 비단에 채색, 86×53cm, 리움미술관 소장, 보물 926호.
관음보살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중생 앞에 나타나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보살이다. 가로 53㎝, 세로 86㎝ 크기의 이 수월관음도에는 관음보살이 사는 화려한 정토(淨土)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중앙에 표현한 관음보살은 바위에 왼쪽으로 비스듬히 걸터앉아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은 풍만한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며, 가는 눈과 작은 입 등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인상이 풍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높이 쓰고, 몸에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옷과 화려한 팔찌·목걸이 등을 표현하였다. 등 뒤로는 한 쌍의 푸른 대나무가 보이고 바위 끝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이 있으며 그 주위를 둥근 광배(光背)가 둘러싸고 있다. 관음의 발 아래에는 붉고 흰 산호초와 연꽃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다.
고려불화는 전 세계에 80여 점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4∼5점만이 전한다. 이 수월관음도는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우아한 종교적인 아름다움과 격식을 지닌 작품으로 고려불화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전문설명]
水月觀音菩薩像은 觀音菩薩의 淨土인 補陀落迦淨土의 特徵을 잘 묘사한 作品으로 14세기 高麗佛畵의 特徵을 보여주고 있다.
中央에 菩薩을, 左下에 近景의 童子를, 右側에 遠景의 대나무와 奇岩怪石을 묘사해 對角線의 構圖를 취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右側에 편재된 느낌을 주고 있으나 대칭으로 굴곡이 심한 바위와 淨甁이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菩薩의 背景은 잔잔한 바다와 頭光과 身光이 있으며 어깨 뒤로는 奇岩怪石과 곧게 솟아있는 대나무 1쌍이 있고 대칭되는 곳에는 수반 위에 버들가지를 꽂은 淨甁이 있다.
菩薩의 발 아래에는 對角線으로 表現된 바위돌과 赤․白色의 산호초, 활짝 핀 연꽃, 막 피어오르려는 연꽃과 그 옆에 奇花가 활짝 피어있다.
菩薩의 전체 形象은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앉아 왼손은 바위에 기대어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내려져 있으며 念珠를 들고 있다.
오른발은 왼발 위에 가볍게 올려져 있어 매우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수놓아진 화려한 寶冠을 높게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W字 모양이다.
沙羅는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며 투명하여 天衣가 환하게 보인다. 天衣는 蓮花文과 龜甲文을 조화 있게 수놓았으며 天衣의 치레걸이와 팔찌, 목걸이 등은 菩薩의 形相을 더욱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가늘고 긴 눈, 작고 도톰한 입, 풍만한 어깨와 가슴, 가늘고 긴 손가락 등은 근엄하면서도 일면 부드러운 면을 나타내기도 한다.
左下에는 童子가 合掌을 하고 菩薩에게 法을 청하고 있으나 表現이 조잡한 느낌을 준다.
14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83.4×34.7cm, 호암미술관 소장
화면의 양 옆이 많이 잘려졌고, 둥근 光背의 위쪽은 덧칠되는 등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水月觀音圖에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대나무와 善財童子, 淨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적외선 촬영을 해본 결과 드러난 원광과 그 위의 암석층은, 이 그림도 원래 이들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수월관음은 물가 암석 위에 吉祥草를 깔고 앉아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왼발은 내린 半跏形으로, 念珠를 감고 있는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엄지손가락을 내뻗었다. 化佛을 안치한 寶冠으로부터 하얗고 투명한 紗羅가 흘러내렸는데, 格子文이나 麻葉文이 그려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S'자 모양의 무늬가 나타나 있다.
치마에는 龜甲文의 바탕에 연꽃과 연잎이 十字모양으로 교차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발과 손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전체적인 모습이 기품 있고 편안하다.
4.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 후기, 비단에 채색, 100.5×52.5cm, 우학문화재단 소장. 보물 1286호.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그가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이 오른발을 왼쪽무릎에 올린 반가좌 자세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으로, <화엄경>의 내용 중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관음보살의 등 뒤로는 한 쌍의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고, 앞쪽으로는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이 있으며 주위에 금가루로 원형을 그려 놓았다.
윤곽선과 세부 묘사는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베일의 바탕과 주름선은 백색으로 그린 다음 금가루에 아교를 섞은 금니로 겹쳐 그렸고 안쪽에는 고려문양의 특징인 연꽃덩쿨무늬를 원안에 넣었다. 입고 있는 치마는 붉은색을 칠하고 백색으로 거북등껍질 문양을 그린 다음 그 위에 먹선으로 덧그려 문양이 뚜렷하다.
