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해얄지 알 수가 없단 말야. 글쎄, 아버지는 소여물하려고 뒷산 언덕이나 산자락으로 꼴을 베러 가시면 항상 그 칡잎에 한웅큼씩 산딸기를 따서 꼴을 잔뜩 얹은 지게 위에 올려놓고 오셨단 말이야. 그럴 때면 아버지의 바짓자락은 항상 젖어 있었어. 왜냐하면 늘 새벽이슬이 걷히기도 전에 산으로 가셨으니까. 얼마나 부지런하셨는지 말이야. 왜, 너도 기억나지? 아이고 우리 성민이 깼다. 잠깐만…”
백일을 지나지 않은 아기의 울음소리. 무선 전화기를 들고 거실에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언니의 빠른 발걸음 소리. 달가닥, 수화기를 내려놓고 ‘어, 우리 성민 왕자님 깨나셨어?’ 하며 아기를 얼르는 여섯 째, 수아언니의 새살거리는 목소리. 칭얼대는 아기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다시 수화기를 드는 소리, 달가닥. “됐다, 얘. 아침에 일어나면 지 목청 힘껏 우렁차게 운다. 참, 얘도 지 외할아버지 닮아서 새벽잠이 없다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이 안 써진다 말야. 아버지가 안마당으로 들어와서 대문께에 지게를 세우시고는 그 지게 위에서 딸기를 내려서… 내가 앉은 마루 저만치 놓아 두시는 거야. 먹어라 한마디하시면 좀 좋니. 얼마나 무뚝뚝하신지 일절 그런 말씀이 없으셨어. 호호, 그래도 난 그 마음 다 알지. 난 얼른 주어와서는 낼름 혼자 다 먹어 치우고는 했다. 그런 때, 아버지의 그 굵고, 풀뿌리를 야무지게 잡으시느라 손톱에는 까만 흙이 박혀 있었어. 그게 왜 그렇게 정겹던지…”
흠흠, 흘러내리는 콧물을 들이마시고 고이는 눈물을 참아내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볼 위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으려고, 안 그런 척 생동거리려 애쓰는 소리. “미안, 내가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이런다. 수형야, 이 부분을 좀 써줘. 좀처럼 표현이 안 된단 말이다. 김치냉장고 타면 보답할게. 해줄 거지? 응?”
아침부터 언니가 걸어온 전화는 한참 나를 망설이게 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 끝머리에 시청자가 보낸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레이션으로 파스텔톤의 그림과 함께 내보내는데 내용이 채택되면 요즘 아줌마들에게 한창 유행인 김치냉장고를 선물로 준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 아버지 이야기를 보내고 싶은데 좀처럼 표현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단다. 초등학생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단 네가 조금 도와주면 쉽지 않겠냐고 했다.
C시로 내려가는 버스 안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다. 반시간 안 되는 시간 동안 길을 걷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지나쳐야 하는 이렇게 붐비고 있는 서울이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머니는 늘 ‘어떻게 제집은 찾아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제집도 찾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수선한 도시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한갓진 시골에 직장을 얻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살고 싶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기차역이 있고 가까운 곳에 병원이 위치해 있는 곳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늘은 내 머리를 누를 듯이 내려앉아 있다. 서울 하늘은 늘 이런가 보다, 생각한 때가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반 년이 되어 가지만 맑은 하늘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요즈음 같은 장마철에는 갠 하늘 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그 시골의 하늘은 늘 높았고 푸르렀고 맑았다. 적어도 C시라는 도시로 이사와서도 별빛이 명멸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었다. 한데 졸업을 하던 달에 직장을 잡고 이 도시에 살면서부터는 기분 좋은 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한 것 같다. 도시의 휴가가 막바지에 접어든 이번 주말에도 서울의 구름은 여전히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솜처럼 찌뿌둥하니 매달려 있다.
