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 터 이야기'는 때 묻지 않고 진솔하면서도 값어치 있는 소중한 이야기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주인공들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돛대에 매단 고딧줄(삼줄로 엮어 만든 굵은 줄)로 양쪽 강둑에서 어깨 걸어 잡아당기며 부르던 '고딧줄 소리'를 기억하던 어른들도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고, 낙동강 하구 넓고 긴 밭이랑에서 김을 매며 부르던 아라리 소리도 그친 지 오래다. 이제라도 낙동강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야겠기에 녹음기와 수첩을 챙겨 들고 나섰다. 낙동강 장어잡이 50년 박남용, 에덴공원 솔바람 백광덕, 구포별신굿 만신네 이미자, 구포국수 60년 곽조길, 흙사람 허경혜, 을숙도 뱃사공 황석용, 다대포 아라리 조두리, 북섬나루 주막 문덕조, 3대 불화장 권영관, 대항숭어들이 어로장 허창호를 만나 낙동강과 함께한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낙동강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질긴 연을 맺고 있는지를 알아볼 터이다. 편집자 주
2~5분 만에 낚아올리는 놀라운 기술
"엇! 장어다!"
박남용(63) 씨가 치켜든 긴 장대 끝 갈퀴에 장어 한 마리가 낚였다.
4분 뒤에 걸려 올라온 장어는 먼저 것보다 작은 놈이다.
그리고 2분, 3분, 5분 간격으로 장어는 박 씨의 갈퀴 끝에 낚여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2006년 12월 20일. 경남 김해 대동면에서 2시간 반을 달려 장어잡이 허가를 받은 경북 흥해 칠포해수욕장의 곡강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 50분이었다. 싣고 온 FRP 작은 배를 곡강 물 위에 띄운 것은 오후 2시 5분이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얇은 운동복에 맨발 차림인 박 씨는 아내, 처남과 함께 장어 잡을 장비를 전투 준비하듯 갖추고 배 위에 올라 갈퀴 장대를 잡았다. 아내와 처남은 장대를 배 좌우 물속 펄에 꽂아 배가 요동치지 못하게 지탱하고, 박 씨는 장대로 펄을 휘저어 장어를 낚아챈다.
스승에게 전수받은 비법 고집
갈퀴에 걸리는 예민한 감각
머리인지 꼬리인지 바로 알아
입에 문 담배가 장대를 펄에 꽂아 내지를 때마다 입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처남은 같이 불 댕긴 담배를 벌써 태우고 버렸는데 남용 씨의 담배는 아직도 맛있게 타고 있다.
오후 2시 47분. 엔진을 배에 장착하여 칠포 쪽 강기슭 가까이에 배를 대고 물질을 시작한다. 한자리에서 16분 동안 8마리나 잡아 올린다. 날씨가 추워지면 찬물을 피해 물속 깊이 개펄로 숨어드는 장어의 특성을 노린 노련한 장어잡이 기술이다. 이곳 곡강 장어는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철새 같은 철장어가 아니라 곡강에서만 사는 뱃구레가 누런 토종장어다.
오후 4시 10분이 되니 햇볕이 사라진다. 우리도 어장을 접어야 했다. 이날 잡은 장어가 6㎏은 되리라 한다. 보통 새벽같이 올라와서 5~6시간 작업해야 7~8㎏을 잡는다는데 오늘 수확이 쏠쏠하다.
장어잡이에 쓰인 갈퀴는, 갈퀴에 걸리는 감각으로 장어 머리인지 꼬리인지 알 수 있게 특수 제작한 갈퀴이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구포 어촌계장 이성호의 부친 이차돌 씨에게서 기술과 함께 갈퀴도 물려받았다. 펄에서 갈퀴에 걸린 장어를 배에 잡아 올리는 시간은 2초 안이라야 한다. 어름거리다가는 놓쳐 버리기 마련이다. 어른에게서 배운 이들은 그사이 모두 타계하고 박 씨가 유일하게 이 특수갈퀴를 사용해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방법대로 장어잡이를 하고 있다.
