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기_전주교구 부안성당 돈지공소
고충곤 바오로 전주 Re. 단장
200여 년 전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지내던 교우의 후손들이 박해시대가 끝난 후 새로운 삶의 터전에 이주해와 주님의 은총 속에 새로운 꽃을 피운 전주교구 부안성당(주임 박대덕 스테파노 신부) 돈지공소(회장 김용운 토마스)의 로사리오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 김미순 마리아)을 찾아보았다.
로사리오의 모후 쁘레시디움은 부안성당 사랑하올 모친 꾸리아(단장 최기우 프란치스코, 지도신부 박대덕 스테파노) 소속 공소 쁘레시디움으로 1989년 3월 설립되었으며, 현재 70~ 80대의 여성 7명으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이다.
사랑하올 모친 꾸리아 최기우 프란치스코 단장의 안내로 돈지공소를 방문하였다. 공소입구에 300ha나 되는 거대한 청호저수지가 석양빛을 받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공소 마당에 당도하니 돈지공소 교우들의 땀의 결실이며, 신앙의 요람인 경당이 친근감있게 다가왔다. 회합 시간이 다가오자 연로하신 단원들이 한 분 두 분 회합실로 모이시더니 정시에 주회가 시작되었다. 공소 내에 영적 지도자도 상급 평의회도 없었지만, 매달 열리는 본당 꾸리아에는 쁘레시디움 4간부가 모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열성이 대단하다고 꾸리아 단장은 귀뜸해주신다.
살아남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선교뿐
돈지공소는 1977년부터 정읍 산내, 신태인, 동막, 함열 등지에서 살길을 찾아 교우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공소로 전북 부안군 계화면 의북리 67-9에 위치하고 있다. 1978년 4월 교우 가정에서 공소예절을 하다가 1980년 이만호 회장 때 대지 136평에 건평 17평의 건물을 60만원에 매입(천주교 전주교사에는 이만호 회장이 기증했
다고 기록되어 있음), ‘돈지 천주교회’란 간판을 내걸면서 시작되었다. 돈지지역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 없이 극심했다. 낯선 고장에 둥지를 틀었으나 대부분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으며, 원주민들은 도움은커녕 시선조차 곱지 않았다.
지역의 냉담한 현실을 보고 당시 대부분 구 교우였던 공소 신자들은 이 지역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선교를 해야만 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도 꼭 선교를 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식이 자리잡아 갔다. 낮이면 밭일과 논일을 하고, 저녁 시간이나 틈이 나는 대로 선교 대상자를 찾아 나섰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당산나무를 섬기는 등 샤머니즘이 성행하는 곳인데다 일찍이 들어온 개신교와 불교 신자들이 득세하는 환경으로 ‘천주교는 마리아교’라는 등 방해가 심해 선교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비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게 된다면 꼭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말에 고무되어서였다.
1989년 3월12일 로사리오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바쁜 농번기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회에 빠지지 않았으며, 주된 활동은 환자 방문, 쉬는 교우 방문,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과 함께 하는 선교활동이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예비신자가 많아지자 1993년 12월에는 본당과 협의하여 전교수녀 3명을 초청, 50여 일간의 집중교리로 45명의 신영세자를 배출했으며, 2년 후인 1995년 12월에는 수녀들을 초청, 신자 재교육 실시와 함께 예비자 교리반을 개설해 운영했다. 이렇게 공소 신자들과 로사리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의 선교운동에 힘입어 계속 신자 수가 증가하였고, 1996년에는 68세대 1백20여 명에 이르렀다.
도시로 떠난 자녀들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소원
공소 신자수의 급증으로 경당 확장이 필요하게 되어 1996년 부안성당 설립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3월10일 돈지공소 새 경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비 7780만원을 들여 대지 432평에 건평 47평의 공소경당을 신축, 7월23일 당시 전주교구장이였던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의 주례로 경당 봉헌식을 성대히 치르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새 공소 경당 봉헌식을 갖기까지 로사리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을 주축으로 한 공소신자들은 경당 신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주, 군산, 익산 등 교구 내 본당들을 두루 다니며 김과 젓갈류들을 판매하곤 하였다. 또한 마을 인근에 있는 김 가공 공장에 다니면서 얻는 수익금을 신축기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농번기 때는 논농사와 밭농사로 인하여 구슬땀을 흘리기도 하였고, 농한기 때는 김 공장에 나가는 등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마음만은 기쁘고 여유로웠다고 김순복 데레사 자매는 들려준다. 공소신자들의 신축 경당을 위한 노력에 감동한 교회 언론의 보도로 각지에서 성금이 보내져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공소는 요즘 많이 쇠락해졌으며, 한 때는 없는 생선이 없을 정도였고, 바지락만 캐도 생계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생선이나 조개류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농한기 때면 일거리를 제공해 주던 김 가공 공장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 모두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새만금 방조제’를 쌓아 바닷길을 막아버린 결과이다. 젊은이들 또한 생존을 위해 도시로 떠났고, 이곳은 이미 고령화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교우들은 지상교회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주님을 마주 뵈올 천상교회를 꿈꾸며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소원을 묻자 직업을 찾아 도시로 떠난 자녀들이 신앙을 잃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대부분 구 교우 신자들이라서 그런지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천주교의 신앙 선조들의 후손들다운 소원이었다. 이분들의 소박한 꿈이 꼭 이루어지길 성모님께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