도시에 처음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눈먼 새끼소처럼 늘 허둥거렸다. 아침에 나가 하늘을 날다 돌아와 보니 어느새 내 집이 전신주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깨끗이 청소된 것을 발견하고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새새끼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늘 두리번거리고, 허한 가슴으로 버스를 탈 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절실함과 절망감으로 가슴 밑바닥부터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과 머리 위에 더께처럼 먼지를 이고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즈음이면 수아언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프로그램에 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 했을 것이다, 생각하니 집으로 들어서는 일에 겁이 나기 시작한다. 내가 바빠서, 싫다고 거절한 것을 알면 나마저 도시로 떠나 이제는 텅비어 버린 집에서, 언니들이 남기고 떠난 기억을 들추듯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있을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언니들이 가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과 그리움이 나에게는 손톱의 반달만큼도 없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머니도 나와 똑같은 감정이 아니냐, 고 우리 그 날 같이, 그 일을 겪고 나서도 나에게 그리운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를 쓰며 눈물바람 하라고 하느냐고 대들 듯 말하면 어머니도 이런 내 마음에 동의해 주시지 않을까.
딸 부잣집에서, 그러나 속사정은 전혀 부자가 아닌 우리 딸딸이 집에서 마흔이 넘은 큰딸수미언니를 비롯한 여섯 명이나 되는 언니들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이나 아득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삿날 혹은 명절날 형부, 조카들과 함께 나타나는 언니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 강원도 홍천의 첩첩 산중 시골 마을인, 여차울에서 아버지와 지냈던 즐거운 기억만 이야기했다. 수미언니는 맏딸이니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자랑하며 매번 이 이야기하길 즐겼다.
“꽤나 더운 여름날이었어. 그렇잖아도 까만 내 피부가 태워질 것 같기도 한 날이었는데, 아버지가 일하시는 옥수수 밭머리에서 애들하고 같이 뽕나무에 매달려서 오디를 따먹으려고 기어오르고 애쓰고 있을 때였어. 그, 우묵배미골 옥수수 밭머리에 있는 뽕나무가 워낙 커서 잘 올라갈 수가 없잖니. 근데 어느새 아버지가 굵은 팔뚝으로 뽕나무를 마구 흔들어 주는 바람에 입술하고 혀가 새까매지도록 실컷 오디를 먹었다는 거 아니겠니.”
아버지는 춘천에 있는 큰댁이나 친척댁에 갈 때에 늘 수미언니를 데리고 다니셨고 자랑했다. 얼굴이 뽀얗고 동글동글한 눈을 가진 큰언니를 데리고 다니며 ‘살림 밑천인 내 큰딸이요’라고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했다.
셋째인 수화언니는 어머니가 연이어 딸만 낳았는데 세 번째도 또 딸이어서 그런지 아버지는 자신에게는 좀 냉정했던 것 같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옛말에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한 번은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막걸리 한 잔씩 마시는 가게로 아버지를 모시러 간 적이 있었는데 아저씨들이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이씨네 셋째 딸 아니여’ 하는 말씀에 막걸리 몇 방울을 흘리며 아버지는 껄껄 소리내 웃으셨다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 그저 아버지가 웃으시는 것이 좋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 웃음이 몹시 가엽더라고 수화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 은영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섯 째인 수인언니는 장마가 나던 여름, 물이 불어 학교에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가 물에 잠겨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사랑방 아랫목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런 언니를 보고 아버지는 ‘책가방 메거라, 학교는 가야지’ 하셨고 흙물이 쿨렁, 다리를 뒤덮고 있는 흙색 강물을 언니를 업고 철벅철벅 건너셨다고 그리움에 잠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장마비가 추르륵 내리는 날이었는데 왜 그렇게 아버지 등이 따뜻했는지 모를 일이라고 세 방울쯤의 눈물을 떨구며 덧붙였다.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은 아버지를 말하며 언니들은 깊고, 그리고 짙은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딸들에게 매질하던 아버지는 없었고 밖으론 무뚝뚝해도 속은 한없는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만 있었다.
그날이 언제였던가. 옥수수를 먹으려면 아직 여러 날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늦여름쯤의 어느 날이었을까. 이제 막 옥수수 수염이 짧고 또 무채색이었다가 연이어 색색으로, 다채롭게 그 머리색을 달리해 가는, 하늘이 파랗던 어느 날이었을까.
