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한국의 모든 사제들의 모범으로 우뚝 서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제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두 분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보여주셨지만, 사제가 품고 살아야 할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꼭 같으셨습니다. 두 분은 온갖 고초를 겪으시며 교회의 신앙을 증거하셨고, 모든 힘과 정성과 마음을 다해 교회 안에 양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두 신부님은 모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분들을 칼과 굶주림으로 죽이기 전에, 그분들이 먼저 세상에서 그 어떤 애착이나 만족함을 구하지 않고 주 하느님만을 사랑하심으로써, 세상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아! 그 열정과 사랑, 그 가난함에 속에 담긴 풍요로움이여.
문득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본당 신부님께서 물으셨던 질문과 저의 대답이 떠오릅니다.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 ‘하느님과 교회만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이(平易)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생들과 새 신부님들에게 그렇게 평이하고 일반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참으로 다양했지만 정리해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제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교회의 사제직을 통해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철저하게 자아(ego)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는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하면서도,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만불평을 하며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과 부딪히고 사제끼리도 부딪힙니다.
제가 전에 있었던 본당의 어떤 신학생에게 뭔가를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안한 즉시 ‘싫습니다. 제가 따로 생각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해야 합니다. 제가 모은 돈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당황스럽고 안타까우면서도 참 많이 다듬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에 들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하는 것, 내가 원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것!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신학생과 사제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것’외에 다른 사랑 다른 뜻, 다른 선(善)은 없습니다.
오늘 역대기 하권의 말씀(24,18-22)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즈카르야를 요아스 임금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음모를 꾸미고 살해합니다. 이는 즈카르야의 말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즐거움, 만족, 안락함, 뜻과 의지를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지 못한 결과입니다. 설사 자신의 뜻이 당장 선(善)이라고 해도, 하느님과 교회의 뜻이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이 있어 제시한 것이라면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회 상황에서, 조선에도 더할 나위 없이 큰 보탬이 될 만한 뛰어난 학식을 지니셨던 김대건 신부님이 13개월 만에 순교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귀한 밀알’이 잘 보존되는 것에 있지 않고,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낟알’을 영글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세상과 자신이 중요시 여기는 효율성, 합리성만을 따지다보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과 사랑과 교우의 사랑은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생각과 의지만을 들이댈 테니까요. 주교든 사제든 교우들이든 모두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에서 무엇을 더 우선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려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말한 다음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구원의 은총과 진리는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고, 그 믿음은 교회가 전해준 것이며, 그 교회는 하느님의 것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가득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교회를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서 자신을 죽이고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사실 하느님 사랑을 위장한 자신의 욕구이자 욕망일 따름입니다. 하여 그에게서는 김대건 신부님과 같은 하느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오롯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영성체송)”