이 그림은 1994년에서 1996년까지 보수작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은 상태로 색채가 매우 양호하다. 전체적으로 안정되었고 고려 불화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수월 관음도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섬세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일반정보]
이 그림은 근년(1994. 2~1996. 10)의 수복작업(修復作業)을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다시 찾았으며 바탕 비단과 안료(顔料)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관음보살은 치마를 입고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寶冠)을 썼으며 보관에서부터 전신을 감싸는 베일을 걸치고 있다.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몸을 약간 틀어 오른쪽을 향한 채 바위 위에 앉아 있다. 관음보살의 앞쪽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등 뒤로는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으며, 화면을 향하여 왼쪽 아래 구석에는 허리를 굽혀 합장한 자세의 선재동자(善材童子)가 배치되어 있다.
이와같은 화면의 구성요소와 자세는 14세기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상과 공통되는 것으로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윤곽과 세부의 묘선(描線)은 주(朱)로 긋고, 그 선을 따라 아주 엷게 다시 주(朱)로 중복하여 그어 나타내었으며 베일은 바탕무늬인 마엽문(麻葉文)을 백색안료로 그리고, 윤곽과 주름선은 백색안료로 그린 다음 그 선을 따라 금니로 겹쳐 그었는데, 다시 그 이중의 선을 따라 백색안료로 엷게 바림질을 하여 질감을 나타내려 하였다. 베일에는 직경 약 2.3cm 정도의 고려불화 특유의 연화당초원문(蓮花唐草圓紋)을 금니로 그려 넣었다.
치마는 전면에 주(朱)를 칠하고 백색안료로 귀갑문을 그렸는데 그 위에 다시 먹선을 그어 형상을 뚜렷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 수월관음도의 표현과 기법을 종합하여 보면, 전체적인 형상이 이지러짐 없이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고려불화의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즉 섬세한 묘선(描線), 세심한 색채가 조화를 이루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의 특징은 일본 보수원(寶壽院)소장의 수월관음도와 매우 유사하여 도상의 계승, 또는 전통도상의 수용이란 점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며, 그러면서도 세부의 표현에서는 기존의 작품과 차별성을 두고자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전형적인 도상의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도상의 창출을 시도한 좋은 예로 당시 수월관음도의 양식 특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5.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 후기, 비단에 채색, 106.2×54.8cm,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는 비록 조성연대와 작가가 명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변․퇴색과 수리 및 덧그린 흔적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 소재의 1323년 작 서구방 필 수월관음도를 위시한 고려시대 14세기 관세음보살도들과 비교해 보면 마치 한 본을 사용하기라도 한 듯 구도와 인물의 형태가 거의 같고, 고려불화의 특징적인 화사한 색채와 세련되고 우아한 선을 구사한 인물 묘사 등 세부묘사에 있어서도 서로 유사한 점이 엿보여 예술성 높은 동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 구성이 충실하며 표현기법 역시 고려불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내에는 제대로 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가 2∼3점에 불과하다는 자료의 희소성, 나아가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두 점의 수월관음도와 비교하여도 질적인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6. 고려 수월관음도(高麗 水月觀音圖)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103.5×53cm, 호림박물관 소장. 보물 1903호.
고려 수월관음도의 도설내용은 <大方廣佛華嚴經> ‘入法界品’에 근거하며,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가는 남방순례 중 28번째 관음보살을 방문하여 보살도는 묻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이러한 경전의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인데, 그림은 관음보살과 선재동자라는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는 보타락가산 금강암좌에 반가좌 앉은 관음보살을 압도적인 크기로 배치하였고, 우측 하단에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합장하며 공손히 보살도를 묻는 선재동자를 조그맣게 배치하여 두 주인공 사이의 심오한 공간감을 나타내었다.
이외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는 청죽․바위․정병 등 경물의 표현과 배치 등은 고려 후기 수월관음도상의 전형을 보여주며, 존상의 형태와 구도 등에서도 고려 불화답게 빈틈없는 짜임새와 균형감을 보여준다.
선묘 역시 굵고 가는 다양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물 흐르듯 유려한 선묘를 보여주고,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을 전신에 걸쳐 시문하였음에도 고귀한 품격을 놓치지 않았으며, 붉은색과 백색, 금색 등 고급스러운 색들이 상호 조화를 이루며 요란하지 않은 세련된 아름다움을 표출하였다.