그날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던중이었고 내 짝 영미가 시내 중학교에 다니는 자기 언니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다준 머리가 길고 얼굴이 노란 플라스틱 마론인형을 꺼내 보이며 내 약을 올리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이것 봐. 이렇게 머리 모양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고 내가 입히고 싶은 옷을 다 입힐 수도 있어. 자, 이렇게 길게 머리를 닿아 주면 더 예뻐, 그지?”
올해 여덟 살인 나. 집으로 오는 길에 영미가 한없이 부러워진다. 우리 집에는 언니가 많고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고도 있었지만 그들은 집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뺏긴다는 이유로 시내에서 아예 자취를 하고 있어 주말에만 집에 다니러 오는 형편이었고 그나마 시험기간에는 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미의 언니처럼 집에서 등하교를 한다고 해도 내게 인형을 사다줄 만한 언니는 없었다. 딸년 공부는 다 헛것이라고 막걸리 몇 모금이라도 걸치면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버지는 언니들에게 등록금 이상의 돈을 허용치 않았다. 때문에 어머니가 광 안 깊은 자루 속에 있는 곡식과 쌀 한 말씩을 머리에 이고 고개를 넘어 시내 가게에 가져다 팔아 언니들의 용돈을 대주어야만 했다.
발 밑에 누런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나는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잇길로 꺽어진다. 집 대문 옆에는 높다란 대추나무가 우뚝하니 서있고 안마당과 바깥마당 그리고 뒤란 울타리로는 고야나무, 돌배나무와 호두나무가 줄을 일탈하지 않고 빙 둘러 서있다. 호두나무 옆으로는 길고 가느다란 도랑물이 흘러내려 가고 있다. 작은 빨래는 강물로 나가서 하지 않고 집 앞에 있는 이 도랑에서 했다. 강물 한 귀퉁이를 묶어 논에 물을 대는 물이 도랑물이었다. 우리 집이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계절 늘 ‘콸콸’ 대고 흐르는 이 물에 아침 세수를 했고, 어머니는 품앗이 나가기 전에 또르륵, 물속에 머물러 있는 돌들이 소리내며 굴러가도록 새하얗게 빨래를 했다.
그런 도랑을 가진 우리 집이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안마당과 바깥마당, 그리고 넓다란 뒤란을 가진 우리 집을 우리 마을에서 가장 사랑했다. 빨래비누와 젖은 빨래로 말갛게 씻겨진 빨래판이 되어 버린 돌까지. 영미의 인형이 너무나 부러운 나. 말간 빨래판 돌 위에 냉큼 앉아 도랑물에 발을 담가 놓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넓게 흐르는 강, 그리고 가엾은 새끼처럼 따로 흐르는 우리 가족들만의 물, 도랑은 푹 퍼져 있는 논과, 밭과, 나무들과, 풀꽃과, 낮은 지붕과 정체를 알아챌 수 없는 새소리를 가득 품고 있는 밋밋한 산이 내는 숨소리와 함께 고요히 흐르고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집과 가끔씩 힘겨운 언덕을 넘는 것처럼 꼬르륵, 소리내며 돌틈을 흐르는 도랑물 곁에 있었다. 영미의 자랑 섞인 말들을 다시 되씹으며, 나에게는 왜 그런 인형이 없을까, 나에게는 왜 그런 인형을 사다주는 언니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놀거리라고는 내 머리보다 한길이나 깊은 강에 나가서 물살과 함께 노는 일이나 낮은 산 언덕에 올라가 나무와 풀들을 만나 이름을 지어주고 들리지 않는 대답을 들으려 애쓰는 일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미가 가져온 인형은 나의 부러움을 한껏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황금색 긴 머리채를 가진, 반짝반짝 다양하게 빛나는 구슬을 매단 분홍색 파티복을 차려입은 눈이 깊은 영미의 인형. 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옥수수밭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수염이 노란 인형을 찾아 옥수수 밭고랑을 헤집고 다닌다. 그리고는 머리숱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옥수수 하나를 찾아낸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한 개를 따서 품안에 넣고 밭에서 빠져 나온다.
