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 편]속세에 두고 온 님 그리던 여승의 수덕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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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편]속세에 두고 온 님 그리던 여승의 수덕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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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월은 유수와 같다라고 했던가?. 세월은 흘러 또 다시 봄을 맞는다.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
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시절, 시간은 흘러 지난 가을 다녀온 수덕사를 그동안 바쁘다는 핑
계를 대다가 이제야 글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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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그동안 몇 번을 다녀가긴 했지만 형님 내외분이 안 가본 곳이라 하여 들러보았던 수덕사! 그러고 보니
수덕사에 대한 여행기를 쓴 것 같기도 하고 안 쓴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아리송함 속에서 여행기를 써 내려가 본
다.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이 절집은 예산 내포 땅 가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명승지 수덕사(修德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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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해발 580미터) 중턱에 널찍이 자리 잡은 수덕사는 옛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
은 고찰로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이 현재도 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선(禪)의 물결을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승려로 살다가 속인으로 임종한 경허(鏡虛,1849~1912)스님과 조선과 일제 강점기
의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만공(滿空,1871~1946)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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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수덕사는 오늘날에도 불교계의 덕숭문중은 큰 일파를 이루어 종정 선출이 난항을 거듭할 때면 으
레 덕숭문중의 의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하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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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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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수덕사를 떠 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여승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수덕사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해졌다. 또 여승들의 큰 선방이 여기에 있어 청도 운문사와
같은 청순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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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같은 유행가가 한세상을 풍미(風靡)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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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여승”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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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전남 진도 출신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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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잘은 모르지만 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히트한 대표적 대중가요로 알고 있고 유랑자의 레퍼토리
안에도 들어있는 대중가요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암튼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 내용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노래는 구구절절 측은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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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이 많은 유랑자로서는 원곡의 송춘희 보다는 간드러져 꺾어 넘어가는 김용임이 부르는 구성지고 감
칠맛 나는 노래가 훨씬 흥겹고 듣기 좋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
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며 히트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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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역사를 모신: 금강문(金剛門)~산스크리트로는 '번갯불을 가지고 다니는 자'를 의미하며 반신은 사람이고
반신은 뱀인 용신을 보호하는 자다. 비를 조절하는 용신과 힌두교의 우신인 인드라와 관련이 있어 가뭄이 들었
을 때 금강역사에게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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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사의 찬
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 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 명
이고, 나머지 한 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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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
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성이다. 그러나 이제 수덕사는 더 이상 옛 애절한 사랑이 묻어있는 그
런 수덕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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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 줄여서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이 문 안에는 그림 또는 조
상(彫像)한 사천왕을 봉안하게 된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
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
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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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상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을 비롯해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북쪽을 지키
는 다문천왕이 모셔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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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깊어만가고 유랑자는 곧 첫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한발 한발 절집을 향해 발길을 내 딛는
다. 주변은 온통 불이라도 난 듯한 울굿불굿 단풍으로 얼룩져 있고 세상은 맑고 산사는 여유롭다.
수덕사의 지형을 보자면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심부에 서 있는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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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
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
레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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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 정사 등 12개가 전하지
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뿐이다. 사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
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
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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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 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로 알려져 있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
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그나마 천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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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정루(黃河精樓) :수덕사 황하정루는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전위누각(前衛樓閣)으
로 1985년 불사를 시작하여 1992년 준공하였으나 1994년 법장스님에 의해 이전 개축되었다. 황하정루라는 명
칭은 덕숭총림 방장원담스님이 명명한 것으로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며 하(河)는 큰 강이 흐르듯 정진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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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누각의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지상 일층은 스님들이 거쳐하시는 요사로, 이층은 강당
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 걸려있는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와 황하정루(黃河精樓) 현판은 원담스
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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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
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