이 작품은 비록 박락되고 손상된 부위가 후대에 수리되었지만, 고려 후기 수준 높은 불교회화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
관음보살은 풍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정연하게 표현되었고, 턱에서부터 가슴까지 이어지는 삼도에는 바림을 하여 볼륨감이 있다. 가슴과 상복부에도 같은 방식으로 바림하였다.
양손에는 흰 염주를 쥐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염주는 오른손에 들고 밑으로 늘어뜨린 모습으로 그리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양팔을 의자에 앉은 자세로 양쪽에 놓고 염주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보관부터 발 아래까지 내려온 흰색의 사라는 탈락이 많아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위에 표현된 당초원문을 통해 사라를 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붉은색의 치마에는 선묘로 된 귀갑문 위에 연화하엽문을 비교적 크게 그렸다.
하단에는 기암괴석과 물결 위에 산호를 배치하였다. 선재동자는 합장을 한 채 관음보살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몸체에 비해 팔, 다리가 작게 표현되었으며 손목 장식을 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불교전통문화강좌 - 3
高麗의 水月觀音圖
정우택 (경주대 교수)
현재 고려 수월관음도는 35점이 알려져 있다(고려시대 수월관음도 현황 참조). 이들 가운데 명문 등에 의하여 작품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1310년의 경신사본(鏡神社本)과 1323년의 천옥박고관본(泉屋博古館本) 두 점 뿐으로 14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이다.
그 밖의 작품들도 대덕사Ⅰ본(大德寺Ⅰ本)과 장곡사본(長谷寺本), 그리고 대화문화관본(大和文華館本), 천초사본(淺草寺本) 정도가 13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14세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와 같은 제작시기의 편협성은 현존 고려불화가 거의 대부분 14세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수월관음도만의 특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현편 현존 수월관음도가 14세기에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실제적인 제작은 훨씬 이전부터, 때로는 대량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권18의 ‘화국원공찬신화성수월관음(和國原公讚新畵成水月觀音)’ 이 찬제(讚題)는 의천(義天) 생시인 11세기 후반의 수월관음도 제작을 시사하고 있고, 毅宗(1146-1170) 때는 동불 40구와 함께 관음도 40폭을 그려 봉안하였다 한다.
이들 기록의 관음도가 현재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진채색(眞彩色)의 그림인가 아닌가에 대하여는 기록의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려 초기부터 수월관음도가 그려졌고, 때로는 대량으로 제작되었음은 확실한 것 같다.
수월관음도상은 장언원(張彦遠)의 <歷代名畵記>에 의하면 주방(周昉)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이에 관하여는 최근 부정적 견해가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현재의 문헌 및 작품의 영세성 때문에 더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전히 주방 창안설이 통설로 되어 있다.
고려의 수월관음도상도 이러한 주방 창안의 수월관음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방의 작품이 전해지는 것이 없고 현존의 고려 수월관음도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14세기에 집중되어있을 뿐 고려전기의 양상을 알 수 없어 그러한 주장은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현존 작례를 통하여 살펴보면 고려 수월관음도의 도상과 그 구성요소는 비록 제작시기에 많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돈황(敦煌)지역의 圖像과 유사성이 많은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사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양자간에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양자간의 상위(相違)는 시기적, 풍토적 또는 신앙형태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어찌 되었든 수월관음도상의 창출 및 전개 또는 수용의 문제에 대하여는 간략하게 언급할 과제가 아닐뿐더러 현존 자료의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고 다음의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圖像의 構成要素
현존하는 35점의 고려 수월관음도의 도상은 그다지 다양하지 못한 편으로 <表>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1323년의 천옥박고관본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우측을 향하여 반가좌한 모습을 취하고 있고, 정병․대나무․선재동자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 이외에는 장락사본(長樂寺本) 등과 같이 왼쪽을 향하여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 그리고 정면을 향하고 앉아 있는 대화문화관본, 공산사본(功山寺本)이 있고, 또한 동광사본(東光寺本), 천초사본과 같은 입상이 있다. 그러나 그들 숫자는 매우 적고 역시 우향의 반가좌한 모습의 관음상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러한 형식과 화면구성이 고려 14세기 수월관음도상의 주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면의 구성요소는 관음보살도의 형식과 마찬가지로 다양하지 않고 대동소이하다. 즉, 관음보살 이외에 선재동자, 정병과 버드나무가지, 그리고 바위와 대나무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화면이 잘려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장곡사본처럼 좌상이면서 선재동자가 묘사되지 않은 예가 있으며 노산사본(盧山寺本), 장락사본처럼 ‘水月’의 ‘月’을 의미하는 달을 상정하여 계수나무와 토끼를 그려넣은 경우도 있다. 또한 담산신사본(談山神社本), 정가당문고미술관본(靜嘉堂文庫美術館本)처럼 <法華經> ‘普門品’의 칠난구제(七難救濟)의 장면을 묘사한 예가 있고, 대덕사Ⅰ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본과 같이 공물과 持物을 든 인물군과 鬼形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좀더 세부의 형상을 살펴보면 각 그림들에서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선재동자의 자세는 무릎을 약간 굽히고 합장한 경우[양수사본(養壽寺本), 등정제성회유린관본(藤井齊成會有隣館本), 보수원본(寶壽院本) 등]가 가장 많고 이 밖에도 천옥박고관본(1323년), 성중래영사본(聖衆來迎寺本) 등과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경우, 그리고 MOA 미술관본처럼 엎드려 절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경우도 있다. 이 밖에도 대화문화관본, 대덕사Ⅰ본처럼 蓮葉에 올라탄 모습의 선재동자도 볼 수 있다.