영미가 가진 인형처럼 머리카락이 길고 또 질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옥수수 수염을 빗으로 빗겨주고 옥수수를 둘러쌓던 잎을 잘게 찢어 갈래갈래 땋은 옥수수 수염을, 아니 인형의 머리를 묶었다. 자 이제 머리를 감아야지, 하며 물에 머리를 감겨 주기도 한다.
그러다 나는 옥수수 인형의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버린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옥수수 밭으로 달려가 다른 옥수수 한 통을 꺽어 가지고 나온다. 이번엔 머리색이 빨간 옥수수 인형이다. 황금색 금발보다 화려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몇 개의, 다 익지 않은 옥수수를 통째로 버린다.
이제는 옥수수를 따지 말아야겠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찰나, 아버지는 내 등뒤에 서있었고 변명의 겨를도, 여지도 주지 않고 등줄기를 가르는 손바닥으로 때리는 매를 맞기 시작한다. 이런 집안을 말아먹을 년아. 어떻게 지은 농사라도 그걸 말아먹고 있느냐고 저녁 늦게까지 갖은 욕은 다 먹는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가을 추수 후부터 봄까지 광 안의 자루 속에 잘 간수해 두었던 옥수수 알갱이 하나하나를 소를 앞세우고 잘 갈아 엎은 밭이랑에 심고 다시 여름날 옥수수 자루보다 푹푹 키를 키우는 잡초를 김매고, 이만큼 자라게 만든 옥수수 농사였다. 그런 아버지 수고를 모르는 철없는 딸이 옥수수 여러 통을 따내 수염을 가지고 놀고 있는 꼴을 봤으니, 그 기분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살갗이 오소소해질 만큼 추운 산속 여름밤, 아버지는 하지만 이런 딸년은 죽어도 싸다며 나를 대문 밖으로 쫓아 놓고 대문을 잠그어 버린다.
왼쪽 눈두덩이는 퍼렇게 부어 올라 움찔움찔 했고 이마에는 한 두 개쯤의 뻘건 혹이 튀어 올랐다. 양쪽 팔을 움직거리기만 해도 뼈마디에 달라붙은 근육이 당겨졌고 얼굴에도, 등짝 어디쯤에도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양 종아리는 가볍게 손가락을 갖다 대기만 해도 차갑게 쓰려 왔다. 우리 집 어딘가에 그렇게 많은 회초리용 나뭇가지가 있었을까, 나는 아픈 매를 맞으면서도 생각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매를 드셨던 것일까, 그날 그 숱한 매질을 당하면서 내 잘못이 그 정도의 매를 감수해야 할 만큼 큰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다.
호되게 맞은 엉덩이와 등짝을 아파하며 대문 밖에 쪼그려 앉은, 집안을 말아먹을, 여덟 살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제 그만 좀 해요.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뭘 그래요, 어머니는 나를 때리는 아버지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했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 그려, 아들 하나 못 낳은 여편네는 집안을 말아먹고 있는 막내 딸년 역성이나 들고 잘하는 짓이네. 밭이나 논마지기를 이 여차울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지주라면 지주인 내가 그 흔한 아들 하나 없이 논물을 대러 논둑을 걸어 나가는 기분을 알기나 알어? 농사일 하나 돕지 못하는 즈 애비 등골이나 빼먹는 딸년들만 수두룩하고 고추 달린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이 많은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은 우리 여차울에서 아니 우리 동리에서 이씨, 나 하나뿐인 거여! 그려요, 다 내 죄요. 딸만 낳은 것도 다 내 죄요, 그러니 어떻허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핏대를 세우는 악다구니는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아들 하나 못 낳는 쥑일 년의 여편네가 말대꾸만 한다고 광 한 귀퉁이에 여러 개 걸어 두었던 낫 가운데 하나를 들고 어머니에게 다가간다. …아버지는 그날 얼마 만큼의 술을 드셨던 걸까.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풀섶에 사는 온갖 곤충들이 우는 소리를 냈고 끈적거리며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멈추고 가만, 나는 그들의 집은 어디쯤에 숨어 있을까, 깜박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느덧 아픈 신음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듣고 있다.