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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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또한 수덕사는 한국 불교를 해외에 알리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숭산(崇山,1927∼2004)이 1949
년 고봉(古峰)에게 비구계를 받은 사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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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大雄殿, 국보49호): 국보(1962.12.20 지정).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와 맞배지붕을 지닌 주심포계
건물이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며, 헛첨차를 써서 공포가 주두 아래
에서 시작되는 백제계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곡선, 이중량의 곡면과 함께 백제계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
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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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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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수덕사에 사랑에 얽힌 전설이 하나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 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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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의 미모가 너무나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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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
(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천왕문‧금강
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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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 석탑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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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
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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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
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 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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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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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
(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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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유서 깊은 수덕사!. 그런데 청하지도 않았던 수덕사 해설사가 나타나 잠깐의 설명이 이어진다. 우선 수덕
사의 대웅전과 영주 부석사의 주전 무량수전과의 건축 양식의 비교로 안내를 시작한다. 해설 사는, 그 건축 양
식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며 세부 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구조나 양식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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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진 유명세만큼 이 사찰의 대웅전 또한 못지않다는 시위로 들리는 것은 유랑자가 무량수
전에 두고 있는 나름의 가치 때문이리라. 그는, 국내에는 오래된 목조건물 세 개가 있는데 연대별로 보면 봉정
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 국보 15)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수덕사가 세 번째 고
(古) 목조건축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을 강조하고는 설명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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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바위 앞 이분이 바로 수덕사 전설의 주인공인 수덕여인을 형상화한 관세음보살님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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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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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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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이 다른 두 목조건물과의 차이점은 현존하는 고려 시대 건물 중 특이하게 백제풍의 곡선을 보이
는 건축물이고, 앞의 두 건축물은 그 건립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데 반해 이 건물의 건립연대(1308년)
는 정확히 알 수가 있어 다른 두 건축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며
차별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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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덕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주전의 역사성과 예술성도 있지만 위에서도 설
명했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도 역할을 하였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 사찰에는 여승인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이 있으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비구니만의 사찰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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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비구니만의 사찰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비구니 김일엽(金一葉)
과 관련된 일화에 더해 당시(1960년대)의 절대 독재자 박정희(朴正熙)의 본부인이 이곳에서 수행승으로 있었고
‘수덕사의 여승’은 그분이었다는 설(說)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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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박정희의 본부인과 연계되었다는 이 가요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 즉 박통(박정희) 본부인 관계
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설 사는 설명하고 있으나 그 노래가 대중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감흥과 함께 시사도 던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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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수덕사 대웅전도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 보았던 정(井)자살문이 있고 그 문 안에 부처님이 계신다. 그러나
부처님의 형상이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데 불교의 문외한은 그것의 의미를 모른다. 무량수전의 부처님은
문을 열면 동쪽을 바라보고 계셔 방문객에게 옆모습을 보이시므로 부처님을 마주하려면 실내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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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의 부처님은 시선을 남쪽을 향하고 있어 문을 열면 방문객을 정면에서 맞아 주시니 모습을 뵈러 일
부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이곳과 부석사의 부처님은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방문객을 맞는 모
습이 다른 것은 사찰만의 특징인지는 모르나 또 다른 신비로 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부석사의 경험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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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의 부처님이 동쪽을 바라보시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인 서방정토(西方淨土)와 유관하고, 그것은
세상 평화지향의 표현이라 이해했는데 이곳 부처님은 비록 남쪽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중생을 살피는 지향은
같으리라 생각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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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중생들과 갖가지 모습으로 소통하고자 하고 그래서 사찰들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
해 각각의 특성을 가지는가 보다. 부처님 모습이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도 그 지향은 모두 세상의 평화
라 결론을 짓고는 유랑자는 합장으로 예를 올리고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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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도로명 :주소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지번) 주소덕산면 사천리 19
전화041-330-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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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덕사 아직 못가봤는데
이모저모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그렇군요.
수덕사는 전주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입니다.
언제 시간 나시면 시나브로 함 다녀 오세요
점심도 먹을겸 해서 겸사겸사 말입니다.
감사 합니다.
가을엔 꼭가봐야겟군요,,,,,,,,,,,,
아~~ 그럼요.
이런곳을 가보지 않은다면 실례입니다. ㅎㅎㅎ
진짜 종교와는 상관없이 한번쯤 가볼만 합니다.
일단은 힐링이니까요.
작년 가을 잠깐 들렸던 수덕사
이리보니 또 다릅니다.
ㅎㅎ 새롭지요?
감회도 남다르구요?
맞습니다. 그냥 보는것 보다는 때론
사진이 더 실감할수 있을 때도 있지요.
비구니의 고향이라 할만큼 격조있는 수덕사
긴긴밤 님 그리워 허벅지 바늘 쑤셔대는 그 시린 가슴을...ㅋ
이젠 한켠 구석에 자리잡은 비구니들만의 공간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