열다섯 살 때부터 맺은 강과의 인연
구포다리 건너 대저 수문에서 북쪽 300m 삼거리에서 다시 50m 위 김해어촌계 표지판을 따라 시멘트 길로 강둑을 넘으면 낙동강 물가 공터에 '물 위 집'이 낙동강 물 위에 떠있다. 박 씨는 '막'이라 부르는 이 집에서 산다. 사는 곳은 김해지만 그는 구포어촌계 소속이다. 뭍에서 놓인 좁은 외다리를 건너 막에 오르면 개 두 마리가 먼저 반긴다. 단칸 컨테이너 박스 같은 '막'에는 TV, 침대, 싱크대 등 갖출 것은 다 갖췄다. 생각 밖으로 포근하여 낙동강의 파도도 울렁임을 멈춘 것 같다. 수상생활에 익숙해 온 그는 추운 날에도 러닝 하나 입고 맨발이다.
이곳의 수상생활이야 2000년부터이지만 열다섯 살 때부터 배 위에서 혼자 살아온 세월까지 더하면 낙동강과의 인연으로 강 일을 하게 된 것은 벌써 50년이다.
그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김순임(金順任)은 아버지 박순수(朴順洙)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연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헤어져 친정인 전라도 남원에서 1949년 남용을 낳는다. 하지만 산후조리를 잘못해 남용의 생모는 갓 돌 지난 아이를 남겨두고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다. 그래서 남용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아버지가 이런 사연을 알게 된 것은 남용이 세 살 때였다. 외할머니 허락을 어렵사리 받은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되던 때 부산으로 오지만 삼락동 집에서는 새어머니와 두 명(박동석, 박주석)의 이복동생이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어머니의 구박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남용의 학교를 옮기고 가야동 외가 근처에 방 한 칸 얻어 자취하게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어른도 어려운 소년의 자취 생활은 고단했다. 굶기가 예사였고 겨울철 냉방에서 떨며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외조부는 이런 운명을 예언이라도 한 듯 세상을 강하게 견뎌 내라고 이름을 남용(男龍)으로 지어 주었다. 호적에는 용석(龍錫)으로 올라 있지만 그는 지금도 외조부가 지어준 이름을 쓴다.
열두 살 때부터 낙동강에서 아버지와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고기 잡는 일을 배웠다. 개성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새어머니는 학비와 용돈도 보내 주지 않았다. 고기 잡는 일에 재미 붙인 남용은 고기 잡아 학비도 벌고 용돈도 벌어 썼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뒤 옛 국제상사 앞 샛강에서 배를 빌려 친구들과 투망하고 고기 잡아 일주일 생활비로 보태 썼다. 그리고 본강(낙동강)까지 겁 없이 나다녔다.
물질… 잠수… 강밑 지형 손바닥 보듯
일 나가지 않는 배를 빌려 타고 친구들과 고기 잡는 일에 신명 나던 남용이 열일곱 살 때 '주낙'일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인 야마구치를 구포 선창에서 만나면서 '낙동강 인생' 좌표가 또 한 번 수정된다. 당시 60세 남짓한 야마구치는 '강물 주낙'의 으뜸꾼이었다. 노인은 만덕에 농장도 있고 대저에 배밭도 있었지만, 집안 일꾼들에게 맡겨두고 투망 쳐서 고기 잡는 재미에 푹 빠져 낙동강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기 잡는 법도 특이해 다른 사람보다 큰 고기를 몇 배나 많이 잡았다.
남용은 야마구치의 주낙배 노꾼으로 고용되면서 인연을 맺는다. 강가에 살면서 강의 생리도 알고, 무엇보다 강건하게 보이는 소년 남용이의 체력과 배포를 높이 산 것이리라. 소년 남용이 신이 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노인이 준비하는 모든 과정과 도구 사용법을 익혀 나갔다.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신 나는 일이었다. 노인의 손놀림이 새로웠고, 남용은 빠르게 주낙 기술을 익혀 나갔다. 노인은 이런 남용이의 손재주를 보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전수하기에 이른다. 낚싯바늘에 논지렁이를 꿰는 법, 물 온도, 날씨, 바람에 따라 주낙을 놓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찰랑대는 물소리, 다채로운 물빛…
낙동강은 정말 아름다운데
강바닥 망치는 공사 안타까워요
"어른의 주낙방법이 희한한 기라예, 오랜 경험으로 익힌거라서 하라카는 데로만 하면 장어를 미련 없이 잡을 수 있었던 기라예."