죽지 않을 만큼의 매를 맞고 대문 밖으로 쫓겨난, 여덟 살의, 집안을 말아먹을 망할 년은 아버지가 잠드신 틈을 타서 어머니가 열어준 대문을 통해 뒤란으로 들어온다. 어머니의 눈은 조금 퍼런 색이었나. 달빛이 없었나, 얼굴색까지 자세히 들여다뵈지 않는다. 그밤 이후 어머니는 왼쪽 다리를, 걸을 때마다 절어야 했다.
들어가자, 아버지 잠드셨다, 며 내 얼굴을 그 이삭진 손으로 몇 번 쓰다듬어 준 어머니는 나를 뒤란으로 데리고 갔다. 가을을 예고하는 하늘은 새벽이라 그런지 어느 때보다 높았고 군데군데 별이 꽃잎처럼 몇 개 떠 있었다. 새벽이었어도 굴뚝이 묻혀진 위의 흙은 아직도 따뜻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오른쪽 다리를 내어주며 베고 누으라 했다.
그 새벽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제목은 별이 삼형제였던가, 은하수였던가.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가운 새벽 공기와 더불어 추웠고 떨리고 있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있고 방이 네 개이고 곡식이나 농기구를 넣어두는 광이 두 개가 있는 커다란 집에 아내의 무릎을 낫으로 찍어누른 남편이 잠든 새벽 무렵, 매를 맞은 어린 딸에게 무릎을 내어 주고 쪼르려 앉은, 이십 년 넘게 살아온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낫으로 왼쪽 다리를 찍힌, 얼굴마다 쭈글쭈글 찌든 굴곡이 얼룩진 한 늙은 여인이 딸을 위로하며 부르는 노래라니.
그런 내게 그리움을 가득 실은 편지를, 그것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정을 쓰라고 하다니… 아쉬울 것도 그리울 것도 향수라든가 쓸쓸함도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라고 하니….
사람에게는 저마다 함부로 열고 들어서길 꺼리는, 문을 열었다가 닫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기 꺼리는, 기억이 묻어 있는 장소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시골에 살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동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마을의 오래된 다리나 강가가 그런 장소일지 모른다. 혹은 마을 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뜨고 나면 그의 영혼을 운반해 주는 상여가 보관된 성황당이 그런 장소일지 모른다. 굳이 시골을 태생지로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나 살아오는 동안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흉터로 남겨두고 가끔씩 그 상처들이 우르르 일어설 때마다 호호, 부드러운 입김을 넣어 주어야 하는, 차라리 전설이 되길 소원하는 시간과 장소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장소나 시간이 머물러 있는 기억 앞을 지날 때에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문질러야 한다. 당겨오는 심장을 온기 가득한 손바닥으로 보듬어야 한다. 아파오는 가슴 저 바닥을 들었다 놓을 만큼 심호흡을 불어넣어야 한다.
내게 고향을 회상하는 것은 들어가길 꺼려야 하는 집 대문을 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들어서기 싫어 그 문 앞에서 멈칫거리며 엉덩이를 어느 만큼 뒤로 빼고 조바심내며 열어야 하는 문과 같은 것이다. 그 문을 열기 전에는 반드시 깊은숨을 가슴 밑바닥까지 깊숙이 밀어 넣어 주어야 다시 용감하게 걸어 나올 수 있다.
“너를 뱄을 때 모든 무당들이 아들이라고 했지. 그래서 니 아부지는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산삼을 사서 나를 먹이지 않았겠냐. 동네 여자들도 내 배모양을 보고 다 아들이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새벽별이 산등성이를 졸면서 빙 돌아가고 있을 무렵, 고야나무 그늘 아래서 내 머리를 무릎에 얹은 채로 말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 흘렀던가. 베고 누운 어머니 무릎이 약간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내 삶은 별로 축복을 받은 것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새벽에, 그 뒤란에서, 새벽별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콩포기가 유난히 두툼하게 움터 올라오던 음력 6월의 어느 날, 아버지가 연신 노래를 부르며 태어나길 기대하던 그 고추를 달고 나오지 않은 나를 확인한 어머니는 붉은 피가 선연한 그 이불 위에 갓 태어난 나를 엎어 놓으셨다. 그리고 아기를 낳은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산모는 콩밭으로 김을 매러 나갈 차비를 했다.
