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알프스 가는 길
강 문 석
고산 중턱에 위치한 나카부사中房 산장의 해발은 우리나라 가야산이나 소백산보다도 높은 해발 1462미터나 된다. 이처럼 높은 산장이 첫새벽인데도 짙은 어둠에 잠긴 산을 오르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의 이마에 붙은 헤드랜턴을 접하자 난 오래전 한밤중에 올랐던 후지산이 떠올랐다. 그땐 산 정상에 올라 바다에서 솟는 일출을 조망코자 그랬지만 이곳 북알프스엔 바다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꼭두새벽에 이처럼 산장을 출발하고 있었다. 산행대장은 말하지 않았지만 북알프스 능선까지 오르는데도 서너 시간이 소요된다니 다음 숙박 산장까지 계산하여 출발을 서둔 건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찾은 우리 일행은 누가 뭐래도 좀 특이한 조합으로 비칠 것 같다.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 등 산악단체에서 만난 인연으로 가끔씩 해외원정까지 함께 나간다는 60대의 세 노인은 전기공사업체 대표인 장유곤 산행대장을 비롯하여 정년을 코앞에 둔 경남공고 윤판수 교감 그리고 건설사 레미콘사업부 허상호 상무다. 서로 동갑으로 중키이지만 표준체형인 장 대표에 비해 윤 교감 체구는 씨름선수를 방불케 한다. 허 상무는 두 사람보다 약간 키가 크면서 날씬한 체형으로 한국산악회 본부의 직책도 맡고 있었다.
예순 밑에 바짝 닿은 난 전력공사 퇴직 후 전문대학에 겸임교수로 출강하면서 학생들에게 전기공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과 사진 등 전공을 벗어난 예술분야를 기웃거리느라 항상 시간에 쫓기는 반거충이가 아닐 수 없다.
이들 네 노인들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다. 40대 중반 두 여승이 더해지는 바람에 특이한 조합으로 보일 터이다. 범어사 암자 전기공사로 인연을 맺은 장유곤이 대성암 주지인 여승의 청으로 승려 성공聖空을 참가시켰고 성공이 다시 출가 동기인 내장사의 지심智心을 불렀던 것. 무한히 자신을 낮추는 수행의 길을 걷는 여승들이지만 둘은 승복을 걸치지 않은데다 등산모까지 눌러써서 외관상 비구니나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사찰에서 교육업무를 담당한다고 성공은 자신을 소개했다. 일행이 절에서 무슨 교육이냐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남자처럼 그저 한번 씩 웃고는 그냥 교육부장관쯤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성공으로부터 범어사 교육 얘길 듣자 난 지난 세월 범어사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현직 때 구청 민방위 강사를 맡아 몇 년을 범어사에 출강한 적이 있었다. 차를 몰고 구불구불 경사진 길을 오를 때마다 20여 명밖에 안 되는 민방위 대원을 왜 구청 교육장에 합류시키지 않고 힘들게 절에서 교육을 하나 싶었다. 거기에다 교육 중인 대원을 살짝살짝 하나씩 불러내어 50분 강의가 끝나갈 쯤엔 절반도 안 남으니 이게 진짜 부처를 따르는 불자들이 맞나 싶기도 했었다.
성공은 중키에다 몸피는 비만으로 우람했고 표정은 밝았다. 성공보단 키는 크면서 야원 편인 지심은 미간에 주름까지 새겨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다섯은 부산 사람들인데 그만 정읍에서 참가했고 말씨도 그쪽 방언이 도드라졌다.
평소 말수가 적은 산행대장은 김해공항 첫 만남에서 날 좀 과장되게 일행에게 소개했다. “여기 문 교수 안 있나, 이번 우리 종주를 사진으로 그라고 마 글로도 잘 만들어줄 끼라. 으음 그리 알고… 자아 박수!" 난 여행에서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제 사진이나 기록은 습관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산행대장의 그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내색하진 않았다. 산행대장은 나와 친분이 있다는 걸 그렇게 에둘러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산장을 막 나서자 간밤 자정 가까운 시각에 달빛 아래 몸을 담갔던 노천탕 외등 밑에선 한 단체가 출발에 앞서 인원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들 20여 명은 아직도 산장 침실에 잠든 다른 등산객을 의식해서인지 소곤대듯 낮은 목소리로 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산행에 나서면서 난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잔 걸 걱정하고 있었다. 산소가 희박할 수도 있는 해발 3천 미터 고산인지라 더욱 그러했다. 어제 산장에 도착하여 먹은 카레라이스 저녁식사가 짰던지 갈증이 심했고 범어사 텃밭에서 직접 수확했다는 녹차를 성공이 권하는 대로 대여섯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으니 결국 녹차 카페인과 옆 사람들 코고는 소리가 수면을 방해하여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것이다.