그렇게 3년이 지난 1969년 어느 날 소년의 후견인이면서 낚시 스승 야마구치는 일본으로 귀국한다. 소년에게는 낚시기구와 길이 6m가량의 낚싯배를 물려주고 떠났다. 그렇게 전수받은 투망과 주낙으로 낙동강을 누비고 다녔다.
이듬해 대보름날 '구포다리밟기'를 하다가 김해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수배자가 된다. 구포 형들 편에 선 것이 화근이었다. 자전거 체인 같은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김해 왈패들을 쿵후 4단의 실력으로 메다꽂은 뒤 숨어 지내다가 1971년 제1공수여단 하사관에 입대하여 1977년 스물아홉 살에 제대한다. 그 이듬해 결혼도 한다.
신접살림은 깨가 쏟아졌다. 주활동무대를 구포선착장에 두고 낮에는 주낙을 겸한 잠수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왔다. 어릴 적부터 배운 물질에 더해 군부대에서 익힌 잠수특수훈련 덕분에 낙동강 물밑을 제 손바닥 보듯 훑고 다녔다. 잉어, 메기, 민물장어를 닥치는 대로 잡았다.
박남용은 그 누구보다 낙동강을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그는 낙동강 품에서 산다. 낙동강의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좋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뀌는 물빛도 좋단다. 낙동강에 이는 바람도 좋단다. 낙동강 물속 강바닥이 훤히 보인단다. 낙동강 물에 그을린 그의 피부가 햇볕에 타고 그을려 구릿빛이다. 한창일 때 가슴둘레가 115㎝, 체중 84㎏에 다리 굵기가 34㎝였다는데 예순이 넘은 지금도 그에게서 젊음을 본다.
원고를 정리하고 다시 찾은 낙동강에서 그를 만났다. 그 사이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하나 더 깊게 팬 것 같다. 4대강 사업의 하나로 낙동강 하안을 낮추는 준설선이 이리저리 파헤치고 뿜어대는 펄물이 그의 어장을 망치고 있다고 한숨이다. 제대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나 보다.
얼어붙은 낙동강 못지않게 그의 속내도 얼어붙었다. 준설한다고 헤집어 놓아 고기의 집중 서식처인 강바닥도 분명히 큰 변화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간 손바닥처럼 익혀 둔 낙동강 바닥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하지 싶다. 날이 풀리면 스물넷 한창일 때 영도 태종대에서 송도 해수욕장까지 헤엄쳐 갔던 그 패기를 다시 발휘해야 할 것 같다. 낙동강 사람 박남용 말고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다
055-336-4812 011-866-3421
첫댓글 장어잡이에 명인 낙동강의 마지막 어부 박남용씨...!!
여름철 장어 활성기에는 주낚으로..그리고 요즘같이 기온이 떨어져 뻘속에 몸을 숨기고 월동하는 철에는 뻘밭을 긁는 삼지칼쿠리 창으로 뻘밑에월동중인 장어를 잡아내는 솜씨는 정말 달인의 경지를 넘어 놀라울 뿐이네요...ㅎㅎㅎ
저도 손으로 하는 장어갈퀴 시골에 하나 있는데 뻘밭 손으로 휘젖고 다니는거 보통일이 아니던데요...갈퀴에 장어 걸리면 감이 낚시할때 손맛 입니다....ㅎㅎ
완전 대단하고 부럽네요~~!! ㅎㅎ
대박입니다 ^^
요즘 장비가 발전하는 전통을 고수 하시네요
개불 잡듯이 배에 갈퀴달고 끌면 많이 잡겠습니다.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