“콩밭 끄트머리에 앉아 김을 매기 시작하는데 아랫도리는 아파오지, 호미는 자꾸 헛손질만 하지. 이 쪼그려 앉은 내 무릎만 찍어 쌓고 풀떼기를 잡은 왼쪽 손모가지만 할퀴고 그러더구나.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래 쪽 집 마당에서 니 아부지가 나를 큰 소리를 불러 제끼더라. 애 젖 안 줄 거냐고, 이렇게 죽일 거냐고 말이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반갑던지, 아랫도리에서 피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달려갔구나.”
어머니가 김을 매던 호미를 내던지고 방에 들어섰을 때 갓 태어난 나는 자지러지던 울음을 끝으로 그만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있던 찰나였다 했다. 아버지는 산파 역할을 했던 윗마을 영자네 엄마가 안방에서 나오며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심란한 마음에 논물을 보러 나가려고 광에 들어가 삽을 꺼내 오려던 참이었다 했다. 그런데 방에서 숨넘어가는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 왔다. 방문을 삐끔 열어 보니, 애 엄마는 어디로 가고 애는 이불 위로 엎어져 자지러지더란다. 그 길로 아버지는 이 망할 여편네 같으니라구 소리를 연발하며 아기를 바로 뉘어 놓았다. 그리고 매정하지만 한없이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큰 소리로 불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서도 말이지만 아마 축복받지 못할 니 생을 삼신할미가 불쌍히 여겼던 것도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점장이들이, 이 아이는 명이 길 거라고 너를 가졌을 때 했던 말이 그예 다시 생각하니 예사롭지가 않드라.”
달빛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별빛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 저물어 가는 달빛 아래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는 조금씩 피가 나고 있었고 내 부운 얼굴은 파랗게 질식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상상할 때마다 매 맞은 자국이 더욱 쓰리고 아파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모질게 내게 매질을 하셨던 것일까. 어쩌면 아버지가 살린 목숨이니 만치 당신이 죽여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 여긴 것인지도 모르리라. 내가 오글오글 해진 어머니의 자궁을 비집고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망감이란. 미옥이 언니의, 튼실한 종아리를 가진 큰오빠와 작은오빠들처럼 미옥이 언니 아버지의 밭농사를 돕고 논에 추수를 하러 가고 하는 등의 일을 하는 아들이, 우리 집에도 태어났어야 했던 것인데.
내 삶이 아버지에 대한 갚지 못할 부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 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가을 밑, 시골분교 1학년 1반 교실에서 내 짝꿍 영미가 가져온 황금빛 머리를 가진 인형으로 시작된, 내 유년기 한 시절의 문을 걸어 두어야 했던 어느 날.
달은 조금씩 이울다가 이내 산허리에 걸려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고야나무 그늘도 조금씩 폭이 작아지고 있었다. 하얗게 달빛을 맞으며 서있는 고야나무 아래 상처받은 모녀가 동상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후 나는 뒤란에 들어서길 꺼렸다. 뒤란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뒤란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면, 그곳으로 들어서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다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야나무 잎사귀 위에 눈꽃보다 더 아름답게 달빛이 새초롬하게 흘러내리던 늦여름날의 뒤란은 온데간데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뒤란에 가보았더니 넓은 하늘을 등뒤로 하고 서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고야나무는 달빛에 비쳐 무섭도록 하얀 손갈퀴만을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장병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도 뒤란에 가지 않았다. 봄과 여름 동안 만들어 놓은 야생화가 가득한 어머니의 꽃밭은 돌보지 않아 푸른 잡초만 무성했다. 어머니는 걸을 때마다 왼쪽 다리를 삐그덕대야 하는 불구가 되었고 나는 기억 한 귀퉁이를 떼어 내려고, 부질 없는 일에 애쓰는 어른이 되어 갔다.