산장 입구에서 바로 시작되는 등산로는 조금도 워밍업을 허용치 않고 바로 경사진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산행 때마다 앞장서서 자취를 감추곤 하는 산행대장은 오늘도 어둠 속으로 먼저 사라져 난 한마디도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가 이번 산행에 일행을 불렀으니 참가한 사람으로선 산행대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을 터였다.
오랜 세월, 북알프스 등산로 중 마지막 구간인 암벽지대가 낙석 위험으로 막혀 종주를 못해오다가 3개월 전 비로소 역사적인 개통을 보게 되었고 산행대장은 발 빠르게 한 달 전 그 코스를 답사하고 돌아와 바로 이번 등산 팀을 꾸렸었다.
90년대 초반 어느 봄날, 장유곤이 나의 직장 사무실을 방문했다. 자신이 등산장비를 구입코자하는데 좀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몸이 자주 피곤해서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자신에게 당뇨병 진단을 내리면서 등산처방도 함께 내렸다면서 허허롭게 웃었다.
장유곤과 난 다섯 살 나이차가 있지만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이를 초월해 친구처럼 지내온 터라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내 산악서클 회장과 산행대장까지 대동하고서 단골 등산용품점을 찾아갔다.
난 장유곤이 싫증을 잘 내는 걸 알기 때문에 등산도 하루 이틀 하다가 끝낼 것이라 생각되어 저가 제품으로 등산화와 재킷 등 두세 가지만 골라주었다. 장유곤은 내가 고른 것엔 눈길도 주지 않고 프랑스와 독일 호주 등지에서 물 건너온 색상마저도 보라와 분홍 등으로 튀는 배낭과 등산복 모자 판초에다 버너와 코펠 수통 헤드램프 아이젠까지 잔뜩 주워 담았다.
장유곤은 자신의 당뇨를 고치기 위해 혼자서만 오르는 등산을 처음부터 꿈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건강관리에 소홀하여 비록 당뇨는 생겼지만 그는 그때 여느 오십대보다 몸이 단단했다. 그가 등산장비를 구입한 그때가 오십대 중반이었으나 자신의 등산에 대한 야망까진 나에겐 털어놓지 않았다.
곧바로 장유곤은 자신의 회사 업무용차량인 봉고를 주말마다 등산용으로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급조해서 탄생한 ‘봉고산악회’엔 고정 멤버로만 10여명이 바로 채워졌다. 부산에선 찾아갈 수 있는 명산이 도처에 늘려 있었다. 봉고산악회엔 결원이 생기면 들겠다는 예비회원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장유곤은 지리산 종주 산행에선 대원사 지구에 대원들을 풀어놓고 차량은 성삼재에 가서 기다리는 식으로 산악회를 운영했으니 참가자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쉬는 날에도 힘든 일을 시킨 운전기사에겐 휴일수당을 지급했고 차량 연료비와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그가 모두 부담하니 회원들은 참가만 하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산악단체 중 규모가 가장 큰 ‘금정산우회’를 장유곤이 맡았고 그 얼마 후엔 대한산악연맹에서도 그를 수석부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그 무렵 오랜 세월 막혔던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자 장유곤은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한 번씩 다녀와서는 설산 트레킹 사진을 나에게 자랑하듯 보여주며 뿌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북알프스는 일본열도 중앙에서 두 개의 지각판이 충돌하면서 치솟은 히다산맥으로 25km 너비로 105km나 이어지는 거대한 산이다. 중앙알프스나 남알프스보다 풍광이 빼어난 만큼 험한 구간 또한 그만큼 많아 등산에도 주의가 필요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