세부의 형상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병과 버들가지이다. 정병은 모든 수월관음도에 묘사되어 있고 전체적인 윤곽 역시 1310년의 경신사본, 1323년의 천옥박고관본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둥이가 달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湖巖美術館本, 보수원본 등과 같이 주둥이가 없는 단순한 모습의 정병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병을 받치고 있는 발(鉢)도 1310년의 경신사본을 비롯하여 대덕사Ⅱ본 등과 같이 생략하여 묘사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버들가지는 정병에 꽂혀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 통례이나 무명(無銘)인 천옥박고관본, 승천사본(承天寺本), 그리고 대덕사Ⅱ본의 경우는 관음보살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 경우도 있다.
한편, 고려와 돈황지역의 수월관음도상의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고려의 수월관음도는 버들가지가 모두 정병에 꽂혀있을 뿐 돈황지역 도상에서와 같이 손에 든 경우는 한 점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차이점은 곧 고려 수월관음도상의 연원을 돈황지역의 도상에 둘 수 없다는 하나의 증거로까지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가 발표되기 이전에 고려 수월관음도에도 버들가지를 손에 든 경우가 이미 세 점이나 존재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따라서 이들의 도상을 포함하여 그 연원의 문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表現과 技法
고려 수월관음도의 표현과 기법은 역시 화면의 구성요소와 마찬가지로 다양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각각의 작품들은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우선 얼굴을 포함한 肉身部에는 1310년 경신사본, 1323년 천옥박고관본 등과 같이 金泥를 칠하여 표현한 경우와 대덕사Ⅰ본, 보수원본 등과 같이 살색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한 경우가 있는데, 숫적으로는 후자의 경우가 약간 많다.
그러나 육신부 표현의 차이는 제작시기를 엿볼 수 있는 요인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畵質을 결정짓는 요소라고도 할 수 없어 관견(管見)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다. 한편, 도상학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1350년 제작된 친왕원(親王院)의 彌勒下生經變相圖 또는 계림사(鷄林寺)의 阿彌陀三尊圖와 같이 여래상이면서 육신부를 금니로 표현한 경우가 적기는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이는 고려불화 여래상 표현의 통례를 벗어난 것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가 화풍상 14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되었거나 또는 앞선 도상을 모사한 그림들이다. 따라서 현존 작품만을 통하여 볼 때, 여래상 육신부를 금니로 표현하는 것은 수월관음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려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은 모두 寶冠에서부터 전신을 덮듯이 베일을 쓰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베일은 기본적으로 올의 짜임새이긴 하지만 바탕무늬는 마엽문(麻葉文)이며, 그 위에 다시 蓮華唐草文 등 화원문(花圓文)을 그려 넣어 표현하였다.
그러나 1310년의 경신사본처럼 베일의 올 짜임새가 무늬를 이루지 않았으며, 그 위에 雲鳳文을 그려 넣은 경우도 있는데, 이처럼 화원문 대신에 운봉문을 사용한 경우는 이밖에도 등정제성회유린관본, 대덕사Ⅰ본 등과 같이 몇 점 전하고 있다. 베일의 표현기법은 공통적으로 윤곽 및 주름 그리고 마엽문은 백색안료를 사용하였으며, 많지는 않지만 윤곽과 주름선을 금니를 중복하여 그어 나타낸 경우도 있다. 베일에 표현된 화원문은 금니 또는 백색안료를 사용하였으며 운봉문은 모두 금니로 묘사하였다.