나는 되도록이면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 새벽에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난 후에도 산이나 들이나 강으로 쏘다녔다. 무엇이든 배부르게 먹고 돌아서도 다시 허기를 느낄 시절에 집이 아닌 장소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이 얼마가 지난 후 가을운동회가 있었던가. 학생수가 통틀어 이십여 명도 채 되지 않는 시골 분교의 가을운동회란 마을의 잔치같았다. 친구들의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가 손바닥보다 조금은 큰 학교 운동장에 모여 마을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조차 운동회를 알리지 않고 어디로 숨어들어 삶은 앞으로도 나에게 이렇게 각박하고 장난스러울 것이다, 라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던가.
2학년이 되면서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봄이 시작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일을 두고 아버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안방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논과 밭에 엎드려 있었고 나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어머니가 계신 들로 호미를 들거나 낫을 들거나 삽을 메고 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리 집 누렁이 황소가 잘 갈아 엎어놓은 이랑에 씨앗 몇 개를 묻어 두는 일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방에 누어 있기엔 온몸이 곰실곰실 가려워지는 봄을 견디지 못하고 선산 끝머리에 묻혔다.
그날이 아마도… 아마도 고마우신 아버지 어머니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는 어버이날이었을 것이다. 어제 학교에서 빨간 색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아버지 가슴에는 달아드리지 않고 다시 학교로 가는 새벽에 다리 위에서 쿨렁, 흐르는 강물 위로 던져 버린 날이었다.
“언제 왔니? 왔으면 벨을 누르지 않고 그렇게 서있으면 어떻게 알라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현관문을 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은 혹시라도 언니가 집에까지 전화를 걸어서 나에게 원고를 독촉했을 일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아 언니 성격에 벌써 어머니에게 호들갑스러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 시간 어머니는 방 세 칸짜리 빈 아파트를 홀로 지키며 사진첩을 들추고 흑백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계셨을 테지. 언니는 다시 나에 대한 잔소리를 주저리주저리 퍼부었을 것이다. 수형이는 애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둥,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둥,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언니 부탁을 거절하는냐는 둥. 그런 언니의 많은 말들에 어머니는 뭐라고 응답을 하셨을까. 바쁜 일이 정말 있는 게지, 혹은 조금 더 기다려 보려무나,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따가 수형이 오면 내가 좀 얘기해보마, 다짐해 두었을 것이다.
“뭐하고 계셨어요? 또 그 사진첩 보고 계셨어요?”
“내가 빈집 지키며 할 일이 뭐 있니. 아주 오랜 적 옛날이야기 같은 이 사진들이나 들여다보는 일이나 하지.”
“옛날이야기는요, 겨우 3, 40년 전인 걸요. 어머니 시집오기 전부터 얼마 전 절에 초파일 불공드리러 갔던 사진까지 다 있잖아요. 어머니 젊었을 적 사진 모습은 별로 오래되어 보이지 않아요. 바로 얼마 전 모습 같아요. 하나도 안 변했잖아요.”
“그래? 그런 소리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같구나.”
“정말이에요. 어, 어딨더라? 어머니가 쪽진 머리를 하고 저를 안고 있는 사진말이에요. 옆에는 수아언니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고 말이에요. 아마 그게 제 백일사진이요? 그 모습하고 지금의 어머니하고 꼭 같아요. 그게 어딨지?”
무슨 사진이 이렇게 많은가. 큰언니에서부터 바로 위 수아 언니의 결혼 사진, 그리고 열 명이 넘는 조카들의 백일사진부터 돌 사진에 이르기까지. 식구들의 모든 이력이 들어 있는, 오래고 오래서, 그래서 묵직해진 사진첩을 앞장부터 차례로 들추어 가본다. 그리고는 이내 엿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반질거리는 머리를 곱게 쪽을 지고 두꺼운 겨울스웨터를 입은 어머니가 딸랑거리는 방울을 들고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나를 품에 안은 어머니 옆에는 세라 칼라를 단 중학교 교복을 입은 수아언니가 어깨를 좁히고 앉아 있다.
“그래, 여기있구나. 이게 니 백일사진이지. …그런데 너 수아 부탁 안 들어 줄 거냐? 웬만하면 들어주지 그러냐. 제 깐에는 도무지 어쩌지를 못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말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냐?”
당신의 젊었을 적 모습과 아기인 나와 중학생인 언니를 한동안 바라보던 어머니는 끝내 수아 언니의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아니요, 어머니. 너무 바빠서요. 그리고 아무리 이야기라지만 꼴 베러 갔다가 칡이파리에 산딸기를 한움큼 따오고, 그걸 어린 딸 먹으라고 마루 끝에 살포시 올려 놓는 아버지가 도저히 상상이 안 돼요.”
“그래…, 어쩌면 그럴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넌 생각이 안 날 수도 있겠다. … 니 아부지가 세상 떠난 지 벌써 10년도 넘는구나. 나쁜 일도 참 많았지. 왜 그렇게 살기가 어렵고 힘이 드는 시절이었는지 모르겠다. 한데 내 기억이 점점 죽어가서인지, 니 아부지와 온갖 악다구니를 해대며 싸우던 일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고 좋았던 일, 기뻤던 일, 행복했던 일들만 떠올라, 니 아부지랑 처음 혼례를 올리고 나서 수미를 갖던 해 한 두 푼씩 모은 돈으로 윗마을 성황당 밑에 밭을 샀던 날, 니 아부지랑 손바닥만한 계약서 비슷한 것을 놓고 울기까지 하던 일이나 수인이가 홍천 중학교에 1등으로 들어가자, 니 아부지가 동네 잔치를 벌였던 일들이며 웃고 그래서 눈물까지 흘렸던 일들만 생생하구나.”
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새벽별이 산허리 돌아 이울고 달빛은 꺼질 듯한 숨결로 고야나무 잎새로 숨어 잠들던 그날, 무섭도록 외롭게 부르던 노래의 기억을 다 잊고 계신 것일까.
“수형아, 니 이 백일사진 말이다. 니가 태어난 달은 음력으로 6월이고 백일이면 가을 무렵인데 왜 백일사진은 겨울에 찍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냐? 수아 중학교 졸업식에 다녀오는 길이었지. 니 아부지도 같이 갔다 오는 길이었다. 홍천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려고 정거장에 서있는데 앞에 사진관이 보이더구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뒤로 세우고 사진관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그리고 당신은 뒤로 물러서고 신출내기 사진사 아저씨에게 어서 찍으라고 비싸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당신도 같이 찍지 그러느냐고 묻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계집애 사진 찍으면 됐지, 나까지 뭐하러 들어서냐고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섞어 말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쉴 듯한 얼굴로 나를 이윽히 바라 본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다 그런 것일까. 그 사람의 존재가 세상에 없고 그와 있었던 기억만 있다면 나쁜 일들은 다 잊어 버리고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기억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는 그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한 추억을 반추하며 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더라. 그 양반 널 낳고 내가 모질게 하고 백일도 챙겨주지 않은 것을 못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셨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던지… 홍천 시내에서 여차울로 들어오는 고개를 넘어 서는데 고갯길이 흐리마리한 게 걷지를 못해… 한동안 먼 산을 바라 봤구나. 여섯 째 수아만 보고 한숨만 쉬다 돌아가신 니 외할머니 얼굴이 어쩌자고 아른거리면서 내 앞길을 막아서는지 말이다. 이십 년 넘게 모여온 한숨이 숨통을 열고 한꺼번에 몰려 나오는 기분이더라.”
12층 아파트 베란다 창을 열어 본다. 화락, 푸른 바람
이 섞여 들어온다.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인가. 서울에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싱싱함이 바람에 새어들어 있다. 내 몸에 묻어 있는 도시의 끈적임이 하얗게 사위어 가고 있다. 도시 어디쯤에서 집을 빼앗기고 퍼드득 대는 새들도 다시 날개를 접을 수 있는 집을 찾아 길을 나서고 있을 테지. 먼 태고부터 깊은 곳에 숨겨둔 싱그러운 자연에 대한 기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