관음보살의 하의는 치마와 같은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바탕 전면에는 귀갑문이, 그 위에 큼지막한 좌우대칭인 타원형의 연화문을 몇 개 그려 넣고 있으며, 치마 가장자리인 깃에는 모란당초문이 묘사되어있다.
한편, 성중래영사본, MOA박물관본, 대화문화관본, 장곡사본과 같이 바탕무늬인 귀갑문을 생략한 작품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치마의 문양은 공통적으로 원화문을 사용하고 있다.
치마의 바탕색은 색조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주(朱)를 사용하였으며, 귀갑문은 백색안료, 연화문은 주, 군청, 녹청으로 묘사하였다. 주름선은 먹선 위에 금니를 중복하여 그어 나타낸 경우가 많으나 몇몇 작품에서는 먹선을 생략하기도 하였다. 치마 단은 먼저 황토색 안료로 전면을 칠하고 보상당초문의 형상과 세부를 먹선과 금니로 묘사한 다음, 바탕이 되는 빈 공간을 백색안료로 채우는 기법을 각 작품에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밖에 수월관음도의 화면구성요소인 정병, 대나무, 바위 등의 표현과 기법은 역시 앞서 살펴 본 베일, 치마와 마찬가지로 각 작품간에 세부의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인정될 뿐 기본적으로 거의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지극히 개설적이기는 하였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고려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지적하면, 우선, 도상의 면에서 단조롭다는 것이다.
즉 도상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만남에 관심을 두고 이루어졌고, 다른 요소들은 관념적, 통례적 범주에 따르고 있어 색이 무시되었을 경우, 얼핏 보면 작품 서로간에 구별이 안될 만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이 주제를 특히 강조하려는 경향, 즉 '주제의 극대화'는 고려불화의 도상상의 특징으로 지적되어 온 것으로, 수월관음도 역시 전통의 흐름 속에서 형성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표현과 기법적 특징을 지적하면, 각각의 작품들은 전체 또는 세부에 있어 고졸(攷拙)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전통의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표현 영역이 비록 극히 제한되어 있기는 하나 특히 세부의 표현에서는 작가 나름대로 독자성을 추구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즉 고려의 수월관음도는 다른 도상의 그림들과는 달리 ‘관음보살’이라는 성격에 어울리는 지고한 아름다움의 표출을 전통 속에서 추구하면서도 도상의 내용과 형식을 끝까지 고수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高麗時代 水月觀音圖 現況
日本 鏡神社 419.5×254.2 半跏坐, 左向 1310年
日本 泉屋博古館 165.5×101.5 半跏坐, 右向 1323年
日本 泉屋博古館 115.2×54.9 ″
日本 大德寺(Ⅰ) 227.9×135.8 ″
日本 大德寺(Ⅱ) 154.3×84.7 ″
日本 大德寺(Ⅲ) 129.6×63.8 ″
日本 藤井齊成會有隣館 105.5×54.3 ″
日本 聖衆來迎寺 145.5×82.7 ″
日本 談山神社 109.5×75.8 ″
日本 長樂寺 119.0×63.5 ″德島縣
日本 養壽寺 101.0×56.0 ″
日本 盧山寺 106.0×51.3 ″
日本 寶壽院 166.4×88.8 ″
日本 睿福寺 99.9×50.7 ″
日本 靜嘉堂文庫 美術館 110.0×59.2 ″
日本 承天寺 108.5×57.1 ″
日本 MOA美術館 99.0×46.2 ″
日本 奈良 縣立美術館 105.3×50.5 ″
日本 太山寺 109.2×56.7 半跏坐, 右向
日本 個人 106.6×48.6 ″願成寺 舊藏
日本 長樂寺 152.3×86.5 坐像, 左向 岡山縣
日本 個人 143.8×77.2 ″ 神戶市
日本 長谷寺 99.0×52.5 ″
日本 功山寺 146.9×85.9 坐像, 正面向
日本 大和文華館 100.4×49.6 ″
日本 東光寺 110.5×53.7 立像, 正面向
日本 淺草寺 144.0×62.6 立像, 右向 慧虛筆
美國 포그美術館 158.3×82.1 半跏坐, 右向
美國메트로폴리탄美術館 113.7×55.3 ″
美國 후리어美術館 98.4×47.8 ″
獨逸 쾰른 東洋美術館 98.0×55.0 ″
프랑스 기메美術館 105.0×58.0 ″
韓國 湖巖美術館 85.0×53.0 ″
韓國 湖巖美術館 83.4×35.7 ″
韓國 李鶴 100.5×52.5 ″
* 2000년 이전에 작성된 통계. 현재는 46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